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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부군성15 원문보기 글쓴이: 愚 谷
지식인으로 사는 소임所任
1)
어느 시대나 지식인에게 주어진 소임은 괴로운 일이다.
구한말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대마도에 유배된 후 죽음을 앞두고도 집요하게 스스로 묻었다. 그것은 “지식인으로 이 시대에 올바르게 사는 일이 무엇인가?”였다.
지식인의 삶이란 진실이 무엇인가 묻는 것과 그를 통해 세상을 바로 잡는 바를 소명으로 한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 ~ 2013)는 27년의 투옥기간 동안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테제를 통하여 350년 이상 존속된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할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체득한 무엇이 있어야 진위를 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체득에 이르는 얼마간의 노력이 필요하며,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이들이 자신의 논제를 통하여 세상의 진위를 논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을 보통 지식인이라 부른다.
지식인의 삶은 그 생에 행복이나 영광과 거리가 멀다.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지식인의 삶은 불행하였다. 살아서 뜻을 이룬 인간은 극히 드물다.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적 욕망을 내려놓고 공적 소임에 그 삶을 희생하는 일이다. 싯다르타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모두 그와 같은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지상의 행복이나 영화를 누리는 일은 그들이 진정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지식인은 뜻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지학志學과 삶의 목표를 세웠다는 이립而立은 젊은 사람이 야망을 세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마천(司馬遷 추정 BC 145 ~ BC 86)은 역사를 집필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뜻을 세우고, 그 뜻 하나로 일생을 살았다. [사기(史記)]에 스민 그의 통찰력은 지식인의 고뇌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며, 그를 통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입증한다.
사마천의 뜻은 치욕을 인내하며 그래도 생존을 손에 쥐게 하였다. 궁형을 당한 원망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는 연대표가 아니라 내밀한 언어로 역사서를 저술하는 이유가 되었다. 사마천은 천하의 자료를 모아 기원전 91년경 아버지의 유언을 받은 지 20년 후 대략의 사기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편에 “생각이 있는 자는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젊은 나이에 때로 감상에 젖어 자살을 하는데,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막다른 벼랑에 몰려 더 해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진정한 실력이 없는 이들의 변명에 불과하다.”라고 썼다.
2)
아득한 날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주어진 조건에 최적화를 이루어내었다. 강인함을 요구하는 지대에는 강인한 종족의 인간이 더 많이 생존하였으며, 빙하기에는 추위를 잘 견디는, 숲과 들과 사막에는 그 여건에 잘 적응한, 용기를 요구하는 지대에는 그러한 인간이 더 많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노력은 생존체가 필사의 노력으로 축적한 유전정보로부터 촉구된 바이며, 그 필연의 기울기에 따른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호모 사피엔스 혼자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따위는 묻지 않는다. 그들은 여건만 형성되면 얼마든지 극단에까지 참렬하게 이를 수 있음을 언제든 실증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이루어내지 못할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기려는 인간과 그를 비웃는 신이 설사 내가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후대 몇 대에 이르기까지 한 삽, 한 바구니 저 산 흙더미를 옮기겠다는 의지를 내놓자 신이 항복하여 산을 옮겨주었다는 중국 설화는 유명하다. 인간의 욕망은 그와 같다. 그런 욕망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이기에 지독한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모두 각자 치열한 비릿내 욕망을 들고 있기 때문에 온갖 선악이 가능하고, 패악이 사무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이 가능했다.
3)
피도 눈물도 없이 펼쳐지는 세상은 대부분 가난하고 힘없는 인간에게 절망과 체념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건과 능력은 뛰어난 인간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다르다. 세상은 뛰어난 소수와 그저 그런 다수로 구성되어 있다. 중고등학생이 참가하는 전국 단위 유도대회의 입상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그들이다. 메달 따는 놈이 다시 따는 것이라고 어느 친구가 투덜거렸다.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그렇다. 평균분포도를 그려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어디서나 전체 가운데 유능한 인간은 소수로 생산된다. 아버지가 재산을 자식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고, 10년이 지난 후 그들이 모두 같은 위치, 비슷한 좌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멍청이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돌려보면 이미 서너 번째부터 눈에 보이는 차이가 발생하고, 이 차이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삶에서 성공하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인간에 비해 뭔가 사소한 차이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크게 벌어지고, 이것이 신이나 우연조차 항복에 이를 수밖에 없는 성패를 가르는 에센스가 된다. 습관이나 성향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세상은 승자 독식의 구조로 운영된다. 세상은 금메달 딴 선수만 기억한다고,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고 그게 불만이라고, 그러므로 공평하게 살자고, 부자에게 더 많이 내놓으라고 외치는 이들은 모두 지독한 바보이거나 무구한 멍청이다. 과거에 가뭄이 든 해 전쟁에 패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자청하여 자신의 자녀를 노비로 들여보내는 인간도 허다하게 있었다. 불과 50년 전 가족의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어린 나이의 누이를 부잣집 식모로 보낸 이도 많았다.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며 ‘위안부’문제로 아직도 시끄럽다.
솔직히 의안부의 대부분은 선금을 받고 자깃 딸을 팔아먹은 조선의 ‘아버지의 딸들’이었다.
이런 시스템 아래 지식인이 있다. 지혜는 누구에게나 있다. 시장에서 만나는 아낙네도 세상을 이야기할 줄 안다. 기차 옆 좌석에 앉은 노인의 언어에도 세상의 지혜는 남다르다. 젊은 날 신림 3동 언덕에서 목격한 어느 여인의 “돈 많으면 세상이 천국이고, 돈 없으면 지옥”이라는 지혜도 세상의 지혜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 어떤 누구도 그녀에게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납득시킬 수 없다. 그녀의 체험은 해당 논제를 그녀의 진실로 세웠다.
인간 대부분은 각자 체험한 바를 지니고 세상을 산다. 지혜라면 지혜고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누구나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듣는다. 문제는 “돈 많으면 천국이고,돈 없으면 지옥”이라는 논제가 세상의 참으로 거래되면, 어떤 결과가 출력되느냐에 있다.
학문이 높으면 세상이 천국이고, 학문이 없으면 지옥이었던 선비의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글 배우는 신분이 사회 가치 대부분을 소유했던 시대가 어떻게 되었는가? 조선을 개국한 이들이 나라를 세울 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이 조선 말기의 사회였겠는가? 그들이 내세웠던 가치도 한 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고, 또 태평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는 법이다. 인간이 사욕을 넘어서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식인이 그 본분을 잊고 사욕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도처에 비탄과 신음이 인간을 망가뜨리고 세상을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4)
세상 대부분의 인간은 잘 살기 위해 노력하며, 한 번 사는 삶 그럴 듯하게 살고자 집념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이 당연한 노력 가운데 온갖 행위가 일어서고 가라앉고 한다. 남보다 더 많이 벌고 많이 얻기 위해 숱한 방법이 동원된다. 거짓과 위약은 물론 범죄와 패륜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기꾼은 도처에 있다. 빌린 돈을 떼먹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높은 지대에는 서로 희망할 수 없게 되고, 조국이든 뭐든 부모형제든 패륜이든 배신이든 모든 사항을 내던지고 살아남기 위해 미워하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생존을 마주하게 된다. 모두 상대의 적이자 만인의 이리가 되는 것이다. 호남과 영남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서로 그가 누구인지, 어떤 됨됨이를 지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선 미워하고 증오한다.
지식인들이 공적 소임에 자신의 삶을 내놓는 것은 그들이 남다른 거룩함과 숭고함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또한 사회적 위상을 향한 치열한 욕망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다 많은 인간의 보다 높은 존경을 받아내려는 의지는 그들에게 남다른 의지가 된다. 은둔하여 도를 닦는 수행자의 행위도 그것이 설령 각성覺醒이나 법열法悅로 그럴 듯하게 설명되더라도 실제 목적은 사회의 존경을 얻어내기 위한 가상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기쁨에 대한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종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욕망일 수도 있다. 교과서나 위인전에 나온 영웅이나 위인은 저술된 것처럼 그렇게 고고하고 위대한 인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 또한 자신의 좋음과 나쁨을 부여잡고 적나라하게 욕망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또한 해당 지평의 집착이 그들의 운명을 만들어낸 동력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들의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시대가 필요로 하고 대중이 원하는 각본으로 그럴 듯하게 재구성된 부분도 많다. 물론 대개의 경우 일반의 유닛과 사소한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희망이 있고 기약이 있으며, 생활과 문화, 역사 곳곳에 모종의 의미가 흐르고 있음을 증거하는 일은 지식인들이 맡을 수밖에 없다.
5)
자본주의 지평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 있어야 한다. 그 행위가 인간 자신과 사회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인가를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행위 저변에 사회구성원 모두의 삶을 향상시키고 번영에 이르게 하는 노력이 스며 있음을, 아이들을 더 밝고 순수하게 웃게 할 수 있음을, 경기에 출전한 선수나 심판이 올바른 판정을 내리고 받게 될 수 있음을 많은 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누군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돈 많으면 천국, 없으면 지옥이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읽는 그것은 겉면에 드러난 그림에 지나지 않음을, 그 뒤 더 큰 배경에 더 넓고 깊은 뜻과 의지가 세상을 만들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자들이 그 위세를 내세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함부로 할 때 그와 같은 행위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다이어그램을 통하여 지적하고, 권력구조가 갖고 있는 힘과 시스템이 어떤 기능과 어떤 작용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바를 설명하는 누군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지나치게 정치에 물들어 있다. 대부분이 좌우로 나뉘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비웃거나, 비꼬거나 비틀거나 한다. 어떤 사건이 발표되면 음모설이 또 따라 붙는다. 모든 것이 음모이고, 음모설에 해당되지 않는 사건이 없을 정도다. 평론가들은 방송에 나와 정부와 여야 모두를 하루 종일 비판한다. 인간은 조건에 많이 노출될수록 그것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권력을 비판하고 혐오하며, 악다구니로 저주하면 저절로 지식인이 되는 줄 안다. 공평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자연에 반(反)하는 비능률인가 이해하지 못하면서 올바름과 진실을 위세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내세운다. 어디나 가짜와 싸구려들이 더 설치는 법이다. 가짜와 싸구려의 판정 기준은 그들이 살아서 쾌(快)에 얼마나 집착하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진짜는 그 자신의 삶으로 살아서 지상의 행복이나 영화를 누리는 일을 만인의 몫으로 남긴다.
6)
공적 욕망이 무엇이며,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를 지식인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에 이르기에 시련과 고통과 불행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필요하며, 그에 따른 진실을 목도하는 체득을 지녀야 한다. 말로, 언어로, 구호로, 정치적 목적으로 저들을 내세우는 이들은 대개 위선자들이다. 필요하기에 가져다 쓸 뿐이다. 그들에게 저들은 그들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해 팬이 필요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식인이 다루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
혁명으로 권력을 쥔 이들 가운데 진정한 세상을 만든 인간이 몇이나 있었는가? 구원을 말하고 종말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진짜가 몇이나 있었는가? 사람들은 권력가들이나 재력가들이 세상을 만들고 운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세상의 운영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언제 기회를 잡고 어떻게 패권을 획득하며, 이익을 수렴하는가에 집중하는 인간이고 그런 재주를 타고난, 그런 배역을 담당하는 인간이다. 세상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지식인들이다.
증오와 불신과 절망을 쥐어짜는 이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 그 위세를 내세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함부로 할 때 그와 같은 행위가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비평가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진정한 지식인은 희망을 만들고 세상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당 지평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스를 설계하는 이들이다. 그곳에 희망이 있고 기약이 있으며, 생활 곳곳에 존재의미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지신인들이 그 언어를 내세워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바르게 세울 때 세상의 욕망들이 자진하여 규칙과 질서를 준수하고 훌륭한 가치를 표상하게 된다. 이것이 지식인들에게 맡겨진 세상의 소임이다.
첫댓글 길고 멋진 글 잘 읽고, 나는 어떻게 살았나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오늘 기존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기는 백골난망이고,
미국의 "듀폰"회사에서 젊고 올곶은 ceo를 기르듯이
젊고 참신한 인물이 비젼과 철학을 가지고 "쨘" 하면서 나타나
터키의 '케말 파샤' 처럼 국부로 존경받는 인물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