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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이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마음속에 스스로가 정해놓은 것뿐이다(나폴레온 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모르겠소.”(마태2,27)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일과
세상의 일 사이에서
수 없이 갈등하게 된다네.
하지만
우리의 노고와
애쓴 보람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날에도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그분만을 찾고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예수님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귀찮아서
2) 그들을 무시해서
3) 말 할 가치를 못 느껴서
4) 그들의 몽매함에 지쳐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신들의 편견과
좁은 시야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고정관념, 선입관, 편견이라는 3종 종합선물세트로
마음이 완고해지고 굳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입니다.
나의 영적인 건강과 유연함을 위해
얼른 영적인 필라테스(?) 개인 PT 받으러
주님 앞으로 가야겠습니다.
영성은 침묵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침묵을 관통해야 하느님의 말씀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개인 PT보다 영적인 개인 PT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투자할 수 있는
재테크와 투자의 고수들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김건태 루카 신부님
예수님의 권위
유다교의 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사회의 지도자들인 원로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르치고 계실 때, 이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가르치는 문제로 이의를 제기한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앞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보여주신 충격적인 행적까지(마태 21,12-13)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자격 문제, 권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앞에서 군중은 모두 놀라워하며 권위 있는 말씀 또는 행적이라 평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의 눈에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분위기, 마냥 부정하고 싶은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지도자들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배경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마음속에 간직해온 그 하느님과,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하느님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처럼 숭배해온 그 제도와 전통이 일러준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는 하느님이 너무나 상충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하느님은 하나의 우상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이러한 아집과 판단이, 끝내 예수님을 하느님 모독죄로 유다교 법정에 서시게 했던 것입니다(마태 26,65).
하느님께서 하느님 모독죄로 종교 법정에 서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사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들이 향유해 온 기득권 문제입니다!
말씀으로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현존 앞에 그들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한 대로 행동하지도 않고, 아는 대로 실천하지도 않고, 믿는 대로 실천에 옮길 생각이 전혀 없으니, 권위와는 요원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반문,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하는 질문에 모르겠소 라고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알면서도 말입니다.
모든 군중이 ‘하늘’이라고 외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대림시기는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에 옮기실 주님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言行一致), 아는 대로 실천하고(知行一致), 믿는 대로 실행하는(信行一致) 권위 있는 삶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권위를 가슴에 담고 조금씩 훈련을 쌓아나가는 소중한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24,2-7.15-17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