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은 촌놈 이광재 신부
양양 터미날에 도착하니 날이 어둡다. 나는 너무 피곤해 여관에 들어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떨어졌다. 지난 밤 잠이 부족한데다 대관령 옛길을 걷고 오죽헌과 김시습기념관, 허난설헌 기념관으로 강행군했으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다. 이튿날은 주일이다. 내가 양양에 온 것은 양양성당과 낙산사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특히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주일미사를 드릴 겸 일정이 제대로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튿날 새벽 자동적으로 눈이 떠진다. 아침 5시 30분이다. 객실에 컴푸터가 있어 양양성당을 검색해보니 첫 미사가 6시 30분인데 거리도 가깝다. 나는 배낭을 그대로 둔 채 여관을 나섰다. 양양군청 부근에 성당이 있었다. 시골성당 새벽미사라 신자는 많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경건하다. 미사가 끝나기 직전 본당신부가 나를 지적하면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는다. 낫선 내 행색이 눈에 띄였던 것 같다. 내가 미국에서 여행 중이라고 대답하자 신부는 "여러분 들으셨지요. 양양성당과 이광재 신부님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라며 웃겼다. 나는 덕분에 신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미사 후 신부는 내게 이광재 신부 순교각과 기념관을 보도록 안내해 주었다. 성당 옆 조그만 순교각에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성경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밖에는 이광재 신부 석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기념관에는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신자들을 위해 친필로 쓴 교리서가 진열되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착한목자로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광재 신부의 생애를 묵상했다.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1909년 강원도 이천군 냉골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살 때 형과 뒷산에서 놀다 낫으로 왼손 둘째 손가락 마디를 잘려 어머니가 칡넝쿨로 묶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뱀 머리처럼 흉하게 되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이들 형제는 매일 20리를 왕복하며 성당 미사에 참례했다. 이때 이광재 소년은 이들을 지도하던 노기남 신학생(훗날 대주교) 눈에 띄여 신학교 입학을 권유받았다. 시골에서 소학교(초등학교) 다니는 것도 쉽지 않던 시절이다. 소학교를 거치지 않고15세에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배우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항상 '작은 촌놈'이라는 별명으로 놀림감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동급생들이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의 피나는 노력과 간절한 신앙심에 감화된 것이다. 그는 언제나 주의 깊게 남의 말을 경청했으며 방학 중에도 신학교 생활습관을 그대로 유지했고 사제가 된 후에도 변함없었다. 그는 신학교 입학 13년 만에 사제가 되어 풍수원 성당 보좌로 3년 근무하고 1939년 7월 양양성당 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 신부는 일제 탄압시기를 무사히 견디어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3.8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소련군은 성당위치가 높아 교신장소로 좋다며 징발했다. 이 신부는 가정집을 다니며 미사를 드렸는데 북한에서 선교하던 외국인 신부들이 추방당함으로써 그의 활동범위는 평강, 원산까지 확대되었다. 이와함께 그는 함흥교구와 덕원 신학교 그리고 연길에 있던 수녀원이 폐쇄됨으로써 많은 사제, 수녀 신학생, 평신도들이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것을 안내하고 도와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양양성당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이기 때문에 남한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신부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소와 신자 가정을 다니며 성사와 미사를 집전했다.
당시 북한 전역에서는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해 신부들이 하나 둘 잡혀가고 있었다. 신자들은 이 신부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남쪽으로 피신하라고 재촉했다. 사실 양양에서 3.8선은 지척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신부는 "북한의 신자들이 전부 내려가고 난 뒤에 따를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버리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라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러는 와중에 1950년 5월 초순 철원 북쪽 평강군 평강 성당 백응만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광재 신부는 그곳 신자를 돌본다며 떠난 후 기다리고 있던 공산당에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 특별감방에 3개월 간 수감된다. 사지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후퇴하던 공산당은 10월 8일 밤 수감자들에게 콩비지를 특식을 제공했다. 지상에서 마지막 식사인 셈이다. 이들은 수감자들을 한데 묶어 산중턱 방공호로 끌고 갔다. 방공호 안에는 공산당원들이 촛불과 총을 들고 서 있고 그들 발 밑에는 방금 숨진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수감자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시체 위에 엎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총탄이 쏟아졌다.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난 한준명 목사와 평강 고등학생 권혁기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특히 한준명 목사는 이 신부와 석달동안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신앙인으로서 흐트러짐 없는 이 신부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신부는 감방에서도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자신의 음식을 덜어주고 성사를 베푸는 등 목자의 역할을 다했다. 한 목사의 증언이다. "공산당이 총을 난사하고 떠난 뒤 방공호 안에는 신음소리가 가득했어요. 사람들 가운데 '물 물, 아이고 목말라'하는 소리와 함께 '예, 내가 가요. 내가 물떠다 드릴께요'하는 가냘픈 소리가 들렸어요. 이광재 신부님 목소리였지요. 누군가 '이 신부님, 이 신부님'하고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지 '응,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 내가 가요'하는 소리만 되풀이 하셨어요. 신부님께서는 최후 순간까지 온 정신력을 모아 주위의 호소에 응답하셨던 거에요. 꼼짝없이 죽는 마당에 자신보다는 오직 남의 일만 생각하는 거룩한 희생정신은 예수님의 사랑 그것이었어요. 신부님의 응답은 약 스무번 이상 되풀이 되었고 마침내 차츰 사그러지다 잠잠해지셨답니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이 방공호에서 신부님을 발견했을 때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어요. 신부님을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증거는 어린시절 신부님의 놀림감이 되었던 비뚤어진 손가락이었답니다. 정말이지 천주교 신부님은 위대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 한 목사와 함께 이 신부의 최후를 증언한 권혁기 씨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 현재 부산에 생존해 있고 그의 두 아들은 부산교구 신부로 재직 중이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원산에 온 미 해병대 군종 월거 신부와 머디 신부는 이광재 신부와 함흥교구 김봉식 신부 시체를 찾아 장례미사를 드린 후 원산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지금 북한땅이니 묘지인들 무사할른지 알 수 없다. 이 신부는 험난한 시대에 41세의 짧은 생애동안 가난과 자신의 열등한 외모와 부족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사명에 충실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양을 돌본 착한 목자의 표상이다. 한국에 살 때 나는 우연히 한준명 목사가 이광재 신부를 증언하는 글을 읽고 크게 감동받았었다. 나는 2차대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자가 있는 수감자 대신 처형을 자원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존경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 성인품에 올라있다. 이광재 신부 역시 콜베 신부 못지 않는 위대한 순교자이다. 올해 가톨릭 교회는 조선왕조 순교자 124위를 복자로 선포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조선 순교자들로 이번에 포함되지 않은 133위와 최양업 신부 그리고 해방이후 순교자들인 홍용호 주교 외 80위,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추진하는 38위 등 모두 253위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 당연히 이광재 신부도 포함된다. 이분들이 모두 시복, 시성된다면 우리나라에는 480명의 가톨릭 성인이 있게 되는 셈이다. 이만큼 우리나라에 성인이 많다는 것은 물론 성덕이 뛰어난 분들이 많아서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험난한 세월을 살아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1년 본당으로 승격된 양양성당은 2021년 본당설립 백주년을 앞두고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양양성당 정귀철 신부는 이를 위해 이광재 기념관을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한편 6.25 전쟁 전후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하했던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2000년부터는 매년 ‘38선 도보순례’를 개최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양양성당을 나와 여관에서 배낭을 찾아 메고 시내버스를 타고 낙산사로 향했다. 오봉산 기슭 바다를 끼고 있는 낙산사(洛山寺)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1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어 1300년이 넘는동안 여러차례 전쟁과 화재로 중건과 복원을 반복했다. 1231년에는 몽골군에 의해 절이 소실되어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 조선 세조 때인 1467년 중창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화재를 당했다. 그후 다시 두차례 중건되었으나 1777년 또다시 화재를 당하고 중건되었다. 근세에 와서도 절의 시련이 계속되어 6.25때 소실된 것을 휴전 후 다시 지었는데 2005년 4월 5일 큰 산불로 또 다시 대부분 전각이 불타버렸다. 현재 낙산사는 불교계가 힘을 모아 2년 만에 완전히 재건한 것이다. 당시 화재로 보물 479호 낙산사 범종이 녹아내려 현재는 흉물스러운 잔해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은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기부한 동종으로 높이 158센티에 지름 98센티로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는데 지금은 모조품이 걸려 있다. 따라서 지금 낙산사에 남아 있는 보물은 칠층석탑(499호)와 관음보살 좌상(1362호), 사리장엄구를 포함한 해수 관음 공중사리탑(1723호) 뿐이다. 그러나 1925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의상대사를 기념해 지은 의상대와 홍련암은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의상대도 40년 전 다시 복구된 건물이지만 아름다운 동해 해돋이와 맞물려 유명한 관광명소가 된 곳이다. 낙산사는 의상대 사진에 빠짐없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처놓았다. 나는 이곳에서 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기(氣) 싸움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의상과 원효 두 분 모두 존경받는 같은 시대 고승들이다. 의상은 귀족출신으로 많는 대찰을 지었으며 원효는 서민출신답게 하층계급을 상대로 불교를 전파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도반으로 존경하는 사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스승이 뛰어나다는 것을 두고 다투었다. 낙산사 창건설화도 의상이 원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은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곳을 찾아다니다 동해안 깍아지른 절벽아래 관음굴을 발견하고 이곳이 관세음보살의 거처임을 믿고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직접 설법을 듣겠다는 원의를 세우고 기도했다. 그는 바닷가 바위에 좌정해 14일간 주야로 기도했다. 그러나 바닷물이 굴 속을 철썩거리며 드나드는 소리 뿐 기다리는 관음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고 차라리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관음굴로 뛰어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온몸을 던지고나면 어디엔가는 관음보살의 법신을 만날 것만 같았다. 의상은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관음굴을 향해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때 그를 다시 땅으로 들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그 순간 의상은 꿈결같은 소리를 듣는다.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 대나무 한쌍이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이다. 그곳에 절을 짓고 나를 봉안하라." 그리고 의상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수정염주와 여의주 그리고 옥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관음을 친견했다고 믿고 뛸듯이 기쁜마음으로 절벽위에 올라가보니 과연 대나무 한쌍이 솟아나 있었다. 의상은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관음이 상주한다고 알려지는 '보타락가산'을 따서 '낙산사'라고 지었다. 또한 절에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하고 옥으로는 관음상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원효의 귀에도 전해졌다. 원효는 자신의 절친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불전을 지었다는 소식에 자신도 관음을 친견하고 싶어 낙산사로 향했다. 양양 땅을 지나는데 벼 베는 여인을 만났다. 배가 고픈 원효가 여인에게 벼를 조금만 달라고 하자 여인은 흉작이라 드릴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한다. 바닷물 소리가 들리는 어느 곳에서 원효는 또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개천에서 월수백(月水帛, 생리대)를 빨고 있었다. 목이 말랐던 원효는 여인에게 물 한목음만 달라고 청했다. 여인은 생리대를 빨던 물을 그에게 주었다. 원효가 그대로 쏟아버리고 자신이 직접 깨끗한 물을 떠서 마시는데 근처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제호탕을 마다한 화상아"하고 한탄하며 날아가 버렸다. 제호탕(醍醐湯)이란 오매육, 사인, 초과, 백단향을 가루로 만들어 중탕으로 달인 뒤 응고시켜 냉수에 타먹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여름철 음료이다. 이상한 생각에 원효가 나무아래로 가보니 신발 한짝이 버려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도착해 옥으로 만들었다는 관음상을 친견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음상 앞에 조금 전 나무 밑에서 보았던 신발의 한짝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원효는 즉시 깨달았다. 벼 베던 여인과 빨래하던 여인 그리고 파랑새까지 모두 관음보살의 현신임을,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이 전설의 핵심은 원효의 법력이 의상에 못미친다는 내용이다. 모르긴해도 의상대사 제자들이 지어낸 전설일 것이다.
나는 이런 낙산사 창건설화보다는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의 꿈(調信之夢) 내용이 훨씬 와닿는다. 조신의 꿈은 훗날 춘원 이광수가 각색하여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어쨋거나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마당 꿈이라는 결론이다. 조신지몽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 때 명주의 흥교사 장원을 중 조신(調信)이 관리하게 되는데 조신이 장원에 온 후 그곳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게 된다. 조신은 여러번 낙산사 관음굴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루는 그가 불당 앞에서 관음보살이 자기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원망하다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 씨 낭자가 나타나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마음 속으로 사모했는데 부모님 명령에 못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 시집 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부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한다. 조신은 매우 기뻐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그녀와 40여 년을 살면서 자녀를 다섯이나 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해 초야를 두루 다니며 구걸하며 살았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몰꼴은 말이 아니었다. 열다섯 살 난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고 열살난 계집아이는 밥을 구걸하다 개에 물렸다. 부인이 조신에게 말한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옷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옷 한가지도 나누어 입어도 사랑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병든 몸으로 추운 날씨에 남의 곁방살이나 하찮은 음식마저 구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겨를에 부부간 애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당신은 내가 있어 누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조가 거울을 향해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헤여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데 여기서 서로 헤여집시다."
이렇게해서 둘이는 각각 아이들 둘씩 나누어 데리고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꿈이 깨었다. 타나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동이 트려고 한다. 아침에 보니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백발로 변해 있다. 조신은 망연히 세상 일에 뜻이 없어졌다. 한평생 고생을 다 겪고 난 것 같아 여색이나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깨끗이 없어졌다. 그는 관음보살상을 대하기가 부끄럽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솟구친다. 조신은 꿈속에서 큰아이를 파묻은 곳을 파보니 돌부처가 나와 깨끗히 씻어 절에 모셨다. 그는 사재를 털어 절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착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줄거리에 극적인 요소를 덧붙여 스릴있게 지은 것이 춘원의 '꿈'이다. 이런 전설이 깃든 낙산사에는 이날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특히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지었다는 홍련암에는 줄이 늘어서 있다. 홍련암은 석모도의 보문사와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홍련암이 지난 화마에 무사한 것은 부처님의 가피라고 한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죄책감으로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은 맞는 것 같다. 나는 여행 중 여러 대찰에서 세조의 흔적을 보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낙산사 대웅전인 원통보전을 둘러 싼 담장도 세조가 지은 것이다. 안쪽의 담벽을 기와로 쌓고 바깥쪽은 막돌로 쌓은 높이 3.7미터 길이 220미터로 흙과 암기와를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화강석을 배치해 단조로운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한 것이다. 폐허가 된 것을 최근 복구한 것이다. 절입구의 홍예문도 세조의 뜻에 따라 26개 고을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다. 죄책감을 씻으려고 평생 안간힘을 썼던 세조의 모습이 조신의 설화와 맞물려 다시 한번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2014.8.27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