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둘러싼 안팎의 여건은 엄중하다. 1,000일을 훌쩍 넘어선 길고 지루한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사회 전체가 지쳐가는데, 군인과 민간인 피해는 계속 늘어나고, 젊은 남성들의 해외 도피 등으로 인구통계학적인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그렇다고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것도 아니다. 취임(2025년 1월 20일) 앞둔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 발(發) 최전선에서의 적대 행위 중단(휴전) 및 전쟁 종식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자칫하면 트럼프의 압력에 밀려 러시아가 내민 최악의 평화안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에게 정치, 선거의 시간이 다가온다. 계엄령 해제와 함께 미뤄놓은 대선과 총선을 치러야 하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임을 원하는 국민은 날로 줄어들고 있다. 유럽의 일부 언론에서는 금수저와 같은 그의 영국 망명 소문도 언급되곤 한다.
나도, 국민도 살고 우크라이나도 자유민주국가로 존재하기 위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벌써부터 자못 궁금하다.
◇선택의 폭을 줄인 '파리 3자 회동'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7일 파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식 참석 직전에 마르롱 프랑스 대통령의 배려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와 만났다. 세사람은 3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파리에서 만난 트럼프 당선자, 마크롱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3자 회동 후 나온 젤렌스키-트럼프의 발언은 서로 조금씩 어긋났다. 짧은 시간에 서로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고, 상대로부터는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7일 회동 직후 다소 절제된 표현으로 트럼프 당선자와의 만남을 언론에 알렸다.
"우리 국민과 최전선 상황, 우크라이나의 정의로운 세계에 대해 (트럼프 당선자와)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이 전쟁을 가능한 한 빠르고 공정하게 끝내기를 원한다. 트럼프 당선자는 늘 그렇듯이 결단력이 있다. 우리와 계속 함께 하기로 했다."
트럼프 당선자는 이튿날(8일)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인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는 거래(협상)하고, 이 미친 갈등(전쟁)을 멈추고 싶어한다"며 "그들은 40만 명의 군인과 더 많은 민간인을 잃었다. 즉각적인 휴전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를 향해 "나는 블라디미르 (푸틴)를 잘 알고 있는데, 이제 그가 행동할 때"라고 주장했다.
전세계 주요 언론은 트럼프 당선자의 발언을 바탕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고 타전했다. 우크라이나인들도 그렇게 알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SNS을 통해 “보장 없는 휴전은 언제든지 다시 불 붙을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인의 손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막으려면, 세계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외면하지 말고, 신뢰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가 강조한) 러시아와의 협상과 전쟁 종식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날(9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확대를 주장하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의 총리 후보인 프리드리히 메르츠와 만난 뒤에는 작심한 듯, 트럼프 당선자와의 만남을 설명하면서 "나는 협상에 들어가기 전, 전장에서는 강력한 군대와 무기들이 필요한데, 바로 에이태큼스와 (독일의) 타우러스, 스톰 섀도 등과 같은 장거리 미사일을 (예로) 들었다"고 밝혔다. 또 "우리에게는 나토 가입과 같은 안보 보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후 그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초청을 요청할 것"이라며 "트럼프 당선자는 아직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다소 도발적인(?)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개 발언의 맥락을 따져보면, 트럼프 당선자와 젤렌스키 대통령은 협상과 전쟁 종식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과 방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한쪽은 '공정하게, 또 국가 안보의 확보'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다른 쪽은 무조건, 또 즉각적이라는 단어를 구사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후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선택의 폭이 앞으로 그리 넓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은 지금.
그의 선택을 좌우하는 요인으로는 크게 현재 처한 상황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들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을 지 모르지만, 미국 등 서방의 군사지원 전망이나 최전선 상황(전황), 국내외 여론 등 여러 측면에서 그의 입지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지난 9월 트럼프 대선 후보와 만나 인사를 나누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3자 회동후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40여일 후에 들어설 미국의 차기 권력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나토 가입을 놓고는 서로 이견만 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평화 구축 방안에 대한 새해 전망은 올해보다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미국의 군사 지원이 주춤해진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군의 군사력 열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군 출신인 예고르 피르소프 전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 의원은 7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우크라이나의 통합 뉴스 채널인 '텔레톤'에 나와 "우크라이나군은 도네츠크주(州)의 주요 격전지인 차소프 야르와 쿠라호보, 포크로프스크, 미르노그라드, 벨리카야 노보셀카 등 5개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이제 전 전선에서 진격하는 게 아니라, 몇몇 요새 도시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며 "5개 도시가 위험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 지휘부의 군사작전에 비판적인 마리안나 베주글라야 의회 의원도 “트럼프 당선자의 취임 전에 도네츠크주를 잃을 위험이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그녀는 앞서 지난달(11월) 26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국가 붕괴 위험이 커지고 있다"며 "러시아군은 포크로프스크와 (드네프르주의 주도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진군하고 있으며, 이제 몇㎞ 남지 않았다"고 경보음을 울린 바 있다. 그녀는 방어 작전의 실패를 부패하고 무능한 군 지휘부의 탓으로 돌렸다.
"국방부가 납품받아 최전선에 제공한 지뢰 중에서 불량품이 무려 10만개나 나왔는데, 우메로프 국방장관은 여전히 자신을 홍보하는 프레젠테이션과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의) 악수로 시간을 보내고, 군 지휘부는 놀라운 쿠르스크 기습작전으로 우크라이나 북부 수미주(州)를 구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며, 병력 부족을 이유로 의료진 등 전문 인력을 보병으로 최전선에 배치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희망이 거의 없다. 온갖 거짓말과 부정, 부패가 국가의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정부 비판 세력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몰아세울 일은 절대 아니다.
영국 BBC 방송은 11월 20일 미국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의 분석 결과를 인용.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 진격 속도를 높이며 지난해보다 약 6배의 영토를 빼앗은 반면, 우크라이나군의 지난 8월 쿠르스크 습격은 군사작전상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해 들어 러시아군이 추가로 점령한 땅은 모두 2천700㎢로, 지난해 전체 점령지(465㎢)보다 약 6배나 크다. 최근 두달(9월, 10월)간 빼앗은 땅도 1천㎢에 달한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남한 면적(100,449.4㎢)보다 더 큰 총 110,649㎢로 추산됐다.
러시아군의 진격 영상/텔레그램 영상 캡처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마리나 미론 국방 연구원은 러시아가 빠르게 진격을 계속하면서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이 실제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힘 빠지는 젤렌스키 평화안 승부수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러시아에 철군 압력을 가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부수도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힘을 잃는 분위기다. 그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믿고, 지난 6월 자신의 '평화 공식'을 근거로 한 첫 '평화 정상회의'를 스위스에서 열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신흥국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전쟁의 즉각 종식을 내세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연내로 열기로 한 2차 평화정상회의도 물건너간 상태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쟁 발발 1000일에 맞춰 그가 꺼낸 카드는 소위 '지속가능한 플랜(План стойкости)'이다. △(평화 협상에서) 안보나 주권을 거래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며 △미국 등 서방에서 강요하는 동원 연령을 낮추지 않고 △새해에는 순항 미사일 3천기를 생산하는 등 군대에 지원을 늘리겠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또 우크라이나의 독립 정교회를 지원해 '모스크바 정교회의 시대'를 끝내겠다고 했다.
미하일 포듈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트럼프 후보의 당선으로) 우리에게 닥친 전국가적 실망감을 고려해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를 국민들에게 미리 알리기 위해 국가 운영의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마련한 플랜"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도 우크라이나 사회의 실망감 확산을 차단하고, 트럼프의 미국으로부터 지원이 중단되더라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구상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스트라나.ua는 11월 1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의회에서 '지속가능한 플랜'을 발표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스트레스(실망감)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며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끝낼 계획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가 전쟁을 끝내는 정책 구상을 추상적인 '평화 공식 10개항'에서 '평화 정상회의'로, 이번에는 '지속가능한 플랜'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의 이같은 정책 구상 변경은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점증하는 전쟁 종식 바람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국내외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게 이제 우크라이나 대다수 국민의 소망이 되고 있다.
올해 8월과 10월에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절반 이상(평균 52%)이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는 협상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응답자는 38%에 그쳤다. 2022년 무려 73%에 이르렀던 결사항전 의지가 2023년 63%로 떨어지더니, 이제는 3분의 1을 약간 웃도는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저항 의지가 큰 폭으로 주저앉았는 점이다. 키예프(86%→ 47%)와 서부 지역(평균 83%→ 43%)에서는 저항 의지가 절반으로 줄었다. 전쟁터와 가까운 동부 지역 주민들의 저항 의지는 아예 27%(2022년 63%)에 불과했다.
갤럽의 또다른 조사에 따르면 나토와 EU 가입을 향한 우크라이나의 기대도 한풀 꺾였다. '향후 10년대 나토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응답은 지난해(60%)보다 10%포인트 준 51%로 떨어졌다. '가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응답자는 두배나 늘어난 22%였다. EU가입에 대한 기대치도 2022~2023년 73%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61%로 내려갔다. 또 전쟁의 조기 종식을 선호하는 응답자 중 52%가 '영토의 양보도 가능하다'고 했다. 반대는 38%.
갤럽 측은 이같은 여론 변화가 지속적인 러시아군의 공세와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에 따른 미국의 우크라 지원에 대한 불확실성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무기의 사용에 러시아가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중거리 탄도 미사일 '오레슈니크'로 대응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전쟁 종식을 위한 어떤 타협안도 반대한다는 민족주의 세력 등 우크라이나 강경파의 위축도 눈에 띈다. 강경파는 젤렌스키 정부가 최전선에서의 휴전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정에 동의하면 '정부 전복'을 경고해왔다. 특히 아조프 연대 등 민족주의 성향의 부대가 대러 강경파 세력과 함께 군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2023년 튀르키예 억류중 풀려난 아조프 연대 지휘관 석방 환영회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 마리우폴 함락당시 항복한 아조프 연대 지휘관들은 포로교환 협상에서 튀르키예로 보내 활동을 정지키기로 했다/영상 캡처
하지만, 군 관계자는 “전선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애국심으로 뭉친 지원병들도 이미 지쳤다"며 "조기 휴전에 대해 군 내부의 분위기가 그다지 부정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 아조프 연대 등 민족주의 성향의 부대도 전쟁에서 얻은 인기를 '의회 권력'으로 전환하려는 생각이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게 나온다.
오히려 젤렌스키 대통령의 강경 군사 드라이브에 반기를 드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스트라나.ua는 6일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애틀랜틱 카운실(Atlantic Council)과의 인터뷰에서 '전장에서 러시아의 병력 우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대 지휘관들이 윗선에 보고하기 위해 병력을 '고기 분쇄기'(러시아군의 인해전술을 비꼬는 표현/편집자)에 집어넣는 공격 작전의 도구로 사용하는데, 이를 즉각 중단하고, (러시아가 2023년 봄에 했던) 3중, 4중 방어망을 구축해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격 명령은 이제 그만, 그 대가가 지금도 엄청나지만, 앞으로도 부정적인 결과를 몰고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일간지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KPru)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언론인 다이아나 판첸코는 11월 26일 SNS를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군 총참모장(우리의 합참의장 격)으로부터 돈바스 등 동부 전선의 전황을 보고받고 짜증을 냈다"며 "(2022년 3월 러시아와 합의한) 이스탄불 평화협정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직격했다. 그녀는 "그렇게(협정 포기) 해놓고 이제와서 지키는데(방어에) 급급하느냐"고 비판했다.
◇ 동원기피, 탈영 등 우크라군의 사기 저하 심각
젤렌스키 대통령의 항전 의지를 꺾는 것은 징병 기피와 대규모 탈영으로 상징되는 우크라이나군의 사기 저하다. 우크라이나 군사위원회(우리의 병무청 격) 소속 징병관들의 길거리 강제 동원은 현지에서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해졌고, 그렇게 동원된 병력의 잇단 탈영은 지휘관들의 힘을 빠지게 만든다.
AP 통신은 탈영 사태는 전쟁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우크라이나의 전투 능력을 마비시키고 평화협상을 앞두고 우크라이나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 짚었다. 일부 지휘관들도 이에 휩쓸려 방어 위치를 포기하는 바람에, 애써 구축한 방어진지가 무너지고, 영토 손실이 가속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제72여단의 한 장교는 “솔직히 말해 탈영은 지난 10월 동부 지역 요충지 우글레다르(부흘레다르)가 함락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일 우크라이나 검찰이 올해 1∼10월 약 6만명을 탈영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고 보도했다. 이 수치는 전쟁 첫해인 2022년부터 이듬해인 2023년까지 2년간 발생한 탈영병 수의 거의 2배다. 탈영은 최대 12년 징역형에 받을 수 있는데, 날이 갈수록 탈영병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FT도 우글레다르의 함락이 123여단의 병사 수백명이 진지를 이탈해 도망(탈영)가는 바람에 지휘관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사태 진전이었다고 짚었다. 이 여단의 한 장교는 FT에 “우리 부대는 소총만 들고 갔는데, 지휘부의 약속과 달리, 현장에는 전차 150대가 아니라, 20대만 있었다"며 "몸을 숨길 곳도 전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6일 "2022년 이후 약 9만6천 건의 탈영 소송이 제기됐으며, 대부분이 올해 일어난 일"이라며 "어떤 소송에는 한 번에 20~30명이 법정에 출두한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우크라이나 탈영병의 실제 규모가 최대 20만 명에 이를 것"이라며 "예비군 동원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 약 30만 명의 병력이 전투에 투입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탈영한 뒤 부대에 복귀한 ‘초범’은 재판에 넘기지 않기로 했지만(11월 28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관련 법안에 서명/편집자), 예비군 징병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길거리 강제 동원과 최전방의 터질 듯한 긴장감, 러시아군의 폭격에 대한 죽음의 공포 등이 예비군들의 참전 의지를 동원 순간부터 꺾어놓기 때문이다.
콘서트장에서 징집된 한 우크라이나 남성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징병관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다/영상 캡처
게오르기 마주라슈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은 최근 길거리 강제 징집을 보면, 우크라이나군 지도부가 동원병을 '노예'로 취급한다고 날을 세웠다. '우크라이나인의 70%가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을 원한다'는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그 응답자의 30%만 현재 우크라이나에 거주 중"이라며 "나머지 40%는 해외에서 '계속 싸우라'고 말만 한다"고 꼬집었다. 대통령실은 이런 자료를 내놓고 '최전선 군인들을 아름다운 애국자'로 칭송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쟁터로 끌려나온 노예나 다름없이 취급한다고 그는 비판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우크라이나 징병관들이 동원병을 '궁지에 몰린 쥐새끼'로 보고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익명의 징병관은 "동원된 사람들은 집에 가서 정리할 시간도 없이 바로 끌려가고, 휴대폰도 빼앗긴다"며 "그래서 그들은 차 안에서도 계속 저항하고, 우리 직원이나 가족에게 복수하겠다고 위협하는데, 궁지에 몰린 쥐새끼를 상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더 나쁜 상황은 앞으로 싸우러 가야 할 젊은이들이 해외로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6일 우크라이나 10대들이 앞으로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유럽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계속하려면 현재 25세로 된 동원 연령을 18세로 낮춰야 한다는 미국의 대(對)우크라 압박 소식에 10대 청소년들도 출국이 가능할 때 조국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르코프에 사는 17세 드미트리는 더 타임스에 “많은 친구들이 해외 유학을 택하는 이유는, 일단 나가면 군에 징집될 위험이 없기 때문"이라며 "나도 폴란드에 가서 공부할 예정인데, 졸업하면 귀국할 지 여부는 그 곳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U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된 이후 우크라이나의 14~17세 청소년 19만명 이상이 EU 국가에 난민으로 등록된 상태다.
로이터 통신도 곧 18세가 되는 우크라이나 청소년들이 (강제 동원 가능성을 피해) 떠나느냐, 남느냐는 '어두운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고 썼다.
독일 일간지 빌트의 파울 론츠차이머 부편집장은 우크라이나 르포 기사에서 "희망에 사라지는 곳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적었다. 기사는 또 "대규모 동원으로 시민들이 (잠적한 채) 길거리에 나서기를 꺼리면서 모든 일상및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며 "이는 앞으로 우크라이나의 전쟁 지속 능력을 떨어뜨리는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짚었다.
이같은 우크라이나 내부 분위기는 해외로 나간 난민들의 귀국 의지를 꺾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마르크 사이베르트 독일 난민국장은 11월 27일 자국의 dpa 통신에 "독일로 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1년 반 전에만 해도 대부분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이제는 거꾸로 65%가 독일에 정착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우려하는 것은 이들의 자립 의지다. 우크라이나 난민의 40%가 어학 코스를 마친 후, 고용 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얻었으나 막상 일하러 나온 사람은 1% 미만이었다는 게 독일 감독기관의 발표다. 난민들이 일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독일 예산을 축낸다는 비판과 다를 바 없다. 독일은 전쟁 발발 이후 유럽 국가중에서 가장 많은, 11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였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피란민들
러시아군의 점령을 피해 타지로 피란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나와 있는 옥사나 미쉬첸코 연방보안국(FSB) 출입국 담당 대표는 11월 27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의 입국에 '심사 제도'(필터링 제도)를 도입한 2023년 10월 중순부터 1년간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통해 입국한 우크라이나인은 8만3,000명이라고 발표했다. 10만7,000명이 입국을 신청했으나 그중 8만3,000명만 입국을 허락받았으니, 대략 5명 중 1명은 입국이 거부됐다. 우크라이나 국적자가 러시아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현재 세례메티예보 공항이 유일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의 입국을 통제하기 전(2022년 2월~2023년 10월), 러시아에 입국한 우크라이나인은 15만명 이상이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국적을 취득해 살고 있거나, 러시아군이 통제중인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 등) 등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입국자들이 러시아에 완전 정착했는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해외로 떠났는지 등에 대해 신뢰할 만한 통계는 없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군이 점령한 고향으로 돌아가 아파트를 판 뒤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우크라이나 집권여당 '인민의 종' 소속의 막심 트카첸코 의원은 11월 24일 "우크라이나내 타 지역으로 피란한 러시아 점령지역 출신 주민 15만명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용 가능한 데이터에 따르면, 마리우폴 주민 20만 명이 러시아군을 피해 떠났는데, 이후 15만명 이상이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는 끔찍하게 많은 숫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실의 반박에 이를 철회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임명한 마리우폴 시장도 "전쟁이 시작된 후 떠난 시민들의 30%가 되돌아갔다"며 "그들은 주택과 사회적 지원, 일자리 등 국가로부터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옴부즈맨(인권 위원) 루비네츠도 "마리우폴 주민들만이 점령 지역으로 되돌가는 것이 아니다"고 거들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15만명 귀환설 등은 확인된 통계가 아니다"며 "눈길을 끌거나 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과장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렇다면 실체적 진실은 뭘까?
스트라나는 최근 몇 달간 러시아에 점령된 영토에서 나온 피난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귀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서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곳에 머물 생각은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 법률에 따라 부동산 소유권을 확보한 뒤 이를 팔고 유럽이나 우크라이나 타지로 다시 떠나려는 사람들"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 점령 지역에서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파손된 주택에 대한 보상을 받거나, 부동산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실제로 현지의 러시아 통제 당국도 피란민의 주택을 주인 없는 부동산으로 간주해 압수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피란민들은 러시아(혹은 러시아 점령지)로 되돌아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뒤 재산권을 행사해야 하는 막다른 길로 몰린 것이다. 고향의 아파트는 많은 피란민들에게 거의 유일한 재산이어서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푸틴 대통령이 재건축된 마리우폴의 새 아파트를 돌아보는 모습/크렘린 영상 캡처
러시아 당국이 적극적으로 재건 작업을 벌이고 있는 마리우폴의 경우, 새 아파트의 가격은 전쟁 이전보다 2배나 뛰면서 전쟁으로 피란민들의 재산이 늘어났다고 한다. 친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시장의 고문 표트르 안드류셴코는 피란민들에게 대놓고 "원룸 아파트도 수만 달러에 팔 수 있다. 기회가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물론, 유럽이나 타지에서 정착에 어려움을 겪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향의 재건 사업에 속도가 붙고,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입소문에다 러시아 측의 귀환 캠페인이 본격화하면서 구미(口味)가 동한 피난민들이다. 특히 러시아 노동 시장에서 공급이 부족한 기술을 갖고 있지만, 유럽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피란민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또 연금 수급자들은 러시아 점령지(고향)로 가면 러시아 연금도 추가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할 만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협상 전략은?
트럼프 당선자를 진원지로 한 협상 강요 바람은 객관적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홀로 거스르기는 힘들 정도로 강하다. 그러나 아직은 필사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보이고 있다. 서방 제공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를 계속 때리는 시도가 그 예다.
러시아 국방부는 11일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 6기를 타간로그 러시아 공군 기지로 발사했지만 모두 무력화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미사일 2기는 방공 시스템으로 격추했고, 나머지 미사일들은 전자전 장비로 경로를 변경시켰다"면서도 미사일 공격의 피해를 일정 부분 인정했다. 나아가 "적절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국방부가 공개한 에이태큼스 미사일 파편/사진출처:국방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렇게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를 압박하면서, 트럼프 측과 대화하는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의 전략은, 자신의 기존 평화안(평화공식 10개항과 평화정상회의)을 포기하더라도 적극적인 대(對)러 군사 작전을 통해 최소한 러시아와 1대1로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입지를 구축한 뒤 트럼프, 푸틴과 전쟁 종식 방안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군사적인 힘과 시간이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이 40일도 안 남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전세 역전이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동맹국(나토 회원국) 사이에서도 제기된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장거리 미사일 공격이 러시아의 새로운 탄도미사일 '오레슈니크'의 발사로 이어지는 등 확전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트럼프 측의 전쟁 종식 방안이 작동할 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자는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시사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 공격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의 중재를 믿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합참 의장 격)이 '오레슈니크' 미사일 발사(11월 21일) 엿새 후인 27일 찰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에게 전화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화 통화후 2주 이상(11월 19일~12월 11일)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미사일 공격이 중단됐다. 두 사람의 접촉은 2023년 10월 브라운 의장이 임명된 이후 처음인데, '우크라이나의 패싱' 우려도 제기됐지만, 그보다는 우크라이나의 확전 의도를 꺾으려는 의지가 더 커 보인다.
미-러 양측의 공식 발표는 '미 해군 상륙함 3척과 이스라엘에 미사일 방어를 제공하는 구축함이 배치된 해상에서 러시아가 군사 훈련을 시작한다는 점을 통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같은 통보는 오랫동안 확립된 다른 '루트'가 있다고 한다. 굳이 양국의 군총사령관이 전화 통화할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 뉴욕타임스(NYT)가 두 사람이 에이태큼스 미사일의 러시아 공격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 종식을 대비한 움직임들
트럼프 당선자의 발언을 보면, 양측이 대치하는 '현재의 전선'을 새로운 경계선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는 지난 7일 젤렌스키-마크롱 대통령과의 3자 회담에서 이를 분명히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트럼프의 제안을 끝까지 거부하면, 군사 지원이 끊기고,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11월 19일 미 폭스뉴스와의 회견에서 "푸틴 보다 훨씬 강력한 트럼프가 미국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한다면 이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패배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남아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흐름은 이미 협상에 의한 전쟁 종식으로 기울고 있다. 미국에서, 또 유럽에서 '한국전 시나리오' 등 다양한 전쟁 종식 방안이 제기되고, 이에 대비한 각국의 구체적인 움직임도, 한껏 부푼 기대도 눈에 띈다.
스트라나.ua는 5일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상공회의소(AmCham)의 연례회의 참가자(230명 이상) 중 77.8%가 내년(2025년)에는 휴전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했다. 나아가 3분의 2 이상(67.9%)이 트럼프가 대통령 자격으로 키예프를 방문하고, 62.7%는 우크라이나행 국제선 항공편이 재개될 것으로 전망했다. 친미 기업인들의 휴전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반증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을 지낸 아레스토비치 같은 이는 "이르면 1월 25일(트럼프 취임 닷새후)에 휴전이 선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 당선자가 '파리 3자 회동'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취임 전까지 (영토를)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 대신 그 이후에는 중단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 것으로 해석하면서 "미국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양측에 강력한 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늦어도 내년 봄까지 휴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종전을 위한, 혹은 대비한 유럽 각국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숄츠 총리는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2일 키예프를 방문했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숄츠 총리의 방문을 "우크라이나 측이 휴전을 위해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내는 게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숄츠 총리는 키예프 방문에 앞서 푸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어떤 형식이든 숄츠-젤렌스키-푸틴 3자간에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듯하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트럼프의 종전 의지를 되돌릴 수 없다고 보고, 휴전 협정을 감독할 평화유지군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라디오 리버티(Radio Liberty)는 2일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가상 합의'에 도달한 후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배치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공식 임기를 시작한 카자 칼라스 EU 신임 외교고위대표(외무장관 격)도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 우크라이나에 군대(평화유지군) 파견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트럼프 계획안'중 하나가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밴스 부통령 당선자 주장/편집자), 유럽의 군대를 (평화유지군으로) 배치하는 것이라고 보도했으나, 트럼프 측으로부터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 우크라이나 특별 대표 지명자인 키스 켈로그가 발표한 논문에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야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평화유지군 아이디어에 대한 러-우크라 입장은 엇갈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일찌감치 유럽 군대의 주둔을 허용할 뜻을 밝혔다. 유럽 군대의 주둔(혹은 파병)이 평화협상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분석이다. 협상 테이블이 참여하는 수가 많을 수록 합의는 어려워지고 길어지는 게 세상 이치다.
러시아 측은 타국 군의 배치는 분쟁 당사자(러-우크라)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평화유지군 파병이 평화협상의 논의 대상으로 등장한다면, 우크라이나는 찬성, 러시아는 반대라는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고, 이는 협상의 또다른 장애물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유럽내 대러 강경세력이 평화유지군 아이디어를 던지고, 논의에 불을 붙인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토 가입' 카드를 들고나오니 협상 여건은 더욱 복잡해졌다. 트럼프 측을 향해 '나토 가입이냐', '유럽 평화유지군 배치냐' 중 선택하라는 게 그의 마지막 숭부수가 될 수 있다.
그는 집단적 자위권에 관한 나토 헌장 제5조를 우크라이나 통제지역에만 적용해도 된다고 한발 물러서기도 했는데, 근본적으로는 스톨텐베르그 전 나토 사무총장이 던진 안과 다를 바 없다. 냉전 시절의 동서독 방식(서독만 나토 가입)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점령 지역 탈환을 위해 러시아를 선제 공격한다면, 나토는 일체 지원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에 대한 (러시아 측의)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경우, 집단 자위권을 발동한다는 방식이다.
관건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를 특수 군사작전의 명분으로 내건 러시아가 소위 '동서독 방식'에 동의할 지 여부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러시아가 이를 조건으로 협상을 시작할 이유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부분 가입안도 결국은, 양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트럼프의 협상안을 방해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더 타당해 보인다. 푸틴 대통령이 거부하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미국의 우크라이나 특사 지명자인 켈로그가 내놓은 종전 방안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최소 10년 유예하자는 것이다. 트럼프 팀(정권 인수팀)은 실제로 워싱턴을 방문한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실장과 회담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미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5일 보도했다.
독일과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최소 3개 이상의 나토 회원국도 키예프의 가입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부분 나토 가입안도 현실성이 '제로'다. 그럼에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가입 철회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협상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유럽 평화유지군의 파병마저 러시아가 거부한다면, 어느 한쪽이 손을 들 때까지 싸우는 장기전 시나리오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딜레마
전쟁 종식을 대비한 러-우크라 양측의 움직임도 포착된다. 러시아 중앙정부는 각 지역 당국을 대상으로 '포스트 종전' 분위기 조성에 나서고 있다고 현지 경제일간지 코메르산트가 2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지난 11월 말 세르게이 키리옌코 제1부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를 대비한 세미나를 열었다. 한 참석자는 “특수 군사작전(전쟁)은 끝날 것이며,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하고, 작전의 성과가 우리의 승리로 받아들여지도록 준비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협상에 의한 전쟁 종식을 반대하는 전쟁 강경파, 특수 군사작전 자체를 비판하는 반정부 세력도 아닌,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홍보 전략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이 제시한 군사작전의 목표, 즉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와 비무장화,점령지의 실효 지배 등이 군사작전의 승패 기준이 되도록 국민 설득을 시작하자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권력 핵심층은 전쟁 종식 후에 치러질 대선에 초점을 맞춘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워싱턴을 방문한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은 트럼프 차기 정부의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과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 등과 만난 뒤 5일 영국 텔레그래프와 가진 회견에서 "우크라이나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 즉시 선거를 실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도 차기 대선 나설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연임을 겨냥한 행보는 이미 시작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3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최근 내놓은 '1천 흐리브냐'(현재 환율로 약 24달러) 쿠폰의 전국민 배포 방안에 대해 "전쟁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의 인기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차기 대선의 패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정치 전문가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1천만 명에 이르는 연금 수급 유권자들을 겨냥한 '포퓰리즘적인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바이든 미 행정부와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동원 연령을 25세에서 18세로 낮추라는 미국 등 핵심 우방국들의 요구를 거부한 것도 대선 전략과 관련된 것으로 관측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고문 드미트리 리트빈은 5일 X(엑스 옛 트위트)에 18세 이하로 동원 연령을 낮추라는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전날 권고에 우크라이나는 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스트라나.ua는 대통령실의 이같은 입장은 전쟁 종식과 이에 따른 차기 대선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차기 선거에서 이를 활용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향해 집요하게 징집 연령 하향을 주장해왔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1월 "최전선 방어를 위해 우크라이나가 더 많은 것(동원 연령 인하)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우리의 관점"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미 정부 당국자는 "(미국처럼) 징집 나이를 18세로 낮추는 게 실존적 위기를 타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4월 징집 연령을 27세 이상에서 25세 이상으로 낮춘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서방이 첨단무기를 더 많이 제공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국의 요구를 일축했다. 집권 여당의 알렉산드라 우스티노바 의원은 "무기 원조 로비를 위해 만난 미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왜 젊은이들을 더 전선에 보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면서 그러나 "동원 연령 하향은 내부적으로 큰 반대에 직면할 뿐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지도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8세 이상 젊은이들을 징집하는 조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영국 언론들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차기 선거에서 발레리 잘루즈니 전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현 주영 대사)에게 패배할 수 있다고 쓰기 시작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민 지지율은 현재 16%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반면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은 영국 대사로 임명된 뒤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설하는 등 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영국으로 망명을 준비한다는 언론 보도도 유럽에서 처음 나왔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스페인 일간지 엘 문도(El Mundo)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이 끝난 후 런던으로 '황금(금손)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우크라이나 외교계 소식통을 인용해 "휴전이 이뤄진다면 서방은 그를 런던으로 망명시킬 준비를 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연기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했다. "동시에 신속한 EU 가입과 국가 재건을 위한 경제 지원, 평화유지군 배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매체들은 전쟁 종식후 전개될 이런 시나리오에 대해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우크라이나 반체제 인사의 반응이다. 반역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알렉산드르 두빈스키 의원은 7일 텔레그램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의 '황금 망명'은 그가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미러 군사동맹 비준, 북한군 본격 참전할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쿠르스크로 파병된 북한군이 평화 협상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여부다.
김정규 북한 외무성 부상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이 4일 모스크바에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조선 중앙통신과 러시아외무부가 5일 이를 공식 확인했다. 김정일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19일 평양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약 반년 만에 조약 발효까지 모든 절차가 완료된 것이다. 핵심 조항은 어느 한쪽에 대한 군사적 공격 위협이 있을 경우, 지원을 위한 협의가 진행되고, 실제로 무력 공격이 발생할 경우, 다른 한쪽은 즉시 군사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쿠르스크에 파병된 북한군은 5일부터 언제든지 전투에 돌입할 수 있다. 러-우크라 양측에서 북한군의 참전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정보도 엇갈리고 공식 확인도 되지 않고 있다.
반면, 북-러 협력 관계는 계속 긴밀해지고 있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내년 5월 9일 전승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북한군 파견을 요청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80주년 기념식에 북한군이 진짜 참석한다면, 양국간 군사동맹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