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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묵상글 ( 부활 제4주간 수요일. - 관상에 매번 실패한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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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관상에 매번 실패한다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며 하느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관상이고 관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관상한다고 하면 하느님 관상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을 자기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저희 프란치스칸에게 이런 관상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관상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보는 것이고,
인간과 피조물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봅니다.
관상이 이런 것이고 또 이럴 수 있는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만 보려 하고 인간은 시야에서 몰아내려고 합니까?
또 피조물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보려고 하고 보는데
왜 인간을 통해서는 보려 하지 않고 또 보지도 못합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인간은 꼴 보기 싫기 때문이거나 진정한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싫거나 미울 때 꼴 보기 싫다고 하잖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치워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사랑하기에 관상하겠다고 하면서
인간은 꼴 보기 싫으니 관상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상이 성공하겠습니까?
꼴 보기 싫은 인간 때문에 관상이 매번 실패할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기만 하면 그 인간이 떠올라
하느님께는 그 언저리에도 못 가고 끝이 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 없이 관상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 없이 관상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 없이 관상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삼라만상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우주와 인간을 그렇게 많이 연구하지만
무기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나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믿으면서 물질세계 이외의 다른 실재를 부정하는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초월적 실재인 하느님 관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고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라고 믿으며,
그래서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관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 보는 믿음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믿음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이고,
사랑과 믿음 없인 어떤 관상도 꿈꾸지 말아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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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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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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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그 ‘빛’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리심은 제게 믿음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머무르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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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신 예수님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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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 영화 중에 ‘삼체’가 있습니다.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구는 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일출과 일몰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동지와 하지를 예측할 수 있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달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달의 자전과 공전 궤도를 알면 밀물과 썰물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보름달과 초승달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이 이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3개이거나, 달이 3개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삼체의 상황에서는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은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영화는 이체의 지구와 삼체의 외계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물리학이 삼체의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삼체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부활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이체의 세상이 추구하는 질서와 원칙이 있습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암호와 같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보호막을 가지려고 합니다. 생명을 다음 세대에 전해 주기 위해서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체의 질서와 원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이체의 질서와 원칙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풀 수 없던 문제에 대한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손과 십자가의 희생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버릴 수 있었고, 고통을 넘어 부활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사명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삶을 보여주었는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공동체는 가진 것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는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배고픈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직면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나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부제들이 나눔을 전담하였고, 사도들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방인의 문화와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각자의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행전, 요한행전, 데레사 행전, 마리아 행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께로 가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들었던 ‘행전’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전에 비움, 십자가, 나눔,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행전에 용서, 겸손, 이해, 친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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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라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볼 수 있고, 그분을 믿을 수 있다는 간단한 말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주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선글라스 써 보셨지요? 봄을 지나 여름이 오면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닐 것입니다. 선글라스는 그 렌즈의 색에 따라서 세상의 색이 결정됩니다. 파란색 선글라스를 끼면 파란색으로, 검은색을 끼면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주님이라는 선글라스를 끼우면 하늘에 태양이신 하느님을, 주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라고 하십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한 줄기의 빛도 없으면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니고서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하느님을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님이라는 선글라스를 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복음을 읽고, 주님을 묵상하고, 그분을 만나고 기도하고, 그렇게 주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또한 주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이 아닌 ‘나’라는 선글라스를 낍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말이 귀에 거슬리고, 보기도 싫습니다. 화가 나고, 무관심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중심에 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와 생각이 달라서,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 시기하고 다투고 화내게 되고,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를 벗고 주님을 입으십시오. 어둠을 벗고 빛을 입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만나듯이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주위 사람들을 보십시오. 주님을 담고, 입고, 먹고 마시며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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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쑤시개
언제부터인가 식사 후 이쑤시개를 씁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행동반경 안에는 늘 이쑤시개가 있습니다.
사실 필요할 때 없거나 너무 멀리 있는 것이 귀찮아서 자주 필요한 것은 늘 가까이 두는 편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쑤시개가 저를 공격합니다.
잇몸을 찌르기도 하고
입술을 찌르기도 합니다.
다행히 자신을 써주는 제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찌르더라도 그렇게 아프게 찌르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쑤시개 자신의 날카로움을 알려주는 인사 수준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쑤시개 같은 존재가 있을까요?
언제나 옆에 있는데, 자주 만나는데
가끔 신경 안 쓰면 쿡쿡 찔러대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그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조금 더 신경 써달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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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봄(春)은 봄(觀)입니다.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지가 봄호 65권 표지를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65권이니 벌써 창간된지 16년째가 됩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봄철은 참 볼 것도 많으니 역시 봄은 봄입니다. 어제 4월23일은 세계 책의 날이었습니다. 작은 잡지 분도 계간지이이지만 참 알찬 잡지로 책의 날 소개해드리고 싶은 교회잡지입니다. 특집의 초점란은 파견(선교)였고, 분도잡지 역시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려는 선교 목적으로 출판되는 잡지입니다.
어제 바티칸의 교황님을 찾은 어느 수도회 장상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이들의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의 얼굴을 반영하는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말씀에 이은 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충격을 받은 하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여기 로마에 왔을 때 일입니다. 이 아이들은 웃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웃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웃을수 있는 능력을 다시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주님의 얼굴이 되어갈 때,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의 옛 어른의 말씀 역시 배경이신 주님께서 환히 드러날수록 하는 일 모두가 이런 즐거움의 경지가 될 것이며,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이 될 것입니다.
“즐기는 것은 만 번을 반복하는 애정이며, 앞으로 만 번을 더 반복할 것이라는 긍지다.”-다산
삶은 반복입니다. 이런 반복의 삶이라면 반복의 기쁨, 반복의 행복, 반복의 새로움이라 부를수 있겠고, 바로 매일 평생 반복하여 부르는 시편성무일도가 그러합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논어
정말 배경이신 주님만이 점차 드러나는 삶일수록 이런 즐거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참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받았던 “배경을 가리지 말라”는 시화(詩畫)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 이처럼 폭발적인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인 자작시는 드뭅니다. 새로 건축되고 있는 피정집 건물이 기존의 옛 건물과는 다리 크고 높아 배경인 불암산을 가리고 있음에 순간 떠오른 글입니다.
“내
그 나무를, 건물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하늘과 산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주님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날로
작고 낮아져
그 좋은 배경(背景)을 환히 드러내는
누구나 좋아하는
겸자(謙者)가
덕자(德者)가 될 일이다.”-2024.4.23
처음에는 ‘싫어함’이란 부정적 말마디를 썼다가 즉시 ‘좋아하지 않음’이란 긍정적 말마디로 바꿨습니다. 수도원 전경도 별내 신도시가 건설되고 고층의 아파트 숲들이 즐비하니 배경을 이루었던 그 좋던 하늘과 산, 들의 옛 전경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위 시 나눔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의 세 답글도 나눕니다.
1.“한없이 좋으신 분, 주님을 가려버리지 않게,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게
노력하는 삶의 자세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습니다.”
2.“이 시는 최고입니다. 주님 만날 때까지 간직하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
3.“주님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낮아지고 작아져 겸손하게 살아야 됨을 다시금 아름다운 시를 통해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배경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환히 드러나듯 우리를 통해 배경이신 예수님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는 삶이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이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니 예수님이 아니곤 하느님 아버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서, 마침내 비움과 겸손의 절정에서 나는 사라져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살았던 예수님이셨고,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에게서 일치의 완성에 도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다음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환히 계시됩니다. 나는 사라져 배경이신 아버지와 하나된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과 하나된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무지와 허무,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빛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세상의 빛, 인류의 빛, 영혼의 빛입니다. 세상 무슨 빛이 주님의 빛을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새삼 구원과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생명과 죽음도, 행복과 불행도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배경한, 주님과 일치를 이룬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눈부시게 펼쳐집니다. 제자들을 통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활동입니다. 제자들은 사라지고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환히 드러납니다. 다음 짧은 대목이 이를 요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이어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후, 둘은 선교사로 파견되니 마침내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이 실현됩니다. 주님의 두 제자이자 사도인 바르나바와 사울의 선교사로서의 맹활약이 펼쳐집니다. 이들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이들의 영원한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배경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하시어 당신의 사도이자 선교사로, 당신의 빛으로 어둔 세상에 피견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6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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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삶을 향한 걸음>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요한 12,50)
죽음을 향한
삶의 길 위에
삶의 걸음이 곧
죽음의 걸음일지라도
두렵기보다 설레고
주저하기보다 기꺼우니
언젠가 닿을 죽음
그 너머 비로소
영원한 삶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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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부활 제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5)
하느님을 보는 것
그러면 하느님은 육체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여기 예수님 말씀에서 ‘본다’는 것은 마음이 보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은 본질이 같음을 나티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이를 가리킬까요? 이 말씀은 이런 이치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강물을 떠다 쓰는 사람은 강이 아니라 강을 흐르게 하는 샘의 물을 쓰는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높은 데 있는 것은 언제나 낮은 데로 흐르고, 낮은 것은 높은 것에 의지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입니다.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법은 없습니다. 낮은 것이 높은 것으로부터 받게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혼보다 높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언제나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십니다. 하느님은 영혼을 피하지 않으시지만, 영혼은 쉽게 하느님을 피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아래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곧바로 흘러드는 신적인 것을 받습니다. 그는 두려움이나 사랑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받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 아래로 완전히 던지십시오. 그러면 지순한 신적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이러한 감화를 어떻게 받습니까? 공기는 태양으로부터 빛을 서먹서먹하게 받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하느님 아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낯선 자로 머무는 한, 영혼은 하느님을 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생경함과 거리감을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가들은 영혼이 빛이 되어 빛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생경함이나 거리감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15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수도생활의 새 양식:
베르나르도는 사람들이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위대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1112년 4월 시토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동시에 30명의 동지를 데리고 왔다. 그는 이 수도원에 처음으로 자극을 주었고, 새로운 이상에 예상 밖의 팽창력을 가져다주었다. 1115년에 그는 열두 명의 수도자들과 같이 새로운 수도원을 건셜하고자 클레르보로 옮겼다. 죽을 때까지 그는 68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가 사망하던 해인 1153년에 이 수도회는 이미 350개의 수도원으로 성장하였고, 1200년경에는 530개의 수도원, 1500년경에는 무려 700개의 남자 수도원과 900개의 여자 수도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비록 오래전부터 여러 개의 수녀원이 시토회의 회헌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수도회가 여자 수도원들을 자신의 연합체에 받이들인 것은 12세기 말엽부터였다.
노동의 강조와 토지 개발과 농업의 종사는 이 수도회와 동부지역의 개발과 선교에서 고도의 문명적인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가 지녔던 본연의 사명은 영적인 영역에 있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생활의 성화와 내면화 및 전 교회의 종교적인 쇄신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각계각층으로부터 조언과 조력의 요청을 받았고, 교황과 황제, 제후들과도 계속 연락하였다. 성전 기사회에 회칙을 작성해 주었고, 1130년의 교황직 분열 때에는 그의 발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147년의 십자군은 대부분 그의 설교 덕분에 성립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죄절된 후에 사람들은 그에 대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베르나르도를 그 세기의 신탁(神託)이요 종교상의 천재라고 불렀다 그는 위대한 개혁가요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첫째로 항상 수도자이고, 성인이며 신비가로 머물렀다.(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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