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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16절-18장 3절.
17장.
16절-17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사라는 구십 세, 아브라함은 백세 때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로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심중에 웃었다. 왜 웃었을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웃은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거다. 그러면 여자가 구십 세에 아기를 낳는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아브라함만 웃을까, 인간들은 다 웃을까? 인간들은 다 웃는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은 웃음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웃음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아브라함처럼 웃지 않으려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인간의 생각이 아닌 이룰구원의 말씀으로 들으면 이 말씀이 믿어지게 되고 웃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는 말씀이 단순히 아들을 원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씀일까, 아니면 그건 껍데기이고 이삭이라는 아들 속에 들어있는 영 중심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까? 후자다. 그 증거로 이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영 주격으로 보는 아들을 생각했다면 기쁨의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당시의 아브라함은 이걸 보지 못하고 자기와 사라의 나이를 생각하며 사라를 통해서는 육신의 아들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을 해서 불신앙의 웃음을 웃은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새겨 들을 때 믿음으로 받는 자식, 즉 영 주격의 아들이 되는 건데, 이런 면으로 보면 아들이라고 할 때 딸은 해당이 되지 않는 게 아니라 딸도 영 주격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눈에는 아들이 되는 거다. 왜 아들이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요, 이 세상에서 영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요즘 여자 목사님들이 많은데, ‘여자가 목사를 할 수 있는 거냐?’ 하며 성경 구절적으로 따지기 전에 여자라도 이룰구원의 일을 주격적으로 해 나간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다. 아무리 남자목사라도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다.
18절: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다.
1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정령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우리 인간이 듣기에는 육적인 아들을 낳는다는 말 같으나 영 주격으로 하시는 말씀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를 의미하는 거다.
예배당도 크고 교인도 많은 교회의 목사라도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있고, 세상을 가지라고 자랑하는 것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짐승자랑을 하는 거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짐승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여기 나오던(주-김경형목사님이 궁극교회에서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성경연구 및 신학강의) 목사님 중에 신학을 한 아들이 있다고 해서 여기 공부하는 데 나오게 하라고 하니까 지금 서울 큰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어서 여기 와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수십 년을 목회를 한 분인데도 누가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 건지, 얻는 건지, 주는 건지를 모르는구나.
내 입장에서 ‘이런 분들이 영이냐. 육이냐?’ 하고 볼 때 육이다. 이런 분들은 내가 자르는 게 아니라 그런 정신을 가진 본인들이 자꾸 성 밖으로 나가버린다. 내 쪽에서 쫓아버리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진리권 생명권 밖으로 자꾸 도망을 간다. 자기의 주격적 생각이 선악과를 따먹으니 본인들이 쫓겨나가는 거다. 원리가 그런 거다.
쫓겨나간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생명과를 먹는 권이 없어진다는 거다. 이렇게 되니 자꾸 선악과 쪽으로 눈이 가고, 소원 목적도 그렇고, 그 맛이 그리워서 자꾸 그리로 가는 거다. 이게 쫓겨나가는 셈이고,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고, 이렇게 되면 스스로 성 밖에서 살게 되는 거다. 그런데 본인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질이 같지 않으면 스스로가 결합이 안 된다. 질이 아니면 나눠진다. 반대로 질이 같으면 결합이 되고 단합이 되고 하나가 된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것은 주님과 나누어진다. 본질이라야 하나님과 단일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과 단일인지, 이질인지?
자기가 살아생전에 어떤 사건적 상황이 왔을 때 자기 속에 들어있는 신앙의 질이 행동으로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즉 사건 환경이 와서 자기의 속을 판단을 해 주고 드러내 준다. 자기가 신앙이라고 하는 게 늘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잘 되는 것을 목적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좋지 않은 사건 환경이 닥치면 그만 그것에 상처를 받고 자기 속에 들어있는 죄적인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아기를 낳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름을 먼저 지어주셨다. ‘이삭’의 뜻은 ‘웃음’이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실 때 웃었다. 이들이 웃은 웃음은 ‘참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다’ 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웃음인데, 이들이 아들을 낳게 되면 이 웃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웃음으로 바뀌는 거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웃음이었는데 이제는 믿는 웃음, 긍정적인 웃음이 되는 거다.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자식으로 이어져서 계속 연결 연결 연결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듯이 한 가정에서 판사가 나오고 임금이 나온다는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수 있는 정신을 가진 후손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거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손과 계속해서 언약을 세우겠다는 거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왕들을 보면 못된 왕이 많다. 그럴 때마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자꾸 깨우친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거다. 이때 깨우침을 받는 자는 자기의 현실에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거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연속성이 아니라면 아브라함 이후의 후손들은 다 빼버리고 인간세상이 끝날 때 살고 있는 사람과 언약을 하면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계속 하시는 것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이룰구원의 연속성을 위해서다. 당신의 백성들의 이룰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후손으로 후손으로 내려가면서 연속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이렇게 해서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진리중심으로 나가는 후손들도 그렇고 하나님의 언약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이어진다면 이들도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들이라고 했다. 복음의 아들이 진정한 아들이다.
육신의 아들은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교육을 하며 부양을 하는 거다. 그러나 믿는 부모는 육신의 아들에게 복음을 주격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고 주님을 믿으라고 권면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으로서의 정신이 바로 박힌 부모들은 선지자의 자세로 안 믿는 자녀들에게 마음으로 기도하고 볼 적마다 귀에 자극이 되게 자꾸 복음을 전해야 한다.
20절-21절: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해서 열두 방백이 되겠고, 그리고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삭과 비교하면 뭐가 없느냐? 신령한 언약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언약이 없다. 이삭과 같은 언약이 없다. 이걸 보면 언약이 없는 번식도 있구나.
육신적인 신앙에는 영적 언약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룰구원에 신경을 쓰는 거다. 아무리 형제가 목회자라도, 아무리 부모와 아들이 목회자라도 언약이 없는 목회는 우리 입장에서는 안 된다. 이건 계:에 있는 음녀교회다. 다른 말로 하면 인본주의 교회, 세상주의 교회, 구복주의 교회, 기복주의 교회, 자유주의 교회에는 언약이 없다. 유업이 없다. 영적인 면이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명년 이맘때에 네가 이삭을 낳을 텐데 그 이삭과 언약을 세우리라’ 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한 번 언약을 세웠으면 될 텐데 왜 또 이삭과 세울까? 이게 무슨 뜻이냐? 언약의 연속성을 말하는 거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이삭에게도 해당이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언약은 이삭이 아들을 낳으면 이 아들과도 세우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세운 언약은 아브라함이 죽으면 이삭에게 ‘이삭아, 내가 네 아비지와 세운 언약은 옛날 일이니 무효가 된 거고 내가 너와 다시 다른 언약을 세우겠다’ 이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이삭에게는 물론이고 그 후손에게도 계속적으로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걸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말씀의 깊이를 알면 이 말씀이 과거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만 하신 언약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바라보며 이룰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진한 구원의 말씀이 된다. 이룰구원에는 감정이 얕은 것도 있고 깊은 것도 있고, 기쁨도 그렇고 슬픔도 그렇다. 또한 ‘어느 쪽으로 진하냐?’ 하는 것도 있다. 이런 걸 영감의 감화성이라고 한다.
22절-2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가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날에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신앙 믿음으로 된 마음의 다짐, 마음의 준비가 들어있는 표현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실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준비와 다짐이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겠다고 하는 각오의 표현이 되는 거다. 주인이 이런 마음이니 그 집의 모든 사람들도 주인을 따라가는 거다. 그 뒤로도 보면 온 식구가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복된 가정이다.
24절-25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삼 세이었더라.’ 난 지 팔일만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양피를 베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 할례를 한 후에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다. 이 점을 이용해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도록 해서 제대로 걷지 못할 때 다 죽여 버렸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했는데, 관계성적으로 보면 이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팔려가는 것보다 아브라함의 집에 팔려온 것이 훨씬 좋고 인간대우를 받는 거다.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아브라함의 집에 들어온 것이 큰 복이다. 일반적으로 부자들은 노예로 사온 종을 자기 집의 짐승처럼 부려먹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사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집은 그런 사상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떠냐? 목사가 교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27절: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 집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다. 즉 모두가 주인 아브라함이 받은 감화를 받은 거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이들이 아브라함 집의 노예로 살면서 할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다. 우리를 당신의 피로 사신다는 말씀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다. 그리고 자기 집 식구나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짐을 무겁게 하지 말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려는 것이니 사람들에게 억압 강압을 해서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말라는 거다. 아들딸들이 시집장가 갈 때 ‘혼수가 적다느니, 패물이 적다느니’ 하면서 짐을 지우면 안 된다.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괴롭고 힘들고 짜증나는 거다. 그러나 자원적으로 짐을 질 때는 기쁘고 즐겁다. 그렇다고 해서 늘 기뻐서 즐겁게 짐을 지는 사람을 보고 ‘너는 의례히 그렇게 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다른 짐도 더 지라고 한다면 이건 뭘 모르는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에서 이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괴로워하는 줄을 모르게 된다.
자식을 키우면서 장가를 가든지 시집을 가든지 했을 때 그 집의 근심거리로 키운다면 그 자식이 어떻게 되겠느냐? 부모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키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살아갈수록 믿는 부모에게 짐 덩어리가 된다면 이로 인해 부모가 치매에 걸릴 수도 있는 거다. 교회적으로도 인도자의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살면서 직접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하다.
믿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건 환경을 겪을 때마다 ‘이 환경을 나에게 주셨으니, 이 사건을 나에게 주셨으니 여기서 깨닫고 이겨나가야지’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자기가 사건 환경을 겪을 때 믿음의 실력이 있으면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러면 더 큰 은혜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모든 면에 항상 이룰구원에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을 주신다.
18장.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햇볕이 뜨거운 오정쯤에, 즉 점심 즈음에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면서 낮잠이나 잘 것이지 왜 장막 문에 앉아있었을까? 점심시간이니까 혹시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더위도 식히게 하고 점심식사도 대접을 하려고?
아브라함이 자기 문 앞에 앉아있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생활로 통한 예수님의 마음이 그림자처럼 보인다. 누가 이 마음을 알까? 오늘날 목사님들이 아브라함의 마음처럼 영감이 깃든 게 있을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고 있는 심정이 2절에서 나타난다.
2절: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이 ‘어떤 나그네가 지나가나?’ 하며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냥을 하려고 문 앞에 앉아있는 거냐?
‘눈을 들어 본즉.’ 이 말이 장막 문에서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는 거냐? ‘눈을 들어 본즉’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아브라함이 영적인 고상한 눈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여러분들도 사람을 볼 때 눈을 들어서 봐라. 무슨 말이냐? 보통 사람이 눈을 뜨면 눈앞에 있는 것들이 보이는데, 여기서 ‘눈을 들어 본즉’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라면 어른을 볼 때 눈을 치켜뜨고 본다. 그러나 자기와 키가 비슷한 사람을 볼 때는 얼굴을 정면으로 하고 본다. 그 다음에 자기보다 키가 큰 사람을 볼 때는 자기 눈을 위로 치켜뜨고 본다. 이런 게 다 ‘눈을 들어 본즉’ 하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구원도리를 깨닫게 해 주는 비유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하는 것이 손님들의 키가 전봇대만 했기 때문이냐? 그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상한 구원의 사상, 고상한 믿음의 눈을 말하는 거다. 뒷 절에서 나오지만 아브라함이 손님을 맞아들여서 종에게만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직접 나서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일을 한다. 이러느라고 온 가정이 분주하다. 이걸 볼 때 참 아름다운 아브라함이다. 정말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하구나.
아브라함이 정오쯤에 장막 문에 앉았을 때 맞은 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눈에 이 세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을까, 아니면 사람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어깨 양쪽에 날개가 달렸을까, 아니면 훨훨 날아다니는 천사로 보였을까? 아브라함의 눈에 천사로 보이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인 거다.
만일 천사로 보였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자나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일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면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알까, 모를까? ‘당신들이 아무리 내 눈에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당신은 천사다’ 이렇게 알까? 어쨌든 여기서는 평범한 나그네로 나타났다.
진짜 사람이 나타나건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건 아브라함은 이 손님들을 반가이 맞이할까, 아니면 사람이면 본체만체 하고, 천사라면 반가이 맞이할까? 아브라함의 평소의 신앙의 성품을 볼 때 누구라도 반가이 맞이한다. 그래서 히: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들이 있다고 표현을 한 거다. ‘아이고, 천사님’ 하면서 맞이한 게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영접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세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기도 하고, 천사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을 깨닫는 우리로서는 이걸 ‘사람이다. 천사다. 종이다’ 라고 단정해서 말을 할 게 아니라 그게 누구이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람을 보냈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다고 하는 면을 봐야 한다.
‘눈을 들어 본즉’ 하는 이 눈은 간단히 말하면 영의 눈을 말한다. 이 눈은 아주 고상한 눈이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고상한 눈을 가졌구나. 영의 눈을 가졌구나. ‘눈을 들어 본즉’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의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서 있는데, 이들이 그늘에 서 있었겠느냐, 뙤약볕에 서 있었겠느냐? 뙤약볕이다. 고상한 영의 눈을 가진 아브라함이 이런 사람을 딱 볼 때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까?’ 하고 그 사람들의 생각과 중심을 읽는 거다. 근심이나 걱정으로 사람의 마음 속에서 흘리는 눈물을 직감하는 거다. 이런 사람이라야 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고 따뜻한 마음이 나가는 거다.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까? 여러분들도 영의 눈을 가지면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생활상이나, 겪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것을 느낌으로 안다. 이게 사람의 옳은 태도다. ‘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까?’ 라고 하면서 마음 속에서 한숨이 나오고, 그렇다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고 이런 게 있는 거다.
사람의 마음이 느낌성이 깊은 사람이 있고, 무딘 사람이 있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줄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읽을 줄 알라는 거다. 이런 면으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읽으러 오신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내가 너의 걱정 근심을 다 들어주마’ 이게 들어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의 근심 걱정을 들어주신다는 것은 믿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으면 자기에게 오는 고통스런 사건 환경이라도 그게 짐으로 여겨지지를 않고 자기의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훈련재료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깨닫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거다. 그 전에는 자기에게 고통스런 사건 환경이 오면 눈물을 흘렸지만 이제는 자기에게 사건 환경이 온 이유를 깨닫고서 그 사건 환경을 이기니 웃음이 나오고, 만세가 나오고, 이로 인한 상이 주어지고 이렇게 되는 거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얼른 알아보고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렇게 달려 나간 것은 그 마음이 그들을 영접하려고 기다렸다는 의미다.
‘영접하여 몸을 땅에 굽혀.’ 자기 자신을 낮춘 거다. ‘절을 했네. 안 했네’ 이게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낮춘 거다. 백세가 된 노인이 자기 몸을 굽히며 완전히 낮췄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많을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 마음을 모르실까? 아브라함이 평소에 품은 마음이 품행으로 나타나는구나. 그러니까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는 마음이 보이는 거다.
‘나만큼 성경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 라고 한다면 이건 자기를 낮춘 거냐, 높인 거냐? 하물며 자기가 스승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옆에 앉아있는데 ‘나보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 이걸 좋게 말하면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예수를 믿다보면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환경을 만나도 이건 다 하나님께서 이룰구원 면을 깨닫게 해 주는 재료로 주시는 것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룰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앞으로 별의 별 사람을 다 겪어야 한다. 이럴 때 그런 걸 다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속에서 옛사람이 튀어나오면 못 이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별의 별 사람이 다 와서 핍박과 조롱을 했고, 십자가에 매달고, 창끝으로 가슴을 쑤시는 일을 겪으셨지만 이런 걸 다 이기고 결국은 부활 승천을 하셨다.
어쨌든 세상만사와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날 때 원망불평을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마음을 넓혀봐라. 그러면 일대 일로 보는 원수는 없어진다. 우리는 이런 원수가 있으면 안 된다. 사람 대 사람 간에 원수가 있다는 것은 자기가 그만큼 차원이 낮다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친할수록 맘먹으려고 한다. 버릇없이 행하는 게 많다. 세상사람들은 그렇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친할수록 예의범절이 바로 서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높아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높이시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인격이 올라갔다면 혹 다른 사람이 자기를 낮추더라도 거기에 대해 항의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상대가 나를 낮추던 높이던 그럴수록 나는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면 되는 거다.
등잔에 불이 켜지면 사람들이 이 등잔을 높은 곳에 올린다. 그러나 불이 꺼지면 내린다.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자기에게 뭐라고 하던 그들이 몰라서 그러는 건데 거기에 대해 내 입에서 저속하거나 버릇이 없는 말이 튀어나온다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게 된다. 이러면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거다.
3절: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접을 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을 말한다. 타락된 목사들은 교인들을 향해서 ‘네가 나를 대접해야지’ 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은혜를 받고 싶다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이런 걸 깨닫게 해 주려고 손수 대접을 하고 교인들을 섬기면 눈치 없고 배움이 없는 사람들은 의례히 ‘그런 거는 목사님이 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렇게 돌아가면 어떻게 되느냐? 이 교인은 은혜받기는 다 틀렸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이 목사님이라고 해서 자기를 위하고 섬기면 ‘교인들은 목사에게 의례히 이렇게 하는 거다’ 라고 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는 틀렸다.
한 해 두 해를 믿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도 모르느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일반차원도 안 되면 어찌 되겠느냐? 이러면 은혜를 받는 면에 자기보다 차원 높은 사람에게 밀리는 거다. 교인들만 아니라 목사님들도 이런 게 있다. 이건 은혜를 받을 줄 모르는 거다. 영육으로 다 깨우쳐야 은혜를 받는 건데 그걸 모르는구나.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도 줄어지고 육적으로도 줄어지는 수밖에 없다.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대접을 받고자 하면 대접을 하라고 했는데 왜 그런 거냐? 하나님께서 빼앗아 먹고 싶어서 이 말씀을 하신 거냐? 하나님께서 더 주고 싶어서 이 말씀을 하신 거다. 이걸 알아야 한다.
내 스승목사님은 본 절의 말씀에 대해 ‘내가 은혜를 받잡사옵거든 나로 이것도 하게 하시고 저것도 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이게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교인 중에 ‘내가 이걸 하겠습니다. 저걸 하겠습니다’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승목사님이 이 사람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도와? 네가 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브라함이 은혜를 받는 태도와, 오늘날 교인들의 태도가 그 주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 주신 거다. ‘내가 이걸 하고 싶은데 은혜를 주시려거든 허락을 해 주시옵소서’ 이게 은혜를 받는 자세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 자세를 가진 거다.
성경에 보면 왕의 잔치자리에 길에 있는 사람을 다 데리고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쫓겨나서 얻어맞았다. 얻어맞은 이 사람은 기본구원을 안 입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룰구원 면에서 사람의 중심태도를 말하는 거다. 마음중심에 품은 걸 말하는 거다.
은혜를 받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물질대접보다 더 큰 축복을 알고 있다는 거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은혜를 주길 원하시거든 나로 이것저것을 하게 하옵소서’ 이 말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단수가 높으냐? 세상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세상사람들의 입에서는 못할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세상목적으로 나가는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다.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떠나서 지나가면 아브라함은 받을 은혜를 못 받게 된다. 또한 생명적 후사의 축복도 없어지는 거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걸 값으로 따지겠느냐?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후사의 생명계대를 주시려고 찾아오셨는데 아브라함이 눈치도 없이 이 사자를 지나가게 했다면 어찌 되겠느냐? 생명계대가 없어지는 거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다. ‘하나님의 사자라. 천사라’ 할 때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참 종도 포함이 되는 말이다. 왜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는 거냐? 구원목적의 하나님의 영감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다. 천사다’ 할 때는 이런 게 같이 들어간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겸손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겸손한 믿음의 아브라함을 ‘나 몰라라’ 하고 지나칠 수 있겠느냐? ‘네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내가 찾아왔더니 참으로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되어야지 ‘믿음이 좋다고 해서 찾아왔더니 그러면 그렇지. 네 믿음이 어디 가겠느냐?’ 이렇게 된다면 뭐가 되겠느냐?
나에게 구원의 눈, 성령에 감화된 눈, 현실에서 이룰구원의 이치를 밝히 깨닫게 해 주는 종이 있다면 이 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인 줄로 알아라. 여기에는 성령님의 영감의 감화성도 있고, 내가 앞으로 나가야 할 신앙 믿음의 길도 밝히 깨닫게 해 준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어떤 상황이나 사건 가운데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내게 된다. 이런 게 계:의 일곱 교회에서 나온다. 비록 연약한 믿음이지만 옳은 정신이 들어있으면 깨달음을 받은 대로 그 믿음을 가지고 사건 환경을 이기는 거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런 게 참 귀중하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도와야 할지 안 도와야 할지 알아서 하시는 거지만 그러나 ‘작은 믿음’이라고 할 때는 성도가 사건 환경 가운데서 작은 믿음을 써 나갈 때 여기에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걸 크게 보시고 역사를 하신다는 거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