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에 대하여 *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 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 '나의 나무'가 있었다 *
한 때 내가 살던 아파트 뒷산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나의 나무'라고 정한 적이 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그날 따라 그 나무가 몹시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어찌된 일인지 허리가 몹시 구부러져 있었다. 밑둥치에서부터 굵은 가지가 두갈래로 뻗어 나왔는데 한 가지가 자칫 땅바닥에 닿을 듯 구부러진 채 위로 뻗어 있었다.
그 부근의 다른 나무들은 다들 몸매가 곧고 늠늠했으나 유난히 구부러진 그 나무만은 어딘가 내 인생과 닮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 나무를 나의 나무로 정하자. 내 인생도 이렇게 구부러져 있잖아." 그렇게 '나의 나무를 정한 후로 뒷산을 오르게 되면 꼭 그 나무가 있는데 까지 가서 구부러진 나무의 허리를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꼭 껴안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1년 쯤 지나자 어느 날 문득 나무와 내가 깊은 우정을 지닌 친구처럼 여겨졌다. 나무는 나를 껴안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적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거네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걱정은 너를 힘들고 아프게만 할 뿐이야." 어떤 때는 하루하루씩 하루 단위로 사는 것도 좋아. 하루를 일생처럼 여기고 살아봐."
"사람들은 다들 직선의 삶을 살려고 하지. 그렇지만 그런 삶은 없어,인생은 곡선으로 이루워지는 거야, 나처럼 이렇게 구부러진 인생을 사는 거야." 나는 가끔 '나의 나무'가 내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직선의 삶을 살지 말고 곡선의 삶을 살라"고 한 말은 나이가 들수록 내 삶에 지표가 되는 귀한 말씀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길 역시 곡선이었다. 물론 나는 늘 직선의 길을 원했지만 단 한 번도 그 길이 허락돤 적은 없었다. 직선의 길을 원하는것은 단숨에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실패의 과정 없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성공에 곧장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인생의 유혹인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지 않고 병고 없는 삶을 통해 내가 원하는 직장, 내가 원하는 결혼, 내가 원하는 집, 내가 원하는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니. 그러나 그런 직선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인생은 원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다들 그것을 알면서도 직선의 길을 원하는 것은 헛된 욕심과 허영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하낱 허상일 뿐이다. 인생의 길은 곡선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어떠한 길이든 길은 곡선을 통하여 완성된다. 비록 그 길이 고통과 절망과 부노와 상처의 길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곡선의 바탕을 이룬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나무든 아름답지 않은 나무가 없지만 직선의 나무보다 곡선의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곡선의 나무에 함박눈이 더 많이 내리고 새들이 더 자주 나라와 앉고 바람 소리 또한 더 맑고 부드럽다. 직선의 아름다움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나의 나무'가 더 겸손해 보이고 깊은 성찰의 자세를 지닌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나무'를 찾아가는 산길 또한 곡선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내가 걷는 산길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직선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북한산을 오를 때 구불구불 곡선의 등산로를 걸어가면서도 등산로가 정상을 행해 끊임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긴 것도 그런 맹목적인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정에 올라 멀리 산 아래로 나 있는 길을 보면 그 길은 곡선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어느 봄날, 느릿느릿 시골의 산길을 휘돌아가는 시외버스가 아름답다 못해 평화롭기 까지 한 까닭은 그 길이 곡선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나무다. 누구나 각자 한 그루의 나무다. 나는 어떤 형태의 나무일까. 당연히 구부러진 나무일 것이다. 푸른 하늘로 늠늠하게 쭉 뻗은 플라타나스 같은 나무가 아니라 외진 산길에 저 혼자 등을 잔뜩 굽히고 있는 선암사 와송 같은 나무일 것이다. 꼿꼿하게 잘 자라 솔가지 끝너머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만,
잔뜩 구부러져 허리를 숙이고 땅의 벌레와 낙엽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가던 적송들은 베어져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쓰이지만, 온몸이 땅에 닿을 듯 구부러져 있는 와송은 아무도 베어가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산을 지키며 바람과 산새들이 날아와 쉬는 쉼터가 된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