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에 지원하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한 명은 그야말로 혹독하게 가르친다. 잠도 6시간 이상 재우지 않고, 틈만 나면 수학공식을 외우게 하고 영어 단어를 얼마나 잘 암기했는지 체크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또 다른 교사는 열심히 시키기는 하는 데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공부하다 꾸벅꾸벅 졸면 그만 가서 자라고 다독이고, 성적이 떨어져도 정성껏 위로해준다.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 보기 힘든, 괜찮은 교사이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학습방법으로 배웠던 학생보다 혹독하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던 교사에게 공부한 학생이 서울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어느 교사를 원할 것인가? 험악한 인상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교사가 싫기는 해도 서울대에 들어갈 수 만 있다면 그 교사를 선택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올해 간절함을 싣고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기도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 말은 전심을 대해. 혹독하게, 몸부림치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 성령과 동행하는 영적 능력을 얻고 삶과 영혼에 풍성한 열매를 누리고는 싶지만, 기도가 생각만큼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중 가장 많은 이유가 그동안 기도의 훈련이 안 되어 있었던 탓이다. 사실 교회에서는 기도회는 적지 않게 열고 있지만, 정작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을 시키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러 가서 자신의 방식대로 기도하는 태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졌기 때문일 게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태도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기도이다. 기도를 시작하면 주여 주여를 외치며 열심히 기도하기는 한다. 그러나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몸부림치면서, 그야 말로 온몸에 용을 쓰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힘들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혹독하게 자신을 찾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여기신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그냥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성령이 내주하는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필자에게 보여주라. 그러면 받아들이겠다. 기도를 시작하면 방언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하는 방언기도는 성령에 몰입되어 나오는 방언과 다르다. 이는 입으로 익숙해서 습관화된 자신의 기도일 뿐이다. 이런 기도는 오래 해도 기도의 몰입도 안 되고 열매도 없다. 그냥 오랫동안 편하게 기도하는 방식으로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렇다. 왜 기도가 어렵냐면 기도의 습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하면 악한 영이 100% 기도를 방해하기위해 잡념을 넣어주거나 감정을 격동케 하여 기도를 못하게 하거나, 식구(특히, 남편이나 자녀)들과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특히, 직장 상사)을 부추겨 기도를 못하게 하고 일에 빠지게 하거나, 기도 못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 못하게 하는 등, 그들의 공격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다른 기도를 하면 몰라도, 성령을 전심으로 찾는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를 방해하는 온갖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다며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하나? 그야말로 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연한 각오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 필자에게 붙는 악령은 보통 놈들이 아니라 센 놈들이라, 필자도 기도를 시작하면 이놈들의 방해공작을 느낀다. 그래서 오랜 시간 훈련을 통과하여 늘 기도하고 있는 필자도 기도를 시작하면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온몸에 힘을 주며 입으로 숨을 지속적으로 내뱉으면서 ‘쉿’소리를 연발한다. 그리고 기도를 마칠 때까지 몸은 사시나무처럼 전율한다. 말하자면 기도가 싸움과 진배없다. 필자의 첫 제자가 아내이다. 예전에 아내가 기도를 시작할 무렵, 오랫동안 필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신도 이 기도를 결심하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전심으로 기도하고 몸에 힘을 주고 팔을 올리며 기도하였든지 일주일이 채 되기 전에 몸살을 앓아 한동안 고생했다. 물론 아내도 오래지 않아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늘 필자 옆에서 기도를 강을 건너가고 있다. 가장 어려운 기도는 응답이 없고 성령이 내려오지 않은 기도이다. 하루에 몇 시간동안, 수십 년간 기도해도 성령과 상관없는 기도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기도이다. 그 반면에 가장 쉬운 기도가 성령에 몰입되어 평안과 기쁨이 내려오고 깊게 쫙 빨려 들어가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는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면 시원한 바람을 맞아가며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쁨이 있다. 이 기도도 그렇다. 처음에는 힘들고 고단해도 기도의 강을 건너가기 시작하면 기도시간이 기쁘고 즐겁다. 필자가 기도에 중독된다고 표현하는 이유이다. 기도의 기쁨을 맛 보고나면 이 기쁨을 평생 잊지 못해 기도를 끊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매일처럼 기도의 강을 쉼 없이 건너가는 이유이다.
기도는 전쟁이다. 자신과의 싸움이고 악한 영과의 전쟁이다. 전쟁은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절박한 상황이다. 인정사정 봐줄 수도 없고 악에 바쳐 싸워야 한다. 이 기도가 바로 그렇다. 그동안 당신이 기도한 방식은 열심히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 기도의 응답과 능력은 당신이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 기준은 혹독하게 자신을 찾는지 보고 계신다. 기도의 강가로 가려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몸부림 쳐가며, 악에 바쳐서 기도해야 한다. 야곱이 압복강가에서 했던 기도를 떠올려보라. 당신도 그런 기도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성령님을 만날 꿈도 꾸지말기 바란다. 필자가 처음 그런 기도 방식으로 기도의 강을 건너고 나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그들도 기도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필자의 영성학교 식구들이라면 모두 필자의 지도 방식에 따라야 한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성령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아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당신의 무지함과 게으른 탓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출처] 기도는 피터지게 싸우는 전쟁이다|작성자 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