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02
12월12일[대림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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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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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xBt-ZByGoU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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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하느님 나라의 계산법과 인간 세상의 계산법>
휴가 나온 선교사들 뵐 때마다, 큰 존경심과 동시에 큰 부끄러움을 감출수 없습니다. 저도 한때 그런 꿈을 자주 꾸곤 했었는데, 그래서 선교 청원서를 여러분 쓰기도 했었는데, 용기와 결단력 부족으로, 시도조차 못 해본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치료차 나오신 수녀님께 제가 그랬습니다. “그만큼 계셨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연세도 있으시니, 한국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죠.” 수녀님께서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힘없이 쫄쫄 흘러나오는 선교지 수도꼭지만 보다가, 콸콸 흘러나오는 한국의 수도를 보니, 죄책감이 드신답니다. 식탁 위에 놓인 빵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드신답니다. 선교지에서는 뭐든 순식간에 먹어치우니 남아있는 것이 없답니다.
현지에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불리는 한 살레시오 선교 사제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는 제가 정말이지 부끄러웠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사제는 언제나 장난꾸러기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신답니다.
신부님이 너무 좋은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신부님과 가까이 있으려고 무한 경쟁을 벌인답니다. 어깨에 매달리고, 무릎 위로 올라가고, 팔을 잡아당기고,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신부님은 항상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신답니다.
연륜이 지긋한 노 수도자로서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만한데, 조금도 그런 생각이 없으시답니다. 영성과 인품을 동시에 갖춘 신부님이시기, 여기저기서 초대를 하지만, 한사코 거절하신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돌보고 있는 길잃은 어린 양들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노사제의 삶입니다. 그 연세에 그 생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쌍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보실 때,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과 인간 세상의 계산법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세상의 논리나 이치, 세상의 계산법으로 교회나 수도회를 운영하게 된다면, 그 끝은 참담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이 땅 위에 과연 어떤 존재가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인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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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태안 내리 살레시오 피정 센터 연간 계획>
1. 2박3일 영성 피정, 1인당 15만원(동하절기 17만원)
3/1-3, 3/15-17, 3/29-31, 5/3-5, 5/10-12, 5/24-26, 6/7-9, 6/21-23, 6/28-30, 7/5-7, 8/30—9/1, 11/1-3, 11/8-10, 11/22-24, 12/6-8, 12/13-15, 12/23-25, 12/31-1/1
2. 청년 힐링 피정(7/12-14), 다문화가족캠프(7/16-18), 사별 가족 힐링 피정(8/23-25), 1인당 3만원
3. 양승국 신부와 함께 하는 7박 8일 영성 대피정, 1인당 65만원
1차: 9/20~27, 2차: 10/6-13,
*매일 미사, 강의, 성체강복, 영성 상담, 고백성사, 해안길 트래킹
4. 살레시오 수도자들과 함께 하는 기쁨과 감동의 해외성지순례
1차: 9/20~30, 프랑스 성모 성지
2차: 10/6~16,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 터키
문의 및 접수: (041) 675-7211, ystefano@hanmail.net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pi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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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2)마술사가 되는 비결>
한국청소년상담실에서 한 일간지에 제공하는 작은 글귀를 보고 눈이 다 번쩍 뜨였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자기가 맡은 반을 시험이든, 체육대회든 늘 1등에 올려놓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매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날,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사 생활 이십 년에 너희처럼 우수한 아이들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어제는 너희들 만날 생각에 잠도 못 잤다. 우리 올 한해 잘 해보자."
마술사가 되는 첫걸음,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온다고 자기부터 믿는 것입니다.(중앙일보, 2003년 12월 4일자 참조)
위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부끄럽더군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 같은 가능성,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눈여겨보기보다는 부족한 측면, 덜떨어진 측면만을 바라보면서 때로 무시하고 지레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음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길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간 받아온 상처가 너무도 크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와 냉대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사회를 향한 적개심도 대단하지요.
아이들 마음 구석에서는 어른들을 향한 분노로 이글거립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다가갈 때는 더 세심한 관심, 민감함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지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서 하고, 가능하면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칭찬의 말로 다가서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소위 문제청소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저지르는 문제행동은 "제발 나한테도 관심 가져줘"라는 강한 외침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삐딱하게 나가는 것은 "날 좀 더 사랑해주세요! 나한테도 눈길을 좀 주세요"라는 부르짖음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비행청소년들도 고분고분한 청소년, 제 갈 길을 잘 가는 범생이 청소년들 못지않게 소중한 청소년, 특히 예수님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셨다면 가장 먼저 찾아 나설 한 마리 길 잃은 어린양이란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 땅의 많은 착한 목자들이 건강하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양들 백 마리보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양, 병들고 말라서 돈 안 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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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u3Jt39nB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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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잊혀진 작은 성체 조각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이처럼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는지의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성당에도 많은 어르신이 교통수단이 없어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서 모셔 오지 못하는 것이 저에게는 마음의 큰 부담이 됩니다. 지금도 그 방법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들을 직접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저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조르지오 마짠티는 본당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태리는 한 번 본당을 맡으면 굉장히 오래 있기에 신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압니다. 따라서 누가 미사에 안 나오면 그분은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지붕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도 지붕 위로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내가 사랑하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의 얼굴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들 한 사람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밥상을 엎으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는 선물에 감사해야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그분의 살과 피로 주시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어떤 신부님이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구둣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바로 그 땅에 떨어진 성혈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강사가 요즘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어서 강의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버지에게 매일 가정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완벽히 감사하지 못할 때 자녀에게 그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아주 작은 것까지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모든 조각도 다 감사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한 조각, 떨어지는 가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작은 영혼들이 그분의 성체의 한 조각임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주는 선물인 성체와 성혈의 조각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주인의 마음에 무감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저는 백포도주보다 붉은 포도주를 미사에 사용합니다. 한 방울도 씻겨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청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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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서울에 갔을 때,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도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LA 신문 홍보 갔을 때는 교우 분 댁에서 ‘미생’이라는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넷플렉스에서 드라마로 본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감동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미생이라는 말은 바둑용어인데 아직 완전하게 두 집이 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수도 있고, 완전하게 두 집을 내고 살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인에게 지금의 삶은 어쩌면 ‘미생(未生)’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간다면 부활의 삶, 완생(完生)이 되는 것입니다. 미생에서 완생이 되려면 최소한 두 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은총이 없는 삶의 내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의 내용이 없는 은총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있다고 모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아 꽃을 피우려는 뿌리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꽃이 피는 것입니다.
바둑은 판 위에 돌을 놓는 것입니다. 판 위에 돌을 놓을 때는 ‘의도(意圖)’가 있어야 합니다. 실리를 챙기려는 의도,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 상대의 돌을 공격하려는 의도, 나의 돌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돌을 ‘사석(死石)’이라고 합니다. 가치가 없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놓은 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의중(意中)’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돌을 놓은 의중을 알면 알맞게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와 의중이 잘 어울리면 멋진 한판의 바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LA에 온 의도는 신문홍보를 위해서입니다. 저의 의중을 잘 알았던 본당 신부님은 제가 신문홍보를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봉사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신문홍보를 해주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구독과 신청은 사랑입니다.’라며 교우들에게 구독을 권면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저는 구독신청과 후원을 받았습니다. 의도와 의중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인’들입니다. 국민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인은 국민들 지지를 받아 성공할 것입니다. 국민의 의중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정치인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처럼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미주 지역에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는 1,500명가량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으로 미주 지역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가 15,000명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주일미사의 참례 수는 10% 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적어도 50%는 될 수 있도록 본당 공동체가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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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아담은 죄를 지어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신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회로부터 냉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셨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차별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처지를 생각 못 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회개한 다음에는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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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여러분은 이 비유에 동의하십니까? 백 마리 양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를 과연 칭찬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무책임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산에 방치될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안전을 위하여 한 마리쯤은 그냥 포기하여 버리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아흔아홉의 무리에 속한다는 안도감으로 내리는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무리에서 벗어난 한 마리 양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양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할 것입니다. 목자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시선은 아흔아홉의 무리가 아니라, 혼자 외로이 길을 헤매고 있을 한 마리 양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새끼 때부터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기르신 당신의 양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걱정에 잠 못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양을 찾아다니셔야 합니다. 여기서 남겨질 아흔아홉 마리의 안위를 논하는 것은 비유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의 몫일뿐더러, 그분께서 그 한 마리를 찾겠다고 나머지를 위태롭게 방치하실 리도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아닌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갑시다. 그분께서 관심 있게 바라보시는 그곳을 함께 바라보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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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을 때의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흔아홉’이라는 숫자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 상황을 반영한다면, ‘잃은 양’과 ‘잃지 않은 양’의 비율을 ‘1대 99’가 아니라, ‘99대 1’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는 성모님 한 분을 제외하고, 인류 전체가, 즉 ‘모든 사람’이 ‘잃은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찾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의’ 목자이신 분이, ‘나에게’ 오신 날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가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양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류 전체의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슬픔만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기쁨인가? 슬픔인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좋은 말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잃은 양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좋은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닙니다. <위선자들이 그런 말을 잘합니다.> ‘내가 먼저’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권고할 때에도,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이 바로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셨을 때,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바로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바로 ‘잃은 양’이구나.”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이라는 말을 14절의 말씀에 적용하면, 14절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1-14ㄴ)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둘 다 ‘잃은 양’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잃은 양’이고, 바리사이는, 자기는 절대로 ‘잃은 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잃은 양’입니다. 만일에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를 해설한다면, 어떻게 해설할까? “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도 잘 바친다는 말은 사실일 텐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1)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그의 말은, 즉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일까?
겉으로만 보면 사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그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는 마음과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교만’과 ‘위선’ 때문에 그는 ‘잃은 양’인데,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되찾은 양’이 되기는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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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성탄...>
우리는 지금 대림절이라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셨음을 기억하고 다시 오겠다고 하신 약속인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교회는 성탄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 오심에 대한 깔끔한 준비하게 하고 예수님 오시는 길을 잘 마련하도록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불과 장식으로 성탄을 꾸밉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날로 그날을 여기는 세상의 떠들썩함과 더불어 우리의 성탄도 그렇게 점점 다가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 곧 첫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려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연히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주님은 당연히라는 표현을 쓰시지만 우리에겐 길 잃은 괘씸한 한 마리 양보다 아직 내 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이 더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는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깝지만 그 정신 없는 짐승 하나 따위에 내 모든 재산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약한 것처럼 들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한마리를 다른 방법으로 빨리 채우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일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실 날에 대한 기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심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대게 그 심판에 대해 우리는 공정하시고 엄하신 하느님만을 기립니다. 그래서 더 고해성사를 강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예수님은 오신 이유가 당신 우리 안에 있는 대다수의 양이 아닌 길을 잃은 한 마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당연한 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같이 그 정신 없는 양 한 마리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에게 양은 우리의 소유물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없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께 그 양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유물인 그 양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중 우리가 실망하고 단죄하고 나쁘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사람 하나 때문에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 하신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그 길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있는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분을 알던 이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목자의 모습은 당연한 우리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 그 날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주님의 첫성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고자 찾아오신 하느님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주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가, 곧 그만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가임을 나타내줍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과 무서운 심판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랑으로 준비하는 성탄은 주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겠지만 심판만을 생각하는 이는 심판 앞에서 하느님과 한없이 멀리 떨어지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을 떠난 목자, 그 목자가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성탄을 준비합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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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님]
<다수와 소수>
다수결의 원칙은 다수의 집합체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때 다수의 의견에 따라 행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근대 영국의 철학자 벤담이 정리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근간으로 확고히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대표적 원칙인 다수결의 원칙은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다 보니 항상 소수는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이 두 개인 물고기가 정상인데 눈이 하나밖에 없는 물고기들 속에 있으면 그 물고기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정상인데 모두가 경쟁을 바란다면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유다 지방에서는 양을 목초 지대에 방목하기 때문에 양이 길을 잃는 경우가 가끔씩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경우 다수의 양을 보호하기 위해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한 마리 양에 대한 포기를 반대하시는 것은 이런 선택이 결국 경쟁과 의심,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 ‘남들도 다 하는데.’라는 말로 위안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죄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이 옳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을 요구하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희생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어쩌면 주님은 소외되고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소수가 되어버린 듯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수가 세상을 편들더라도 주님이 옳습니다.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내가 그 한 마리의 양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이 내 의견을 따르지 않고 내 판단을 비난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오시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랬을 때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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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태형 베드로 신부님]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나서는>
오늘 복음은 한 마리의 길잃은 어린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 목자의 모습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입니다.
인간이 모두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하느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벌주고 벌하시는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길 잃은 어린양 하나까지 찾아 나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유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인간들에 관한 관심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희망을 가져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 길잃은 어린양에 관한 관심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큰복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진정한 회개의 삶이 필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굳게 믿을 필요성을 가집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한 짓이 이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죄의 종교가 아니라 사랑의 종교입니다. 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로써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죄에서 벗어나려면 적극적이고 완전하게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각자는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근본정신은 그 잘못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지만 진정한 뉘우침이 됩니다. 통회는 다만 죄를 짓지 않겠다는 죄 생활의 정지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회개이전의 죄상태를 뉘우치고 그 죄상태를 다시는 계속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회개는 단순히 순간적인 마음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새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은 물론 죄의 생활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과거에 나빴던 죄의 상태가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미움이 없는 한 참 생활에 대한 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시기이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길을 잃고 헤메는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찾아 나서는 자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평소에 버리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길잃은 어린양을 찾고 계시는 참 목자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회개의 삶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두 이러한 회개의 삶을 바탕으로 이 대림시기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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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18,14)
예전 제가 사목했던 제주 표선은 한때 ‘한국의 라스베가스’로 알려질 만큼 적은 주민 수에 비례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티켓다방이 성행했었습니다. 그런데 통영의 어느 티켓다방에 일하면서 성매매를 하던 한 여성이 성매매 함정수사 단속에 적발되자, 6층에서 투신한 사건이 몇 년 전 있었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여성이 죽고 난 뒤 알려진 그녀의 기구한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17세에 딸을 낳아 미혼모가 되었고, 타향인 통영에 와서 티켓다방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수입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벌어 딸을 키우고 있었는데, 공사장에서 일하다 아버지마저 다치셔서 생활비로 얼마씩을 보내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늦은 밤 모텔로 찾아온 A씨에게 화대를 받고, 그녀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밖에 대기 중이던 다른 단속반원들에게 연락했고 경찰이 들이닥치자, 투신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는 명백히 함정수사로 말미암은 사고였습니다. 그녀는 17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렵게 살아왔을 것이고, 먹고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면서 살아왔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토록 모질게 살아온 그 여성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요8,1~11참조)
오늘 복음에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18,12)라고 저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위 통영의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되자 투신한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분명 길 잃은 양 한 마리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비유의 이야기를 듣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을 수긍할 수 있지만, 후자 곧 ‘투신한 여성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시나요?
먼저 저는 오늘 복음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점에서 ‘한 사람’도 제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습니다. 결국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어떤 사람은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길을 잃었을 때 찾아 나서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때일지 모르지만 ‘아흔아홉 마리’ 가운데 어느 양도 예외 없이 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점은 아흔아홉과 한 마리 양의 숫자에 있지 않고 반복해서 나오는 ‘길을 잃으면’에 무게를,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다만 그렇게 숫자를 구분하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예수님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기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상대적으로 짧은 복음인데도 무려 4번이나 반복해서 ‘길을 잃음’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18,12),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18,13),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 이렇게 반복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숫자보다는 ‘길 잃은 양 곧 길 잃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 복음보다 이전의 문맥에서 역시 반복해서 사용한 단어, 곧 ‘이 작은 이들’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마태오 복음 18장의 시작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8,1)라는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18,4~5)라고 답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18,6) 그리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8,10)라고 하신 말씀 안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신 ‘이 작은 이들은’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훗날 제자들의 복음 선포로 당신을 믿는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는 당시엔 소수의 ‘작은 자들’이었으며 다른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자들 안에 때론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도 사실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길을 잃은 양이 왜, 어떻게 길을 잃었는지를 언급하지 않고, 그 길 잃은 이유가 어떠하든 그것에 상관없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는 말씀에 예수님의 깊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느끼셨으리라 봅니다.
어느 부모에게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표현처럼, 아빠 하느님에게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감사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의 형제자매를 곧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길 잃지 않은 양들이야 서로 비비고 의지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풀을 뜯겠지만, 대열에서 떨어진 양은 그 시간에 혼자 힘들고 어려울 것이기에 찾아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단죄나 판단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필요한 자녀이기에 그 길을 잃은 영혼을 찾았을 때 하느님은 그 한 사람으로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처럼 아버지께 원망하고 투정 부르기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더욱 성탄을 준비하는 이 대림 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이 바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런 마음에서 통영의 투신자살한 여성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없어지게 하려면, 우리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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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계속 반복되면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화를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직장 동료 중에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품고 힘들게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고, 사랑을 실천하자고 매일 마음 먹으면서도 점점 미워하는 자기 모습에 우울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그 자체에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변화된 나와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양 백 마리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이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즉, 그 수는 늘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무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이것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내가 변하고, 네가 변하고, 우리가 모두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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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마태오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18,14)
하나가 있어
하나입니다
하나가 있어
둘입니다
하나가 있어
열입니다
하나가 있어
백입니다
하나가 있어
만입니다
하나가 있어
모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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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 아픈 사람을 만나서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다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 아픈 사람이든 그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더더욱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見利忘義’(견리망의)랍니다. “이익에 취해 의로움을 잊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각자의 이익을 더 생각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정당화되는 현실입니다. 분양사기,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등 신뢰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 졌습니다. 이득을 생각하면 한 마리 양이야 버려지면 어떻습니까? 아흔아홉이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졸이고 속을 태웁니까.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의로움은 언제나 지켜져야 합니다.
골치 아픈 사람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의 관심이 요구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는 옛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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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잃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
-늘 깨어 실천적 회개로 하느님께 화답(和答)하는 삶-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복음 환호송)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는 잘못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면 주님의 용서요 치유요 구원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대죄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여 스스로 “잃은 양”이 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합니다.
아마 거의 20년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매월 두 딸 가정과 한 아들 가정, 그리고 부부가정을 위해 매달 꼭꼭 미사를 봉헌하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다 미혼의 자녀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결혼하여 손주들도 많습니다. 그중 “남궁우주”, 한 손녀의 이름을 잊지 못합니다. “우주”같이 크고 귀하다하여 “우주”라 작명한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하나하나가 우주보(宇宙寶)요 세상이듯 하느님께도 우리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오늘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물으면서 비유를 시작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백 마리 양 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잃은 양 하나를 집요히, 끝까지, 마지막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피력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 중에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잃은 사람, 하나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요, 작은 이들 누구 하나라도 잃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라는 말마디는 오늘 복음 앞에도 분명히 언급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심판” 일화에서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40)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관심사이자 기쁨은 “잃은 한 사람”에게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 주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임은 물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비유에서는 99마리 양중 길 잃는 양은 하나인데, 실제 오늘의 인간 현실을 보면 100중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잃은 양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길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이 길을, 희망을, 빛을, 자기를 잃고 방황합니다. 심각한 것은 아예 잃은 양 같은 자기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존재 망각의 비극보다 큰 비극도 없습니다. 아예 주님을 찾지도 않고 자포자기 절망으로 주님 찾기를 포기하고 지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물음은 우리 하나하나의 독자를 향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길잃은 존재입니까? 또는 주님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부단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과 더불어 더욱 열렬히, 항구히, 한결같이 희망이자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찾아 오시는 주님께만 맡기는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 우리 역시 주님께 화답하여 주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잃은 양같은 우리를 찾아오셔도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대림시기의 주제는 온통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께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꿈을, 빛이자 길을 잃을 때 병든 사람, 병든 공동체, 병든 사회, 병든 나라는 필연입니다. 대림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고자, 빛이자 길이 되시고자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대림시기야말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잃은 양들 같이 희망과 꿈, 빛과 길을 잃은 무기력한 무감각한, 무의욕적 삶이었다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심기일전,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는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마음 활짝 열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도 강조했다시피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 안에 희망과 꿈을 팍팍 심어주시고 친히 빛과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사야서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집중케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모두가 사라져가는 덧없는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의 닻을 내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빛과 생명이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사야서 말씀이 삶의 광야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께 적극적으로 화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적극적 행동으로, 삶으로 회개의 실천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과 함께 내 삶의 광야 안팎을 부단히 갈고 닦고 가꾸고 돌보아 평정케 하여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겸손한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오신다.”
우리 모두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어 주님 오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착한목자 주님을 영접하는 대림시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참 많이 나눴던 “하늘을 담자”라는 제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바로 고요한 호수가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늘이신 주님을 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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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도 길 잃은 양>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도 역시 대림 시기에 왜 이 복음을 읽는지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을 대림 시기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거지요.
제 생각에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에서 읽는 거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독서로 다음의 이사야서를 읽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에서는 한 마리 양이 <잃은 양>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작은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차이가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왜냐면 <잃은 양>은 목자가 잃은 것이고, <길 잃은 양>은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길을 이탈한 것이니까요.
아무튼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실수로 또는 일부러 목자를 따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길 잃은 양입니까, 아닙니까? 길을 잃곤 한다면 어째서 길을 잃습니까? 실수로 길을 잃습니까, 일부러 길을 이탈합니까?
우리 신자들의 경우 점쟁이한테 가는 신자가 적지 않습니다. 점쟁이한테 가지는 않아도 유혹을 느끼는 분은 더 많겠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길을 잃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의 가르침 따르지 않고 정치가의 선동에 따라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얘기해주면 그분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제시하는 교회를 오히려 정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돈이나 권력을 쫓는 분들도 있는데 이분들도 길 잃은 양들이지요. 이런 분들은 돈이나 권력을 쫓다가 주님의 길을 잃는 것은 물론 요즘 잘 볼 수 있듯이 패가망신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지금 저의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는 제가 앞에서 열거한 그런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꽤 있을 겁니다.
집안에 시련이나 우환과 같은 큰일이 닥치면 하느님께서 계시는 건지, 나와 함께 계시기는 하는 건지, 나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나의 말을 듣고 계시기는 하는 건지, 이런 의심을 하게 되고 우리는 신앙적인 방황을 하게 되지요. 현세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믿음이 굳건치 못한 분들은 결국 하느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의의 길을 가지 않고 사랑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도 사실은 길 잃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아닌 사람이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이었거나 현재 <길 잃은 한 마리 양>이거나 미래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일 것입니다.
그러니 목자인 주님께서는 한 마리가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고 아흔아홉을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김 양을, 다음은 정 양을, 그다음은 박 양을 찾아 나서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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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역지사지>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어떤 사람이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면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경제논리와 합리주의라는 세상 가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되찾은 양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메시지가,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 존재가 바로 '나'라고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로 들려옵니다.
세월호 가족들!
10.29 이태원 참사 가족들!
12.12. 군사 구테타 세력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
....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처지를 바꾸어 그들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나의 많은 것들이 바뀔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바뀔 것 같습니다. 나의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소중하지 않고, 잃은 양 한 마리만 소중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다 소중하지만, 지금 누군가의 간절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약한 이웃들이 지금 더 소중하고, 그들에게 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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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X3EjJT0q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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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4)
잃어버림도
떠나버림도
주님께
나눌 수 있는
나눔의
행복이 됩니다.
길 잃은
양 한마리를
되찾는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며
기쁨으로 우리를
다시 살게하십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봅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길을 잃었기에
만나게되는 새로운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해
내딛는
한 걸음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렇듯
신앙은 익숙한
방식이 아닌
때로는 낯선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익숙함에 많이
갇혀있습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우리의 신앙이
깨어나는
유일한 길은
주님과 함께
기쁨을 되찾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을 되찾는
것은 새롭게
보는 감사에
있습니다.
새롭게 보는
은총의
대림시기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마음을
돌이켜 보는
시간입니다.
소중한
만남처럼
기쁘고 행복한
만남은 없습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걸음을 멈추고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이 아닌
작지만
믿는 것을
실행으로
만드는 순간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삶의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기쁨의 길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내면의 기쁨을
나누는
오늘입니다.
감사의 길을
만나는
아버지의 뜻인
감사와 기쁨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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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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