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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佛]씨 이야기 흉내
저- 단풍이 먼저 물들음은 뒷물들어옴을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임이니 그것이 억지로 먼저 물듦이 아니라 절로 自性에 의해(宇宙燮理 본연에 行相) 그러하거늘 잘난체(증상만)한다고만 할 것인가? 위한다는 것은 布施의 관점이니 그 잘난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後達者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면 일부러 위해서 하는거와 같음이니 自然의 이치와 같은 것을 탓할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머리에서 일어나길 정신이 껍질이고 마음 또한 껍질이고 일체지칭 생각상이 모두 껍질이라한다。
이와 같이 증상만이라도 위해서라면 보살의 개념이다.그냥 이대로의 行相이 그렇다는 것이다. 문맥이 잘이어지지 않지만 양상에 의지치 않고 生心하면 치우치지 않아 구분없는 마음은 物事의 판단을 가늠하는 가늠자가 된다는 것이다。보살은 마땅히 제양상을 지어 그에 들어가 있어도 마땅히 이와 같은 입장이 되어있다는 것이다。바르거나 그르거나 하는 것은 판단하여 구분짓는 것이니 그 以前의 구분없는 구분지어지는 客相이 될 것이 아니라) 가늠자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사람이 이해타산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아 마음을 비우면 이런 뜻 깨닫게 하기위하여 이해타산속에 든다한다면 그 또한 말이 된다 할 것이다。) 관점이 가운데가 잡힌다는 것이다。그 가운데라는 생각도 짓지 말라는 것이다.그러나 以上의 말씀이 모다 치우친 견해이니 왜냐? 그 顚倒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즉 그 전도의 양상에 들어 깨뜨림을 얻음이 진정한 깨뜨림이라서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어 그냥 그 되어 돌아가는 現상태로의 해탈
行相이요、중생상이요、번뇌 그것이 또한 어떻다 특정지울 수 없는 無相 깨뜨림 相이라는 것이다.저ᆢ벗었다하는 것은 그 벗는 맛을 다시는 맛보지 못하고 塵汚의 늪속에 뿌리박은 蓮根은 계속 꽃피우는 맛을 볼 것이니 이것이 윤겁의 고통 고해가 아니요 허실상의 유무를 따질 것 없이 복락이 극한 경계인 것이다. 무애보살이 이와 같아 지옥처럼 여기던 것이 극락境化 된다는 것이다.
구분짓는 모양이 무너지면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니 담는 그릇은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것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本性 各 個性이 本性을 뿌리로 하듯 그것은 따로 없다는 것이다。곧 구분지어진 모양속에 있다는 것이니 그것이 그것인 것을 性相의 구분을 갖고 방편을 들었으니 성상 구분이 무너지면 그릇이라는 것이다.
四、
布施란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은덕을 베푸는게 아니라、원래 있었던 자리에 잘 꾸며서 도로 갖다놓는 것이라는 것이다。이쪽으로 勢를 당기듯 당겨와 짐을 실었던 원인은 그 利潤을 불리듯이 살찌우기 위함인 것이었으니 본래 제 위치를 찾아주는게 당연한 道理아닌가? 본래 제위치에서 가져왔던 것은 그 허
했던 자리를 메꾸고 넘치게 하여 풍요로운 맛을 보이기 위해서였으니 흡사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은 가꾸어 가을에 큰 수확을 걷우기 위함이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랄게 없다는 것이며 필요에 의해 잠깐 당겨왔던 것을 번성번화하게 꾸며서 그 원위치로 돌리는 모습이 그렇게 베푸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어서 생색낼게 하나도 없고 받을 위치에 있다고 하등에 부담이나 꺼려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왜냐? 그것이 원래 여기 있었던 것임으로서 라는 것이다. 저와 이의 균형이 잡힌 것을 (참은 없지만 참의 뜻을 따서=참이라 하면 무너뜨리는 칼이 나온다 지어진 것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참이 없다는 것이다.) 참위함, 참염원 상의 해탈파라 하는 것이다.이것이 또한 이러함만이 해탈만이 아니라서 해탈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어서 편견이라는 것이니 그는 곧 다른견해 이념이나 立場 思想 物質事相도 있어서 편견이라는 것이다。편 지견에 머물지 않으면 斜側되지 않아 제 양상의 해탈을 일으킬 수 없음이니 흡사 실패의 실끝에 추를 달고 풀어돌리면 도는 테가 또아리쳐 점점 커져나가듯 그 錘와 그 돌리는 방식이 편견이라는 것이니 편견이 또한 해탈할 수 있는 根基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고뇌는 파괴되지 아니하니 편견이 아니고 무슨 바른 지견이 있단말인가? 바른 지견이라는 것이 一片의 偏知見이니 그 中心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축은 무위유동이라 그 주위幻相따라 移動케 되는 것이니 對相的適應無固停이라는 것임) 中으로 나타났다하나 中이 아니라 그中의 방편껍질상이니 역시 外部相이지 속性은 쥘 수 없는 것이라 보지못한다 할 것이다.(이것이 또 편견이니 그 외부상이 속성의 발로가 아닌가? 나는 일편으로 또 생각한다。) 속性이 곧 器이니 어떤 한 가지의 形容을 짓지 않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多양상으로 표현된다 할 것이다。((당연히 줘야할 것이고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는 것이니 그것이 爲(人爲的 또는 위한다는 보살行的하는 爲)的으로 하는 것같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되게 되있는 것)이어서 설사 꼭붙들고 있을려고 하더라도 숙명이 도둑질해가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니 이런 뜻을 득달치 못한 자는 빼앗기듯이해 마음만 상할 것이고 득달한 자는 당한다는 감 以前에 베푼다는 善 성취의 감으로 내어놓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이 강도의 좋은 말로 구슬리는 협박공갈과 같음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렇더라도 줄 때는 줄 값이라도 잘 간수하고 있다가 줄 곳에 주어야지 즉 그런 마음자세를 가져야지만 방만한 허실이 없다 할 것이다。어렵게 얻은 것을 낭비하는 것은 베풂이 아니라 등수타락 퇴색 가치 상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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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이면 너 뜻에 反하는 것도 네가 實行受容해야지 空이라는 것이다。네 뜻을 추종하는 것은 어느一方的으로 行하는 것이지 그쪽에서 이쪽으로 反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흡사 來往을 가르킴일 수도 있는 (=)複號와 같다 할 것이니 나란히 가는 것 오는 것만 아니라 오고 가는 것도 나란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같게 이뤄줘서 나란히라는 것이니 無空이라도 有空의 모양現象態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그것은 正理아니라 하는 것에도 너를 빠지게하여 空이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가를 공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正理아니라 하는 것도 염원성취에 덕을 주면 참보살이요 法身인 것이다。무애공에는 正邪란 치우친 견해양상이 없기때문이다。無碍空이란? 一切벌어진 樣象이니 저것이 有碍하여 원풀기 위해 있다기보단 無碍하여 원풀어있다는 것 이렇게 재는 것 또한 편견 양상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관찰하여 그 어느 관점에 머물지 않고 관찰의 尺度를 자유자재롭게 함을 가르킴인 것이다。尺度를 자유롭게 하면 드고남에 꺼림이 없는 것이다。생각해봐라! 장애가 있다면 저 집이 저렇게 지어져 있을 것이며 저 꽃이 제 모습을 보이며 저수레가 제노릇을 하며 저 물이 유유히 흐르겠는가? 諸 行相이 本然의 無爲로 있음이니 無爲
로 있고 난 다음에 諸行態가 爲的이라는 것이니(爲的인 것도 있다는 것이니) 어느 一方으로 行함이 有애하기도 하고 무애하기도 한 것이 있음이니 만약 爲的이라는 것이 어느 일방을 막아 제키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것이 장애인 것이니 불구자는 충실하다하는 제양상이 있고 난 다음 여러 여건에 의해서 생겨났음인 것이다. 이제 생각이 그 모순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이다.
◎ 큰 힘이 좌지우지함도 위하여 하는 것이니 억눌림을 당함이 아니라 보살이 다듬어주는 성취의 개념을 갖으라는 것이다.피해의식을 버리고 나를 해탈케 해줄 것이라는 가다듬는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힘이 센자가 어려움을 당하여 허덕이는 자에게 각중에 붕ᆢ 띄워주듯 힘을 실어주면 어려움이 해결될 건 기정사실 아닌가? 그런걸 사시눈으로만 볼게 아니라는 것이다。네이놈 도와줘도 그 공을 모르고 제 주제파악도 못하고 꼴같지않게 굴터이니 어디 한번 골탕먹어봐라 해도 별 수 없는 것이다.
◎ 所謂 佛三寶란 뜻인가? 저쪽과 이쪽 연결짓는 중간을 분간지어 말하는 것인데 저쪽이 주는 입장이라면 연결짓는 중간은 줄 꺼리(件=與할 物事나 學習敎材 등 받을 대상에 兩比、多比、等外에 또 餘他한 것이더라도 성격형성 物事格形成 등 諸形成에 영향을 미칠만한 것)이요 이쪽은 받는 對相의 立場이라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과 나타난 文章과 말씀과 文字와 그림조각 등 일체의 모양과 行事物 등 깨닫게 하는 敎材기以法身이고 그러한 모양을 지어 가르치는 立場에 선 것을 갖다 化身이라하고 가르침을 받을 입장 즉 諸모양을 관찰해서 어떻게 씻고 닦고 꾸미던가할 立場에 선 것(받을 主體)을 報身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一身인 것을 분간지어 말한 것이니(설령 내왕이 있어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 하더라도 ※ 상대자가 많아도 서로 임엔 변함없다。내왕 니콜 一身空이라는 것이다) 곧 각자 自我일 수도 있고 餘他일 수도 있는 것이다。이를테면 여기는 과수원이다 사과나무가 있다 이것은 化身이란 것이다。自他의 身이요 自他의 받는 입장일 것인(입장일 수도 있는 그 사과나무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이것은 法身이란 것이다. 그 사과나무를 잘 손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야지만 오래도록 사과를 얻을 수 있어 우리 또는 우리의 후예에게 혜택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은 報身이란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뜻이 세 몸으로 分身되어 각개 양상을 띄는 것이 아니고 사과나무란 하나의 身 主題속에 모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個人이나 각 物事에 있어서도 스스로 주는 입장이 되기도 하고 가르칠 敎材의 立場이 되기도 하고 받을 對相(다듬고 가꿀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각개마다 佛이요 覺醒시켜 成就시키는 해탈法이요 염원 衆生相이라는 것이다。사람이라 하면 사람이 지키고 하여야 할 도리나 덕목이 있고 그 도리나 덕목따라 순응실천하는 것이 사람된 所以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三寶一身이라 하는 것인 것이다。三寶一身에 法身을 중심으로 삼아 時空으로 한량없이 있는 것이 제양상이니 性 生覺 그림 조각 여러 有動體 및 삼라만물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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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껍질양상이니 좋다고 기뻐할게 하나도 없고 나쁘다고 슬퍼할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거기서 移動해야 할 時運껍질이라면 통사정한다고 될 것이며 거기서 오래도록 扶支할 時運껍질이라면 몰아낸
다해서 가게 될 것인가? 이 말이다.諸相 心相의 강팍하게 함과 유연하게 함에 의해 諸行事相이 달렸으
니 이런 心相을 갖게 됨이 제(自)가 爲的(人爲的하는 爲的=즉 일부러 지어서=作)으로 하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니라 本性이란게 조정하여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누차 말했지만 본성이란게 時運옷을 자유자재로 입고 벗는다는 것이다) 즉 諸相이 껍질로 움직일 따름이라는 것이다。本性이 어떻게 조정하는가? 그對相이나 與件에서 囑託받게 해서 또는 心上에 요격을 加해 상념을 일으키게 해서 (요격을 加한다는 것은 이미 들어있는 因識 知見을 利用케 한다던지 그로한 상상적 망상적 상념을 일으켜서 앞의 조성된 여러 여건과 合成시켜서 새로운 착상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一切行이 억지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있어도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니 통하고 안통하고는 모다 本自性覺에 달린 것이니 사람에 心相을 움직이는 것도 역시 그이라ㆍ 일부러 自我가 짓는 것처럼 보여도 各個 自我가 自作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이것이 自性覺이란 헛상을 우상으로 만들어 살찌우고 그 종되고 괴뢰되는 것 아닌가 하는 一末의 의구심이 들고 일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따라 춤추지 않겠다는 것이 또한 억지라。좋을 때 웃고 나쁠 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가 그런 놀림인 줄 알지만 正常타하는 모습인 것이니 無情公子처럼 웃어야 할 때 웃지 않고 울어야 할 때 울지않으면 (그런 옷을 입었을 땐 그 행색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도리혀 미친 이 취급을 받거나 大衆이 未達한 자로 여길것 아닌가? 그렇게 따라 하는 것이 껍질상의 본 모습인 것이다。何人의 집안을 보니 도저히 그 자리에선 그에 賦與된 운명을 볼 진데 헤쳐나가지 못할 형편이거나 언제쯤이면 움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기에 여러 여건이 조성되서 그 자리에서 옮기게하는 것이지 그것을 껍질인 누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 생각잡힘이 모두 本性이 요격을 加해서 그렇게 되는 줄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이 말씀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 같아도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니 상대적인 것도 있음이니 이렇게 나오면
이렇게 對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對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에 있어서 절대나 상대의 相이 껍질이고 특툭털고 나면 그런 對比는 없는 것이니 귀결은 염원탈인 平等空이 되기 때문이다。평등공의 몸놀림이 그렇게 보는 이에 따라 시각차이를 일으키는 對比로 나타나 보였을 뿐인 것이다。이것은 自性相이 아니라 外相이 外相끼리의 感識하는 것을 마치 自性이란 것에 괴뢰化되어 움직이는 自我本心相이 外見相의 本自性들을 조정하는 것처럼 여겨짐을 말한 것이다.
○ 남에게 복을 주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삭힐 것이 못되어 도리혀 禍를 주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달굼질이 되어 덕을 주는 것이 된다고, 그 조정하고자 하는 이의 뜻대로 對相體가 따라주는 것만 아니다. 그래서 전화위복이요 길변위흉이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인위적 조작에 의해서만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가만히 있어 무엇이 절로 때가 되어 이뤄진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노력하는 곳에 되던 안되던 바라볼 것도 있다할 것이다.
◎ ※ 釋書一類를 보건데 一切指稱하는 것들이 다 障碍를 일으키기 때문에 여러 말의 빠져나가고자 하는 양편、多片、對比 方遍의 言 多하게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게 釋經 數多 要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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