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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正觀아닌 힘관이라 하였는데 그 力觀이란 뭣을 말함인가?
勢力 쏠림을 말함인가? 그럼 세력이란 뜻인가? 어디다대고 어떻게 어떤것을 가르켜 準을 세워 그것이라 할 것인가? 항우같은 힘센 장사도 인동초덩굴에 걸려넘어지고 大人도 말벌이 한대쏘면 경황이 없어한다。이것이 세력이 一片인가? 저ᆢ질량이 작다하는 것이 힘이센 것인지 저 질량이 크다하는 것이 힘이 약한 것인지 또 그 반대의 견해인지 또 강약은 어떤 準則이 있는 것인가? 진위정사 양비 다비는 힘에 의해서 정해진다면 힘은 뭣을 뜻하며 무엇에 의해서 정해지며 무엇을 힘이라하는가? 의문에 꼬리는 계속이어진다 할 것이다. 힘은 諸指稱相의 겉과 속과 같은 것인가? 元來부터 힘에 의지치 않고 正見相있다 한다면 그것이 正見이라는 것을 무엇을 갖고 主知시킬 것인가? 正이건 邪이건 힘이 없인 그 자리를 유지 할 수없는 것이니 조그만큼의 비례적인 자리를 유지한다 하더라도 그 지탱하는 힘이 있어야지만 유지한다 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아직 큰 세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공백기간에 의해 버틸 힘 없어도 절로 있단 말인가? 버틸힘없는 것을 死相이라 하는 것인가? 死相이라도 아직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그것은 死相에 의한 無爲力아닌가? 生相이 올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던 버틸 것이니 諸外見相이 힘이 없인 그모습을 유지치못한다 할것이다。說服시키는 것도 하나의 지혜와 상념이 모아 이룬 변재력인 것이니 설득시키는 힘이 없는말은 누가 거들떠보기나 하겠는가? 사로잡을만한 힘이 있으니까 투망에 걸리듯 포로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지 어떻게 조성되나? 힘은 차별이나 구분짓는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고 그러한 차등相이 對힘은 應하는 연계성 인연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이다.여기 동량이 될만한 나무가 싱싱하게 살아서 자태 뽐내고 있다.
힘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동량에 쓰기 위해 저를 베어재키는 힘 가치를 살려주기 위해 힘이 조성되어 오는 것이다. 어떠한 主된 體가 있다한다면 그 自體가 中心力이 되어 주위의 無形現것이라도 쏠려들게 되는것(설령 내친다 하더라도 말이된다)이니 이에 의해 力相이 現相케 되는 것이며 그림이 조성된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어떠한 主된 體가 없다하더라도 힘은 顚倒의 개념이 形成되어 現相存在케 되는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단면 소멸 상태라도 力相은 生成된다할 것이니 지나친 억측의 근거될만한게 없는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하지 말것이니라。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有相인 것이니 有無나 有無아닌 力相이 어찌 존재치않겠는가? 이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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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要旨는 進行過程 有脈上 融通不通 窮極目的은 하는 그‘目的’에 대한 설명을 하라한다면 何志向性의 有無는 제쳐놓고라도 我의 目的은 一定의 定不定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我之目的은 일관성을 유지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여시키는데 있는 것이다.또한 그렇지만도 않으니 목적은 일관성을 결여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지시키는데 있다는것。또 이만도 아니니‘목적은′ 유지를 維持 缺如를 缺如시키는데 있다 등 그아니다 등 數多가 派生됨을 말하고자함인 것이다. 목적은 뭣인가? 목적은 我執인 것이다. 목적만 아집이 아니라 일관성도 아집 유지 결여 등등 一切指稱하는 것이던 그 둘러리던 그無有相의 상태이던간 모두가 我執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아집을 相擊시키고 相殺(쇄)시키는데 目的아닌 목적 목적인 목적이 있는것이다 목적아닌 목적은 그목적이란 것이 상쇄됨을 말하는 것이요 목적인 목적이 또한 허망한 부서짐인 것이다.또 以上內容의 反意를 取擇하여 堅固하게함에 있는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無有得보살(天使=하필 천사일까 보통사람도 위해한다면 부리는 것의 使者가 되는 것이다)이 默默이나 積極으로 現相無有하는 것이다.엮음이 엇가는(交) 모순에 의해 엮어져서 線面相이나 立體相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瑕疵 안잡히길 바라는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다。왜냐? 이 모든 서술형태는 그 뜻이 모순투성이 갈등현상이라서 병약의 포획에 걸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일체 치우친 것도 아집 그 反側도 我執 치우치지 않은 중간도 아집아집으로 보면 아집 아닌것이 없으니 생각생각이 원인과 결과가 아집이라는 것이며 그中道이며 그 아니라는 것이며 無有라는 것이다.
商氏 억지쓰는 것이나 參氏 그만아니라고(또는 그 아니라고) 생떼쓰는 것이거나 똑같다 할 것이니 有作家의 作品이나 感前에 벌어진(羅列) 識別相이나 뭐이 다를게 있는가 이말씀이다。내(我)心象 行이 비뚤으면(잣대尺을 치우치게 하는것) 금방 거울(세상을 거울로 여긴다)에 相(어긋나거나 갈고 치거나 훼방꾼이거나 그릇되거나 등의 심상이 그려가는 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거와 조성해 만들어 재킨다(根原因과 여건을 조성해 짓는 作者의 作品)와 뭐이 다를게 있는가 이말이다。시각과 관념이 차이가 나서 그렇지 모두가 한통속인 것이다’(남방인은 그것을 귤이라하고 북방인은 그것을 탱자라하고 유식한체 하는 이는 그것을 토룡이라하고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지렁이라하고 표현따라 엉덩이라하고 궁둥이라하고 동씨는 그것을 오얏이라하고 서씨는 그것을 황두라 하는 등 그 표현하는 方法에 말이 다를뿐 한가질 지칭할뿐인 것이다) 諸者의 主張에 대항하려는 심리에 달리 조명해 보겠다는데서 생각을 달리짓고 말을 달리 둘러대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한가지를 가르킴인 것이다。象을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창조했다는 것이나 感(五感 六感하는 感)前에 벌려논 식별상이라는 것이나 말을 달리 했을뿐 그 뜻은 한가지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니 認識하기 위한 차별상이 나타난다는 것인데 一例로 犬을 인식시키기 위한 他物과 區分짓는 視感이 差別象으로 비춰짐이라는 것이다.
개를 개로 보는 것은 그렇게 인식받았기 때문이나) 누구나 같을 것이다。이러므로 인식받는 마음은 같다는데서 하나의 마음 自心性相으로 본 것이다.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생겨나라 등 言命이나 生覺命이나 어떤 行爲를 지어서 萬象이 있는것이 아니라 諸여건조성의 화합에 의해서 諸象이 있다는 것인데 그 절대자란 것의 命이 마음에서 짓는 망상이라면 妄想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인데 만약상 망상이 生作한다면 象의 얼토당토않은 因果性을 주장케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니 여기서 망상이란 一切想念의 흐름(流行)에 의한 聲言事 動靜行事象을 뜻함인것이다。感前 羅列 因識 識別相에선 그상념 以前에 自性象이 그대로 비춰진것이 諸실다웁다하는 事物現象이라는 것이다。所謂 橋脚은 水요 水는 橋脚이라는 것과 끓는 물속에 뜨거운 솥이 들었고 그 겉에 장미꽃이 피어나라 하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작자가 있어 그作을 주장하면(※ 혹가능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도 된다는 것이니 즉 거짓을(僞象)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절대作家의 作이 없는 것이요 諸象은 自心性의 비춰진 거울이라는 것인데 이또한 단적으로 그 주장을 신빙한다는 것은 생떼쓰는 한편의 말을 들어주는 것 같음이라 實은 없지만 크게 실다웁다하는 平等尺은 못된다 할 것이다。번거로운 말 같지만 어떤 절대적 작자의 작품이 아니요 마음이 비춰진象이라는 것이니 심상이 느낌은 같아도 그래서 하나인것 같으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니 하나라면 여러 양상을 쓰고 따로따로 구분지어 놀겠는가? 이런 뜻이다。하나인것 같아도 하나가 아니라 空象인 것이다.
사람이 생각에 몰두하여 걷다보면 머리가 무거워져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은 動靜行事相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무디어진 한쪽의 어두운 行모습을 표현하는 이 그렇게 지어진다는 것이다.그 비판의 생각이
흐를때 그에 사로잡혀 행하면 그 비판 動靜 物事相(생각이 흐르는 影象)이 行事物事相으로 옮겨 變形되어나타난다。이처럼 사시적인 생각이 흘러 행할때는 그와 같은 사시적인 心事相이 物相의 방훼相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니 如他의 비평개념이 일때는 그비평개념만큼의 (大小는 재는 心尺의 料量에 있는 것이니 만큼보다 클수도 작을수도 만큼이라 해보는 것이다)방해상이 앞에 나타날수 있다는 것이요 꽃 향기 등을 생각한다면 주위여건(환경)이 그렇게 조성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니(즉 그와 同一선상의) 美香을 나눌만한 상이(反相포함=反相이란 혐오스런 악취나 불완전 불미스런 모습이나 사건) 演出된다는 것이다。이것이 생각하는자 본인은 개의치 않는 것이 되어서 모른다 할런지 모르지만 一種의 쏠리고 에워싸는 축따라 움직이는 念力이 瑞氣化함과 같은 것 일수도 있다할 것이다.또한 반드시 그렇치만도 않다할 것이니 한때의 흐르는 억측妄靈想이라할 것이다.
◎ 앞서 생각하면 고개가 밑으로 숙이게 된다하였는데 그러면 생각은 무게가 나가는 것인가? 이것은 저울대 위에 몸을 싣고서 관찰해 보면 생각이 무게가 나가는 것인지 알수 있다 할 것이다. 생각을 깊이함 두뇌행동을 혹사시키는 것임으로 그 기능이 저하되어 고개가 떨구어지는 것이지 생각이 무게가 나가서 고개가 떨구어진다고 할 수없다 할 것이다.
신성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은 신성하고 경건한 상이 조성되고 번뇌잡념은 번거롭고 잡된상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마음에서 그렇게봐서 그렇게보이는 것이지 마음이 그렇게 보지않는 다음에야 그렇게 그러함이 조성된다고 할 것인가?
◎ 모든 事物質의 素粒子가 예전의 생애에( 먼저 있었던 형태) 겪었던것 익혔던것 달굼질받았던것이 기억합금처럼 刻印되어 遺傳因子化하여 (나타나 있는 것無現形이라도 없어지지 않는 것을 以業成粒子果라한다고 醒氏는 말하고 있다. 그合成은 變異粒子를 形成한다고 볼것이며 그것은 또하나의 유전인자가 될 것이다.
◎ 一切法相이 各自마다 自己라함이 없다는 이것이 法無我인가? 그러면 뭔가? 비춰진 마음 自性相의 外見 現相體껍질옷이란 뜻인가? 그렇담 이 마냥 그것이라할 수도 있는 마음조차 떠난다 한다면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는것이 허무한것이 확트임 저언덕이란 말인가? 얽는(
罟縛)마음도 없으니 투명한 그릇이 되어 있다는 뜻일게다. 마음은 껍질 쫓아갔고 즉 生作品의 作者는 그成作한 집을 쫒아살러 갔고 여기엔 남는 것이 없어 허망하고 투명한 것이란 것이다. 그렇담 以 허망하고 투명한 것을 作者보다 上達한 것으로 여김 아닌가? 여러종류의 作者가 合成하면 곧 一作空이 모인것 같아 一滴水의*作者라 그 一滴水의 作者도 투명함 속에 있다는 것인가 그렇담 투명함 속에 作品과 作者가 一身으로 내 비춰보이니 투명한 것은 소멸된 것이 아닌 것인가? 의문은 끝나지 않는다할 것이다.여기서 法相은 諸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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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신이 부족하니까 남도 부족한줄 여긴다。어딘가 정신상태가 부족하니까 채우기 위해 구제코자活動함인 것이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고 충실하게 自삶을 즐기다간다。정신의 부족은 굶주린 늑대와 같으니 허기진 배는 채우면 되려니와 빈 머리는 실다웁지 못한 고뇌만 쌓인다 할 것이
다
○ 과현미의 찌꺼기가 남아 개운치못한 業事가 있어 그것이 障碍라 하면 大路修道를 위한 障石을 뽑은걸로여김 一切의 업장이 묻혀지듯 소멸될 것이다。되려 그 장석이 너를 보살을 만난 것처럼 여기리니 모든 걸림이
고를 벗지못해 하던 것이 그벗겨달라하는 표현이었던것이나 그벗겨주니 어찌 좋아하지 않으랴? 이런 뜻이다。업장은 소멸됐다하면 소멸된것이니 어느 귀신도 물고 늘어지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 귀신이라 하는 것도 이미
고가 풀려 변한 갖가지 形色의 구슬을 이룬 것이고 그 구슬 달린것이 걸고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아니라、장식걸이로 醒美人을 全美하게 시리 치장한것이 되기 때문이다.
◎ 歷史가 무엇인가? 自性에 묵은껍질이요 낡은 옷이로다。미래史가 무엇이뇨? 自性이 새로 걸칠 새옷이라하는 것이요 새탈바꿈 환태로다。그에서 절대상대를 들먹임은 겉껍질이 싸은 대변에 제利롭게 하는 먹이인듯 많은 쉬쓸어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 自性이란것의 조종하는 迷妄속에 갇혀 밝지못하거늘 억지로 국물짜내듯 짜내려한들(될 法한 일인가?) 그래가지곤 무엇하리? 맑아지고 밝아지면 너란 것을 내세워서 임금하겠느냐? 하늘하겠느냐? 조그만치 생활을 위한 노력을 할지라도 가만히 있음 절로 벗겨질 것이거늘 쓸데없이 발버둥쳐 실타래 엉키게하듯 점점 엉키어드는구나.
◎ 이것은 또 어느때 얻은 것인가? 명함 뒤에 또 쓴 글이 있구나 일러왈 그근골을 쓰겁게하는 것은 그렇게 쓰겁게 하지 않으면 그러한 생각(그 어떤 느낌받는 생각 머리골의 자극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지금에 와선 뭣을 말하는건지 알수 없도다) 이 짚히지 않기 때문이다。所謂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執念이 되고 그 집념은 그집념이 기운을 얻을때에 成不成의 힘을 쓰는 것이다.
◎ 元素가 大小가 없는 것이다。因識시키기 위하여 차별지어 보일뿐이니 흡사 맛의 느낌이 크거나 작거나 한것이 없고(그 맛을 내는 素材粒子의 大小를 말하는건 아니다) 그 맛이 진하고 흐릿한 구분이 大小形으로 나타나지 않듯이 ((이를테면 그 진한맛은 눈으로 보기에(볼 수없지만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만큼 큰것이며 흐릿한 맛은 눈으로 보기에 이만큼 작은 것이다。하는 등등의 大小形의 표현)) 보는感도 원래 小가 없는 것이다。大小가 없이 그 맛이 舌感해 두뇌에 전달되길 해바라기씨앗 박혀 있듯이 기억시스템에 그렇게 박혀 있을뿐이니 그러한 記憶刻印은 遺傳的 素材粒子가 되어 因緣의 連繫性을 짓는 고리가 되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즉 因緣이 本然에 物性은 아니지만 (物性으로 존재치 않지만) 物性에 있는 것같이 物性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니 그 인연은 習氣가(달굼질 받은 刻印氣質) 파고들듯 스며들듯 감돌듯 맴돌듯해(앞말과 모순같지만 物의 習性으로 있게 된다는 뜻) 恒常으로 함께하나 時象이라、그따라 인연의 果가 나타나기도하고 소멸되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大小가 인식시키기 위해 차별되어 있는것은 萬物象事가 五六감의 인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있는거나 같으니 이른바 손가락다섯개는 왜인가하면? 벙어리장갑라 하는거와 (손가락 네개를 하나처럼 붙치면 엄지와 둘이된다 할것임) 손가락 다섯이 각각 들어갈 수 있는 보통장갑을 끼워맞추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그 장갑은 여건이 그렇게하라고 조성시킨 것에 대한 저촉을 받아 사람의 심상이 그린 겉표현이라는 것이다. 추우면 장갑끼고 일을할려면(필요하다면 장갑을 끼게 되는데 장갑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손과 손가락 다섯개가 거울에 비춰지듯 物象으로 비춰져있고(비치해둔다의 갖춤의 뜻도 조금 통할런지 모르겠다) 그 장갑은 사람의 心性이 그린 念願의 表出이라는 것이다.이렇게 뭘 어렵게 말할필요가 있을까? 이것은 순 억지 떼쓰는 모습의 論인 것이니 그냥 손이나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하여(필요에 의해) 장갑이 있다. 말하면 될걸가지고(즉 作者있음을 인정하면 될걸가지고)굳이 우겨서 그아니라고 한다면 그아니라고 하는건 또한 (이아닌데) 있겠는가 이말이다. 바로 말하건 뒤집어 말하건 말할꺼리(건덕지)가 조성되어 있으니까 말하게 되는 것이다。그아니라고 굳이 제뜻대로(열을내어하듯)물들이고 뒤집어 씌울려하는건 뭔가? 그것은 순전한 아집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한 독선과 같은 아집이 있곤 和合平等이란 있을수 없는 것이니 뭔가를 얻고자하는( 뭔가를 얻고자한다는 것은 툭툭 털어낸 것을 말함일수도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컴컴한 어둠의 지옥으로 끌고가 방황케하는 것인지 밝다못해 눈부셔 손가리고 있어 누가 어떻게좀 해줬음하는 지옥으로 처해 있게하는 것인지: 그저 길다란끈과 같고 사방 어디론가로 비켜서지 못하는 돌덩어리 같음만(같이만)存在케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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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產唯物論에선 神을 否定하니 사람의 마음을 육신의 감관기능에 의한 것으로 事物의 反影(投影)된 것으로 여기고(사람의 마음을 사물이 비친 거울역할을 하는것으로 보고) 석씨는 그 反對논리를 主張하니 마음(自性을 필자가 마음으로 誤認하고 있는지 모른다)이란 것이 내비친 것이 事物이니 삼라의 事物을 되려 거울에 나타난 象역할로 여기고 이러한 논리를 잡아먹기를 즐기는 西作氏는 절대作者가 있어 세상 삼라 사물을 작품한 것으로 여기고 以海虛無尺은 망상을 내쫓는 아뭍케나 지어진 象으로 여겨(망상이 내쫓겨
아뭍게나 이뤄진象을 삼라라하고) 妄想의 근원은 무위유동이 얽히는 얽힘(罟
고)으로 보고 儒家氏는 心身物事의 現相을 昏査의 兩分 즉 혼 사했던것 (밝지 못했던것 어둡지 않았던것)이 청탁 경중 등의 음양판으로 갈라진 것으로 보았으며、그 主된 思想은 仁은 虛하여 無敵이니 그 對하기가 흡사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는것 같아 걸림이 없다하고 孝는 實하여 그 수직의 연계성을 표현한 것으로 敵이 있으니 그적이 不遜한것이라 숙으려 (주먹으로 내질러 한방먹이려하듯) 내질러 오는 것을 목표로 삼는것이라 허와 실이 음양의 짝이되어 世上이 萬象態로 存在한다는 것을 六經四書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仁은 받고 孝는 불순한 말같지만 내지른다는 뜻이다.仁은 包容하는 허공상의 문이요 는 활동하는 一現象의 내질르는 陽象相이라 즉 이러하다는 뜻이다.
주제넘게 以海虛無尺을 성인에 반열까지 끌어올린다해서 주접떤다(분수도른다)할 것이나 성인이 또한 누구이며 愚愍이 또한 누구이겠는가? 깨뜨리고나면 모두가 한부류 가루이거늘 그 떡가루 돌가루 질이 다르다 할 것인가? 그 意性대로 質은 다르다하더라도 곱 꺼칠 불문하고 가루가 되었다는건 같지않은가? 絶相對의 구분이나 上中下의 등수매김 차별상은 그 論理的인 겉껍질일뿐 모두가 自主張이나 因識받은 것을 툭툭 털듯 벗고白紙상태와 같이 될 것이거늘 무슨 長短脚이 있다하겠는가? 이말이다。허심탄회 아라한량(할량)(흡사 시중에 낳다하는 건달배가 자잘구레한대 매여 있겠느냐?)이 드고남에 구애될게 없는 것이다。平等、사상은 斜側을 부를지언정 그成器自體로는 진리없지만 불변할 진리와 같음인 것이다。생각을 굴리다 한켠으로 치우치게 되는 뜻을 내포하게 되는데 一切의 指稱이 모두 그렇다할 것이니 그것이 正知見觀인가 하더라도 正知見관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일뿐 정지견관이 아니요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땅이 기울듯
그릇이 기울어 생각水가 흐르게 된 것이다. 마음이 탁트여 화통한걸 허심탄회 하다는건지 阿羅長漢良이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시간 누적은 그만큼 벗을게 많아진다는 뜻이다。이를테면 만년전엔 열생각
벗는 行을 끝낼걸 가지고 지금와선 그 무량곱절로 늘어낳고 미래에 가선 또 이에 대한 무량곱절일 것이라서 그만큼 벗는 行이 어려워질 것이라거나 혹 어떠한 원인이 있어 일거에 탁 트이듯 벗는 行이 될진 알수 없는 것이다.
◎ 絶斷은 끝까지 파헤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끝까지 파헤치는건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다。없는것에 도달 한다는 것은 그 하나의 굴레의 순환의 理致를 본다는 것이니 쉬임없는 환태나 顚倒의 이치를본다는 것이다.
◎ 이말(※ 밑에 나오는 말)은 世人이 보는 정당하다하는 시각관점이 아닌 것인데、諸書 言語 文字 나아가선 諸相의 비침感에 의한 생각이 흐르게함이 뭔가? 感識의 本質이 物質이 集積(모이고 쌓여) 和合하여 이룬 感體(이것이 心相一모퉁이에 있는 욕망인가? 괴뢰도구로 이용코자하는 사탄의 형태인가?)로써 정신을 파먹는 벌어지(虫)이다。그 虫으로부터 내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一切의 감관을 어지럽히는 相의 일편인 잡다한 사상이념 經書를 폐기처분하다시피해야 할 것이니 李사의 분서갱유가 지극히 당연하여 많은중생을 求한 본보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이것이 邪見惡見이요 비뚤은 심사의 견해인가? 하면 그렇치만도 않다. 왜냐? 맑은 정신은 衆生의 根本이니 어찌 중생의 뿌리를 보호하지 않으랴?<<(何人의 가르키는 뜻을 곡해하여서 생각이 중생이요 중생의 모습이 諸相이라는 것을 말했다해서 그가르키는 眞意는
모르고 그가르키는 形象짓는것만 보아서 그편벽된 뜻만 곡해하여 취했다고만 하지말고) 생각이 萬象의 根源이 되므로((생각이 만상의 근원이란 생각의 흐르는 감식별이 萬象을 내비쳐(내비치게하여 놨기 때문이다. 이말은 또 무슨말인가? 식별코자 하는 것은 염원에 의함이고 염원은 마음으로부터이고 마음은 萬象이란 거울에 비친 本모습인 것이다=이것이 되구말구 가르침을 베껴쓰는 것이다.)) 여러가지로 흩어지는 생각을 衆生이라 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말고 一切 들어 받치는 감식을 멀리해야지만 淸淨한 정신을 갖게 되어 중생의 근본된바를 구제한다고 할 것이니 중생이 뭔가? 自性이 엮어내는 생각으로부터 지어진 것이니 이것을 先知增上 痴心妄想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이나 진실없지만 진실된 엮음象이니 그것이 數生을 받으면서 기억합금처럼 되어서 엮는것만 아니라 自性이란것(象을 엮을 원인될만한 것의 重點體)이 發開해서 저 막대를 잡는 동작을 취하는 것이지 치심하고 망상이 잡혀서 그러한 作爲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설령 들여받치는 저촉이나 하여야할 일이 없더라도 그 막대를 잡는 동작은 뭔가를 해보겠다는데서 나오는 것이니 뭔가 해보겠다는것이 곧 自性 發開인 것이지 치심망상이 일으키는 사악 僞見에 의한 行은 아닌 것이다。이렇게 世人이 보는 시각과 틀린 비뚤은 잣대를 얼마든지 휘들러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있다 할 것이다. 이른바 오른것은 그른것이고 그른것은 오른것으로 되는 것이니 억압하는 폭력같은 能實力만 있음 궤변으로 대의명분을 그렇듯하게 둘러대어 모든 反하는 ( 일체 것을 이것의 먹이나 제압할꺼리로 본다) 저쪽을 눌러잡고 쥐어 짤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여하한의 힘이든간? 힘을 갖고 볼 것이다.
◎二十六、七年前의 事이다。필자가 옹기굴속에서 거처하며 생각하여 얻길 因識方式이 네 단계를 걸친
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었던 것같다。어떤 네 단계인가면 바로 觸·感·思·覺이다。접촉치않으면 느낄수 없으며 느끼지 않으면 무엇인지 생각(깨닫거나 어떻게 하거나 어떻게 할려한다는 생각할수 없으며 생각지 않으면 깨뜨려얻는것 무너뜨린것이 없다는것이다。이것은 평범한 理致같아도 識別의 구분단계로써 以感識段階 걸쳐야지만 감식을 초월한 단계를 들수 있다는 것인지: 감식단계도 각개의 相들로써 以外物識相을 벗어야지만 自性相에 到達한다는 것인지 역시 확실한 것은 알 수없으나 諸識別法이 이러한 방법을 취택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든다.
◎ 釋類에선 自性깨치는 方法이 漸 頓 두가지가 있다고 말하였는데 내생각으론 점돈이 一相이니 점돈이 표현이 다를뿐 一相(하나의 껍질모양 物相에서 따왔을 따름인 것이다) 일뿐이다 돈이라도 諸相이나 순차적인 고리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며(마치 세포조직과 같을 것이니 무질서한것 같아도 그물(網)이 서로가 잘 얽히어져 그물을 이루듯 모든 연계된 相이 이와 같을 것이니 설령 강릉에 흙먼지가 신발에 묻어서 인천에 떨어졌더라도 이처럼 신발묻어서 갔다하는 원인이 있는 것이니 방계곡경이라도 질서는 질서인 것이다) 즉 점이라는 것이며 찰나 아닌 것(※ ㅡ 찰나도 時的이므로 漸이라는 것이다)으로 보면「펑」터짐(빅뱅)또한 돈이요 무량 늘어진것으로 보면 순차 순환고리 환태굴레굴름(轉)인것이니 漸인 것이다。原因있는 것은 원인없는 것을 고리(環=圓成無端相續)하여 萬象의 物事가 存在한다는 것이니 美氏의 빅뱅의 논리나釋氏의 漸頓이 無妨으로 확장되거나 응축되거나 鏡象을 이룬 논리나 틀린바 없다할 것이니 (※거울상을 이룬것은 實한 것이 없으니 허깨비 같은 것이라는 뜻이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어져 현상해 보이는것은 영원히 불변할 수 없다는 논리이니 무너진다는 것이다。진리라 하는 법신불 또한 장구한 것이
아니라 쇠력하면 他力에 의하지 않더라도 무너져 공백처럼 된다는 것이니 얇은 필름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으되 바람에 모로서면 없어진거와 같다할 것이나 이것은 지금 다른 곳을 비추고 있는 것이니 다른 方空間의 거울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여기선 무너졌다봐야 옳을 것이다) 차이는 한꺼번이든 보는 시각에 달렸다 할 것이니 한꺼번을 늘리면 순차적인 차이고 차를 바싹 오므라들게 하면 한꺼번에( 별안간)폭발인 것이나 빅뱅이나 점진이나 모두가 한모양일 뿐인 것이다。「펑」하고 터지면 지금 생각기울길 펑하고 터진 그 外見相으로부터 펑하고 터지게된 원인이 생긴 것이 아니고 원인이 원인없는 것을 根基로 하여 펑하고 터져 벌어졌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터지는 찰나도 순차적인 진행과정을 밟은 것이니 漸이요 또 찰나없는 無時라도 점이요 또 순간이니 순간의 時가 없더라도(순간의 時가 없으니) 한꺼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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