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이제 정말 봄은 오는가. 아니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벌써 와 버렸단 말인가. 하긴 대자연의 순리를 어찌 사람이 막을 수 있겠는가. 국민의 뜻을 얼토당토치도 않은 탄핵소추란 이름으로 제멋대로 저버릴 수가 없듯이, 이 땅에 찾아오는 봄 또한 감히 누가 어떤 재주로 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제 아무리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희뿌연 황사가 날아온다고 해도 국민의 마음 깊숙이 이미 둥지를 야무지게 틀어버린 개혁의 봄을 누가 함부로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아무리 떠들고, 제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100만개의 촛불로 물결치는 개혁의 봄을 어찌 모른 채 할 수 있단 말인가. 표충사로 향한다. 표충사로 가는 길목 곳곳에도 매화, 목련, 개나리 등이 앞 다투어 꽃망울을 내밀어 산하가 온통 꽃 잔치에 잠긴 듯하다. 곧이어 진달래와 벚꽃, 복사꽃, 살구꽃, 앵두꽃 등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구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땅의 산하는 향그런 꽃밭으로 변할 것이다. "재약산? 약이 실려 있는 산이라. 정말 산세 한번 끝내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음골이 있는 가지산과 표충사가 있는 이곳 재약산 일대를 통틀어 영남 알프스라고 부르지."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왜 이곳에 머물렀는지 이제서야 알겠네요."
표충사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 양 편에는 대추나무가 아직까지 깡마른 가지를 벌린 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줄이 서 있다. 그래, 몇 해 전 가을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저 대추나무에 갈색 점이 알알이 박힌 토실토실한 대추가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려 있었지. 그때 은근슬쩍 서너 개 따먹은 그 대추는 참 달기도 달았어. 이윽고 표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표충사 입구로 들어서자 아름드리 송림이 나그네를 반긴다. 대략 500m 정도의 소나무 터널을 만들어놓고 있는 이 송림들은 언뜻 보기에도 나이가 수백 년은 넘어 보인다. 재약산에서 흘러내리는 거울보다 더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소나무 터널로 들어서자 이내 한기가 느껴진다. "태종 무열왕 1년, 서기 654년에 원효대사가 이 사찰을 처음 세울 때에는 죽림사(竹林寺)라고 불렀지. 그 뒤 흥덕왕 4년, 829년에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지금의 자리에 중창하여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고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했다는구먼."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 주소를 둔 천 년 고찰 표충사(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는 밀양시에서 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재약산(천황산)의 남서쪽 허리춤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 사찰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이름 지은 절이라고 한다.
표충사, 아니 영정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보우국사(普佑國師)가 한국 제일의 선수행(禪修行) 사찰로 만들기도 했으며, 충렬왕 12년, 서기 1286년에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한 곳으로 이름을 떨친 사찰이다. 그 뒤 헌종 3년, 1839년에는 사명대사의 법손(法孫)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에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사찰의 이름도 표충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당시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무안면 표충사에 있었던 서산,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眞影)과 위패를 옮겨왔다고 한다. "가람 안에 사당과 서원이 있다는 게 이곳 표충사의 특징이지. 우리나라 가람 안에 사당이나 서원이 있는 곳은 없거든." "이 표충서원은 혹 조선시대 때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토착산앙과의 접목을 위해서 산신령을 모시는 삼성각이나 칠성각 등이 있는 것처럼 유교와의 접목을 이루기 위해서 사당을 서원처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표충사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보물 제467호 3층 석탑이다. 이 석탑은 1층 몸돌이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 특징이자 흠집이다. 하지만 뾰쪽한 쇠막대가 세워진 탑의 머리장식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사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3층 석탑 앞에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그 석등을 지나 오른 편을 바라보면 표충사의 큰 법당인 대광전과 팔상전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용트림을 하고 있다. 특히 대광전과 팔상전은 여느 가람에 있는 전각의 화려한 단청보다 빛이 바랜 단청이 더 눈에 띈다. 그 단청의 꼭지 점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듯한 풍경이 하나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풍경은 자신에게 매달린 잠 든 물고기를 깨우며 은은한 목소리를 굴린다. 마치 "네 자신을 등불로 삼아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법어를 되뇌이는 것처럼. "이곳도 숙종 41년, 서기 1715년에 중건을 했지만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는구먼.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전각들은 그때 불 탄 것을 다시 세운 것이지." "하긴 저도 지금까지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은 거의 없었지요." 지금 표충사에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과 보물 제467호 삼층석탑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을 비롯한 25동의 건물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점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표충사를 지나 재약산으로 향한 산길을 올라가면 흑룡폭포와 층층폭포, 사자평 등도 볼 수 있다. 사자평까지 1시간 30분~2시간 소요.
| ||||||||||||||||||||||||||||||||||||||||||||||||||||||||||||||||||||
첫댓글 사찰 순례를 다니시나요? 가까우면 동행하고 싶네.. 근데 여긴 인천이라서.. 넘 멀다.. 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