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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도 도저히 믿을 수도 없는 장면이었다.
7월 하순이면 동남쪽 해안가로 어김없이 찾아와 노도처럼 들이닥칠 돌풍을,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던 터라 아침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돌변할 날씨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생각대로 그는 방심한 듯 어쩌면 무관심한 듯 여느 때와 같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텐트를 걷었고, 얼른 코펠과 버너를 배낭 속에 집어넣고는 해변의 남쪽 곡각 지점의 바위 틈 사이에 단단히 쑤셔놓은 다음에 바람막이가 될 만한 소나무 뒤에 누워서 한참 능청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예언자라니, 무슨 얼어 죽을! 어쩌면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채로 내 발 아래까지 날아올 성 싶군.)
나는 잠시 후의, 자칭 예언자라는 작자의 꼬락서니를 상상하며 혼자 웃음까지 터트렸다. 나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고, 북쪽하늘의 난기류를 탄 새카만 모래먼지가 그가 거닐고 있는 해변 쪽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서 조금 있다가 이리저리 당황스런 몸짓을 연출할 그의 몰골을 생각하며, 백사장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거대한 검은 장막이 해를 가리자 해안의 모든 주변이 단박에 어두워졌고, 돌풍이 불어 닥쳤다. 강풍을 동반한 수많은 모래알갱이들이 내가 숨어 있던 주위의 바위와 나무의 등껍질을 마구 때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빗발치는 적의 총알을 피하려는 전쟁터의 겁먹은 병사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가 궁금해져서 소나무 뒤로 은폐한 몸뚱어리는 놓아두고 알량한 대가리만 빼꼼이 내밀어보았다.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바람 때문에 억지로 가는 실눈을 뜨면서 모래먼지 사이로 보이는 유약한 물거품 같은 그를 겨우 발견해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시야에서 퍼뜩 사라지고 말았다. 방파제 위로 하강한 돌풍의 커다란 아가리가 그때까지도 태연히 백사장을 거닐던 그를 발견하고는 몹시 불쾌한 듯 굉음과 함께 단숨에 삼켜버렸던 것이다.
(죽기야 하겠어?)
사실 조금은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돌풍이기도 하였거니와 미리 그에게 모래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예언의 적중률을 실험삼아 보았거나 그로 인해 그가 모래알갱이의 따가운 맛을 느끼거나 말거나 내 책임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하여튼 나는 모진 회오리바람 속에서 몸서리치고 있을 그를 생각하자 순간적이나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같은 놈도 예측할 수 있는 돌풍의 행차 정도도 못 알아맞힐 실력으로, 예언자는 무슨 놈의 예언자란 말인가? 자빠져 있든 나뒹굴든 결코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모래바람 속을 헤매는 예언자여, 조금만 참으시라. 어차피 지나갈 바람이 아니던가.)
예상보다는 강풍이었지만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 바람이 잠잠해졌고, 다시 한 번 머리를 내밀어 백사장 쪽으로 내려다 볼 때쯤 검은 빛깔의 해안가는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도 서서히 뒤로 물러가고 있었다. 철퍼덕 백사장에 엎어져 있을 그를 생각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장막에서 벗겨진 푸른 바다와 부딪쳐서 반사되는 눈부신 햇살이 마구 내 눈을 찔러댔다.
하지만 나는 그 온통 하얀 와중에서도 너무도 쉽사리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게인 하늘의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여, 나의 시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백사장을 가로질러 내가 은폐하고 있는 바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가 좀 더 가까이 내게로 다가왔을 때 나는 환하게 웃음 짓는 그의 입술 속에서 백설처럼 하얀 이가 빛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우아하게까지 보였다. 나는 여전히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든 모래먼지를 털어내고 있었고, 가래침으로 성가신 모래알을 연신 내뱉고 있던 터였다. 잔뜩 몸을 웅크리며 그 지랄 같은 바람을 피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에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가진 그인데도 모래먼지는커녕 단 한 알갱이의 모래알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는 침도 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갈색의 재킷 상의에도 모래먼지 자국이나 파도에 튕겼을 얼룩 자국도, 바람에 날아들었을 지푸라기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나는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고는 의아함을 넘어서서 싸늘한 경계심과 더불어 야릇한 공포 같은 것마저 느끼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드는 파도가 장관이었소. 김 형은 아깝게 그 장면을 놓치고 말았단 말이오. 어허, 그딴 바람 땜에 여기 처박혀 있었다니 혹 지루하지는 않았소? 하핫.”
그가 유난히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내 앞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말했다. 나는 허연 모래먼지를 함빡 뒤집어 쓴 꼴을 하고서 나무 아래에서 기어 나와 그와 마주했다. 낮은 자세로 언뜻 바라본 그의 골덴 바지에도 역시 모래알은커녕 티끌조차 하나 없었다. 재삼 마음속으로 놀란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어설픈 미소를 흘리고 있다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그냥 그대로 거기에, 그 자리에 서 있었단 말입니까?”
“오, 미풍에서조차 흩날려져버릴 그대여, 느낌의 삶, 드디어 그 시작점에 도달했도다. 핫핫핫, 김 형, 아직까지도 믿지 못한다면 나로서도 달리 당신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어요. 사실 설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
그는 마치 나의 정신적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거나 기묘한 장면을 연출해줌으로써 훨씬 더 실감나게 그가 말하던 미약한 나의 통찰력의 수준을 끌어올려주는 듯했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철썩거리는 파도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러한 그를 한참동안이나 황홀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2.
밤은 고요했다. 그를 처음 본 사흘 전의 그날 밤도 지금처럼 고요했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쪽은 그였다. 백사장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장작불 위의 뜨거운 삼겹살 그리고 싸한 소주 한 병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나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 했던 그날 밤, 대뜸 그가 나타나 밤새도록 태우고도 남을 만큼의 땔감을 한 아름 던져주면서 내게 말을 붙였다.
“씨를 뿌리십시오. 그러면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
“술 한 잔의 미덕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니, 핫핫핫.”
불현듯 등장한 그와 뜬금없는 그의 말에 약간은 당황한 탓으로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그는 환한 미소와 조용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술, 마침 술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군요. 앉으시죠.”
그에게서 악의란 전혀 없어보였으므로 나는 소주가 가득 담긴 종이컵과 갓 구운 삼겹살을 소복이 담은 양철쟁반을 건넸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천진한 웃음을 띠우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이내 내가 잔을 채우자 그는 또다시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이상한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한 것이었을까? 나도 아무런 말없이 연이어 잔을 채워주었고, 그도 여전히 내게 잔을 권하지 않은 바람에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소주 한 병은 금세 바닥이 나버렸다.
(젠장, 주도를 모르는 작자군.)
그가 자진해서 백사장을 가로질러 마을까지 걸어가서 가게에서 술을 사오지 않는 한, 취하기는 아예 글렀기에 내가 친히 술을 사러간다는 것은 더 더욱이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주도를 모르는 술 도둑놈을 향해 눈을 몇 번 흘기는 것이 고작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아주 친숙한 사이처럼 나란히 앉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천공에다 기나긴 화미를 그리면서 서쪽 하늘 아래를 향해 사라지는 유성을 보았다. 내가 방금 그 유성을 보았냐는 식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술잔을 비울 때부터 한 마디도 않던 그가 웃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잘 될 거요. 소원은 빌었소?”
나는 그의 지나가는듯한 말투와 간단한 질문을 들었을 뿐이었지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생각들이 밤하늘의 유성처럼 불꽃이 튀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나는 무진장 애쓰고 있었다. 다음 주말까지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절대 절명의 숙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농도 난분해성 오폐수 정화처리 시스템의 마지막 관문, 즉 폐수 속의 오염물질과 깨끗한 원래의 물과의 완전한 분리를 해내지 못한다면 투자의 단절은 고사하고 어쩌면 나의 발명을 믿고 투자해온 그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회적 매장과 처절한 응징으로 인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사느니 맞아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바닷물 속의 소금기와 물을 해리시키는 실험을 통해 폐수의 오염물질과 본래의 물과의 명쾌한 분리라는 해답을 얻고자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실험 장비를 갖춘 지 꼬박 한 달이 다 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의 천칭저울은 자꾸만 참담한 실패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동안 온갖 방법과 갖은 수단을 다 써봤건만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실정이었다. 예초부터 나로선 감당하지 못할 과제에 손을 댄 것인지도 모른다는, 아니, 인간의 지력으로선 도저히 풀지 못할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시간을 부쩍 늘여가고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소원은 빌었냐는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은 당연히 절대 절명의 과제해결이라는 것임에 틀림없었겠지만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의 말이었다.
“제기랄, 술이라도 있었으면.”
그것은 가뜩이나 사방이 꽉 막힌 방에 갇혀버린 것과 같은 가혹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혹독한 현실의 옥죄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술을 누군가가 죄다 처먹었지 않았느냐는 뜻으로 내뱉은, 진정 그를 향한 빈정거림이었다.
“젠장, 술이라면 지천에 깔렸는데 뭔 걱정이오?”
그는 나의 푸념 섞인 말투를 흉내 내면서도 함박웃음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옥죄게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 잘못을 그에게로 돌리려는 심사로 기왕지사 내뱉은 빈정거림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설마 마을 가게까지 술심부름 내기를 하자고 하진 않겠지요?”
“내기? 그것 참 좋은 생각 같은데요.”
“관둡시다.”
내가 안면을 퉁명스런 표정으로 바꿔갔으나 그는 여전히 호의의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내기의 건에 관하여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배낭 속에 소주 됫병이 ‘있다’에 내기를 걸겠소. 당연히 당신은 ‘아니다’에 걸어야겠지요, 어때요?”
그가 마치 나에게 내기의 조건, 즉 어떠한 것이라도 들어줄 수 있으니 꽁무니 빼지 말라는 조롱과 은근한 독촉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든지 자신이 있다는 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좋아요, 내기의 조건은 무엇이든 상관없겠죠?”
“오, 물론. 만약 내가 이기면 당신이 난관에 봉착한 문제를 내게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그것도 애원하듯, 부탁하듯! 아까부터 볼일 본 후에 뒤를 안 닦은 듯한 당신의 표정이 하도 안쓰러워서 말이지요. 혹시 알아요? 내가 문제를 풀어줄지, 하핫핫.”
“내가 이기면?”
“하, 그럴 리야 없겠지만 무엇이든 들어줄 거요. 그러니 얼른 배낭 속에서 술이나 꺼내 와요.”
내기는 보나마나 내가 이길 것이 확실했다. 제 놈이 처먹은 두 홉들이 소주가 전부였으며, 나는 술고래가 아니므로 소주를 됫병 따위로 사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시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모래 표면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배낭 속으로 손을 넣었기 위해 꼴사납게 무릎을 꿇었다. 손을 넣어 휘저어보기까지 했으나 역시 배낭 속은 고추장이 든 양념 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시해도 될, 이 시시한 짓거리를!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서!)
내가 찌푸린 얼굴로, 나도 모르게 약간은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미묘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은 기적을 보더라도 내 기대만큼은 놀라지는 않겠군요. 자, 생각해봐요. 술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위하여 어떤 상태로 있을지 말이오. 아마 플라스틱 병 속의 맑고 투명한 액체상태가 아니겠어요?”
그때였다. 그가 지극히 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하던 순간 뭔가 딱딱한 고체 같은 것이 불쑥 솟아올라온 듯 배낭 속의 손가락을 툭 치는 것이었다. 꽉 부여잡고 들어 올려보니 소주 됫병이 내 손아귀에 쥐여져 있었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잠시간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그러한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배낭 속으로 직접 손을 넣었다. 그리곤 일부러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밤새 마실 테면 그것으론 부족할 거요. 양주는 어때요? 짐 빔? 잭 다니엘은? 아무거나 상상해 봐요. 꼬냑은 좋아해요?”
나는 황당한 환상과도 같은 현실에 적응하려고 퍼뜩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짐 빔 좋죠. 아니, 잭 다니엘.”
“좋아요, 좋아.”
그가 배낭 속에서 손을 빼내자 잭 다니엘 한 병이 딸려 나왔다. 나는 그가 뚜껑을 열어 술을 가득 따른 종이컵을 코앞으로 내밀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적까지야 되겠어? 이 사람의 직업은 틀림없이 마술사일 거야. 속임수를 잘 쓰는 마술사, 그런 사람들에겐 미리 배낭 속에 술을 숨겨놓기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야. 암, 그렇고 말고. 저 따윈 아무 것도 아니야. 코끼리를 사라지게 하고, 빌딩도 없어지게 하는 마술사조차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물론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그딴 사소한 트릭 정도에 놀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하자 오히려 기분이 한층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도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당신은 마술사군요?”
“마술사라.......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처럼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재주는 없어요. 그보다 더 미천한 사람이오.”
“더 미천한 사람이라뇨?”
“나는 미래예측 프로그래머이지요. 사실 요즘은 미래예측뿐만 아니라 미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 중에 있소.”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하마터면 비웃음의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만약 그가 그토록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뒤로 자빠져서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조용해졌고, 종이술잔만이 몇 번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무릎을 치며 과장되게 내가 먼저 말했다. 사실 반은 농담조였다.
“당신은 예언자군요.”
“그렇소, 난 예언자요.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하, 그랬나요? 아 참, 우린 아직 통성명도 못했잖아요? 난 김혁수라고 합니다만.”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난 내가 누군지 모르오. 나를 찾기 위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만 그저 이별 저별 속에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만을 넘나드는 고작 예언자일 뿐이오. 지금까지는 그렇소.”
“환상의 세계? 지금 이곳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환상이란 말인가요?”
“생의 한 가운데의 도달점을 제외한 모든 곳은 환상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지금 진실이라는 것에서 약간 벗어난 다른 한 측면에 있을 뿐이오. 실체는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부분에 있기 때문이지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만 주절거리던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밤하늘로 고정되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그의 알 수 없는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있음을 내내 알 수 있었다.
“나 자신 이 생명의 우주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조각 파편, 바로 그 작은 조각 속에서 우주가 숨 쉬고 있음을, 모든 생명들이 요동치고 있음을 알아야 하거늘. 해변을 뒹구는 모래알갱이와 무한한 바다는 원래 동일한 한 조각의 파편이었으므로 모래알갱이 속에 바다가 있음을 알아야 할 텐데....... 이곳에 남긴 나의 환상의 발자취도 파도에 휩쓸려가더라도 그 발자국을 수용할 만치 충분히 넓지는 못했소. 이 놀라운 수수께끼를 보시오. 환상조차 자유의 한 형태로 남아 있잖소. 망각이 되어버린 실체의 또 다른 형태로 내 가슴 속에 더욱 깊이 박혀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난 아직까지도 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기실 나는 나의 예언을 경멸하고 있어요. 저 높은 나의 영혼의 쉴 곳에 빨리 도달하려고 미래예측에 애쓰지만 그것은 비굴이며 또 다른 굴종으로, 육신의 다리가 아닌 영혼이 절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예언을 하지만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하지요. 나는 진리의 방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오. 어쩌면 그것을 놓아둔 곳을 잊지 않기 위해 예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나는 아직 미처 그리지 못한 그림과 미처 짓지 못한 노래를 완성하려 애쓰는 예술가의 처지인지도 모르겠소. 나는 예언을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칭송하거나 경멸할 수 있소. 부러움과 미움을 받은 적도 있지요. 분명 이것만은 말할 수 있어요. 나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과찬의 말이 더 많았다는 걸... 진정 마음의 눈을 열고 본다면 모든 영상 속의 또는 모든 환상 속의 자신을 발견할 것이오. 하지만 그것이 절대 진리로 가는 통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그렇지만 반드시 지금 당신이 알아야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어쨌든 대지가 꽃을 피우듯 진정으로 소망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환상의 세계 속에 당신이 있소. 이곳에서도 당신의 할 일은 많겠지요. 다 부질없는 것일 테지만 사실 마음과 영혼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많소. 그러나 괜히 섣부른 비유를 들어 말하다간 다들 내가 미쳤다고 말하겠지요?”
그는 이해불가능성의 말들을 주절이 늘어놓다가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퍼뜩 말을 멈췄다. 동시에 나는 그가 나를 비웃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틀렸소, 나는 비웃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못난 세상에다 쓴웃음 짓고 있을 뿐이오.”
그가 진정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발휘해서 한 말인지, 하도 그런 식의 소리를 많이 들어서 알게 된 말인지는 몰라도 적잖이 놀라긴 했으나 연이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등줄기로 너무도 오싹한 기운이 지나갔음으로 술이 확 깨이고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강과 호수와 바다의 약물중독을 우려하는 직업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죠. 특히 이 바다와 해안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오.”
“!!....”
“예언자답게 예언을 하나 해주지요. 이곳의 미래는 마치 암울한 판타지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은 소외되고 극도의 편리함과 이익을 추구하는 추악한 인간만이 존재하는 곳, 그들은 인간성을 박탈하고 인간을 배제할 것이며 인간 본성마저 잃게 하고, 인간이 만든 가장 중요한 이 환상의 세계를 파괴할 것이오. 지금이야말로 진정 자신과 환상세계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깊이 사유할 때요. 당신도 결국 그들처럼 될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소. 우선 당신은 자연과 인간을 위해 큰 업적만은 남길 것이오.”
나는 정신이 가물거리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한없이 작아지고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그런 현상은 낯선 사람 앞이거나, 타인에게 평가받는 상황에서 곧잘 나타나는 자율신경의 부조화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과학적 해석을 내리기도 급급히 해보았다. 아무튼 나는 완전히 까발려져 노출된 느낌의 상태로 거인과도 같은 그의 시선에 자꾸만 주눅 들고 있었다.
내가 대꾸 없이 조용해지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말문을 닫아버렸고, 플라스틱 됫병을 베개 삼아 모래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날 밤도 그와 함께 그렇게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 역시 그가 말한 환상의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는, 눈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진 하늘과 무수한 별들 아래에서 곯아떨어졌다.
3.
밤은 고요했다. 내가 한참 모닥불을 지피고 있을 때쯤 그가 다가와 마주앉으면서 말을 건넸다.
“우리의 만남도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 김 형의 최대 고민거리를 말해줘야 되지 않겠소? 내기는 분명 내기니까.”
“다음 행선지는 어느 별입니까?”
내가 농담조로 말하면서 시선을 밤하늘의 아무 별에게 던졌다가 얼른 그에게로 고정시켰다. 여전히 그는 환한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글쎄, 이름 따윈 잘 생각나지 않소.”
그 역시 농으로 말을 받으면서도 아까 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재촉했다.
“처음에 김 형은 내가 마술사인 줄 알았지요? 사실 그 마술이란 것도 그 비법을 모두 배우고 나면 더 이상 마술의 매력을 잃게 되지 않겠어요? 내가 가진 능력을 다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부담 갖지 말고 고민거리를 말해 봐요.”
“그런 시시콜콜한 수준정도는 당신이 더 잘 알아야하는 거 아니오?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그 잘난 통찰력으로 말이오.”
나는 심술궂게 끝까지 비아냥거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동안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단계를 건너뛰어도 되겠소?”
“무얼 말입니까?”
“김 형의, 그 풀지 못한 최대과제를 들은 셈 쳐도 되겠냔 뜻이오.”
내가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표시로 어깨를 한 번 들썩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수첩을 꺼내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든지 하는 어떠한 작은 동작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한 손에는 수첩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펜을 쥐고 있었다. 그리곤 부지런히 무언가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고도의 정신집중상태에서 벗어나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내게 수첩을 건네줄 때까지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역시 환한 호의의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수첩을 펼쳐보았다.
아래 화학식은 지금까지 당신을 고찰 하였던 바, 착염(당신의 소망) 및 복착염화(당신의 욕구 + 투자자의 욕망) 반응에 대한 결과(원래의 맑은 물)를 바라는 것이 가장 올바를 듯하다.
※ 아미노산(회사구성원들의 욕망)과의 반응의 예 - Fe는 당신의 욕구
(NH₄-CHR-COO―) + Fe2(SO4)3 + 12H2O
→ 3(NH4)2SO4 + 12CH₂+ 2Fe(OH)₃+ 9O₂↑
※ 지방산(투자자들의 욕망)과의 반응의 예 - Fe는 당신의 욕구
3(CH3CH2COOH) + Fe2(SO4)3 + nCH₂
→ 3[CH3(CH2)nOSO3 -Fe+3]+ Fe(OH)₃+ 1.5CO2↑ + 1.5C
※ 기타 이온(여타 소액 투자자들의 욕망)들과의 분해 및 착염화에 따른 반응 - M은 당신의 소망
* <산화제의 금속염(당신의 소망 M)과 탄산수소(소액투자자 A의 욕망)의 분해 및 착염>
M+3 + 3HCO-3 ⇒ M(OH)3 + 3CO2
* <금속염(Fe는 당신의 욕구)과 인산(소액투자자 B의 욕망)의 분해 결합>
M+3 + PO4-3 ⇒ MPO4
* <이온화 경향이 높은 각종 금속염(여타 소액투자자의 욕망 C - 여기서의 M은 당신의 잔여 소망 부스러기)과의 전자교환 및 착염>
3Mg+2 + M(SO4)3 ⇒ 3MgSO4 + M+2
3Zn+2 + M(SO4)3 ⇒ 3ZnSO4 + M+2
3Ca+2 + M(SO4)3 ⇒ 3CaSO4 + M+2
6Na+ + M(SO4)3 ⇒ 3Na2SO4 + M+
*<복착염화 현상(당신의 욕구 Fe + 투자자의 욕망 Mg, Zn, Ca...)의 화학구조의 예>
Fe[Na(Mg)SO4]
Fe2[Na2(Mg)SO4]3
(Zn),(Ca),...
*<고염기화 상태에서의 폭기 충돌(투자자의 손익분기점 + 당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탈기현상>
NH4 - N(투자자의 욕망 손익분기점) - NH3(자유암모니아 탈기 - 당신의 자유의지 A) NH4CL(탈기 - 당신의 자유의지B)
= 이로서 여액은 본디의 물로 환원 될 것이로다.
“다른 탁월한 방법도 많이 있지만, 지금 시간이 없잖소. 김 형은 명석하니 내가 써준 그 방법의 한계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핫핫핫.”
나는 수첩에 나열된 화학식을 본 순간 너무 놀라서 오히려 입을 콱 다물 지경이 되었다. 나는 마치 어둔 동굴 속에서만 살다가 환한 도시의 불빛으로 인도된 원시인 마냥 너무도 놀라고 환희에 겨워 얼마 동안 부르르 떨고만 있었다. 그가 내게 준 화학식은 명쾌하고도 완벽한 절대 절명의 과제에 대한 정답,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당신이!...... 아, 예언자....... 당신이 날 구해냈어! 날 구했어!”
나는 미친 듯 외치며 부둥켜안고서 키스세례라도 퍼부을 기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한 사방팔방의 어두운 백사장을 지칠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결국 그의 부재를 인정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서있는 그 세상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소. 그것이 그대가 속한 환상세계 속의 유일한 자유인 것이오.”
천공에서 내질러진 그의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서 맴맴 돌았다. 나는 그때서야 그가 저 멀리 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하나, 이름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환상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꿈결 같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사업설명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덕분에 나는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의 자금사정은 넉넉해졌고, 세미나다 인터뷰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빡빡한 일정 때문에 잠시 그 예언자를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가 가져야 할 영광을 독차지 하면서.)
한숨 돌릴 틈이 생기자 새삼 인간의 간사함을 정작 나 자신을 통해보고서는 소스라쳤다. 나는 나의 기묘한 행동에 혀를 차다가 억지로 시간을 냈고, 드디어 그 해안가를 찾아 나섰다.
철지난 바닷가는 쓸쓸한 파도와 노닐고 있었다. 나는 할 일 없이 해안가를 거닐다가 퍼뜩 예전 생각이 떠올라 마을의 슈퍼를 향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됫병 소주와 대충의 안주거리를 샀다. 그 다음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는 해변의 남쪽 곡각지점의 낮은 언덕으로 올라가 만만한 나뭇가지를 꺾어 모아 밤에 땔 장작으로 삼았다.
늦여름의 밤은 깊어만 갔다. 밤이 깊은 만큼 장작도 활활 잘도 타올랐다. 땔감도 충분한 탓이었을까? 소주의 싸한 진통이 가슴의 쾌감으로 변해 잘도 번져나갔다. 일단 예감이 좋았다. 조금 지나면 그가 손을 흔들면서 환한 예의 미소와 함께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술 취한 고개를 들었을 때 동해의 여명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밤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핸드폰이 지루하게 울렸지만 나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비록 약간의 허탈감과 망설임이 교차하기는 했어도 나는 빛나는 영광의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사람을 되살려보려는 심정으로 나 자신을 달래며 무료한 해안을 거닐고 거닐었다. 그러면서도 그때처럼 예언자가 나타나 줄 것이라 믿고선 또다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의 소재가 궁금해진 핸드폰이 하루 종일 울어 젖혔다. 나는 그렇게 되고파 했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만큼 ‘돈줄 따위라니’하고 무시하는 자신을 보니 절로 혐오의 비웃음이 나왔다. 그 따위 무지막지한 놈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나는 여전히 전화를 무시했으며 탄알 장전하려는 군인처럼 다시 마을의 가게로 가서 역시 소주 됫병과 안주거리를 한 아름 사가지고서는 해안가로 돌아왔다. 땔감도 어제 마련된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행히 핸드폰이 귀찮게 하지는 않을 정도로 밤은 다시 깊었고 장작불이 타올랐다. 이른 시각부터 술을 마신 탓에 숙취가 가시지 않아 컨디션이 별로였으므로 몇 잔 남지 않은 술병을 팽개치고는 게슴츠레해진 비몽사몽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만 보고 있을 때였다.
“미안하오. 늦게 와서....... 오래 기다렸군요. 어쨌든 나도 한 잔 주시오.”
어느새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는 것과 동시에 내 옆으로 앉으며 빈 잔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왜 이제 나타났느냐는 식의 눈초리로 쏘아보면서도 그렇게 기다리던 그의 등장에 별반 놀라지 않는 자신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침 떼고서 그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고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간 별나라 여행이 아주 재미있었나 보군요.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연락 한 번 주지 않았을까!”
“말도 말아요. 그곳에서는 우리 둘이 나누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단숨에 술을 털어 마신 예언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의 술잔을 채우는 나를 보고서 결국 멋진 기술자로 만들어 주었다는 자부심이 흐르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잘 되어보니 어떻소? 역시 별 거 아니지요?”
그는 그렇게 당연하다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내가 무슨 심통이라도 부려볼 찰나에 가로막듯이 그의 말을 이었다.
“김 형, 드디어 나의 마지막 여행지에 도달한 것 같소.”
“마지막 여행지라뇨?”
나는 그의 말을 되뇌어주면서 언뜻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허, 죽음이란 없소. 그것은 다른 시공에 불과하오.”
그는 내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그리고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채 계속 말했다.
“어찌 보면 멍청이들 같기도 하지만 그들만이 실상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소. 한동안은 그들의 사악한 본능에 치를 떨며 괴로워한 적도 있었소만 그들의 정신 한 구석에는 맑은 거울처럼 순진한 신성이 빛나고 있었소. 나는 그것을 자극하리라 마음먹었단 말이오.”
“자극하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곧 눈치 챌 내심의 불안감을 알고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마음과 영혼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많다던, 일전의 그의 말이 단박에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괜히 섣부른 비유를 들어 말하다간 다들 당신을 미쳤다고 말하겠지요?”
내가 예전에 그가 한 말을 확인시켜주듯 물었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미쳤다고 할 뿐이겠소? 나를 죽이겠지요.”
나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기가 막혔지만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곳에서 죽겠지만 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는 거요. 죽음을 극복한 완전한 자유의 몸....... 이 우주에서 그곳이야말로 과감히 예언자의 사명을 완수해도 될 만큼 가능성이 큰 세계란 걸 알았지요. 진리의 심지에 불을 붙일 만한 곳, 폭발하는 진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표현된 감정은 결코 설명할 수 없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그를 고쳐보았을 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저 멀리 하늘의 무수한 별 중의 하나, 이름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환상세계가 궁금해져 물었다.
“그곳이 저 많은 별들 중에 어느 별입니까?”
그의 손가락이 찬찬히 동쪽 하늘의 끝을 가리켰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초록별 하나가 시야로 빨려 들어왔다.
“저기, 지구라는 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