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말씀의 초대
예수님의 제자들은 강렬한 성령 체험을 한다. 그분께서는 바람처럼 오시어 그들 위에 내리신 것이다. 제자들은 영적 뜨거움을 접했다. 불꽃 모양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제1독서).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같은 성령께서 주신다. 활동도 여러 가지지만, 같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바오로가 남긴,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제2독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었다. 스승님께서 떠나시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의기소침해 있는 그들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러고는 성령의 이끄심을 전해 주신다. 하느님의 새로운 기운이다. 사도들은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복음의 제자들은 숨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 당당했는데, 사도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요?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순교자들에게는 이끄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힘이 그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 ‘영적인 힘’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스승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어둡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식 때문에 불안해한다면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르기에 불안해합니다. 매일 ‘하늘의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그분의 사랑을 잊고 살기에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어떤 형태를 띠건 하느님과 이어지는 연결입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고, 저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아 ‘매일의 기도’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야겠습니다. 현실에서 그분의 힘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욕망의 그물’에서 떠나 있으려면 성령의 이끄심이 절대적입니다. 순교자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았기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성령의 이끄심을 만났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구나 밝은 모습으로 바뀝니다.
우리 삶을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
-홍승모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받은 상처와 아픔, 분노와 앙갚음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곤 합니다. 이런 상태는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 혼돈이고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고 어두움의 심연과도 같습니다(창세 1,2). 이 폐쇄된 장벽을 뚫을 수 있는 힘은 주님의 영에서만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창세 2,7). 그렇기에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얘기를 한 것이 기억납니다. 바다가 넓어서 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배가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넓어서 비행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도 자유스럽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생각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자신만의 생각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나듯이, 사람의 생각도 한 번 그 길이 뚫리면, 그 길로 생각하고 사유하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런 좁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일상의 틀에서 한 번 벗어나 봐야 한다고들 합니다. 고정된 틀을 깨보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뜻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성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생각을 주곤 합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공동체에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위해 자신의 영적 내면을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까지 걸어온 길에 마음을 두지 말고 기꺼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오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을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해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6-7). 성령의 일곱가지 은총(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기도드립시다.
죄의 용서, 성령을 받는 지름길
-손용환신부-
성령강림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16세기 최고의 신비주의 화가입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주제로 많은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성령 강림>은 사도행전이 그 배경입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찼다.”(사도행전 2,1-4)
성화를 보면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 천장에 있는 성령으로부터 빛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불꽃 모양의 빛이 각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1/3 지점에 나란히 위치한 열 명의 시선은 수평을 이루고 있고, 그 중심에는 성모님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열다섯 명인데, 세 명의 여자와 열두 명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맨 아래 오른쪽 제자는 하늘을 향해 쓰러질 듯한 자세로 한 손을 뒤로하여 계단의 난간에 몸을 지탱하고, 다른 팔은 위로 벌린 채 모든 관심과 시선을 위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치는 원형을 이루고, 사람들의 시선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몸이 이루는 커다란 두 사선은 순교자들의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 모양입니다. 또 손의 자세나 모든 동작이 곡선으로 이어져 신비로운 통일감을 더해줍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든 손과 팔이 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강림이 열린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유일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 그림에서는 성모님을 바라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왼편의 남자가 베드로이고, 성모님 옆에서 고개를 돌리는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이며, 녹색 옷을 입은 오른편의 남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성모님에 대해 “당신은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라고 선언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분을 향해 팔을 쳐들고 어머니로서 공경하겠노라고 선서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은 그분의 신비로운 내면까지도 들여다보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왼쪽 맨 아래에 있는 제자는 자기의 허물을 벗어던지듯 자기의 망토를 벗어던지고 일어나 계단으로 오르며 성모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제자도 우리에게 성령 강림의 증인이 되라는 듯이 우리를 강렬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제자들처럼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둘째는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같다는 게 신기합니다. 또 성령을 전하는 것과 평화를 전하는 것이 같다는 게 신기합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우리가 제자로 파견받은 곳에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독서 예수님께서는 해가 저문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합니다. 이 ‘평화’?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첫 인사는 제자들을 위해 빌어주시는 ‘평화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이, 충만한 은총과 평화가 제자들의 삶을 받쳐준다는 것을 깨닫기를, 현재의 걱정과 두려움만 바라보지 말고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모든 것을 맡기며 충실히 살아가기를, 그런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파견하며, 예수님은 당신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시고?(창세 2,?7), 마른 뼈들을 일어나게 하십니다.?(에제 37,?9) 새로운 계약의 성령이 새로운 마음을 주어 말씀에 따라 살 수 있게 하십니다.?(에제 36,?25 이하)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 성령을 불어넣습니다. 요한의 증언은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이 승천한 뒤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한 약속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의 숨을 불어넣는 행위를 통해 제자들이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힘에 차 있는 사도들의 모습과 달리 바로 다음 장인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은 아직도 두려움과 의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고 있어, 지금 이 순간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내렸다는 사도행전의 증언은 이미 초대교회 안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사도 2,?1???11) 실제로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때 성령 체험을 한 요한이 사도행전과 달리 자신의 복음서에 지금 이 순간 성령이 내렸다고 하면서 새롭게 자신만의 성령강림절을 창조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문맥 안에서 보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나중에 예수님이 떠나신 후, 성령을 보내줄 것임을 의미하면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은 상징적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아버지에 의해 파견된 것과 같은 양식으로, 예수님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합니다.?(21절) 그들은 예수님처럼 “추수할 것이고”?(4,?38), 예수님처럼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15,?8.?16), 예수님처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15,?27) 이 모든 일은 제자들이 오직 나중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당신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의 힘’?에 의지하고,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한 후, 바로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십니다.?(23절) 곧 이어서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떤 뜻인지 설명합니다.?(요한 21,?1???23)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내 양들을 돌보라.”?는 부탁을 되풀이합니다. 이 부탁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해 신앙의 힘으로 양들의 영혼을 강하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21,?15???17) 베드로는 교회를 지도하라는 특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들을 먹이고 돌봄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지요. 베드로는 양들에게 힘을 주라는 스승의 부르심에 충실하여, 결국 스승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서 순교함으로써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21,?19) 요한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떠나신 후 성령의 힘을 받아 선포하게 될 ‘복음’?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루카 24,?47)
성찰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례 받는 순간에 성령 체험 안으로 들어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이기 때문입니다.?(갈라 2,?20 참조)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성령이 개인에게 따로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은 그 은사로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1코린 12,?3ㄴ???7.?12???13)
기도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30)
우리는 모두 ‘특별’합니다!
-신희준신부-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돈이 얼마나 있고 학벌이 얼마 나 좋든, 또 지위가 얼마나 높든 상관없이 모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 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려는 결심을 내린 사람들이기 때 문에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靈)”을 불 어넣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 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줄 때마다 우리 안에 새롭게 하느님 의 영께서 계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 하느님의 영의 뜻 에 따라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자 기쁨을 선사해 주고, 삶의 여러 가지 역 경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상처들을 치유해주는 참 ‘평화 가 우리와 함께’ 있게 해줍니다. 우리가 특별한 사람인 것 은 용서가 주는 참 평화를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누구를 용서해 주고 사랑해 줘야 할까요? 우리와 평소에 상관이 없는 사람들, 아주 먼 과 거에 살았거나 거리상 우리와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을 용 서하기란 비교적 쉽습니다. 사실 그 사람들한테 우리가 직접적으로 받은 상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매일 만나고 매일 다투고 매일 말을 섞는 사람들의 경우는 용 서하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번 용서한다 고 해서 그 사람들이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렇다고 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백 번씩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 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용서해줄 능력이 없다고 절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면 우리는 성령께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 것입니 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라고 말 씀하신 취지는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적인 능력 에만 의지해서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믿
음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 와주십니다”(로마 8,26). 감정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이 느 껴지지 않고 미움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도 성령께 의지하면서 기도 중에 용서를 할 때 그 용서는 ‘완전’한 용서가 됩니다. 비록 새롭게 용서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아쉽게도 무척 빨리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끝으로, 문득 오늘 제가 접하게 된 다음의 말씀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가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친 밀감이 강한 그만큼 우리는 교회를 활성화시켜주시는 성
령과도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정도가 큰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사랑합니다’(샤를르 드 푸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이들이 모인 곳이면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부족해서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면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곳 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주 는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도 커집니다.
몇 년 전, 대만에 사는 한 젊은 기독교인이 동물원에 있는 사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사자여! 회개하고 네 죄를 뉘우쳐라.”
이 젊은 기독교인이 보기에 사자가 사자로 태어난 이유를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한 손에 성경책을 움켜쥐고 높은 사자 우리의 철장을 뛰어 넘었던 것이지요. 즉, 자신으로 인해 사자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으로 가리라는 확신을 갖고서 이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자에게 열심히 전도한 이 젊은 기독교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까지 우리 안에서 얌전히 잘 살던 사자를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사제에게 물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이 젊은 기독교인의 행동은 바른 것일까요? 그래서 동물에게 전교하려고 했던 이 젊은 기독교인에게 칭찬의 박수를 쳐 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인 것이지요. 동물은 창세기의 말씀 따라 보호하고 다스릴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젊은이의 행동은 분명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 편협되고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은 당장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기억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이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감하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또한 자신의 뜻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을 갖고 주님의 뜻을 전하는 지혜로움도 얻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모습을 우리도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을 받으면 됩니다. 즉, 우리 모두가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갑곶성지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제가 밖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 어떤 형제님께서 저를 불러 세워놓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서 제가 선물 하나 하고 싶습니다. 신부님, 뭐가 필요합니까?”
사실 그 당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고는 싶었지요. 하지만 차마 꼭 찍어 말은 못하고 “괜찮아요. 정 주시고 싶다면 알아서 주세요. 뭐든 기쁘게 받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형제님께서 쇼핑백 하나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님, 밤에 적적하실까봐 양주 한 병 들고 왔습니다.”라면서 술이 들은 쇼핑백을 내미시는 것이었어요. 솔직히 좀 서운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술을 잘 마시지 않거든요.
저는 술 마실 일이 없어 그 쇼핑백을 방구석에 놓고는 한동안 꺼내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제가 아는 청년들이 놀러와 그 술병을 드디어 깨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술병 밑에 봉투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봉투에는 생각보다 많은 액수의 금액이 ‘갑곶성지 계발에 써주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생각은 저의 차원을 뛰어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경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 정도인데,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시는 주님은 어떠할까요?
우리의 생각과 뜻을 항상 뛰어 넘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1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장영희).
생명의 숨
-오민환-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린 그날, 바로 “주간 첫날”에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요한 복음은 여인에 의해 제자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친절하게 남겨둡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곧 성령이 오신 날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성령 강림’ 사건은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유다인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지만, 오늘 요한 복음서에서는 닫힌 문 안에서 비밀스럽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의 심리적 공포와 압박을 읽어봅니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난 뒤 상황은 역전되어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급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었지만 아직 두려움을 풀지 못한 제자들은 문만 잠근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잠가놓았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로 주님께서 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최후만찬 때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으로 옆구리와 두 손을 보여주시고 다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마치 주일미사와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부활의 기쁨이 초대교회 주일 경배의 본질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모습은 마치 세상 창조 때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만드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창세 2,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숨을 불어넣으며 주신 성령은 제자들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얼(정신) 차리십시오!
-김찬선신부-
군대에 가면 얼차려라는 것을 합니다. 군인 정신이 빠지고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군인 정신을 다시 살리고 군기를 세우기 위해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신 나간 놈 또는 얼빠진 놈이라고 욕을 하는데 얼이 빠지면, 즉 정신이 나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지고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면 노상 궁리하고 행하는 것이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이거나 먹고 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정신을 올바로 차리면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정신을 차려도 정신력으로 초인적인 것을 하는데 주님의 영을 받아 차리면 더 더욱 못할 것이 없습니다. 얼이 빠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멍청하지만 얼을 차리면, 그것도 주님의 얼을 차리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입당송에서 노래하듯 주님의 얼은 온 누리에 가득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그 주님의 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1독서에서 보듯이 성령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이상한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민족 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사람 간의 담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니 서로 간에 용서도 하고 일치도 이루게 됩니다. 전에는 각기 다른 생각과 정신으로 살았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 다투고 평화 없었지만 이제는 같은 영을 모신 한 영혼이 되었기에 생각이 일치하고 정신이 일치하고 지향이 일치하고 마음이 일치하고 존재가 일치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평화와 용서를 주신 것처럼 주님의 그 영을 받으면 우리도 평화와 용서를 선물로 곁들여 받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 일치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주님의 영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 하기를 청합시다.
-김기현신부-
【미식 축구계에 빈스 롬바르디라는 전설적인 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1958년 그린베이 패커스라는 팀의 감독이 되
었는데, 당시 그 팀의 승률이 1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감독으로 취임한 지 1년 만에, 그 팀
의 승률이 60 퍼센트가 되었고, 1961년과 1962년, 그리고 1965년에 NFL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거둔 승률은 74퍼센트에 이릅니다. 그 빈스 룸바르디가 ‘미식축구에서 어떤 팀이 위대한 팀인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승하고 난
다음에 얻을 상금과 영광을 상상하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이 위대한 팀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하기 때문입니다. 미식축구는 굉장히 격렬한 경기입니다.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건강한 상대편 선수들
이 들소처럼 돌진해 옵니다. 앞에 선 수비수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아주어야 하는데, 만약 ‘나만 살아야지!’ 하고
슬쩍 피해버리면, 최후 수비수들이 상대편 공격수에게 심하게 부딪혀서 팔이나 허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다
고 합니다. 빈스 룸바르디 감독은 미식축구에서 위대한 선수는 자기가 막지 않으면 자기 뒤에 있는 동료가 큰 부상
을 당할 수 있으며 실점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몸을 날려서 상대편을 막는 선수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 한 팀입니다. 그 안에서 위대한 신앙인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팀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던질 수 있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위험한 상황 속으로 자신을 내어 던지
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겪었던 것과 같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긴 전도 여행을 떠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고, 마지막에 생명까지 내어 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
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본능을 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받아라.” 라고 말씀하시며, 성령님을 보내주십
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본능을 넘어서는 일들을 합니다.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고,
다른 민족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긴 전도여행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희생하여 복음
을 증거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님의 도움심과 보호가 있
었기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내던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불타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지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성령님이 내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고, 성령의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간구하고 청합시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누군가가 제 뒤에서>
가끔씩 제 삶을 스스로 진단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주 느끼는 감정 중에 기쁨, 감사, 행복, 충만과도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도 있지만, 때로 의기소침, 무기력, 좌절, 자신에 대한 무가치, "하루 하루가 죽을 맛"과도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그저 죽지 못해, 마지못해,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차분하게 그 원인을 추적해 가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다름 아닌 "성령부재" 현상, "성령 결핍"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활동이 극히 미미하거나 중지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행하는 복음선포나 사도직 역시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미 와 계신 성령께서 다시 한번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제 삶을 돌아보니 몇 차례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던 순간, 견진 성사의 순간, 성령쇄신 세미나의 순간, 첫 서원과 종신서원의 순간, 부제서품과 사제서품의 순간, 잘 준비된 고백성사의 순간, 심각했던 병고의 순간...
그렇데 위에 나열한 순간의 상황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순간은 제 나름대로 다시 한번 겸손하게 제 자신을 낮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고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나란 존재로 가득 차있던 제 영혼을 최대한 비우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니 그 순간만큼은 정전으로 인해 꺼졌던 선풍기가 다시 한번 힘차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감정은 참으로 은혜로운 것이었지요. 그 누군가가 제 뒤에서 저를 지켜주시는 것과도 같은 든든함에 하루 하루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 순간은 그렇게 미워 보이던 꼴통들조차도 어찌나 예뻐보이던지요. 한 녀석 한 녀석이 다 천사요, 선물이요, 제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 반드시 있지요. 때로 절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때로 죽음 이상의 고독과 절망 앞에서 눈물 흘립니다.
그 순간 필요한 노력이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비워진 그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힘차게 활동하실 때 불가능은 없습니다. 평생 삭이지 못할 것만 같던 깊은 상처들도 천천히 아물 것입니다. 성령께서 활동을 시작하시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못할 것 같은 사람도 용서가 가능합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 다시 한번 우리 안에서 힘차게 가동을 시작하셔서 우리가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좌절과 슬픔 가운데서도 힘차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기양신부-
물으면 대부분 신자들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이 정도입니다.
"성신이요."
많은 분들이 성령은 성령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 또 성령 세미나에 열중한 사람들은 성령을 마치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 세미나의 일부 과정에서 사람들이 성령에 도취하여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성령과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성령이 무서워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되었지요. 성령은 나와 상관없는 분이 아니고 성령 세미나를 하는 일부 신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고, 나의 전 생애를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살아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은 비둘기 형상이나 바람, 또는 숨이나 불혀의 모습으로 내려오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성령은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형상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은 그 시작부터 성령의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임신 사실을 알리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응답합니다. 그 때 천사 가브리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즉,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왔으며, 마귀를 물리치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다른 협조자란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렇게 약속해 주신 성령은 오순절이 되어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사도 2,2-3)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서도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오늘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 문을 박차고 나와 유다인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성령의 지혜를 받은 제자들 언변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쩔쩔 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등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을 행해 보였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사도 5,15) 바랄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힘을 갖습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령에 가득 차서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교회를 태동시킨 분이시고,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는 생명이시며, 우리 신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힘,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르는 개인이나 단체 또 교회 공동체는 단지 인간 집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칠성사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며 밀떡이 예수님의 성체로 변화할 때 사제는 그 위에 손을 얹으며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성 변화의 주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만물을 거룩하게 하고 인간의 경지를 넘어 천상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은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배광하신부-
오랜 세월 동방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말씀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안내를 해 주리라 생각됩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입은 제자들이 배신과 비겁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송가’ 안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 그리고 타오르는 힘이신 성령께 청원을 드립니다.
‘생기와 휴식,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시고,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꾸어 주시고, 성령 칠은 베푸시어 덕행의 공로 쌓아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복락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자유를 살지 못하고 주님의 크신 영광에 확신을 가지고 믿지 못하는 나약함을 지녔어도 사도 성 바오로의 다음 말씀에 위로를 삼으며 또다시 성령의 뜨거운 믿음을 청해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 17~18)
힘이신 성령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의 여러 상징을 가르쳐 왔는데, 그중 가장 큰 상징으로 ‘바람’ ‘물’ ‘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쓰러진 영혼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신 성령을 바람과 물과 불로 상징한 이유는 그것들의 영원한 힘의 작용이 성령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구름을 사방으로 옮겨 지구 곳곳에 생명수를 뿌려 줍니다. 바다의 무서운 해일과 폭풍도 실은 생명의 바다가 썩지 않도록 뒤집어 주는 것 또한 바람의 역할입니다.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바람인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체인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창세 2, 7 참조) 바람은 또한 온갖 꽃들과 씨앗과 옮겨 모든 대지에 생명이 자라게 해줍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이 바람은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쉬도록 만들어 줍니다.
‘물’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몸은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 생명의 시작도 어머니 뱃속에서 물인 ‘양수’로부터 자라납니다. 물은 또한 ‘정화’의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그릇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영혼을 씻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주며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때문에 세상 모든 종교의 거룩한 예식에서는 반드시 이 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불’이 없으면 또한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일정한 불인 체온을 유지해야 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생명체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인 태양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이 없으면 물은 얼어붙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며 구름의 이동 역시 멈추어 버리게 됩니다. 오순절 그 나약했던 제자들에게 내리신 성령께서도 불과 같은 모습이셨습니다.(사도 2, 3 참조)
이제 우리는 또다시 성령께 성령의 상징인 물과 바람과 불의 엄청난 생명의 힘을 청해 다시 한 번 강인한 복음의 사도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넘치는 생명의 힘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적인 축제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 대한 것은 이미 부활 2주일에 들었으므로 지금은 성령에 대한 몇 가지 주제를 보기로 하겠다.
오늘 복음은 이 때의 “문학상 큰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즉 부활에서 성신강림, 부활절 저녁으로부터 성신강림절 아침까지 부활의 효과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성령의 은사이다. 항상 부활이며 항상 성신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 이제 하느님은 결정적으로 Immanuel,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신다. 유일하신 하느님은 불가분리적이시며 위격들의 삼위 안에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존재하시는 곳에 필연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기에 이 선물은 삼위일체적 은사이다.
성령, 신적 희년1)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신적 친교이며 나누임 없는 생명의 통교로 하느님 안에 사랑과 모든 재물에 대한 나눔으로,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형제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오랜 인고의 준비과정에서 보면, 창조 시에 주어진 성령은(창세 2,7), 하느님의 원수인 “육”으로 거만하게 된 인간을 버려야 했으나(창세 6,3), 하느님은 인간의 결정의 자유를 존중하셨다. 하여간 하느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사건에서는, 즉 출애굽기에서 이미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72 인의 백성의 원로들, 그리고 지성소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위해 하느님의 영을 받는다(민수 11,17; 신명 34,9; 출애 31,1-5; 36,1-2 참조). 그 뿐 아니라 모세는 백성 전체 위에 성령이 내리기를 원하고 있다(민수 11,29). 몇몇 판관들, 그리고 사울, 다윗, 예언자들이 성령을 받는다. 모두가 항상 그들의 사명을 행하는 때에 한시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영구적 은사를 위한 것으로, 귀양이 끝난 후, 거룩한 율법과 약속된 땅에서 떨어져 나온 후에(에제 36,16-18)2), 부활을 이루시는 참된 사건(에제 37,1-14)으로, 또 민족적 파국을 모면하게 해주시는 분으로(요엘 2,28-32), 당신의 백성을 위한 메시아적 왕에게(이사 30,33; 11,10; 32,15); “새로 태어나는”, 재창조되는, “마지막 때에” 새로운 생명에로 부활할 모든 백성들 위에 내리는 영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는 마지막 사건, 주어진 희년처럼 드러나고 있다: 이사 61,1-2; 루가 4,18-19, 절대적 신적 무상의 은총으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숨을 내쉼”(?μφυσ?ω)으로써 제자들은 새로이 창조되었다(창세 2,7 참조).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견진을 받았고, 사제적으로 축성되었고, 모든 신적 신비에 대한 처음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신적 은총의 희년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로 되었다는 것이고, 십자가의 열매를 전하는 사명과 함께 인류에 대한 성령의 운반자로서, 그리고 삼위일체의 거처인 하느님의 가족을 모으고, 희년의 성찬을 전하며, 죄인들과 흩어진 사람들을 부활하신 분이 그 머리이신 귀한 “몸”, 하느님의 백성, 성령의 궁전, 교회, 소집된 단체, 말씀의 정배, 성령, 지혜, 말씀이 거처하시는 곳,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신적 선성이 모두에게 우리에게 까지 이르게 될 교회를 이루는 자들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때의 사도들의 기억에, 우리 또한 오늘 여기서 말씀의 은총과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그리고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들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인 그리고 거기에서 은총의 옥좌를 향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크신 역사들을” 찬양하는 교회라는 존재의 은총으로써 모두 성령으로 충만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로서(Pneumatophoros) 교회를 위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원의식이 분명하고 이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경계하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가 긴장하며 사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잘 따를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안에 누리는 자유는 아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가 될 것이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이제 참으로 새로이 창조된 마음으로, 그런 기분으로 누리를 새롭게 보고 가꾸어 가는 자들이 되도록 노력하자. 항상 새로이 창조된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자. “주여, 당신 얼을 보내시고, 온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성령은 바람이며 영입니다.
-이재욱신부-
오늘날 우리는 성령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총, 성령의 선물을 가득 안고, 가득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이며 영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시원한 오아시스의 향기를 날라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독한 광야에서 홀로 죽음과 싸우고 있을 때 세상만물에 숨겨놓으신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며 우리를 이끄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굳건한 아버지이십니다. 성령에 취해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분노로 달아오르고 주체 못할 화 속에서 괴로워할 때 우리를 식혀주는 한줄기 바람이십니다. 내 마음이 북해의 빙하보다도 차갑고 어두운 외로움 속에서 웅크러들 때 내 마음을 무엇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사랑의 불길이십니다.
성령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고 그리워하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1독서에서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역이, 언어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서로를 배척합니다. 같은 민족, 같은 동네 사람들이라하더라도 성이 다르다고, 동문이 다르다고, 경제적 여건이 다르다고 ‘남’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 하느님은 우리의 이 부족한 모습을 다르게 이용하십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를 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너무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는 못났지만 그분은 우리를 완전하도록 이끄시고 도와주시는 봉사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지식, 두려워함, 슬기, 의견, 굳셈, 통달, 효경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성령 하느님의 도우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대축제를 지내고 나면, 불같이 뜨거운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시원한 바다의 바람을 불어주고, 얼음같이 차가운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화톳불의 따스함을 전해주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그저 순종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입을 열어 말할 수 있 을까? 내가 손을 뻗어 도와줄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람이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
-김지영신부-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에서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내게 믿음이 생겼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었다. 나의 모든 생활이 급작스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나는 전에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고, 전에 원치 않았던 것을 원하게 되었다. 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그릇된 일이 되고, 과거에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이 옳은 일이 되었다. 나의 생활과 욕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선과 악은 서로 그 의미를 바꾸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만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래알 같은 시몬을 바위 같은 베드로로 변화시키셨고, 박해자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변화시켰으며, 방탕한 생활에 빠진 어거스틴을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로 회개시키셨습니다. 또한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됩니다.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에 인간의 나약함과 그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는 진정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이 이제는 목숨을 걸고 그 분은 진정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유다인들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포기요, 절망이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근원적인 힘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성령은 나약하고 부족한 사도들이었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 초대 교회를 태동하게 하는 힘이었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바탕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려 했던 제자들이, 꼭꼭 숨었던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그들을 박해하던 유다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당당하게 증언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의 지혜이며 힘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힘을 못 쓰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음식이며 힘이며 우리의 활력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는 진정한 회개에서 오며, 감사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하나 되어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라는 화해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참된 평화는 이와 같이 성령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의 힘으로 세상 곳곳에 복음을 !
-유영봉신부-
1.인간에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합천 본당에서 첫 사목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교리 반에 잘 나오던 40대 부인이 2주 째 교리 반에 결석을 하였다. 사정을 알아본즉, 죽은 시어머니 귀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 신(神)기운이 돌면 완전히 죽은 시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신기(神氣)가 돌아서인지 목소리도 시어머니 목소리로 변했고, 촌수도 바뀌어서 시아버지를 보고 '여보!' 하면서 삿대질을 하고, 남편을 보고는 '야, 이놈아'하면서 어머니 행세를 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갑자기 "신(神)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神) 내림 굿'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神)이 내려 무당이 되는 사람을 강신(降神)무당이라고 한다. 어쨌든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神)과 통할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잡신(雜神)이 내리면 무당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이 내리면 그리스도의 영(靈)에 사로잡힌 참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 1독서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시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개교(開敎)기념일이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다락방에서 무서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오순절 축일에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을 받아 가르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위에 성령이 쏟아 부어짐으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워진 사도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 이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도 또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를 통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고린12,3)고 하신다. 성령강림 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백성,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3.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전파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그 기쁨과 평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의 공동체인 것이다. 제 2차 바디칸 공의회도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 고 선언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무덤에 가두어 놓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한 사람도 교회에 인도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새 순(筍)이 돋아나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고 냉담자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 사도들로 하여금 생명을 바쳐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그 성령의 활동이 더욱 아쉬운 때이다.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벌였던 '쉬는 교우 찾기'와 '새 교우 찾기' 실천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명령을 잊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있는 신자이다. 나는 살아있는 가지인가?
현명한 선택
-김영수신부-
3년전 독일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게청년대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청년들을 위해 마련하신 행사로 전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축제를 벌이고, 우애를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 프로그램 중 하나로 독일의 준비된 가정에서 그 가족들을 함께 지내는 홈스테이 과정이 3박4일 동안 있었습니다.
광주 교구에서 간 30명중에서 독일 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어는 단어를 띠엄띠엄 이어가면서 말을 하는 정도.. 사정은 독일의 그 마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공소정도에 해당되는 시골 공동체이다 보니 영어를 할줄 아시는 분들이 드물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3박4일을 같이 지낼 수 있을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행복한 체험을 했습니다. 홈스테이 3일째 되는날 저녁 우리는 그 성당의 교육관에 모여서 그 동안의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 한 청년의 인상 깊은 나눔 한마디 “나는 이곳에서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웠어요!!” 준비된 일정을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 서로 아쉬워하며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독일의 어르신들과 우리 청년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서로 알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면 언어라는 장벽이 생각보다 큰 장애가 되지는 않는구나 ….” 말이 다른 것 보다는 오히려 차가운 마음, 닫힌 태도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성령을 받은 이들이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말이 같아도 오해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평소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언어가 갈라지는 바벨탑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고,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에는 그러한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어 일치를 이루는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생활가운데 언제나 펼쳐지는 모습들입니다. 나의 아집과 교만으로 인해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 순간 우리는 나의 언어와 그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영원한 타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반면 서로를 이해하고자 원한다면 언어라는 커다란 장벽도 거침없이 뛰어넘어 하나되고 일치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바벨의 벌입니까? 성령의 은총입니까?
-허영엽신부-
오늘날 가톨릭에서 성령쇄신이라 부르는 신심운동은 1967년 2월, 미국의 듀케인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지도신부와 함께 사도행전을 주제로 한 주말 피정에서 성체조배를 할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의 성령쇄신 운동은 대학생들의 신앙쇄신 운동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본당과 수도회로 확산되면서 신자들의 신심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신앙인을 위한 신심운동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교만하거나, 신앙이 부족하여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성령 안에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하느님께서 모두 주십니다. 문제는 각자 다르게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잘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사를 공동체의 이익과 이웃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 중에서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평화’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의 마지막 목표도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유다인의 일반적인 인사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많이 누리고 소유하여 높이 올라가야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주는 평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오히려 고통과 불안 속에서 끄떡없는 영적이고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평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인간적인 힘으로는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잠시 잊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얼마나 복된 말씀이고 은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내 인생의 동반자 성령
-양승국신부-
요즘 형제들과 밭을 빌려 농사를 조금 짓고 있습니다. 다들 '왕초보'라 문제가 많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기는 하는데 여간해서 싹이 안 올라옵니다. 이것저것 모종을 심기는 하지만 간격도 안 맞고, 또 뭔가 어색합니다. 보다 못한 '프로'들께서 한마디씩 거드십니다. "자네들, 무슨 모종 장사할 일 있어? 고추모종을 왜 그렇게 빽빽하게 심었어? 그리고 저기, 호박모종을 이랑 한 가운데다 줄줄이 심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뭔 야채 박람회야? 상추, 케일, 토마토, 가지, 오이, 쑥갓… 없는 게 없구먼,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자주 야단을 맞다보니 저는 가급적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서 제일 먼 쪽에 앉아 일하지요. 요즘은 꽤 키가 커진 고추모종에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 고추모종들을 하나하나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또 갈증을 해소시켜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 손길이 아마 이러했겠지요. 제대로 걸어 다닐 힘조차 없어 비틀거리던 나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시며 지척에서 따라다니시던 분, 혹시라도 넘어지면 비호처럼 달려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던 분, 다시금 살아갈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시던 분… 돌이켜보니 많은 경우 그런 하느님 손길은 마치 미풍처럼 불어오는 성령을 통해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성령께서 내 안에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란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진지해지더니 나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이 다들 걸어가는 넓은 길을 굳이 마다하고, 이 좁디 좁은 길을 택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후배들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름대로 꽤 많은 영적진보를 이뤄냈다는 마음에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한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신앙, 하느님과 관계를 총정리 하는 '영적자서전'을 써나가면서 평소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성령의 이끄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굽이굽이, 곳곳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음에 감사의 눈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이 너무도 막막해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서,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심각한 성소의 위기 상황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는 형제들로 변장하고 나타나셔서 자신을 위로해주시고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죄로 기울어져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오랜 방황 속에 허덕일 때,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는 몰랐는데, 조금 빠져나와서 바라다보니 손을 내밀어주시던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늦게나마 성령의 손길, 성령의 자취를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둔감해서, 우리가 너무 육적으로 살아서 잘 감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손 내밀면 언제라도 잡아줄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걸어오신 분이 성령이심을 인정합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이 온통 육적인 것에 몰두해 있기에, 우리 안테나가 온통 세속을 향해 있기에, 우리 시선이 전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에, 그분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순간 체험하게 될 은총은 놀라운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느님 자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던 현실이 '살아볼만한, 견뎌볼만한 현실로 변화할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인간들이 그저 안쓰러운 인간, 측은한 인간, 감싸주어야 할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기적의 원동력, 우리 신앙을 한단계 성장시켜줄 활력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호자,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서공석신부-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남기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집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떠난 사람이 사람들 안에 남겨 놓은 기억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역사에 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당신 안에 일하시던 성령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과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그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과 더불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에서 종말을 고한 당신의 삶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마태 1,20)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이 당신 위에 내려오시면서(마르 1,10)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같은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성령을 받아 시작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고 예수님은 그 숨결로 사셨습니다. 창세기(2,7)는 흙으로 된 인간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숨결을 받아 산다는 뜻으로 복음은 예수님이 그들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인간 죄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해 하느님이 벌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미운 사람이 불행할 것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세상과 그런 마음은 하느님도 사람을 미워하고 불행을 주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악한 마음은 악한 하느님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하여 만든 하느님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합니다. 악한 인간이라도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대신”(루가 11,11) 주지는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6,36) 스스로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고 실천하셨습니다. 어느 날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우리는 오늘 제1독서로 사도행전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선교활동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활동을 서술하기 전에 두 폭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들은 성령강림의 그림입니다. 이 두 폭의 그림은 사도행전의 서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도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떠나셨고, 성령이 오신 다음 시작된 사도들의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의 서문에 해당하는 성령강림의 화폭에 성령이 강림하신 장소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시기는 유대인들의 해방절 다음,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모여드는 오순절을 택하였습니다. 오순절은 해방절이 지나고 50일째의 축일입니다. 보리와 밀의 햇곡식을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제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13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모두 이 날 예루살렘 성전에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강림 장면에 나타나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20,18)가 묘사하는 하느님 발현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졌다’는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에 의해서 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기원이 있는 말씀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불길 같이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모여든 군중은 각기 자기네 지방말로 알아듣습니다. 복음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예수님 한 분 안에서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인류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움직였던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그 성령은 인간의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 일하십니다. 인간은 작은 구실만 있어도,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고 장벽을 쌓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함을 비롯하여 출신과 직업의 다양함은 인류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을 차별과 불화의 동기로 만듭니다. 성령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많은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여러 역할을 함으로써 교회는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것이지만, 일부 역할을 성령이 주어져서 발생한 신분이라고 과대 포장하여 신앙인들 사이에 장벽과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성령의 이름을 붙인 신심단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만들어 갈라놓고 교회 안에 새로운 장벽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하신 일도 없고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벌주는 악한 하느님을 상상하여 만들었듯이,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차별하는 성령을 만듭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일하셨던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 안에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숨결입니다. 차별 만들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우월감에 빠져 살고 싶은 우리를 그런 욕구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의 자녀로 함께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은 용서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욕심, 허영, 질투, 미움 등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의 해방은 이 용서로 시작합니다. 성령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그 숨결은 우리를 갈라놓는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여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 물건 정말로 끝내주는데.”라면서 물건을 먼저 산다면, 너도 나도 덩달아서 물건을 사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는 용기가 없어서 먼저 사기보다는 따라 사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소위 ‘바람잡이’가 동원되곤 하지요. 이렇게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바람잡이’가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람잡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난 달 성지순례를 다녀온 뒤에 체중이 3Kg이 증가했습니다. 하도 먹어서 그렇겠지요. 그런데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저와 동행했던 ㅈ신부는 자그마치 5Kg이 증가했거든요. ㅈ신부는 여행을 다녀온 뒤, 체중계 올라간 뒤에 눈물이 나오더랍니다. 자기 평생에 있어서 최고의 몸무게, 즉 ‘89'라는 숫자에 바늘이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ㅈ신부는 그날부터 필사적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저께 아침, 드디어 일주일 만에 5Kg 감량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와의 간격이 거의 나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제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ㅈ신부보다는 몸무게가 조금 나갈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이대로라면 역전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역시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커피는 크림과 설탕 넣지 않고 무조건 블랙으로, 밥은 최대한 천천히 식사하기, 술은 최대한 자제하고 마시더라도 안주는 절대로 먹지 않았지요. 물론 입에서는 ‘뭐 좀 넣어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ㅈ신부에게 추월될 것이 두려워서 꾹 참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체중 조절하는데 있어서 ㅈ신부는 저에게 있어서 바람잡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잡이의 모습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주님의 바람잡이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주님의 바람잡이는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바람잡이 말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바람잡이보다는 세상의 바람잡이에 더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장삿속이 보이는 바람잡이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주님의 바람잡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부활하신 뒤 오십일 만에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내렸지요. 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어떻게 변합니까? 두려움이 가득하는 등 제자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던 모습들이 성령을 받은 뒤, 자신감이 넘치고 예수님께 충실한 참 제자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세상의 바람잡이가 아닌, 주님의 바람잡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성령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받았습니다. 세례 때에 그리고 견진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주님의 바람잡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자유의지를 주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스스로 하려는 노력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 자신을 개방하여 이웃을 위하여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성령의 놀라운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성령께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가요?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그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도 들어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할 때입니다. 그때 충실한 주님의 바람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바람잡이가 됩시다.
“성령을 받아라.”
-양승국신부-
<기도와 비례하는 성령의 활동>
돈보스코 성인이 창안한 ‘예방교육’의 핵심은 교사가 청소년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소년 사이에 교육자의 능동적 현존’입니다. 이태리어로 'Assistenza'라고 합니다.
돈보스코께서는 틈날 때 마다 살레시안들과 교사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청소년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청소년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절대로 청소년들끼리만 두지 마십시오. 교육자가 잠시라도 자리를 떠날 때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놓고 가십시오.”
돈보스코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청소년 교육 사업이 확장일로의 길에 접어들면서 자주 토리노의 ‘오라토리오’를 떠나 먼 여행길을 떠나곤 하셨는데, 그때 마다 그렇게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신을 대신할 다른 누군가를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래도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 양육 때문에 고생이 많으실 젊은 부모님들도 많이 느끼실 텐데, 사실 아이들만 있게 될 때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극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던 돈보스코,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에 목숨을 걸었던 돈보스코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때면 다른 보호자, 협조자를 파견해놓고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떠나가지 않으셨습니다. 노심초사하시면서, 근심걱정하시면서, 그렇게 떠나가셨겠지요.
그리고 돈보스코처럼 당신 대신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해줄 존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예수님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우리 각자에게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로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협조해주시고, 결국 최종적으로 구원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후, 그분 대신에 우리에게 오신 성령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말씀 안에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경의 깊은 뜻을 깨닫게 도와주시며, 복음을 생활화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혼 안에 충만히 현존해계십니다. 특별히 삶의 중요한 여러 단계 안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세례성사 때,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나 신품성사 때...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보통 우리는 평소보다 더 순수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비웁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기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영혼 안에 성령께서는 더욱 왕성히 활동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은 겸손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자신을 비우는 영혼 안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반대로 자만심, 우월감, 자기중심주의로 가득 찬 영혼 안에 성령의 활동은 미미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비참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 혼신을 다해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는데, 그 응답이 바로 성령 강림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도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그들이었는데, 그토록 나약하고 게으르고, 사심 많고, 타성에 젖은 그들이었는데, 사람들이 확 바뀌었습니다.
용광로처럼 활활 불타오르는 열렬한 신앙인,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순영이처럼...
-오상선신부-
언젠가 굿뉴스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올라왔다.
"이봐요! 아직 개시도 못했으니까, 다음에 와요!"
너절한 행색에 냄새마저 나는 부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주인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빠의 손을 이끌고 음식점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은 그때서야 그들이 구걸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어, 아저씨! 순대국 두 그릇 주세요."
주인은 다른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돈을 못 받을지도 모른는 그들에게 음식을 내준다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은 손짓을 하며 아이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음식을 팔수가 없구나. 거긴 예약 손님들이 앉을 자리라서 말이야."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거든요."
주눅 든 아이는 잔뜩 움츠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다 말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비에 젖어 눅눅해진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주먹의 동전을 꺼내 보였다.
"알았다. 그럼 저쪽 끝으로 가서 앉아. 빨리 먹고 나가야 한다."
화장실이 바로 보이는 맨 끝자리로 옮긴 부녀에게 순대국 두 그릇이 나왔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순대국이야.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께. 잠깐만 기다려."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소금통 대신 자신의 국밥 그릇으로 수저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국밥 속에 들어 있던 순대며 고기들을 떠서 아빠의 그릇에 가득 담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순영이 너도 어서 먹어라. 어제 저녁도 못 먹었잖아."
"나만 못 먹었나뭐, 근데 아저씨가 우리 빨리 먹고 가야 한댔어. 어서 밥떠, 아빠, 내가 김치 올려줄게."
아빠는 조금씩 손을 떨면서 국밥 한 수저를 떴다. 수저를 들고 있는 아빠의 두 눈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밥을 다 먹은 아이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넉 장과 동전 한 움큼을 내놓았다. 주인은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정성을 봐서 재료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핑게를 대며 이천 원만 받았다. 그리고 사탕 한 움큼을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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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창립일이자 생일날이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생일을 맞이한 순영이 아빠의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외형적으로 우리 교회는 순영이 아빠와는 달리 아주 화려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장님과 다름없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순영이 같은 마음을 지닌 착한 영혼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들이 오늘 아빠인 교회를 위해 생일상을 준비하고 온 맘으로 축하를 드리려 한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비록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비틀거린다 하더라도 순영이 같은 영혼들이 이 교회의 삶을 아름답게 비추어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내리소서. 무엇보다도 순영이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게 따뜻한 마음을 주소서.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보다는 따뜻한 말을 전할 줄 아는 능력을, 치유의 능력보다는 영육으로 병든 영혼을 감싸 안을 줄 아는 능력을, 화려한 열광으로 기도하기보다는 조용히 당신 말씀을 음미하며 기도할 줄 아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 교회를 순영이처럼 우리 신자들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교회가 그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참된 회개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소서. 무엇보다 일치와 친교의 영을 내리소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형제자매로서의 정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소서.
오늘 로마에서 우리 프란치스칸 가족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낸다. 성령을 우리 수도가족의 실질적인 총장으로 모시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바로 순영이 같은 맘으로 교회의 탄일을 경축한다.
-작은자-
오늘은 부활시기의 마지막 날이자,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50일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몸을 숨기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聖靈)’이라는 말마디를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립니다. ‘성령(聖靈)’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 의 3번째 위격으로서, 모든 기도 때마다 우리가 입으로 소리내어 표현하는 친숙한 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여러 번 말로 표현하고, 또 듣는 ‘성령’에 대하여, 기도를 제외한 시간에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친숙한 분을 현실의 삶 안에서 어떻게 체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이 어떠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부 하느님만을 유일한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유다인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인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그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 또한 하느님이심을 체험하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성령’이라는 분을 몸으로 체험하고, 성령 또한 하느님이심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여러 번 들어 왔고, 또 믿을 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번째 위격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초대 공동체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그 분 또한, 우리의 삶 안에서 만나고 체험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의 본질은 성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리고 성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성자 하느님께서는 죄(罪)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이 세상을 해방시켜 구원 곧 생명을 주시고자 인간으로 오셨고, 그 말씀과 행적을 통해,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명을 주시려는 성부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 하느님 역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께서 하시는, 생명을 주시며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곧,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령의 여러 활동들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생소하고 신비로운 어떠한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령은, ‘생명(生命)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靈)’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사야서에 언급되어 있는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여러 은사들, 그리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 모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활동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되게 하시고,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시도록 겸손되이 청하도록 합시다. 동시에, 우리 자신도, 스스로가 하느님 안에 머물고 또한 공동체 전체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살리는 일’을 하도록 합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배광하 신부-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고자질(?)은 아담이 했다고 창세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어찌 따 먹었느냐고 추궁하시자, 아담은 사내답지 못하게 하와를 고자질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둘이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 몸을 이루었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제 탓이오’가 아닌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은 끊임없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극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같은 삶의 끝은 육과 영이 함께 죽는 죽음의 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끊임없는 몸부림 속에 깨닫는 것은, 결국 수렁의 깊고 깊은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가련한 인간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은 깊은 수렁 속에서 비로소 한 줄기 빛을 만나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이셨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몸부림 쳐도 하느님과 갈라졌던 분열을 다시 이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성령과의 일치없이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삶이셨습니다.
천사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들으신 성모님께서 믿지 못하시자,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 35).
예수님의 탄생, 세례, 광야의 생활, 갈릴래아 전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그분의 전 생애에는 늘 성령께서 함께 하셨던 삶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갈라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예수님 안의 성령께서 하나로 일치시켜 주셨기에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 6)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 13).
모든 사회적 계급과 인종과 사상이 벽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놀라운 힘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분열의 역사에 또다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청해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되는 삶이 생명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인간의 허망한 노력으로 하나임을 꿈꾸었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특별히 인류의 피비린내 나는 정복의 역사에서 대제국이 완력으로 일치를 이루고자 했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제국들이 시도했던 언어의 통일도 끝내는 치욕의 역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제자들의 말은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전쟁과 폭력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하느님 위업의 찬양을 자기들의 언어로 듣고 있다고, 통일된 언어로 들었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사도 2, 1~11).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 그토록 꿈꾸었던 지상낙원이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 어떠한 인간적 노력으로도 불가능 하였던 일치와 나눔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된 초대교회 신자들은 진정 잃어버린 옛 낙원을 지상에서 되찾았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 44~45)
그렇기 때문에 인간 창조의 첫 순간,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성령)을 불어넣으셨던 것과 같이(창세 2, 7)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죽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시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불과 같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타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자들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던 죽음의 두려움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거침없는 희망 속에 복음을 살았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오늘의 세상을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진정 생기가 사라지고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는 오늘의 신앙에 뜨거운 불의 성령께서 다시금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기양 신부-
알코올 중독자로 평생을 폐인처럼 산 아버지를 둔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는 아버지의 술 마시는 처절한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지요. 세월이 흘러 첫째 아들은 커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반대로 금주주의자가 되었지요. 상담 심리학자가 두 사람을 상담하면서 따로따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금주주의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형은 환경이 자신을 삼키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동생은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물론 동생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닫아걸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이 달라지지요.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인들 앞에서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모습으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달변에 놀라고 감동되어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가 오늘 제1독서에 나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성령 강림이지요.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은 인간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함께 하셨습니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합니다. 마리아가 깜짝 놀라 묻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천사는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예수님의 탄생 자체, 즉 처녀 잉태라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성령께서 가능하게 해 주셨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 강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과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면서 약속해 주셨지요.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그 성령이 오늘 제자들에게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사도로 변화되어 복음 선포의 열정에 온 몸을 불사르게 되지요.
바오로 사도 역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라고까지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핵심인 칠성사는 모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될 뿐만 아니라 사제는 봉헌 예물 위에 두 손을 올리며 기도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성령, 교회의 생명이신 그 성령께 내 삶을 이끌어주기를 청하며, 성령 안에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노력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허 성 신부
“오소서 성령님, 저희 안에 머무소서!”
오늘은 다락방에서 성모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던 사도들 위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께서 강한 태풍과도 같은 하느님의 숨결을 동반한 불혀 모양으로 그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충만해진 사도들은 그동안 불안에 떨며 잠갔던 다락방의 빗장문을 열고 용감하게 밖에 모인 군중들 앞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오늘은 그때 그날 30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품으로써 교회를 탄생시켰음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구약의 시대를 성부께서 주로 활동하신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공생활 시대는 성자께서 주로 활동하신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는 성령께서 주로 활동하시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얼, 혼, 기운, 숨결)으로 표현된 성령께서는 태초의 창조사업에도 참여하셨고(창세 1, 2), 구약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일꾼(모세, 여호수아, 삼손, 다윗, 여러 예언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일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영이신 성령을 받아 예언자로 활약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앞으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일할 구세주의 출현을 예고하였고(이사야 11장), 요엘 예언자는 만민에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 줄 날이 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요엘 3장).
구약에 예언된 구세주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잉태되어 나신 천주 제2위이신 성자 예수께서 공생활 시작전에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 악마의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마태 3~4장). 또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예수님은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태 12, 28).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마르 1, 8)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시어 오순절날 함께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1~2장).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고 힘있게 복음을 전파하며 놀라운 일과 기적들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보편적이었던 성령의 은사는(사도행전, 고린토1서 12장) 그동안 교회안에서 수많은 성인성녀들을 통해 끊임없이 교회안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일반 신자들 사이에는 거의 사라졌던 것이 20세기 들어서 다시 초대 교회처럼 일반 신자들도 성령의 여러 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능력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이 살아 계신 분이며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체험하고 있으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도 더 깊고 친밀한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도움심으로 새롭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더욱 깊은 기도생활로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에 맛들이고 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임을 체험하기에 전보다 더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힘쓰며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상한 언어의 은사,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여러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며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같은 성령의 열매를 전보다 더욱 많이 맺는 생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인 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주고 계십니다.
1967년 2월, 미국의 듀 케인 대학에 다니는 가톨릭 대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성령쇄신은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지금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전파됨으로써 교회 역사상 가장 빨리 세계적으로 전파된 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한국에 들어온 성령쇄신운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교황 요한 23세께서 『오소서 성령님, 이 시대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신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예수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습니다. 다음은 분명 자신들 차례라고 여겼습니다.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뵈었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들이닥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엊그제 장사 지낸 분이 막달레나 말대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에 서셨습니다. 돌무덤을 열고 나오셨듯이 닫힌 문을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현존하십니다. 인간의 차원을 극복하고 뛰어넘으셨습니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어디에나 두루 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닫힌 문을 여셨듯이 닫힌 세상을 여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영적인 몸’(1코린 15,44; 필리 3,21)을 지닌 분이십니다. 예수님 몸소 문 밖에서 문을 뚫고, 죽음 저편에서 죽음을 건너 이리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고별 만찬 때도 평화를 이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14,27) 평화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을 뚫고 성취한, 부활과 승리의 참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모든 갈등을 풀어갈 것입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20절). 부활하셨지만 여전히 몸을 지니셨습니다. 온갖 수모와 고생을 다 겪으신 바로 그 몸, 그분이십니다. 부활은 희뿌연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세상의 갈등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ㄴ절) 그들은 주님을 뵈었습니다. 공포의 분위기가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분위기로 바뀝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4,18-19),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ㄹ)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를 그들은 보았습니다. 제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목격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들뜬 분위기에 젖어 있지 않으시고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당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요한 신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파견되셨습니다. 당신의 사명을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아버지께 파견되셨듯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무력한 그들이 그냥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지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라.”(22ㄴ절) 이미 최후 만찬 때 하신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15,26) 진리의 영이신 분이 제자들의 보호자로 나서십니다. 성령을 주시기 위해 ‘숨을 불어넣는 것’은(22절) 생명을 주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신 것과 같습니다(창세 2,7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새 생명을 얻어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그분께 직접 파견되었으니 제자들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권한도 제자들에게 함께 주어 보내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요한은 예수님의 활동 전체를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결실은 용서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성령을 받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받는 일과 연결됩니다. 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도 화해와 참회·용서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령을 받아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제자들은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매고 푸는 엄청난 권한이 교회 공동체에 주어집니다. 선물인 동시에 소명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제자들의 소명이 되었고 예수님의 일이 제자들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성령을 받은 이라면 용서를 실천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공동체라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공동체는 평화를 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령을 이어주는 마지막 소명을 완수하십니다. 전에도 몇 번이고 예고하셨던 성령, 그분을 당신 온몸으로 전해 주셨습니다. 살아 있는 숨으로 오신 성령은 풀 죽은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먼 길 떠나는 제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은 용서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제자들의 결단이 모두를 위해 공평하게 나눠지는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1코린 12,7)
성령강림 : 교회의 탄생일
- 박상대신부-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오늘로서 50일간의 부활시기가 그 막을 내린다. 우리는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의 알맹이가 영원한 생명임을 깨달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대축제인 과월절(뻬샤흐)을 부활절로, 오순절(샤부옷)을 성령강림절로 지낸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부활절은 예수부활을 통하여 인류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오순절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율법을 통한 물리적 해방의 영적인 지속(持續)을 의미한다면, 성령강림절은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시는 협조자이시며 진리이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마련된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선포하며, 실제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강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 위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의 완성이며 충만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절의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비록 승천하여 오셨던 곳으로 가셨으나, 약속대로(마태 28,20) 예수께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지속적 현존(現存)의 보증(保證)이다.
그래서 성령강림은 부활시기의 마무리를 고하는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탄생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의 죽은지 사흘만의 부활과 발현, 40일간 지상체류와 승천사건은 아무래도 스승 예수의 산 증인들인 제자단(11제자와 여인 제자들)에 한정된 효과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단지 몇 명으로 조직된 소수의 집단이었고, 스승의 죽음에 직면한 집단의 태도는 차라리 조직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스승으로부터 지상 최대의 복음선포와 세상으로의 파견을 명(命)받았다.(마르 16,14-20; 마태 28,18-20)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승천직후 제자들이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다(16,20)고 하나 이 대목은 후기 편집에 해당한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사명을 수행할 능력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루가복음의 기록대로 제자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49)는 스승의 명을 따라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24,53)과 하늘의 능력을 기다리는 일로 소일(消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이 되었을 때, 한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렸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은사로 가득 차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사도 2,1-11) 성령을 듬뿍 받은 사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사도들이 모두 그 증인이다"는 요지의 논리적이고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했고, 이 설교에 믿음을 얻은 사람들 중에 그 날에만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사도 2,14-42) 드디어 소수의 제자단에 한정되어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강림절은 세상을 향한 교회공동체의 탄생일이며, 동시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인 셈이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 낮미사의 복음은 지난 부활 제2주일에 들었던 요한복음(20,19-31)의 첫 부분(20,19-23)이다. 이 대목의 서술적 시점은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던 그 다음 날이며(19절), 내용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과 제자들의 부활체험(20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 대목을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의 복음으로 선택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불어주심"과 "파견"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요한 14,16; 16,7) 아버지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하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고 하시면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하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곧바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 안에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죄와 용서에 대한 "자유처분권"이 엿보인다. 물론 죄에 대하여 "단죄(斷罪)"와 "용서(容恕)"를 선포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성령뿐이다.(16,8-11)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제자들의 활동 안에서 보시는 것이다. 즉, 성령의 협조자로서의 활동과 진리로서의 활동을 제자들의 증거행동과 복음선포활동을 묶어 두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 세상은 누구인가? 세상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배척하였으며(요한 1,10-11), 예수와 더불어 제자들을 미워하였고(요한 17,14), 결국에는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죽음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그 세상에로 파견된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하는 일"이다. 용서 없이는 복음선포도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으로 자리잡는다. 물론 사도들이 용서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돌아가신 예수님의 영(靈)이신 성령께서 사랑의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恩賜, 카리스마)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직과 신앙의 증인에로 불림을 받는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받은 일반사제직의 성숙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며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고 가르친다.(LG 11) 복음전파와 믿음의 수호(守護)는 신자의 의무와 책임인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이며 자랑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느님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다. 이는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는(로마 11,29) 하느님의 선물 전체"를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로마 5,15-16) 또 영원한 생명이 되는(로마 6,23)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고"(에페 1,6)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선물을 베풀 것"(로마 8,32)이다. 이 선물들 중에 첫째가는 것은 성령 자신으로,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내려져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심어 준다.(로마 5,5).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칠은(聖靈七恩) (이사 11,2-3)
① 슬기(sapientia): 자연·초자연적 가치 인정. 주님께 쉽게 마음을 향하는 은혜.
② 통달(intellectus):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말씀과 능력을 수용. ex) 마리아의 동정성.
③ 의견(prudentia): 선·악 구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아닌 것을 식별.
④ 굳셈(fortitudo): 신앙생활에 수반되는 장애를 극복하는 힘과 용기. ex) 순교.
⑤ 지식(scientia): 신앙감, 즉 믿어야 할 진리와 아닌 허위를 식별하는 은혜.
⑥ 효경(respectus):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형제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수용.
⑦ 두려움(timor): 경외심. 경건한 태도와 자세. ex) 경건한 성호경, 기도하는 태도.
2. 봉사의 은사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9가지 은사 : 1고린 12,8-10)
① 지혜의 말씀 은사(sermo sapientiae):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1고린 12,8)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온 실천적인 말을 하게 하여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은사이다. 예수님처럼 어떤 시험을 당할 때(마태 22,15-22)나,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받을 때(사도 4,19-20)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상대방의 그릇됨을 깨우쳐 준다.
② 지식의 말씀 은사(sermo scientiae):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1고린 12,9)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설명하거나 설교할 때 영감을 받아 말함으로써(1고린 2,13),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을 초월하여 신앙의 진리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은사이다.
③ 믿음의 은사(fides): 신앙과 다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무슨 일이든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적 확신으로써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④ 치유의 은사(gratia sanitatum):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았다."(1고린 12,9) 치유(治癒)의 은사는 영적인 치유·육체적 치유· 내적 치유의 은사로 구분된다. 영적인 치유는 고백성사, 기도, 영성체로 얻는 경우와도 같다. 육체적 치유는 일상적인 질병의 치유와 구마(Exorcismus)도 포함된다. 구마는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 지속적인 악습이나 결점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 노력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과 자력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악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의지적 통회하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구마 명령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⑤ 기적의 은사(operatio virtutum):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사도 5,12) 자연적 은혜를 넘어서서 놀라움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로 불치의 병이나 중대한 병의 즉각적인 치유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이다.
⑥ 예언의 은사(prophetia):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능력이다. "나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4,5-39) 격려나 위로의 말씀이 대부분이다. 성서적인 표현들이다. 100% 주님의 말씀은 아니다.
⑦ 분별의 은사(discretio spirituum): 성령과 악의 영, 인간의 영을 식별하는 능력으로 하나의 생각, 활동, 사건 그리고 은사의 원인과 근원이 다른 무엇의 힘인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은사이다.
⑧ 이상한 언어의 은사(genera linguarum): 심령기도와 같다. 이로써 간절히 청하면 거의 대부분 청한 바를 얻는다. 조건부 기도가 아닌 적극적인 기도이다.(1고린 14,2; 로마 8,21) 심령예언도 이에 포함된다.
⑨ 해석의 은사(interpretatio sermonum): 이상한 언어나 통상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심령기도나 심령예언을 해석하는 은사이다.
3. 성령의 9가지 열매 : 갈라 5,22-23
① 사랑(caritas; charity): 아가페적인 사랑, 즉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의 열매가 가장 본질적이고, 나머지는 사랑의 열매의 열매들이다.
② 기쁨(gaudium; joy):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기쁨에 찬 생활을 영위한다. 기뻐해야 할 일이 없음에도 샘솟는 기쁨을 말한다. "항상 기뻐하십시오!"(1데살 5,16)
③ 평화(pax; peace): 세상 풍파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화로서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 이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④ 인내(patientia/longanimitas; patience): 비록 일이 지연되는 경우라도 실망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린다.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요구되는 열매다.
⑤ 친절(benignitas; understanding of others): 이웃의 어려움을 알고 따뜻하고 우호적으로 대한다.
⑥ 선행(bonitas; kindness):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베풀어주신 시간, 재산, 재능 등을 관대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⑦ 진실(fidelitas; fidelity): 거짓없이 신뢰할 수 있고 착수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충실성을 의미한다.
⑧ 온유(mansuetudo; gentleness): 매사에 자제된 힘, 약자에 대한 너그럽고 부드러운 힘을 말하며, 너무 따지고 들지 않는 자세이다.
⑨ 절제(continentia; selfcontrol) : 욕정을 눌러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주권 아래 복종시키고, 유익하지 않는 것을 절제하는 힘과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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