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반가운 여행
강화도의 재발견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8. 11 vol. 497
Ganghwa
오래된 방직 공장과 세월의 때가 묻은 한옥에
보석 같은 공간이 숨어 있다.
다시 빛나기 시작한 강화도 구도심의 또 다른 매력을 찾아서.
write
• photograph 박은경
직조기 소리 멈춘 조양방직은 시간의 이야기를 곳곳에 남긴 채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뾰족뾰족 옛 공장의 외관을 그대로 살린 건물 자체가 볼거리다.
직조기 소리 요란하던, 빛나던 그 시절
조양방직·소창체험관
강화는 직물의 도시였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구와 어깨를 견줄 만큼 그 위상도 대단했다. 심도직물, 평화직물, 이화직물 등 당시 유명한 직물 업체들이 모두 강화도에 터를 잡았다. 직물 공장 종업원이 강화읍에만 4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 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 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노동자와 공장 기계가 하나 둘씩 섬을 떠났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당시 방직기 소리가 요란하던 공장들은 제 기능을 잃은 채 시간 속에 갇혔다. 몇몇은 폐가처럼 방치됐고, 몇몇은 건물 일부만 남았다. 또 몇몇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문화 공간으로 변신했다. 조양방직도 그 중 하나다.
1933년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조양방직은 강화 최초의 인견 공장이었다. 조양방직이 문을 열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가내 수공업에서 기계화로
바뀌었고 몸집을 키웠다. 세월이 흘러 강화 직물이 쇠락하자 조양방직도 가동을 멈췄다. 건물은 단무지 공장, 젓갈 공장을 거쳐 폐가로 전락했다.
흉물스럽게 스러져가던 건물은 지난해 지금의 주인을 만나 올해 7월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됐다. 990㎡(약 300평)가 넘는 공장터와 건물 골조를 그대로 살려 시간의 이야기를 곳곳에 남겼다. 음료와 케이크를 판매하지만, 카페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허물어져 가던 벽면은 근사한 미술관이며 영화관이 됐고, 기다란 작업대는 커피 테이블로 바뀌었다. 기계도 사람도 떠난 공간은 중국과 유럽 등지에서 찾은 골동품으로 채워졌다. 깨진 유리창을 간직한 영국제 문짝, 체코의 옛 기차에 달렸던 둥근 거울, 겨울마다 몸을 뒤집느라 애쓴 붕어빵 기계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놓였다.
빛 바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예술적
가치와
흘러간
세월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
펼쳐진다.
무심하게
툭
놓인
오래된
물건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예전부터
함께
어울려
살았던
것처럼 억지스럽지
않아
더
좋다.
규모는
작지만
알찬
재미가
있는
소창체험관
19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평화직물은 올해 초 소창체험관으로 모습을 바꿨다. 소창은 기저귀나 행주로 사용하던 면직물이다. 1956년 문을 연 평화직물은 소창과 더불어 화려한 문양의 인견을 주로 생산했다.
체험관에서는 베틀과 직조기, 1800년대 재봉틀, 평화직물에서 직조된 직물 등 옛 방직 산업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직접 베틀을 이용해 소창을 짜보거나 이미 만들어 놓은 소창에 다양한 도장을 찍어 나만의 손수건으로 간직할 수도 있다.
체험관 옆에는 1938년 지어진 한옥이 있다. 적산가옥과 한옥을 반반 섞어놓은 분위기다. 대청마루에 앉아 마시는 따끈한 차 한 잔이 온몸을 녹여준다. 뒤뜰에 가면 보송보송 솜털뭉치가 달린 목화가 밭을 이루고 있다.
손때 묻은 재봉틀과 새하얀 목화 솜까지 챙겨봤다면 잠시 옛 한옥에서 여유를 부려보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얼핏 보면 사찰처럼 보인다.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이 내부에 전시돼 있다.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처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 구도심을 걷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에 서 있는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절집 또는 큼지막한 양반집처럼 보이는 이 건물의 정체는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로 알려졌다.
2001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강화성당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의미를 담아 터를 잡았다. 멀리서 보면 큰 배 한 척이 강화읍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듯하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외삼문과 내삼문이 나타난다. 내삼문은 절집 천왕문에 해당하는데 종루를 겸하고 있다.
종은 당좌(撞座·종을 칠 때 망치가 닿는 자리)에 새겨진 십자가가 아니면 절의 범종과 구별이 쉽지 않다. 지금의 종은 1989년 다시 만들어졌다. 애초 영국에서 들여온 종은 1943년 일본이 강제로 공출해갔다.
내삼문을 지나면 기와를 얹은 본당이 한눈에 든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져 익숙하고 편안한 모습이다.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용마루 위에 얹은 십자가가 은은하게 종교색을 드러낸다.
건물 앞마당 오른편에는 보리수 한 그루가 우람하다. 영국에 다녀오던 신부가 인도에서 10년생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원래 건물 왼편에 회화나무도 한 그루 있었는데 2012년 한반도를 덮친 태풍 볼라벤의 강풍에 안타깝게도 쓰러졌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외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아래가 트인 중층 구조다. 중앙에 본당을 놓고 측면에 복도를 두는 바실리카 양식이 가미돼 독특한 느낌을 준다. 마치 우리나라 개화기 모습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듯 생소한 모습이다. 유리창과 서양식 조명도 인상적이다. 조명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지만 유리창은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다. 중층에 난 창이 자연광을 넉넉하게 안으로 끌어들여 화사하고 포근하다.
목재는 뗏목을 이용해 운반해온 백두산 소나무를 썼다. 도편수(집을 지을 때 책임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는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목수가 맡았다. 전통 방식대로 다듬은 나무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끼워 맞춰 지었다. 아치형 출입문은 건축 당시 영국에서 들여와 설치한 것으로 지금까지 열쇠로 문을 여닫으며 사용 중이다.
성당은 휘 돌아보자면 10분이면 족하지만, 조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 중에서도 세례대와 제대는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둘 다 성당 건축 당시 강화도 화강암으로 제작한 의례물로, 지난해 12월 국가지정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제대는 바로 앞까지는 출입이 불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없지만, 세례대는 손으로 만져보며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팔각형 모양의 세례대에는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去惡), 작선(作善)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신을 닦고 마음을 씻으며, 악을 떨쳐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제대 가까이 걸린 성당 깃발에는 칼과 두 개의 열쇠가 수놓아져 있다. 이 성당을 지키는 두 성인, 바울의 검과 베드로의 열쇠를 뜻한다. 깃발 앞쪽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용하던 독서대가 서 있다.
개화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드라마 세트장에 들어선 듯하다.
아치형 출입문은 건축 당시 영국에서 들여왔다.
시간으로 완성한 집
남문한옥 대명헌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은퇴 이후 지낼 한옥을 4년 가까이 찾아 다니던 도예가 최성숙 씨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강화읍 남문안길 7, 지금의 대명헌이다. 그는 강화산성 남문에서 마을 길을 따라 걷던 중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고, 운명처럼 이 집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집은 40년 가까이 빈집으로 방치돼 있던 터라 먼지와 잡초가 옥죄듯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틈 사이로 언뜻 보이던 기와지붕이며 다락 외관에 반해버렸고, 그 길로 집주인을 수소문해 계약서에 덜컥 도장을 찍었다.
1928년 건립된 이 집의 원래 주인은 강화도 천석꾼으로 알려진 황국현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머나먼 백두산에서 잣나무를 베어와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창틀과 마루를 하나하나 짜 맞춰 지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백범 김구 선생이 대명헌에 머무르며 남긴 사진.
맨 앞줄 오른쪽이 김구 선생이다
황 씨 집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방직 공장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배재학당을 짓고 독립군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씨의 맏사위인 김근호 씨는 배재학당 이사장을 지냈다. 1947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이 집에 머무르기도 했다. 당시 김구 선생과 지인들이 이 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최성숙 씨는 고택을 매입한 이후에서야 가옥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잃어버린 역사의 페이지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집을 매만졌다.
지붕에서 쏟아진 흙을 거둬내고 무너진 기와를 정성껏 쌓아 올렸다. 40년간 쌓인 세월의 무게는 녹녹하지 않았다. 꼬박 6년을 하루같이 쓸고 닦고 나서야 겨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대명헌 곳곳에 숨어 있는 보물 같은 흔적들을 하나씩 찾다 보면
어느새 100년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최성숙 씨가 매미 문양 노리개를 걸어 보이고 있다. 약연. 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기구다.
본래 집은 본채와 문간채, 별당채, 곳간채로 구성돼 있었으나,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았다. 본채는 ‘ㄱ’자 구조로 대청과 안방, 사랑방, 누마루, 부엌이 연결됐다. 전체적으로 영국풍이 결합되어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헤링본 무늬의 마룻바닥과 에칭 기법으로 마니산 등의 문양을 낸 크리스털 유리문 등이 모두 영국식이다.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는데 서양식 발코니 같은 난간이 설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집안 곳곳은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하다. 금사, 은사로 매미를 수놓아 만든 노리개, 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기구인 약연, 흥선대원군이 신동의 그림이라며 감탄했다는 석담의 화폭 등 대부분 최성숙 씨가 사 모으면서 생명력을 갖게 된 것들이다. 대청마루 안쪽에 있는 그릇장과 금고는 예전 집주인이 남긴 물건이다. 느티나무 결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그릇장이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럽다. 유리 미닫이문에는 돌가루로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문간채에는 서점과 그릇가게가 문을 열었다. 3년 전 대명헌을 통해 인연이 된 부부가 3개월 전부터 하나씩 맡아 운영하고 있다. 아내가 주인인 그릇가게 ‘유림상회’에서는 체코, 폴란드 등지에서 직접 들여온 수제 그릇을 만날 수 있다. 하나 같이 독특하고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남편은 세상을 하얗게 밝히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서점의 이름을 ‘소금 빛’으로 지었다. 수량은 적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채워져 있다.
대명헌은 전화로 예약하고 방문해야 한다. 집주인 최성숙 씨가 고택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관람 후에는 강화 순무를 직접 덖어 우려낸 차를 내준다. 관람료는 1인 1만원. 11월 15일 이후부터 내년 3월까지는 숙박 예약만 가능하다. 최대 6명까지 하루에 한 팀만 받는다. 집안 곳곳을 느긋하게 둘러보며 뜨끈한 구들방에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1인 1박에 8만5000원이다. 장작비 1만5000원 별도.
문간채에 문을 연 서점과 그릇가게.
대명헌을 통해 연을 맺은 부부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INFO
조양방직 인천 강화군 강화읍
향나무길5번길 12
032-933-2192
소창체험관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20번길 8 032-934-2500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336 032-934-6171
남문한옥 대명헌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010-9075-1108
유림상회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032-934-3456
소금빛서점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010-9845-5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