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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문협과 보령문협 자매결연
일시:2018년 5월 26일 토요일
장소:충남 보령문협 회장님댁 지석석공예술공원
* 보령 지석석공예 예술원 김윤자 <들꽃> 시비
오늘은 서초문협과 보령문협이 자매결연을 맺는 날이다. 서초문협은 내가 몸담고 이사로 활동하는 문단이고, 보령문협은 나의 고향문단으로 출향문인으로 활동하는 문단이다. 그래서 중간에서 내가 가교역할을 하여 성사된 자매결연이다. 보령문협 김유제 회장의 지석석공예 예술원에서 행사를 한다. 나는 기차를 타고 웅천역으로 와서 택시로 왔다. 인사를 나누고 나의 시비 [들꽃] 앞에 왔다. 지난 해에 김유제 회장이 건립해준 시비다. 고마운 마음이다. 그리고 다룬 문인들의 시비도 보며 행사 시간을 기다렸다.
* 서초문협과 보령문협 자매결연 행사장
서초문협 임원단과 보령문협 회원들이 함께 자리하여 자매결연행사를 거행했다. 행사장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아주 그윽하고 문향과 낭만이 깃들어 있다. 보령문협 회원들과 서초문협 임원단의 소개와 각 회장님의 인사, 그리고 자매결연 서약서, 선물 교환 등 아주 보람된 시간이었다. 두 문단의 더 큰 발전을 빈다.
* 서초문협과 보령문협 자매결연 시비제막
자매결연 행사를 마치고 장소를 옮겨 서초문협 김유조 회장의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보령문협 김유제 회장이 석공예 장인이어서 자매결연을 기념하여 선물로 건립해주는 것이다. [시, 아를에서] 장시다. 시낭송까지 마치고 단체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서초문협과 보령문협 자매결연 중식
행사를 모두 마치고 함께 중식을 했다. 술잔도 건네며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신 보령문협에게 감사하며 잘 먹었다.
* 보령댐
보령댐은 내 고향 보령의 큰 명소가 되었다. 나도 여러 번 지나며, 혹은 내려서 탐방했었던 곳이다. 보령댐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에 있는 다목적댐이다. 높이 50m, 길이 291m, 총저수량 1억 1700만 톤의 댐이다. 1992년 6월부터 한국수자원공사가 4286억 원을 들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등을 공급할 목적으로 건설한 다목적댐이다. 1996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성주산과 아미산의 계곡물이 흘러드는 웅천천을 막아 세운 댐으로,은어가 많이 서식했던 웅천천이 댐이 들어서면서 거대한 인공호수가 되었다. 보령을 비롯한 부근의 서산, 서천, 홍성, 예산, 태안, 당진 7개 시군에 생활용수를 공급한다. 호수 주변 도로에 무궁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보령댐 수몰기념관을 비롯하여 도화담약수와 옥마산 중대암의 영천약수가 있다. 수현사(충남문화재자료 142), 용암사, 보령 삼계리 입석 등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오늘은 버스 안에서 조망만 하였다. 잘 보이는 전망대에 잠시 정차하여 산과 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자랑스런 내 고향 명소 보령댐의 우람한 풍경이 비경이다.
* 보령 물빛 공원
보령댐을 빙 돌아 버스가 정한 곳에 보령 물빛공원이 있다. 이곳은 보령댐 제방 아래 위치한 공원이다. 커다란 돌비에 '보령 물빛공원' 이라는 글작 새겨져 있다. 보령댐 환경정비 사업으로 2008년에 조성된 것이다. 공원에는 시비와 함께 휴게소, 다목적운동장, 만남의 광장 등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아름다운 공원이다.
* 물빛 공원 임영조 시비
한국시인협회에서 자주 뵙던 임영조 시인님의 [물] 시비가 있다. 중앙대학교대학원 문창과에서 강의를 하시던 마지막 해에 한국시인협회에서 당진 심훈생가 필경사에 탐방 갔을 때 뵌 것이 마지막이다. 그날 선생님께 내년에 나도 중앙대학교에 등록하여 선생님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하였더니 오지말라고 하셨다. 왜냐고 물으니 몸이 많이 아파서 금년으로 강의를 마치신다는 것이다. 소화가 안된다고 하셨다. 그 전 해에 한국시인협회 시의 날 행사 후 인사동 식당 지리산에서 석식만찬을 하는데 나는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그때 선생님 앞에 맛있는 반찬을 놓아드리며 많이 잡수시라고 했더니 그날도 소화가 안 되어서 많이 못 먹는다고 하셨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60대 아까운 나이에 가셨다. 오늘 시비 앞에 서니 생시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선생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린다. 선생님 시비 앞에서 선생님과 마주하듯 기념사진도 찍고, 왜 그리 빨리 가셨냐고 따져 물으며 어루만져드리기도 하고, 마지막 떠나며 간절히 명복을 빌었다. 내 고향 보령에서 임영조 선생님가 함께 태아났다는 것이 큰 자부심으로 가슴에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 토함 이지함 묘소
이곳은 국제펜문학탐방에서도 왔던 곳이다. 토정 이지함은 한산이씨이신 나의 어머니의 조상님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정겨운 마음으로 묘소를 찾았다. 오늘은 남편과 나의 큰아들까지 같이 왔으니 참으로 뜻깊은 날이다. 이지함(李之菡)은 1517년 인종 1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토정(土亭)이다. 일찍이 그는 용산의 마포 강변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아래에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를 짓고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고 했다. 그는 체격이 당당했고 키가 커서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다.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지만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가 웅장했다. 그는 고려 말의 명현이었던 목은 이색의 7세손이었다. 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이치(李穉), 어머니 광산 김씨는 집현전 학사 김맹권의 딸이다. 14세, 16세 때 연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형 이지번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글을 멀리했는데 형의 권유로 학문을 익히면서 금세 각종 경전에 통달하고 온갖 사서와 제자백가의 책까지 섭렵했다. 이지함은 당시 뭇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하려 했는데 이웃사람이 갑자기 벼슬을 얻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보고 비천하게 여겨 과거를 포기했다. 23세 때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 등 각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 그의 성품은 매우 호방하고 따뜻했다. 종실이었던 모산수 이정랑의 딸과 혼인했을 때 그는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저고리 차림으로 돌아왔다. 집안 사람들이 두루마기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묻자 홍제교를 지나다가 얼어 죽게 된 거지 아이 세 명을 만났는데 그 모습이 하도 가련하여 두루마기를 세 폭으로 나누어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고 대답했다. 그 후 풍습에 따라 충주의 처가에 살던 이지함은 1549년 어느 날 갑자기 가솔들을 이끌고 고향 보령으로 이사했다. 그때 연유를 묻는 형에게 처가에 길운이 없어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대답했다. 과연 이튿날 장인 모산수가 충주에서 역모를 일으킨 이홍남의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충주의 양반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충청도라는 명칭이 청홍도로 바뀌었다. 이지함이 만일 충주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듯 이지함은 일찍부터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지함은 한때 승정원 사관 안명세와 매우 절친했다. 그런데 안명세가 을사사화에 대한 내용을 사초에 정확하게 기록했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실망한 그는 출사의 뜻을 깨끗이 접고 천하를 떠돌았다. 조카 이산해는 〈숙부묘갈명〉에서 당시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했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해변에 장사지냈는데, 장차 바닷물이 무덤을 덮칠 것이라 예측하고 돌로 제방을 쌓으려 했다. 이 계획은 포구가 넓고 깊어 끝내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늘에 달렸으나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해 재난을 막는 계획은 게을리 할 수 없다.” 그의 형 이지번은 백의정승이라 칭송받았을 만큼 청렴한 인물이었는데, 중종 때 권신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섬에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죽은 뒤 석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의 아들 이산해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유명해서 당대의 실세였던 윤원형이 사위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이지번은 벼슬을 버리고 단양으로 피신하여 구담에서 은거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구선이라 불렀다. 이때 이지함은 형과 함께 내려가 조카 이산해와 이산보를 가르쳤다. 나중에 서울에 살던 이지번이 병석에 눕자 이지함은 보령에서 도보로 상경하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마침내 1575년 선조 8년 12월 1일 형이 죽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실상 나를 가르치셨으니 이것은 형님을 위한 복(服)이 아니고 스승을 위해 입는 복이다.’ 큰조카 이산해는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고 북인의 영수로서 벼슬도 영의정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상대적으로 작은조카 이산보는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산보에 대하여 “대인은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법인데, 오직 산보만이 그에 가깝다.”고 하면서 “옛날에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고 큰 절의를 세움에 임하여 뜻을 빼앗기지 않을 만한 자라는 말이 있는데, 산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 세 명의 적자가 있었는데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아내가 50이 넘어 섬에서 낳은 산룡은 12세 때 역질로 죽었다. 서자인 이산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지함은 명가의 후손, 산림처사의 길을 걷고, 효성과 우애로 세상을 감동시키고,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을 나누고, 실학의 근본을 설파하고, 기행 속에서도 예도를 지키고, 포천 현감이 되어 시무책을 건의하고, 아산 현감으로 민생을 돌보고, 임진왜란을 예견하는 등 여러 면에서 탁월한 분이었지만 특히 《토정비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토정비결》은 19세기 말부터 급격하게 유행의 물결을 탔던 비결서이다. 순조 대의 학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당시 정초에 한 해의 신수를 보는 방법은 《토정비결》이 아니라 윷가락 같은 나무조각을 사용하는 오행점이었다. 그러므로 《토정비결》은 순조 이후부터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토정비결이 인기를 얻은 것은 이전에 점술서로 쓰인 주역보다 점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주역은 개인의 사주에서 생년월일시를 모두 포함하지만 토정비결은 시(時)를 제외하고 연월일(年月日)을 괘에 맞추어 숫자로 분류한다. 총 144개로 이루어진 토정비결의 점괘는 ‘북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구설수가 있으니 입을 조심하라.’, ‘봄바람에 얼음이 녹으니 봄을 만난 나무로다.’처럼 개인의 길흉화복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점괘의 대부분이 길조를 담고 있고 나머지도 흉조이지만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최선의 삶을 독려한다. 최근 학자들은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 민간에서 전해져온 책자에 예전부터 친숙했던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세도정권의 전횡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던 당대에 궁핍한 삶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던 백성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던 토정 이지함이 희망을 주는 비결서의 저자로 낙점되었던 것이다. 외가 쪽이지만 자랑스럽고 나와도 인연이 깊은 보람되고 뜻깊은 탐방이다. 나의 어머니가 생시에 조상이신 토정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자랑스러워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여기서 아주 가까운 오천 선산에 누워계신다. 한참을 보고 또 보고, 내려오면서도 어머니를 떠나듯 자꾸 뒤돌아보고 아쉬운 걸음으로 하산하였다.
* 보령 화력 발전소 탐방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에 있는 보령화력발전소에 왔다. 오천은 나의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하여 아주 정감어린 곳이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종종 오천에 왔었다. 오늘 이렇게 많이 발전한 내 고향에 오니 감개무량하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설명과 함께 잘 탐방하였다. 보령화력발전소는 국내 최대 면적의 화력발전소로서 유연탄과 중유를 각각 전소할 수 있는 50만㎾급 기력발전설비 2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고정화력발전소(高亭火力發電所)로 불렸으나 1984년 4월부터 현재의 보령화력발전소로 개칭되었으며, 당시 발전소 부재상태였던 충청남도에 서천화력발전소와 함께 최초로 건설된 발전소로서 이 지역을 새로운 전력생산단지로 형성시킨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제4차 전원개발5개년계획(1977∼1981)에 의거 삼천포화력발전소와 함께 국내 최초로 건설된 대용량 유연탄 전소 발전소로서 유연탄 이용기술의 개발 및 축적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물론 전력구조 및 우리 나라 에너지 구조 개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발전소의 건설사업은 국내 최초로 한국전력공사 주도하에 분할발주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보일러는 한국중공업주식회사와 미국의 바브콕 윌콕스(B&W)사가, 터빈 및 발전기는 대우중공업주식회사와 일본의 도시바(東芝)사가 각각 제작 공급하였고, 기타 보조기기는 한국중공업 외 27개 업체가 분할 공급하였으며, 시공은 대림산업주식회사가 일괄 도급 시행하였다. 건설공사는 1979년 12월 12일에 착공, 1983년 12월 28일에 1호기가, 1984년 9월 28일에 2호기가 각각 준공되었으며, 총 건설비는 4434억9400만 원이 소요되었다. 설비상 특징으로는 국내 유일의 고성능 전기집전기가 설치되어 연소성이 불리한 탄종에 대해서는 연소효과가 우수하고 컴퓨터에 의해 주기기의 조작이 완벽하게 자동으로 제어되며, 11만t급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부두와 하역설비, 150m 높이의 고연돌 및 폐수처리장치 등 철저한 공해방지 설비를 갖추고 있다. 주연료는 호주 및 캐나다 지역산 유연탄을 사용하며, 또한 중유 전소에 의한 발전도 가능하므로 연료수급 변동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발전소는 연간 약 61억㎾h의 전력을 생산, 345kV 초고압송전선을 통하여 경인지역과 중부지역에 공급하며, 연간 230여 만t의 유연탄을 소화하여 유류대체 연료비 절약효과를 도모하고 있다. 한편, 이 발전소는 처음에 50만㎾급 유연탄 발전설비 6기를 건설할 수 있도록 부지 조성 등 기본설계가 되어 있으며, 1990년대 초 동일 용량의 후속기 2기(3^4호기)의 건설사업이 추진, 준공하여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대단위 유연탄 연소 화력발전단지가 되었다. 오늘 본 화력발전소는 8호기까지 있다. 전에 보령백일장 작품 심사위원으로 이 근처 숙소에서 유숙하며 심사할 때 본 화력발전소는 6호기까만 있었다. 그때 쓴 나의 시 [대천 바다 당고물]에도 그 6호기가 나온다. 우뚝 솟은 굴뚝과 바다 등 매우 자랑스럽고 훌륭한 내 고향 명소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길 빌며 떠나왔다.
* 대천 바다 당고물
당고물은 가두진 물을 뜻한다. 유년시절부터 충청도 내 고향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나의 시 제목도 [대천 바다 당고물]이로고 붙여서 지었다. 10여 년 전 보령문협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왔을 때 해변 숙소에서 라룻밤을 지새우며 심사하고 새벽 대천 바다 당고물을 보고 지은 시다. 오늘 그 주변 해변로를 달리며 대천 바다 당고물을 본다. 어부의 비린 손과 목숨 같은 바다의 소산물을 씻어주는, 젖은 영혼까지 씻어주는 당고물 바라보니 참으로 정겹다.
* 대천 바다 머드광장
오늘의 일정 마지막 순서로 대천 바다 머드 광장에 왔다. 7월에 세계적인 머드 축제가 오픈되는 광장이기도 하다. 조각상은 머드축제의 대표상징물이다. 김유제 회장이 제작한 것이다. 서초문협과 보령문협 회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석양이 뒤에서 비춰 약간 어둡지만 그윽하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석식만찬으로 해물뚝배기를 먹었다. 풍성한 해물과 함께 맛있는 식단이다. 내 고향 보령의 바다 내음 물씬 배인 오늘의 석식만찬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두 문단의 아름다운 교류와 발전을 다짐하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대천역에서 본 일몰 비경
행사를 모두 마치고 대천역으로 왔다. 귀가하기 위해서다. 들녘 너머 바다로 지는 일몰이 비경이다. 황홀하게 분사하는 저녁 햇살이 눈부시다. 모두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