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또 하나의 ‘큰 별’ 지다
정대판 축복사 10월 7일 서거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한국 교회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교회 발전에 결코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정대판 축복사가 10월 7일 오후 7시 40분, 긴 병마와의 씨름을 끝내고 편안한 안식에 들었다.
1933년 7월 1일 일본 오사카(Osaka, 大阪)에서 태어난 고인은 12세 때인 1945년 4월 전남 여수로 귀국,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2년 서울대 농대 농학과에 입학을 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1학년을 마치고 중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소년시절부터 종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청년 정대판은 1953년 장로교 총회 신학교(예과 2년, 본과 3년제)에 입학, 목회자의 꿈을 안고 신학공부에 매진한다. 예과 1학년 때 본과학생이 공부하는 헬라어(신약원전) 수업에 참여, 1등으로 과정을 마침으로써 일찌감치 교수들의 눈에 들었던 그는 학업성적은 물론, 종교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신학교 교수감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된 학회의 회원이 되면서 교수들의 특별지도를 받는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정대판이라는 재목을 한국 땅의 개척기에 요긴하게 쓰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주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정대판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신학대 4학년이던 1956년 여름, 친구 장세천의 권유로 서울 성북구 정릉에서 열린 후기성도들의 피크닉에 참가한 것이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는 첫 계기였다. 피크닉 참가자는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잘 계획되고 빈틈없는 그 모임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은 그는 곧바로 후기성도 전임선교사 게일 이 카(Gail E. Car) 장로와 복음토론을 시작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학생 정대판은 학교로부터 몰몬교와 신학교 중 하나를 택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고, 이미 회복된 복음의 참됨에 대한 간증이 싹트고 있었던 그는 망설임 없이 신학교를 자퇴한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은 1957년 1월 7일, 일찍이 개신교의 목회자와 신학대학의 교수를 꿈꿨던 청년 정대판은 게일 이 카 장로¹로부터 침례를 받고 다음날인 안식일에 김호직 박사²에게서 안수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회원이 된다. 주님의 교회 성도가 된 정대판 형제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찬송가와 공과 교재 등의 번역작업이었다. 침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현 관리본부의 전신인 번역실 설립에 동참하여 주일학교, 상호부조회, 신권회 공과교재의 번역 출간에 팔을 걷어붙였다. 침례 받기 전인 1956년 10월에 이미 50곡 분량의 찬송가 번역에 참여했던 그는 1962년 홍병식 형제 등과 함께 150곡 분량의 찬송가를 번역하여 펴냄으로써 당시의 성도들에게 우리말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선교사합창단, 지방부합창단 등을 조직하여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음악발전에도 열정을 쏟던 그는 1965년에 시작한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의 번역을 1968년에 끝내, 당시 선교부 회장이던 스펜서 제이 팔머 회장의 승인을 받아 이 새로운 경전의 번역자로 정대판이라는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렇듯 주님으로부터 받은 고귀한 달란트인 외국어 실력과 음악적 재능을 초창기 한국교회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그였지만, 1968년 그에게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시련과 아픔이 찾아오게 된다. 그렇게 교회를 떠난 이후에도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음악적 열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여러 개신교단의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1984년 어느 봄날, 그 옛날 그가 신촌지부 지부 회장으로 봉사했던 때의 전임선교사였던 마크 이 피터슨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그에게는 인생행로를 바꿀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1965년부터 68년까지 한국에서 전임선교사로 봉사했던 피터슨은 브리검 영 대학 아시아 및 근동언어학과 교수로 미국 내 한국학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한국문화의 전도사라 일컬어지던 인물. 당시 풀브라이트장학재단 이사장으로 한국에 머물고 있던 마크 이 피터슨은 옛 친구이자 존경하는 교회지도자였던 정대판이 교회와 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가슴아파하다가 가까스로 그의 거처를 찾아내게 된다. 피터슨이 다시 만난 옛 지도자는 다니던 회사의 파산으로 매우 곤궁한 상태에 놓여있어 두 사람의 만남에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수입이라곤 정 형제가 성가대 지휘자로 받는 몇 푼의 거마비가 전부였던 것. 그런데다 정 형제의 아내 황안례 자매는 헤모글로빈 결핍증으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사정을 목도한 피터슨은 앞 뒤 가랄 것 없이 먼저 황 자매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는 한편, 치료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곧바로 황 자매가 침례를 받도록 인도함으로써 마침내 정 형제가 교회로 돌아올 길을 텄던 것이다. (마크 이 피터슨은 1987년 부산선교부 회장으로 부름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교회로 돌아온 정대판 형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는 새로운 부름들이 주어졌다. 무역관련 업무에 복귀하면서 1986년 경남 마산으로 이주한 그에게 부산 서 스테이크 고등평의원에 이어 마산 와드 감독이라는 부름이, 직장을 서울로 옮긴 1988년 이후에는 북 스테이크 고등평의원과 스테이크 회장단 제1보좌, 서울성전 봉사자 등의 부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음악은 그의 가슴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1989년부터 온누리합창단 개편에 참여하여 지휘자 겸 부단장의 책임을 맡게 되고, 1995년에는 온누리합창단 미국 4개 도시 순회공연을 이끌던 중 솔트레이크 교회본부를 방문, 당시의 고든 비 힝클리 회장과 배석한 십이사도들 앞에서 찬송을 부르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인천으로 이주한 1996년 이후에는 인천스테이크 고등평의원에 이어 2001년 9월부터 2007년 9월까지 인천스테이크 축복사의 부름을 받는 등 쉼 없는 활동을 펼쳤다.
한국 교회 초기의 개척자이자 성도들이 나아갈 길을 비추는 큰 별이었던 고 정대판 축복사!
고인이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고인이 한국교회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부분은 초판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 및 찬송가 번역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런데 2005년에 출간된 개정판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 재번역 작업에도 고인의 손길이 미쳤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고인은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 개정판의 첫 번째 번역자(First Translater)로 참여해 6년 동안 자신이 한 초판 번역을 재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이처럼 고인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을 스스로 수정하는 것조차 받아들이는 겸손의 미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년에 당뇨병을 앓은 고인은 합병증인 당뇨망막증으로 시력을 잃는 등 고초를 겪다 2007년 9월 아들(정승일 형제)이 있는 부산 영도로 이주, 부산 스테이크 고등평의원의 임무를 수행하며 마지막까지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 김호직 박사에 이어 이호남, 김차봉, 서원 등 먼저 간 한국교회의 큰 별들을 따라 홀연히 세상을 등진 고 정대판 축복사의 타계에 고인의 생애 마지막 6년여를 함께한 부산지역 성도들은 크나 큰 상실감 속에서도 유가족과 함께 영도 해동병원에 고인의 빈소를 차리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며 발길을 잇는 조문객들을 맞았다. 10월 8일 오후 8시에 가진 추모 예배에는 부산지역 성도들은 물론 평소 고인을 존경하고 따랐던 경향 각지의 성도들이 참석해 고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 날 추모예배에서 추모사를 한 전 부산선교부 회장이자 현 교회 역사 국가 고문인 서희철 형제와 전 총관리역원 고원용 형제, 그리고 지역 칠십인인 배덕수 장로는 한결같이 고인이 이룬 업적을 기리고 고인의 발자취에 찬사를 바쳤다. 끝까지 병수발을 들며 병석을 지켰던 미망인 황안례 자매는 “긴 투병이었지만, 너무 많이 괴로워하시지 않고 조용히 얌전하게 돌아가셔서 그나마 다행이죠.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저희 부부에게 베풀어주신 영도지부와 부산 스테이크 형제 자매들의 보살핌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며 하나님과 성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반려자를 잃은 애끓는 심정을 달랬다.
이제 세상 고통을 다 내려놓은 고인은 10월 9일 오전 11시에 경남 양산 석계공원묘지에 누워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긴 잠에 들었다.
[기사제공: 부산 스테이크 전영준 형제]
아내와 함께 미소짓는 정대판 형제(왼쪽)
주
1. 게일 이 카 장로: 그를 침례 준 카 장로는 1962년에 한국에 최초로 선교부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 한국 선교부 회장이 되었다.
2. 김호직 박사: 그를 회원으로 안수한 김호직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후기성도가 된 분으로 초창기
한국교회의 텃밭을 일구는데 앞장을 섰던 큰 지도자이다.
첫댓글 편히 쉬십시오 축복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