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 1689).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인물이다. 그는 인조때 출사하여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에 이르기까지 정계를 풍미했던 주자성리학 (朱子性理學)의 아이콘으로서 조선중화 주의(朝鮮中華主義)에 기반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완고한 명분론과 교조적인 해석으로 안으로는 붕당(朋黨)을 촉발 하고, 밖으로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을
고수함으로써, 후기 조선의 폐쇄화에 한 몫을 했다는 평을 함께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노론의 영수였던 그는 결국 1689년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다가 사사(賜死)되지만, 생전 그 어마어마한 정치적 영향력과 정신세계를 엿보고 싶어 괴산 화양서원(華陽書院) 으로 향했다.
원래 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 이었으나, 우암이 들어온 후 중화의 양기가 서려있다는 뜻으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쳤다는 이 계곡은 무심한 물소리와 흩날리는 낙엽으로 청명한 늦가을의 정취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1696년(숙종 22년) 사액서원으로 건립된 화양서원은 그 후 서원이 폐쇄되고 묘정비가 땅에 묻히는 등 숱한 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 장소에 복원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만력제)과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 (숭정제)을 모신다는 만동묘(萬東廟) 였다.
모든 물길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 (萬折必東)에서 따왔다는 만동묘는 주자성리학의 본향인 명나라에 보답하는 의미에서(再造之恩) 서원 뒷편의 가파른 돌계단위에 당당히 세워져 있었는데, 웬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도덕의 정치이념화가 초래하는 무서움이 느껴졌다.
2. 괴산읍내 멀지않는 곳에 있는 홍범식 (洪範植 1871~1910 호는 一阮) 고택에 들렀다. 1730년경 건축된 정남향으로 지어진 오밀조밀한 한옥을 2008년경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홍범식 선생은 조선후기 사도세자의 비빈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서 할아버지 홍우길은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아버지 홍승목은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특진관을 지낸 명문가에 태어나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1902년 공직에 나아가 혜민원 참서관, 태인군수, 금산군수등을 지냈다. 특히 태인 군수 시절이었던 1907~ 1909년에는 아전들의 수탈을 금지하고 수리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며, 1910년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고 관아에서 목을 매어 의절 하였다. 아래는 장남에 남겨진 유서의 내용이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홍범식 선생의 장남은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알려진 홍명희 (洪命憙 1888~1968 호는 碧初)라는 사실이다. 그는 1919년 3.19 괴산만세시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일제시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임꺽정에 끌렸는지 후일 8.15 해방 공간에서 월북하여 북한의 부수상과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지낸 것을 볼 때 격동적인 삶의 무상을 실감케 한다.
3.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이었던
김시민(金時敏 1552~1592)을 모신 충민사라는 사당이 남한강 상류격인 달천변 야트마한 야산 자락에 있었다. 이 지역이 고향인 장군의 영정에 참배하고 사당옆 언덕배기에 올라 그를 생각해본다.
김시민 장군은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 군기시 판관 등의 신분으로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전공을 세우다가, 진주통판으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 부임, 성곽을 보수하고 화약과 총통을 확충하여 3,8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장군 평소태 (平小泰)를 사로잡는 등 2만여명의 파상적인 공세를 물리치고 진주성을 사수했으나, 쓰러진 적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전사 직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으며,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받았다. 이 진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데, 전쟁전 일본 통신사로 다녀와 적정을 잘못 보고한 학봉 김성일도 후일 진주성에 합류해 왜적과 싸우다가 병사한다.
돌아오는 길, 임진왜란때 남한강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우다가 8천여 병사들과 장렬하게 옥쇄한 신립(申砬 1546~ 1592) 장군의 흔적이 있는 충주 탄금대에 올랐다. 삼국시대이래 각축장이었던 이 중원의 요새에서 당시 열두대 절벽에서의 장군의 모습을 그려본다. 일본 조총의 위력을 사전에 대비치 못한 자책감이었을까? 자결한 그가 흘린 회한의 눈물이 오버랩된다. 하늘도 알았던지 어디선가 우륵의 구슬픈 가야금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4. 돌이켜 보면, 조선의 선비로서 국난에 임했던 그들 삶의 역정은 다양하지만 나름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열정을 바쳤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 분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추측해 보면 이렇지 않을까?
(송) ; "도덕이 바로 서야 나라도 바로 되는 법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외다. 나는 평생 사문난적(斯文亂賊)들과 싸워왔소"
(홍) ; "역부족이었소. 원통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결밖에 없었소. 남은 일은 후손들에 부탁할 수 밖에~"
(김) ; "우리가 똘똘 뭉쳐 싸운다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데 그만... 분합니다. 다만 왜놈들이 가진 총포가 부럽네요 "
하지만 역사의 그늘에서 그들의 치열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배엘리트만의 분발로는 한계가 있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국가시스템의 정비와 함께 저변을 흐르는 민초들의 뒷받침이 없으면 건강한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조선망국론을 피력한 중국의 지성 량치차오 (梁啓超 1873~1929)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한 연후에 남이 정벌하는 법이다" 라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대중들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각성이 절실하다. 공동체의 정의(正義)나 공의(公義)가 구현되는 바탕위에서만 진정한 부국강병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민주국가로 가는 길에 공짜점심은 있을 수 없듯이 모두가 참여하는 풀뿌리 시민운동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대중은 생각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로서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라는 아돌프 히틀러 (1889~1945)의 섬뜩한 말이 새삼 가슴을 찌른다.
(금년 11월 여행 명상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