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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5,27-33
요한 3,31-36
진리를 믿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능력을 수반하지 않는 진리는 없기 때문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의 결말입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믿어야 하고 그러면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 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진리 안에는 성령의 힘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지팡이의 능력도 함께 주셨습니다.
말과 능력이 합쳐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고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이 따르지 않는 증언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둘이 아니시듯 진리는 능력과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육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7세 담임을 하던 시절 만난 재혁이(가명)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형과 사는 아이였습니다.
바쁜 아빠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비난과 훈계를 일삼았던 분이었습니다.
저희 원에 3세부터 다니던 재혁이는 집에서 채우지 못하는 욕구와 감정을 원에서 해결했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교사들을 괴롭히기 일쑤였죠.
당연히 교사들은 재혁이 담임이 되는 걸 두려워했고, 재혁이로 인해 많은 엄마의 불만이 차고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혁이 담임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첫날 다른 친구들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재혁이를 아이들 앞으로 세웠습니다.
‘얘들아, 사람은 모두 다른 장점이 있거든.
우리 재혁이는 튼튼한 몸이 있어서 1년 동안 우리 친구들과 선생님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보디가드가 될 거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재혁이에게 도움을 청하자. 재혁아 도와줄 수 있니?’
그리고 수시로 교실에서 재혁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재혁아, 선생님 좀 도와줄래?’
‘재혁이가 있어서 선생님은 너무 든든해.’
‘재혁아, 너는 참 괜찮은 친구야!’
‘그동안 재혁이 마음이 아팠던 건, 그래서 친구들을 괴롭혔던 건 재혁이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에겐 모두 사랑 창고가 하나씩 있는데 어른들이 우리 재혁이 사랑 창고를 채워주지 못해서 재혁이가 친구들에게 줄 사랑이 없었던 거야.’
‘오늘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재혁이 도움을 많이 받았네. 고마워.’
그렇게 재혁이는 달라졌습니다.
졸업식 날 재혁이 아버님께서 참 많이도 우셨습니다.
재혁이에게 미안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재혁이와 약속했습니다.
'이제 아빠도 괜찮은 아빠가 될게.' "
[출처: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다음 카페, ‘광양 시립 진상 어린이집’]
이 보육 교사는 분명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고 그래서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진리이고 능력입니다.
위 교사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증언대로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진리 안에는 능력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그동안 아버지가 재혁이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진노가 따를 것입니다. 변화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기적보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듯 진리의 증언에는 능력도 함께 따르기에 믿지 않으면 고집을 부리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무술과 진리가 관련이 없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도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 무술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실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는 중국인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가짜 무술 헌터라고 불리는 쉬샤우둥입니다.
알리바바의 마윈까지도 쉬샤우둥을 이기는 중국 무술 고수가 있다면 수십억 원을 주겠다고 돈을 내걸었습니다.
이에 중국 무술 고수들이 도전했다가 번번이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는 김치가 중국 것이고 태권도도 중국 것이라는 주장에 김치도, 태권도도 한국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그런데 중국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말이 옳아지려면 그에 따른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무술은 계속 시대에 뒤떨어져 그의 말대로 서커스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진리를 믿지 않는 데서 오는 진노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그분의 대를 이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감히 시작할 용기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능력이 있음에도 믿지 않는다면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왜 쉬샤우둥의 말을 믿지 않을까요? 그들이 평생 해 온 무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증언 앞에서 그러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능력을 수반하지 않는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믿을 근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증언을 믿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 한 것이기에 진노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5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스런 유치원생들과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녀님을 모시고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 살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지에 대해서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깊이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 중에 제 가슴을 크게 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현재 지구는 생태 용량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후손들이 쓸 용량을 앞당겨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인간이 쓰기에 좋은 세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환경 위기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동식물들입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담대한 생활 양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합니다. 에너지 재생, 자원의 순환, 미니멀리즘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복음 3장 35~36절)
공생활 기간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 역시 몹시도 지구를 사랑하셨으며,
친환경적인 삶,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 하늘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당부, 전도 여행길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여벌옷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 등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노선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지속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소박하고 청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 기간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세상의 승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통한 예수님의 승리와 관련해서 늘 유념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 상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시종일관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은 결정적인 순간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또 다시 죽고, 부활하고, 승리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4월 15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과 땅에서 난 사람의 차이를 보여 주십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요한 3,31)
땅에서 난 사람은 육에 매여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의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기에 그에게 아무리 영적인 사정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들 먹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즉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외에는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나이시고, 또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완전히 결속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진리와 선, 아름다움이 하느님의 반영임을 관상하며, 성삼위 하느님의 참됨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제1독서는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 사이의 식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대사제의 지시를 어겼다고 사도들이 다시 끌려가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당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주눅들지 않고 이렇게 진리로써 응답하지요.
사도들의 응답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이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도 응당 고백해야 하는 진리지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관상하며 그 안에 함께 머무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사람의 말, 육의 관심사, 땅에 속한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겠습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화답송)
땅에서 태어난 일차적 생명을 넘어서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 하늘의 일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입은 주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가 끊이지 않지요.
그렇다고 그의 삶이 늘 태평무사하고 승승장구하며, 부귀영화만 누리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에 머물러 하늘의 일을 관상하는 이는 세상에서 피해갈 수 없는 거센 고통과 슬픔이 덮쳐도, 그조차도 찬미로 승화하는 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탄식 중에서도 찬미와 감사가 새어나오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 점령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생각과, 입에서 나가는 말이 주로 어디에 속하는 말인지, 영의 관심사와 육의 관심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깨어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위치가 어디 쯤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진리가 어느 쪽인지 조금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하느님과 우리를 결속시켜 주시고 그분 생각을 알게 해 주시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의 유혹과 과대포장된 거짓 위안의 허울을 넘어서, 영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발돋움하려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