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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2일 월요일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수도회] 굳건하고 항구한 믿음이 가져다주는 생명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호세 2,16.17ㄷ-18.21-22
† 복음 마태 9.18-26
◈ 오늘의 묵상
죽은 딸의 소생을 바란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권위와 덕망을 갖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찾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권위 속에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만나신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자신의 병 때문에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도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병을 고칠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에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간절함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치지만, 그 어려움이나
질병이 크면 클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
어려움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게 됩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면, 반대로 그만큼 인생에서 한계에 이르는 어려움을 겪지 못했다는
뜻도 됩니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하느님께 우리를 인도하는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그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깨닫게 하는 은총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믿음의 중요성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6.17ㄷ-18.21-22
복음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6
팔찌가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차고 있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원 팔찌가
한때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도 어떤 분이 직접 만든 소원 팔찌라고
하면서 주시더군요. 물론 차지 않고 어느 서랍에 깊숙하게 들어있지요.
답답한 것이 싫어서 시계도 차지 않는 저인데 계속해서 차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예 차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바람을 이 팔찌에
맡겨야 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들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행운의 편지’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행운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행운이 깃들이게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편지는 4일 안에 다른 이에게
전달해야 하며, 똑같은 내용으로 7통의 편지를 작성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야 7년간의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불행이 찾아올 것이라는 위협도 있었지요.
제가 초등학생 때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똑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안 그러면 저를 포함해서 가족 중
다른 누구에게 큰 해가 돌아간다고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일곱 통의 편지를
힘들게 적어서 다른 일곱 사람에게 전달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불안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을 때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 더구나 이렇게 사제가 되어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미신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들 역시 그러했지요. 그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단정 지었고,
반면 예수님께서는 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분명히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대로 마치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아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중요성은 복음의 중간에 나오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녀는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 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손을 대었고 실제로 병의 치유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복음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분명히 하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세상의
기준과 관점인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관장하시는 주님인지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에 세상의 기준과 관점을 따르는 우리지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선택하게 된다면 모든 불안한 마음이 말끔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즐겁게 살려거든 주기 위한 주머니와 받기 위한 주머니를 가지고 다녀라
(괴테).
행운의 편지. 기억나십니까?
미신도 이용할 수 있는 지혜
언젠가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들었습니다. 자기 어머니는 시험 때만 되면
미역국을 끓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보통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져
떨어진다는 미신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발 미역국 말고 다른 것을 달라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너 부담 갖지 말라고 미역국 주는 거야.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시험을 못
봤다고 하지 말고, 미역국 먹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더
좋잖아.”
‘미신도 이렇게 이용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미신을 자녀의
자신감을 키울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성적이 안
좋으면 미신 탓이니까 스스로 잘못했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고, 성적이
좋으면 미신을 극복한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잘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단정 지으면서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요?
어제는 서울대교구 풍납동성당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굳건하고 항구한 믿음이 가져다주는 생명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 9,18-26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Jesus Heals the Woman with a Hemmorhage
굳건하고 항구한 믿음이 가져다주는 생명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부부관계에 비추어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하듯 다정하게 말하고
(호세 2,16),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영원히 아내로
삼아주십니다(2,21). 이러한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은 복음에서 회당장의
딸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방금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마태 9,18).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나서십니다(9,19). 그분을 움직인 것은 회당장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생명을 향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는 한시바삐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아이를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숨이 끊어진 아이를 살리는 일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9,20-21).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 하시며 치유해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 안에 머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믿음을
지닌 이라면 발걸음을 멈추고 언제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은총을 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어쩌면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다음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 여인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시간을 초월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작은형제회르셨을 때, 사람들은 피리를 불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9,23). 그분께서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9,24). 군중을 물리신
다음 그분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났습니다(9,2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은 인간의 마음과 내적 상태를 나타냈고 권위, 힘을
상징했습니다. 죽었던 소녀는 아버지의 믿음의 중개로 하느님의 생명의
힘과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어나 자상하게 다가가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써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이 어떤
뜻인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상기했으면 합니다. 피리를 불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던 회당장,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 또한 어떤 고통과 절망의 순간이 다가와도
희망이신 주님의 손을 놓지 않는 믿음을 지녔으면 합니다.
인생살이가 늘 쉽지 않지만 혹시 우리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 저항할 수
없는 불의와 차별 앞에서 마치도 소녀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피리를 불며
소란을 피우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겠지요. 삶의 질곡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굳게 잡고 그 모든 것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자비의 목소리, 생명의
이끄심을 알아보는 마음과 지혜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태 9,21)
믿음은 우리에게 거창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치유를 얻기 위해 613의 율법조항을 잘 지키고
밤낮으로 많은 기도와 봉사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당신 종이 나으리이다."고 한 백인대장처럼,
또 오늘 하혈증을 치료받은 여인처럼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낫겠지." 하는 마음이면 족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며
성호경을 긋고 주모경만 한번 바쳐도
하느님의 어전에 가납되는 훌륭한 아침기도가 됩니다.
내가 돈도 별로 없고 시간과 능력도 많지 않아
봉사도 봉헌도 거의 못하지만 오늘 스쳐지나가는 가난하고 아픈 영혼을
위해 주모경 한 번 바쳐주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봉사가 됩니다.
오늘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말과 행위이지만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참 믿음을 한 번 표현해 보십시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님의 따뜻한 음성이 내면에서 들려올 겁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 9,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치유와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치유는 치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치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동반하는 것이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함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믿음과 치유의 관계는 서로를 살게하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하느님 자녀임을 일깨워주는 것이 믿음이라면
하느님 자녀를 살게하는 것이 치유일 것입니다.
믿음과 치유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우리에게서 치유가 필요한 부분이 무언지를 알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봉헌하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치유는 간절히 갈망하는 믿음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예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예수님 안에 치유와 믿음이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죽음의 문화에 맞서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 9,18-26
죽음의 문화에 맞서
완전히 죽었던 회당장 딸의 소생 사화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의 소생
사화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완전 소생 사화’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소생
사화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조차 다스리는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이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죽음의 문화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분명 숨을 쉬면서
살아있기는 한데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은 외관상으로
멀쩡히 살아있지만 이미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노인은 집에 누워있으나 산에 누워있으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죽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
너무나 고귀한 생명을 결정권도 없는 본인 스스로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씩 저녁 산보 삼아 한강으로 나가는데 마포대교를 지나갈 때 마다
얼마나 제 마음이 우울해지고 씁쓸해지는지 모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연간 약 1만5천여 명이 한강 위에 놓인 수많은 다리 위에서 투신한답니다.
그 가운데 천명 이상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1위를 달리고 있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리니 다리 밑에는 구조대원들이 상시대기하고
있습니다.
한류 드라마에 매료된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평생 한번 꼭 와보고 싶은
나라, 정말 잘 사는 환상적인 나라로 부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우리나라에
삶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한 적극적 자살 시도자가 하루에 70명이 넘습니다.
한 사람이 자살을 하거나 시도하면 본인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들이며 목격자들이며 구조대원들이며 의료인들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는 충격을 입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무려 1000여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각 원인에 대해 다양하고 심도 깊은 연구와 조사가 있었는데
그 결과는 두 개의 원인으로 압축되었습니다. 바로 절망과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절망이란 도저히 희망이 없다는 극한의 좌절이며 이분법적
사고란 사느냐 죽느냐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인 결론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살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으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희망도 있고 행복도 있었으며 소중한
가치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가 자신을 절대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합심해서 이 거대한 죽음의 문화에
맞서야겠습니다.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성공지상주의와
배금주의의 결과인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살아있어도 진정 살아있지 못한 청소년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청년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더 이상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노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야겠습니다.
그분들도 너무나 소중한 우리들의 이웃이며,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것을 그분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고 있는 그분들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삶으로
건너오도록 일으켜 세워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어도 삶을 견뎌내고 달릴 곳을 끝까지 잘 달릴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정확하게 잘 보시는 분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예수님은 정확하게 잘 보시는 분
사람보다 더 대단한 생명체란 우주상에 없다면서 자만심만 키웠습니다.
경험했거나 감각하거나 보여야만 있고 그 외엔 없는 걸로 알고 삽니다.
전기 전파 햇빛도 오거나 움직이는 과정은 모르고 결과만 보고 압니다.
영물인 인간이 몸의 지시만을 받고 사니까 실수도 별 짓들도 다합니다.
영물인 인간보다 인간인 영물로, 주역이 영물로 살면 알찬사람 될 텐데.
알찬 사람과 겉 찬 사람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잘 보시는 분이시거든요.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마태오 9,22)”
불우한 이를 돕는 신앙인들은 주님처럼 보기 때문에 알차게 영글어 갑니다.
겉 찬 사람들은 영을 모르고 육만 아니까 인생이 쭉정이 되는 것도 몰라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이웃을 섬기면 구세주를 만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 마태 9,18-26
이웃을 섬기면 구세주를 만난다.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랍비가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랍비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랍비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
는 랍비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던 학생, 혀암으로 시련에 봉착한 자매, 위암 수술을 마친 자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는 형제가 맑고 밝은 모습으로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 믿음 바탕위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2013년 6월 9일 삼종기도)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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