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에서 화생방(방사능·생물학·화학) 무기를 총괄하는 이고르 키릴로프 화생방전 방어사령관(소장)이 17일 모스크바에서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키릴로프 사령관은 이날 아침 모스크바 남동부 랴잔스키 대로의 아파트 건물(주상복합) 밖으로 나오던 중 근처에 있는 전동 킥보드(전기 스쿠터)에 장착된 폭발물이 터지면서 그의 보좌관(운전 기사)와 함께 현장에서 사망했다.
러시아의 화생방전 방어 사령관에 대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한 현장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에서 중대범죄 수사를 맡고 있는 연방 수사위원회는 즉각 이 사건을 테러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보고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주변 감시 카메라(CCTV)를 확보하는 등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위는 CCTV와 차량 블랙 박스 영상 등을 근거로 폭발 장치가 원격으로 조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키릴로프 장군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생방전 전문가인 데다 모스크바시 주요 주거지역에서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모스크바의 아파트 단지나 대로에서 볼 수 있는 킥보드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원격으로 작동시켰다는 것은 모스크바 시민 안전에 경보음이 울릴 만하다.
최근 며칠 사이에 러시아 순항 미사일의 설계를 담당하는 전문가 2명이 모스크바 인근(수도권) 지역에서 암살 테러를 당했고,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는 교도소장이 탄 차량이 폭파되는 등 주요 인사를 겨냥한 암살 기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키릴로프 장군의 명성과는 비교가 안된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후 테러를 당한 러시아군 인사 중 최고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짐작 가능하듯이, 서방 외신은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키릴로프 (장군)의 제거는 SBU의 특수작전"이라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SBU는 사건 전날(16일) 키릴로프 장군을 우크라이나에서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한 혐의로 궐석 기소했다. 하지만 SBU 측은 아직까지 이 사건 연루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박하거나 논평하지 않고 있다.
◇키릴로프 사령관은 누구?
키릴로프 소장/현지 TV채널 영상 캡처
당연하지만, 키릴로프 장군에 대한 러시아와 우크라·서방 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2017년부터 러시아군 화생방전 방어 부대를 맡은 그는 특수 군사작전 개시후 (미국 주도의) 우크라이나군 생물학, 화생방 공격 가능성을 폭로하고 위험을 경고해 왔다.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소위 (특정 지역에 방사능을 퍼뜨리는) '더러운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한 장본인이다. 쇼이구 전 러시아 국방장관(현 국가안보회의 서기, 우리의 안보실 실장격)도 이를 공개적으로 경고한 바 있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특수 군사작전 직후 미국이 우크라이나 생물학 실험실에서 다른 나라에 생물학적 위협을 가하는 고병원성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우크라이나의 임박한 화학전 도발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지난 8월에는 우크라이나가 '더러운 폭탄'을 생산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더러운 폭탄'의 개발을 부인하고, 오히려 키릴로프 장군은 화학무기 사용 혐의로 기소했다. 영국도 지난 10월 초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며 제재 대상에 올렸다.
서로 상대방이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을 위반하거나,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서방 측 논쟁의 한 가운데 늘 그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8월 습격한 쿠르스크주(州) 수드자에서 서방 화학무기인 연막탄을 사용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폭사 당일에도 국방부에서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생물학 무기와 핵 안전 규정 위반 등에 대해 기자들에게 브리핑할 계획이었다.
키릴로프 장군이 운전기사와 함께 아파트 건물을 나서는 순간
주변에 있던 킥보도에 설치된 폭발물이 폭발했다/영상 캡처
그렇다고 해도 키릴로프 장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큼 중요한 작전 최고 지휘관은 아니다. 후방의 지원 부대 사령관 중 한명이다. 드러내 놓고 목숨을 노릴 만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폭사는 러시아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안전한 곳이 없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키예프(키이우) 당국이 공식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SBU로서는 러시아군 주변에 공포를 조성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러시아의 대응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 사건을 명백한 우크라이나의 테러로 보고 있다. '보복은 불가피하다', '백색테러에 적색테러로 대응하자', '가장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할 때', '우크라이나 의사결정 센터에 대한 공격은 언제 가할 것인가' 등 강경 대응 여론이 쏟아졌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정치 군사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앞장서 주장했다.
러시아의 이같은 강경 분위기는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가 내년 1월 20일 취임에 맞춰 조성해온 러-우크라 평화협상의 흐름을 해칠 게 분명하다. '테러리스트들과 무슨 평화협상을 한다는 말이냐'는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자의 협상 분위기 조성에 내심 불안한 키예프에게는 호재다. 만약 SBU가 이를 노리고, 키릴로프 장군 제거에 나섰다면, 일단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트라나.ua는 이번 사건이 트럼프 차기 정권 하에서 평화 협상의 개시를 막고, 러시아가 적대 행위를 더욱 확대하도록 부추길 목적으로 시도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매파(네오콘, 대러 강경파, 전쟁 지지파)는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이끌어내기 위해 트럼프 당선자의 협상 분위기 조성을 마뜩잖게 여기기 때문이다.
러시아 내부의 분노 목소리와 상대가 노리는 전략적 음모 사이에서 푸틴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까?
러시아와 서방, 트럼프 인수위에도 전쟁이 더 길어지면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물론, 서방에게도 경제적 위기 또는 핵 전쟁 공포 등을 몰고온다고 믿는 비둘기파(평화협상 지지세력)가 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트럼프의 공약을 지지한다.
당선후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난 트럼프 당선자. 지난 7일 파리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3자 회동했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트럼프 당선자의 취임까지 한 달 조금 넘게(34일) 남았다. 그 동안 키릴로프 장군의 폭사 사건과 같은 암살 시도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마다 러시아가 보복의 대상과 폭을 더 키우지 않고, 기존의 폭격및 공습 정도로 끝낼 수 있을까? 트럼프 당선자가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해 러시아가 만족할 만한 타협안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흔쾌히 협상 테이블에 참석할 수 있을까?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