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1일 목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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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말씀의 초대
이제 주님께서 친히 당신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실 것이며, 이로써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을 모아들이시어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며, 정결하게 하시어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하늘 나라를 말씀하신다. 초대받은 이들이 잔치에 오려 하지 않자 임금은 그들을 응징하고 다른 이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온 이들 가운데 예복을 갖추지 않은 한 사람은 거절당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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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제와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비유의 대상을 가리키시는 대신에 긴 이야기의 구성과 인물 전체를 비유로 삼아 하늘 나라를 보여 주십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는 손쉽게 교훈이나 가르침을 이끌어 내려 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체험’하고 단번에 눈에 띄지 않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도록 노력할 때, 머리로 파악한 비유의 주제들이 더욱 생생하게 가슴속으로 다가옵니다. 어제 복음의 주제가 하늘 나라의 ‘무상성’이라면, 오늘 복음의 주제는 하늘 나라에 초대된 사람의 ‘책임성’입니다. 혼인 잔치의 예복은 그 책임성을 잘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는 주님의 자비로 우리에게 거저 선사되는 것이나, 우리가 준비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서 절실하고 명확하게 떠오를 때 비로소 이 하늘 나라의 비유를 묵상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언젠가 읽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주인공의 독백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미혼모로서 파출부로 일하며, 머리가 평평해서 ‘루트’라는 별명을 가진 아들과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그녀의 고용주는 기억 상실증의 수학자였는데, 그가 그녀와 그 아들에게 진리의 세계가 가진 아름다움에 눈뜨게 합니다. “배가 고픈 것을 참아 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 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우리 가슴속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망, 그저 자신의 처지에 주저앉아 눈앞의 일에만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진실한 세계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리의 존엄을 지켜 줍니다. 이렇게 참되고 고귀한 갈망이야말로 혼인 잔치의 예복이 아닐까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책임성’은 주님께서 심어 주신 하늘 나라에 대한 이 갈망을 유혹과 곤경 속에서도 꿋꿋이 지키는 데 있음을 절절히 느낍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진한 감동을 주는 신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죄를 고백하는데 무슨 감동을 줄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회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데,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의 눈에는 진실된 회개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예뻐 보이시겠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짜증이 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특히 “사는 게 다 죄지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모든 죄를 여기에 묻어두려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같이 평범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짓겠습니까?”라면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양 말할 때에는 왜 고해소에 들어오셨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희한한 것은 삶을 더욱 성실히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죄 고백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이러한 예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방에 더러운 쓰레기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그 쓰레기가 잘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반대로 방이 더럽고 정리정돈이 전혀 안 되어 있다면 쓰레기 하나 떨어진다고 한들 티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하고 잘 정리정돈 되어 있다면 그만큼 죄가 잘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도 성실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도, 고해소에 한 번 들어가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작은 쓰레기라도 치워버릴수록 더욱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한 임금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먼저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 하기에만 바쁩니다. 밭에 나가고, 장사를 하러 가는 등 세상일에 신경 쓰면서 임금 초대를 무시해버리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상으로 광범위하게 당신 나라로 부르시는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초대에 얼마나 성실하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그 초대보다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의 대상이 바로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나옵니다. 아무나 불러놓고서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복은 회개의 옷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즐기러만 왔을 뿐, 혼인잔치를 축하하지도 그리고 주인을 경배하지도 않았기에 회개의 예복을 입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주님의 잔치에 초대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며, 그리고 잔치에 어울리는 회개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단순히 잠깐 즐기려는 마음으로 그 잔치에 들어간다면, 또한 나중에 가면 되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예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잉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꼭 선택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불행이 닥칠 때에는 그 불행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보라(에픽테토스).
세상이라는 하느님의 잔칫상
- 상지종신부-
세상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온갖 피조물들이 함께 어울려 생명을 꽃피우고, 기쁨과 희망을 가꾸어 가는 축제의 마당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은 이 축제에 초대받은 특별한 손님입니다. 손님이면서 하느님과 함께 주빈의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료 사람들과 어울려 이 세상을 평화와 정의가 넘쳐흐르게 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세계를 보살핌으로써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를 더욱 흥겹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이 잔치에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인간은 오만하게 하느님의 잔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잔치를 만들려고 하고, 때로는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잔치에 초대받은 다른 손님들을 몰아내고 잔치의 기쁨을 혼자 독차지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세상이라는 잔치는 모든 이가 함께하는 기쁨의 자리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 기쁨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와 인간의 탐욕으로 마구 파헤쳐지는 고통 받는 창조세계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초대하여 함께 즐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
-임문철 신부-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
-한명수 시인-
태중교우인 나는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 위해 교회의 가르침대로 봉사하며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나 또한 조금씩 그런 물에 젖어들었다. 청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나는 학교 공부뿐 아니라 본당과 교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어느 날 본당 선배가 “미카엘은 참 부지런하구나.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을 보니 사회에 나가면 돈 많이 벌겠는데!” 하는 게 아닌가.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지내면서, 교회 일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요즈음 그 선배의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돈’이 나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의 의’를 구하기보다 ‘개인의 의’를 먼저 찾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일이 주어지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기보다는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합당한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오히려 입고 있는 예복조차도 하나씩 벗으며 살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 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 찢어지고 버려진 예복을 다시 깁고 다림질해야겠다.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임영숙 -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던 길에 관광명소가 된 외국의 한 성모 마리아 발현 성지를 찾게 됐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인지라 신자·비신자가 함께 동행한 길이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성모 마리아 유치 운동을 펼쳐야겠네.” 모두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조금 듣기 거북했습니다. 얼마 전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세례를 받기로 했는데 약속한 날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귀국 후 그분을 잘 아는 작가 최인호 선생을 만나서 그분도 세례를 받을 마음이 있는 듯하다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분을 선택하는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총과 축복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분은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뽑히지는 못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는 오늘 복음은 세례를 받은 신자라 할지라도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즉각 일어나 그분을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부르심에 적극 응답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지요. 그러나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그를 부르러 온 임금의 종을 붙잡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듯이 오늘 우리가 쫓는 명예나 돈, 안락함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 뜻에 따르는 것이니까요.
주님,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헤아리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
-전수홍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임금의 아들은 그리스도이며, 첫 번째 나오는 종들은 예언자들이고 그 뒤에 나오는 종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이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되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의 초대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받음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저 주는 은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참된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종들에게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임금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 선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런 사랑과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는 것과 우리 신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나 창녀나 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초대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설명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베푸는 천상잔치에 어울리는 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회개와 굳은 신앙의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기쁨의 잔치이지만 또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십자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란 싫은거고 없으면 좋은거고 나와는 상관없어야 하고, 그냥 장식품으로만 남아 나를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길을 내 안에서 걸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늘 우리들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에 걸맞는 삶을 예수님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기쁘게 생활하도록 합시다. *
-박기흠 신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이스라엘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주님께 뽑히기 까지 그 삶의 수고를 다해야 하지만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탄식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는 비유로 시작하십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인지라 '모든 것'(4절)은 그야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임금이 초청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자리이며, 개인에게는 그러한 자리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간이 아주 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왕의 초청에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3절) 왕이 다시 두 번째로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아예 그 초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4절)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일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5절)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6절)
그러자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노하였고,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찌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보낸 임금님 자신의 종들까지 욕을 보이고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잔치에 빈자리를 원치 않으시고, 초청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 자리를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구별 말고 만나는 누구든지 다 데려오니 혼인 잔치 자리에 이제야 손님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왕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버림을 받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업신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그 행운이 넘어왔고, 죄 많은 우리 역시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임금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오직 초대하신 분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예복은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기 전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던 임금님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임금님의 눈에 띄었던가 봅니다. 그가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종에 의해 아무렇게나 불려온 그들이 임금님의 수많은 종들에 의해 좋은 예복으로 잘 입혀 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 입기를 완강히 거절하였기에 쫓겨 나갔다고 가정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호통에 의해 그는 손과 발이 꽁꽁 묶여 바깥 어두움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기서 통곡하며 슬피 울고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져 담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꼭 입어야 할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 우리가 받은 세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똑같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한 공동체이며, 나뉠 수 없는 연대를 상징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나라와 관계된 불가분의 시민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복을 잘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로 살아야 할 산 신앙은 더욱 소중합니다.
아무나?
-이인옥-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연관되는 주제나 이미지를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특히 오늘의 경우와 같이 전혀 상관없고 어울려 보이지 않는 대목들이 있을 때는. 판관 입다의 이야기와 혼인 잔치 초대의 이야기에서 오늘은 왠지 '아무나?’란 주제가 떠오른다.
판관 입다는 '전투에 이기게 해주신다면 제일 먼저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 '아무나’ 주님께 번제로(몽땅 태워 바치는 제사) 바쳐 올리겠다’는 서원을 했었다. 그런데 집 문앞에 처음 튀어 나온 것은 불행히도 그의 외동딸이었다. 서원대로 딸을 바치는 입다의 슬픔과 의젓하게 순응하면서도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달래야했던 딸의 심정이 고스란히 독서에 나타나있다.
입다는 다급한 나머지 <어리석은 서원>을 자청해서 드렸다. 이 대목은 사실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자기가 믿는 신(神)에게 자진해서 서약을 하고 가장 아끼는 제물(자식)을 바치던 고대의 종교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어느 나라에건 이런 제의식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심청, 에밀레 종의 전설 등)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을 바치는 제사는 철저히 금지되었으나 (이사악을 바치는 대목은 간접적 금지. 2열왕 16,3: 21,6; 23,10; 미가 6,7; 예레 7,30-31참조) 괄호를 보면, 예언자들의 시대까지도 이런 풍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떻든 하느님은 인간을 바치는 무분별한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
복음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거나하게 준비하고 백성들을 초청하는 왕과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모독까지하는 백성들이 등장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하느님과 백성사이의 종말론적 잔치를 표상하고 있는 우화이다. 그러니 온갖 <준비를 마친 하느님>과 그것을 거절하고 모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꼬집고 있다.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70년경의 예루살렘 파괴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그 사건이야말로 주님의 징벌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리고 오라 한다. 종들은(사도들은) 나쁜사람 좋은사람 가릴 것없이 만나는대로 데려온다. 그야말로 '아무나’인 것이다.
이 비유에 앞서,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에서는 유다인들이 거절한 기쁜 소식의 초대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따라나선 그리스도인들은 마냥 안심해도 될 것인가?
손님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 들어선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길거리서 만나는 '아무나’ 데리고 왔는데 어떤 예복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혼인잔치로 표상되는 '하느님과 인간의 종말론적인 일치’. 주님은 혼인잔치의 <준비>를 마치고 초대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덜렁덜렁 잔치에 간다?
그 준비란 무엇인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회개’인 것이다.(4,17-예수의 선포 첫마디)
구원은 '누구에게나’(선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열려있지만, '아무에게나’(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열려있는 것이 아灸遮?경고이다. 흔히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만 믿고 종국엔 '누구나’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 두 가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 하느님이 모든 인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스 큉-"믿나이다" 중에서 인용) *
자격이 없는 자들
-강영구신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거나 내일 해도 좋은 일을 지금 서둘러서 한다면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 싹이 돋고 잎이 패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에 먼 사람들은 차례와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열매를 따겠다고 덤빕니다. 순리(順理)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인생을 헛살게 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이자 축제입니다. 누구나 그 축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그 축제를 즐기게 됩니다. 하늘의 소리보다 사욕(私慾)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기보다 욕망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욕(私慾)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의 하늘나라를 놓치는 사람은 미래의 하늘나라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一明)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 버리고
-양승국신부-
저희 집에 있는 차 가운데서 유일한 승용차이자 제일 고급 승용차, 그래서 서로 타기 위해 경쟁이 심한 ‘비스토’가 요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며칠 전 무작정 상경했다가 죽을 고생을 다했던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귀가조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싶어 아이를 비스토에 태워 가까운 국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역까지 길어봐야 5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그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너무나 지독해서 차창을 있는 대로 다 열었습니다. 그래도 못 참겠어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차 트렁크에 방독면을 하나 준비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차에서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방향제를 뿌린다, 향수를 뿌린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잔치 참석자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헤어스타일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예복도 아니고, 추리닝차림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의 주인공들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형식이, 외모가, 옷, 이딴 것이 뭐 그리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잔치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 됩니다. 신랑신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혼인잔치를 총괄하는 임금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혼인잔치는 천국에서의 생활입니다. 종들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예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갖춰야할 예의입니다. 예복은 하늘나라의 공연에 입장하기 위한 티켓입니다. 입장권 없이 연극을 관람할 수 없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하늘나라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예복은 무엇보다도 성령안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쌓은 자선이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국 예복은 예수님 그분 자신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 예복을 준비하라. -박상대 신부-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을 따라 여러 마을들을 거쳐 예리고(요르단강 서쪽 10Km, 예루살렘 북동쪽 36Km)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식도 있었다.(마태 21,1-11) 이제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로 오염된 성전까지도 정화하셨다. 예수님의 대담 상대자는 막연한 군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원로들과 대사제들로 바뀌었다.
예복을 준비하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로 이들에게 들려준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나귀를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한 행렬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21,1-1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21,12-16) 때문에 이미 백성의 지도자들과 한바탕 대립을 벌였다(21,23-27).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잇따른다. 이 비유가 오늘의 복음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20장부터 22장까지에서 모두 네 개의 비유를 대면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 중에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던 ①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 예루살렘에 와서 백성의 원로들과 대사제들에게 들려주신 ②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 그리고 ④ 혼인잔치의 비유(22,1-14)이다. 네 개의 비유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이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그런데 비유내용의 강도에 주의해야 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 모두가 초대되어 똑같은 차원의 후한 대접을 받지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이미 차지한 특권마저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잘못과 책임은 백성의 지도자들 측에 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맞이하게 될 종말의 심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태오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고는 오기를 거부하자,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아무나 불러들여 잔칫집을 가득 채운다.(1-10절) 이 대목을 거듭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배척했고 때로는 죽였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이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는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한 셈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시는 것이다. 임금의 종들이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임금이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칫집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집어내어 추방하는 장면이다.(11-14절) 이렇듯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초대해온 사람들로부터 ‘예복’을 운운하는 임금의 처사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비유의 사실적 표현에서 눈을 떼어 비유의 우의적 표현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 자질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내리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단순히 ‘굳게 마음먹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이요, ‘덕행의 열매’를 말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 안은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복음중심)> : † 하느님의 초청, 천국잔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려왔습니다. 만일 지금도 그러한 소리를 자신있게 이 사회가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며칠전 만원 버스 속에서 노인들에게 혹은 아기를 업은 엄마들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해 주는 모습을 보고는 공연히 내 마음이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여러 해 전으로 기억합니다. TV광고에 라면 한 그릇을 가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일상 용어 중 하나는 'After you'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출입구 같은 데서 혹은 자동차를 탈 때 에프터 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먼저 양보를 하는 말입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는 이 에프터 유의 에티켓이 더욱 엄격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풍자한 유머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부인이 임신을 했는데, 해산할 달이 넘었는 데도 분만이 되지 않아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진단을 마친 의사는 부인 너무 걱정 마십시요. 부인께서 쌍둥이를 잉태하셨는데, 아이들이 지금 태(胎)안에서 서로 애프터 유, 애프터 유하면서 앞을 사양하는 바람에 좀 시간이 늦어지는 것 뿐입니다고 말해 주었답니다.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비록 예화이지만 그저 유쾌하고 흐뭇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에서 보면 이 사양하는 일을 잘못해서 실로 엄청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양도 지나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입니다. 어떤 임금에게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길러 낸 아들이 장성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굉장한 혼인 잔치를 준비햐였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마다 1)나는 밭에 일이 많아 밭으로 가 보아야겠다. 2)나는 장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영업하러 가야겠다. 3)나는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니리까 못 가겠다 4)나는 오늘 아이들과 놀이터로 가기로 약속해서 못가겠다. 5)나는 오늘 마음이 끌꿀해서(?) 못가겠다...는 등등의 너저리한 이유를 들어 저마다 사양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임금의 초청장을 들고 찾아간 하인을 잡아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임금은 기가차서 허파가 뒤집어질 지경입니다. '이것들 봐라, 맨날 성당니나 교회에게서는 아멘, 아멘 해놓고는 막상 잔치를 마련해 주니까, 전부 쓰잘데 없는 핑계를 데...내가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괘씸하구나. 더우기나 내가 보낸 종을 죽이기까지 해!!!'.....임금은 이렇게 몹시 실망하고 노하여서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임금은 잔치 초대자 선정에 관한 마음을 바꾸어, 다시 종들을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잔치상을 예비해 놓고 초청을 해도 오지 않는 자들은 천국잔치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베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2000년전 주님 당시 이스라엘, 즉 유다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시비나 걸고 위협을 하면서 하늘나라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복음은 이러한 교훈을 천국잔치에 비유(譬喩)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느님을 뜻하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혼인 잔치란, 성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신랑이라 하고 믿는 신자들을 가리켜 신부라고 하는데... 인간사 중에서 혼인 잔치를 가장 즐거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하늘나라(천국)의 즐거운 생활을 혼인 잔치에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 하인(종)들은 신부, 목사, 수도자, 선교사 혹은 먼저 믿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천국, 즉 하늘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루가 14,17에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천국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잇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곳이면서도 천국에 없는 것도 있습니다. 무엇이 없을까요? 천국에는 마귀가 없습니다. 마귀가 없으니 죄가 없고, 죄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니 이별이 없습니다. 질병과 고통이 없고, 가난과 슬픔, 한숨과 눈물이 없습니다. 미움도 없고, 거짓도 없고, 시기와 질투도 없고, 싸움과 분쟁이 없고,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나라, 추위도 없고 더위도 없는 나라, 대신 생명과 평화 사랑과 행복 기쁨과 감사만이 넘치는 나라... 그래서 천년이 하루처럼 짧게 느껴지는 나라 그러한 곳이 바로 천국, 하늘나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묵시록에 의하면, 그 천국도성의 열두대문은 각각 다른 진주로 만들어져 있고, 성벽 주춧돌은 그 성벽의 주춧돌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데, 벽옥, 사파이아, 옥수, 비취옥, 홍마노, 홍옥수, 감람석, 녹주석, 황옥, 녹옥수, 청옥, 자수정으로 각각 꾸며져 있으며, 그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묵시 21,19-21)
그 찬란한 천국에는 또한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그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달마다 12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기화요초 만발하고 아름다운 새 소리 천군 천사들의 청아한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리는 곳,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는 나라,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 때문에 해와 달이 필요 없는 곳, 그러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를 준비해 놓으시고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1)무조건적으로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무조건 오기를 싫어합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종교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덮어놓고 반대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세상사 때문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밭 일 때문에, 장사 때문에.....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 믿자고 하면 아이들 키워 놓고 믿겠다, 시어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믿겠다, 자식들 공부나 시켜놓고 믿겠다, 며느리 얻어 놓고 믿겠다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면서 미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믿는다는게 아니고 차차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과 저는 모두 하느님의 황공하고 영광스러운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복되고 영광스러운 초청을 받고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회답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제가 대한민국 부산에 있는 바오로 수사로부터 하늘 나라의 잔치에 꼭 오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 키우는 일 때문에, 회계사 시험준비 때문에, 또 세무조정 사업 때문에 때문에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니 널리 이해하시고 천국은 다른 사람이나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중에 감히 이러한 회답을 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회답을 쓰느니 차라리 그 손이 말라 비틀어져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토록 엄청난 축복과 사랑을 뿌리쳐 버리고 그 무서운 지옥 형벌을 스스로 자취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렇게 회답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하느님 아버지 나처럼 죄많은 인간도 빼놓지 않으시고 그 복된 나라에 초대해 주시니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잠시 후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그 영광스러운 나라로 갈 터이니, 이 부족한 것이라도 영접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 이렇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고 여러분을 초청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해 드렸습니다. 사양은 지옥문 앞에서나 할 일이지 이 복된 하느님의 초대를 무지몽매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27,22에 "어리석은 자는 절구에다 찧어도 어리석음이 벗겨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이렇게 어리석은 인생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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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