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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묵상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없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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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4.25 05:19
-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이것으로 봐 둘 사이는 영적 부자 관계였던 것 같은데
둘 사이에는 인간적으로도 나이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코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마르코는 어렸거나 젊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2장은 베드로가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얘기이고 여기서
베드로는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마르코의 어머니 집으로 갔던 것입니다.
마르코의 어머니 집은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는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가 아들처럼 돌봤던 중국 신학생이 신부가 되어 사목하던
곳을 제가 방문하러 갔는데 마침 그때 그 신부가 베드로처럼 공안에 잡혀갔고,
그래서 저와 신자들은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마르코 어머니 집에 모여서
기도했던 사도행전의 신자들처럼 모여서 기도하였는데 그날 밤에 그 신부가
감격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풀려나 얼싸안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르코도 어렸을 때 이렇게 베드로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때문에 같이 고초를 겪고,
하느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기쁨을 같이 나눕니다.
우리말에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있고 누가 누구와 동고동락했다면
이는 둘 사이가 매우 깊은 관계임을 뜻하는데 베드로와 마르코는
세속적 동고동락이 아니라 영적인 동고동락을 나눈 사이이고
그래서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때의 마르코는 영적으로 그리 성숙한 상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와 만났지만 베드로 사도는 홀연히 떠나고
어제도 읽은 사도행전 12장 24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니까 마르코는 사울과 바르나바의 1차 선교의 동반자가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를 모두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13장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마르코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5장을 보면 마르코의 동반을 놓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다투고
그래서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부터는 둘이 갈라서는 빌미가 됩니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정이 격해져서 서로 갈라졌다.”
이런 것을 보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대 성인으로 여기는 이들도 인간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또한 도전도 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싸우고 갈라질지라도
영적 성장의 여정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나의 여정이 멈추어서는 안 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이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마르코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주님의 복음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도가 되고 복음사가가 되는데
우리도 이런 마르코에게서 위안과 도전도 받으면서 영적 성장을 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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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 삶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었을 때, 이제 막 후반기를 맞이했거나 곧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이미 후반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바랄까요? 그들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첫째, 인생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다르게 살고 싶다.
둘째, 이제 나답게 살고 싶다.
셋째,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인생 전반기에는 주로 사회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하면서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많은 것을 하고 또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면, 이제 내려놓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도 황창연 신부님처럼 큰 신부가 되어야지.”
그 친척은 아마 유명한 신부를 큰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잘하고 이를 통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온 힘을 쏟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글이 아닌 몸으로 주님을 알려야 함을 묵상합니다. 특히 나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 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인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시지요. 2,000년 동안 읽히는 성경을 기술할 정도로 그의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그 뛰어남을 살려서 자기 이름을 더 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알려야 할 것은 주님뿐이었고, 주님의 기쁜 소식뿐이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가 자기만을 알리려고 하고,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만족을 얻었을까요? 의미 있는 삶을 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바로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함으로 인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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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 일엔 언제나 양면이 있다. 강함과 약함은 늘 함께 붙어 다닌다(송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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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전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전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 전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러니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먼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혹 “복음”이 아닌 다른 것, 자신의 가르침이나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대체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생활 시작 때 하신 말씀이고, 하나는 공생활을 마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요,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루카 24,6)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 하십니다. 그러니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가라’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하고, 내가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고,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전해야 할 일입니다. 곧 “온 세상” 어디든지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이며, 누구나가 그리고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우리의 편리와 안락을 추구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응답해야 할 구원의 짝지이며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강요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며, 동시에 함께 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정녕, 함께 하시는 그분과 함께 하는 일, 바로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함께 하시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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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길 기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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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행기를 타면 좌석이 늘 신경 쓰입니다. 저는 주로 창가보다는 복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 창가에 있으면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복도 쪽에 있는 분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복도 쪽에 있으면 원하는 때에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옆에 있는 분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도 복도를 원했습니다. 다행히 복도 쪽으로 좌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좌석을 찾았는데 제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그 사람도 저와 같은 좌석번호였습니다. 항공사 직원이 오더니 착오가 있었다면서 제게 새로운 좌석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좌석이 복도 자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제 옆으로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옆에 두 좌석이 비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아주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1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주 편안하게 거의 비즈니스 좌석의 수준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부활 선물로 편안한 좌석을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 도착해서 ‘발현산’을 올랐습니다. 저는 뾰족한 바위산을 오르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올랐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들것으로 모셔 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해서 올라가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환희의 신비 5단이 청동으로 있었습니다. 저와 순례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이 발현했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는데 성모상이 그곳에 모셔진 사연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발현산을 올랐고, 그분들의 자녀 중에 아픈 아이가 있었는데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비행기 좌석이 좋은 곳으로 옮겨져서 감사했다면, 아픈 아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순례자들은 아이가 치유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모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성모상 주변에는 많은 순례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모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하늘에는 둥근 해무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저와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니 하늘도 순례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이 새로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하신 산상 설교도 기쁜 소식이었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표징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건들이었습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여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하였고, 그 믿음이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였고, 그 믿음이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기도 후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십자가의 영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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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마르코 성인의 이름은 세례명으로 쓰고 계신 모든 분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를 보면 제자들이 걸었던 길에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이 곳곳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 또한 제자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따스함으로, 어떤 제자는 용기로, 어떤 제자는 희생으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한 속성이기에 주님 보시기에 기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주님께서도 일하십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표징으로써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표징이 있었을까요? 우선 기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치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징과 더불어서 삶의 희망과 행복이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기적과 치유의 표징도 만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삶의 희망과 행복을 만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하루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 매일 복음이 전해지고 동시에 주님의 표징이 나타나 우리가 오늘은 희망과 행복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내일 또한 오늘과 같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듯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은 주님께 맡기고 희망으로 걸어가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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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엄마들은 다 할 줄 아는 미역국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지만
거의 다 비슷한 미역국
처음 외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
미역국을 먹고 싶었습니다.
한국에도 미역국을 파는 집은 거의 없지만
외국에는 더 없습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면 모를까….
그래서 한국마트에서 미역을 샀습니다.
처음 끓이는 미역국
큰 볼에 미역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하하…. 한주먹 넣었는데, 볼 하나가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처음 만든 미역국을 일주일 내내 먹었습니다.
소박하고 간단해서
오히려 사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있습니다.
오늘은 미역국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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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적 삶, 순교적 삶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한결같이-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012년도 수도원 설립 25주년 감사제때 낭송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마지막연입니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 많이 나눴고 하루도 되뇌어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 좌우명 고백시와 더불어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늘 생각했던 인생여정중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했을 때,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했을 때, 나는 과연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의 점검이었습니다.
아침 6시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태어나 오후 6시 해가 짐과 동시에 죽는 인생이라면 나는 어느 시점(時點)에, 또 봄철에 태어나 겨울로 끝나는 삶이라면 나는 어느 계절의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늘 나눴지만 저의 경우는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런 확인이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오늘 하루를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젊음은 나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처럼 샘솟는 꿈과 열정의 삶이라면 마음은 늘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에. 영원한 현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기에 하루하루 마지막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죽어야만 끝나기 때문입니다. 옛 어른이 오늘 말씀이, 또 교황님의 오늘 말씀이 인생순례여정중의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이 됩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나이테는 어떤 재주로도 흉내낼 수 없다. 사람들은 그의 성과에 감탄하지만 그의 노력은 따라하지 않는다.”-다산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면 쇠와 돌에도 무늬를 새길 수 있다.”-순자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은 영원한 삶에 유익이 되는 향주삼덕(向主三德)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1.인내, 2.현명, 3.용기, 4.정의, 5.절제에 대한 강의에다, 6.믿음, 7.희망, 8.사랑의 향주삼덕입니다. 향주삼덕에 대한 마지막 결론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령께 마음을 연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 신적덕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신뢰를 잃었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믿음에로 다시 열어주실 것이고, 좌절되어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안에 희망을 일깨워주실 것이고, 우리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면,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부드럽게 하실 것이다.”
강론후에는 어김없이 평화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교황님의 다음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패배이다. 이런 전쟁의 비극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은 무기생산자들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중에 있고, 젊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교황님의 시야는 전 세계 고통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4월25일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이런 앞서의 모든 성찰들이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선교적 삶, 순교적 삶에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흡사 유언처럼 참 엄중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선포 사명은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우리 신자들의 기본의무임을 깨닫습니다.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신자여야 비로소 신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받아들여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구원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선포의 핵심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환호송이, 영성체송이 복음의 핵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알렐루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물론 멀리 파견되어 활동하는 복음 선포자도 있지만, 각자 삶의 자리 또한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선포의 장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합니다. 어디서나 복음 선포자의 선교사로서의 신원입니다. 다음 복음의 후반부 말씀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심을, 하느님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의 일을 이루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후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16,19-20ㄴ)
바로 하느님곁에 계신 초월자(超越者)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내재자(內在者)가 되시어 늘 우리의 일을 완성에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니 새삼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예수님이니 얼마나 든든하고 복된 복음선포자의 삶인지요!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복음선포의 사도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안팎은 하나입니다. 안으로 충실한 제자가 밖으로도 훌륭한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충실한 제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가르쳐주십니다. 1.겸손과 2.깨어 있음과 3.믿음입니다.
1.“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애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2.“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3.“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중,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나나이다.”(시편89,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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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의 길>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기쁨이 오시어
기쁨으로 삼으시니
기쁨이 되어
기쁨을 언제나
기쁨을 어디서나
기쁨을 누구에게나
기쁨을 나누러 떠나는
기쁨이 함께하시는
기쁨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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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마르 16,17)
이 은사는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러한 표징과 능력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것들에 관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는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육적으로 행하였던 바를 지금도 날마다 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구마 은총으로 신자들에게 안수하고 악령이 신자들의 정신 안에 살지 못하게 할 때, 그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어떤 신자든지 속된 옛 삶을 버리고 거룩한 신비를 말하며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권능을 거듭 찬미할 때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선한 권고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을 제거하는 사람은 ‘뱀을 집어 드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표징들은 영적이기에, 곧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는 수단이기에 더 위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원하기만 하면 이러한 표징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영혼 안에는 아무개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입니다. 대가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고,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여기도 저기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것 안에도 있고, 저것 안에도 있습니다. 저것은 이것 안으로 흘러들고, 이것은 저것 안으로 흘러듭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로가 했던 말의 취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복 안에서 하느님과 연합하십시오." 바로 여기서 영혼은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 원천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끌어냅니다.
영혼의 생명과 존재는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다른 쪽은 여기 이렇게 바깥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은 언제나 이 안쪽을 따라서 하느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바깥쪽이 안쪽을 밖으로 밀어내거나 죽이지 않게 하려면 말입니다.(15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언제나 새로운 희생을 발명하며
히야친타는 배고픔과 목마름에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 병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그 어린이다운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루치아 더러
“아이고, 저 개구리와 귀뚜라미더러 좀 울지 말라고 해. 난 머리가 아파 죽겠어. 이젠 아무 일도 못하겠구나." 라고 했다.
“그럼 이젠 죄인들을 위해 고통받지 않겠니?"
프란치스코가 말하자 히야친타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아. 고통받고 싶어. 그냥 저대로 울게 내버려 둬."
하고 열띤 어조로 말했다.
때때로 그들은 집에서 식사하는 이외에 9일 동안 혹은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들이 이런 약속을 하고 있는 기간중에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셋이서 고바 다 이리아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려고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있는 늪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히야친타는 루치아에게 말했다.
“난 목이 너무 말라서 골치가 아파. 이 물을 마시고 싶다."
“이 물은 마시지 못해 얘. 우리 엄마가 이 물은 더러우니 마셔서는 안된다고 했어 . 바로 이 근처에 있는 마리아 도스 안요스 아주머니 댁에 가서 얻어 마시자."
이 아주머니는 최근에 시집온 친척이었다.
“아니야, 난 말이지 목마른 고통대신으로 이 물을 마시고 싶어. 좋은 물로는 고행이 되지 않잖아!"
이렇게 끊임없이 새 희생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에 주리고 있었던 것이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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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본디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나지만 오늘 복음이 포함된 9절에서 20절은 부활과 승천,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과 함께, 이를 구현하고자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너희”라는 주어와 “주님”이라는 주어가 상응하면서, 복음 선포가 우리 몫이라면 그 뒤 여정은 하느님께서 몸소 완성하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제시하고, “그분께서”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이나 설득 또는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일상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독서). 그러면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복음).
복음화를 완성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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