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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
열왕기상8:22-30
어제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었습니다.
내일까지 추석연휴가 계속됩니다만 이번 추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았습니다.
고향은 왠지 정이 느껴지고 포근해지고 친근함이 깃들어있는 곳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향은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가족친지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육신의 고향뿐 아니라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16절) 했습니다.
성도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그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찾을 때마다 더 나은 하늘의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찬송가 241장 ‘아름다운 본향’에 보면
♪우리들을 위해 예비하신 내 집/ 주 예수께서 계신 곳/
왕의 왕 되신 주/ 우리 쓸 면류관을 손에 들고서 기다리네/
손에 들고서 기다리네/ 왕의 왕 되신 주/ 우리 쓸 면류관 손에 들고서 기다리네(3절)♬
고향에 부모님이 계신 것처럼 더 나은 본향에는 왕의 왕 되신 우리 주님께서 면류관을 들고 기다리기에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또 한 가지 향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내용입니다.
7년 동안 최선을 다하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짓고 이제 봉헌기도를 드립니다.
22절부터 53절까지가 솔로몬의 봉헌기도인데요,
기도의 내용은 이 성전을 향하여 또는 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이곳에서 기도할 때에’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 다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요,
평화로울 때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겠지만 어떤 때는 성전에 올라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 먼 이국땅 바벨론에서 생활할 때 성전에 갈수가 없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갈수도 없었거니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전은 이미 파괴되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에 세 번씩 무너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대적들에게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올가미에 걸려서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여 죽지 않게 하실 뿐 아니라 이 일로 인하여 모함하던 대적들이 오히려 일괄 소탕당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던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던지 주의 백성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어달라는 솔로몬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은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전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을 향하는 것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이고 주님을 향한 훌륭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전을 향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여주십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여주십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1.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추석에도 북녘에 고향과 가족을 두고 살아온 실향민들은 망향단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믿는 자들은 기도를 드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북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실향민들의 그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방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갖고 있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봉헌식에서 자신이 지은 성전을 일개 건물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보면,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이라고 했고,
29절에서는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이라고 했고,
9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언급한 대로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조그만 건물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조그만 성전 건물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성전을 주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성전은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은 늘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도 하고 훼방받기도 합니다.
그곳을 찾아 예배하고 기도하는 자들을 주님을 살펴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님은 높은 곳에서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작은 자를 박대하면 주님을 박대하는 것이고 작은 자를 환대하면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동일시의 모습이 성전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있는 성전을 향하는 것은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있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주님을 믿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성도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은 좋고 믿을만한데 교회는 좋지 않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 싫은 교회에 안 나가고 혼자서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 성전의 모습이 보기 싫어도 그러나 그곳이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기에 우리는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방향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지를 때에 눈을 떠서 새로운 광명을 보았습니다.(막10:46)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은 예수님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며 사모하는 마음이며 주님께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2.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말은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의 의미입니다.
35절을 보면 솔로몬의 간구 중 하나가 나옵니다.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이것은 솔로몬이 예로 든 경우 중에 하나입니다만 사람들이 범죄 하였습니다.
그 범죄로 인하여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방향을 돌이키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향할 때는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고 적국에게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방향을 틀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는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힘입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방향과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인 줄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기 위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아버지를 떠나 살면 대단한 신천지가 펼쳐질 줄 알고 기대를 갖고 떠나갑니다만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살아간 결과는 그렇게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믿었던 친구들에게도 이용만 당하고 당장 먹고 살기가 막막했습니다.
일거리도 찾기가 힘들었고 찾았어도 임금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탕자는 지금까지 세상을 향하던 방향을 아버지의 집으로 돌립니다.
아버지 집을 향하여 체면 불구하고 돌아갑니다.
잘못했다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고 환영하며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주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여러분,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고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것 같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고 세상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는 시선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치루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을 향하던 방향을 돌려서 주님을 향하고 성전을 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시간을 등한히 여기고 예배에 빠지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모습에서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생길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고 성전을 찾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뭄이 들 때, 흉년이 들 때, 적국에 패했을 때, 문제가 생겼을 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성도들이 드리는 회개의 기도를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십니다.
위기가 생겨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다가 문제를 만나니까 겨우 기도하니?’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진정한 교만은 문제가 생겨도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지 않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손을 들지 않는 것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하는 방향을 전환할 때 주님은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3.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봉헌 기도를 보며 ‘이곳을 향하여 비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달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예배나 찬양이나 금식이나 기도와 같은 여려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요소 중에 찬양할 때만 한 번 나오고(35절) 나머지는 다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어달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곳을 향하여 예배한다든지 이곳을 향하여 제사를 드린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없고 제사장이 집례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 할 수 없기는 합니다.
그렇더라도 이곳을 향하여 그들이 하는 일이 전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뿐이라는 말은 그만큼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은 기도를 빼 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에 깨어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 신앙은 기도의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이 언급한 대로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은 23절에서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신으로 일컬음을 받는 존재는 많지만 그러나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특권인 줄 모릅니다.
거기다가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유효합니다.
잘못했을 때, 인생의 역경을 만나 힘들어할 때, 적국에게 패하였을 때,
가뭄이 들고 흉년이 들었을 때, 전쟁에 나갈 때, 전염병이 돌았을 때,
잘못하여 타국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어느 때든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E. M. 바운즈는 ‘기도의 심장’이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집에서는 기도가 주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집이 다른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기도만 있으면 그 곳은 성소로 변한다.
기도 없는 교회는 영혼 없는 몸과 같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교회 안에 존재하신다.
기도가 익숙하지 않은 교회에는 하나님도 낯선 객에 되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교회의 생명과 능력과 영광은 곧 기도입니다.
성도들의 생명도 기도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교회와 성도는 생명력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건물만 남게 됩니다.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은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기도를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힘입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