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2.
현대의
**작가
1. 라클로(1741-1803)
<위험한 관계>
소설 ‘위험한 관계’는 프랑스 사교계의 사랑, 욕망, 허영을 그렸다.
위험한 관계는 서간체 소설이다.
군인이었던 작가 라클로가 군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려 쓴 소설이라고 한다. 여러 인물이 주고 받은 편지 175통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낱낱이 배열한 소설이다. 특별한 장치를 한 것은 없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귀족사회를 거의 완벽하게 묘사함으로 오늘의 독자에게도 재미를 준다. 특히 내밀한 심리 묘사로 18세기 프랑스 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이다. 이성과 도덕이 지배하던 시대였디. 이성과 도덕의 사회 이면에 숨겨진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낸 시대의 풍경화이다. 감정의 굴곡을 그린 연애 소설이다. 18세기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시대에 성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와 악의 문제를 다룬 작가 사드(1740-1814)와 더불어 18세기 성 담론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 문학에서 심리소설의 고전적인 교과서로서 널리 읽힌다.
안드레 말로는 이 소설을 말하기를
“두 주요 인물 발몽과 메르테유 후작 부인의 관계는 곧 인간 의지의 신학이다. 의지와 성적 욕망으로 유지되는 이들의 결속이 이들의 행동을 더욱 대범하게 만든다.
<라클로>
북 프랑스의 아미앵에서 지위가 높지 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세를 위하여 군인이 되지만 이곳, 저곳의 근무지를 따라서 돌아다니느라 출세도 하기가 어렵다. 문학을 좋아하여 스탕달을 많이 따랐다. 그는 군인으로는 이름을 남기기가 어렵다고 보고 한가한 시간에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위험한 관계’이다
그는 이 소설 때문에 부도덕하고 신성모독적이며, 미풍 양속을 해친다고 비난을 받았다, 대중은 손가락질 하였다.(마광수가 생각납니다.) 혁명 이후에도 세인의 평가는 싸늘하기만 하였다. 판매금지까지 당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심리소설 계보를 잇는다는 확고한 평가를 받는다. 라클로는 이 소설 한편으로 프랑스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군 주둔군의 사령관까지 된 라클로는 63세 때 이질로 죽었다.
2. 사드 후작(1740-1814)
사드 후작은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이다. 철학 용어인 사디즘 이란 말을 만든 사람이다. 입대하여 기병대위로 퇴역했다. 파리고등법원 총재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10대 후반부터 난봉군으로 이름을 날린다. 사디즘적 일탈도 나타났으나, 귀족이란 빽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성추문(사디즘은 학대이다.)으로 투옥되었다. 이 일로 프랑스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매춘부를 상대로 최음제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루이 16세 때 13년 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때 많은 집필을 했다.
1789년, 대 혁명 때도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다.
결국 1776년 미성년자 시종들을 상대로 한 음란행위가 폭로되었고 1777년 2월 13일 국왕 루이 16세의 봉인장을 소지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되고 말았다. 사실 이는 수감될 만큼 큰 죄가 아니었지만 사드의 행위를 알게 되어 그를 증오한 장모가 수를 써서 국왕에게 사면 없는 무기한 구금명령을 받아 낸 것이다. 이때문에 그는 1790년 왕정이 무너지고 봉인장의 효력이 상실할 때까지 13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집필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789년 7월 즈음엔 사드는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감옥 밖의 시민들을 향해 간수들이 죄수들을 학살하고 있다며 선동하는 고함을 질러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한다. 다만 사드는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기 며칠 전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사드가 이송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는 과정에서 소돔 120일의 원고는 실종되며 사후에나 발견되었다. 이렇게 실종된 뒤 여러 수집가 손을 거치며 이리저리 매매되다가 2017년 다시 경매에 나왔는데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의 중요 국가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경매를 중단시켰다. 국제 시세대로 나랏돈을 주고 구입할 것이라고.# 참고로 사드의 원고는 가격이 한화로 70억 원이 넘는다.
1790년 이후 사드는 정식으로 석방되어 자유를 찾았으나 사실상 빈털터리로,무일푼 신세이다. 아내와 이혼까지 했다. 공포정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1793년 반혁명분자란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주요 저서들을 실명 혹은 익명으로 간행하지만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드의 사상과 성적 취향을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해하지 못하고 불경으로 간주하다보니 사드의 저서들은 팔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드는 저술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다. 그러나 1801년에 그의 저서들이 불경하다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또다시 음란물 유포 혐의로 투옥되었다. 1804년에는 그의 악명에 진저리가 난 자녀들에 의해 파리 근교의 비세트르 병원(Bicêtre Hospital) 폐쇄병동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원고 일부가 유실되었다.
정신병원의 독방에 갇힌지 5년만인 1814년 12월 2일에 사드는 이 정신병원에서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자손들은 그를 부끄러워하여 오랫동안 사드 후작이라는 작위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드가 재평가되면서 근래부터 그의 작위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사드의 소설은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유물론, 무신론, 아나키즘적 요소도 있어 20세기 들어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예술적, 학술적 평가를 받아 지금에 이른다.
*여기서 사드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시대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이고, 문학작품으로서는 다른 기회에 ----
3. 자코모 카사노바(1725-1798)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모험가이며, 작가, 시인, 소설가를 자칭한 범죄자, 사기꾼이다. 자서전이기도 하고 회고록이기도 한 그의 주요 저서《Histoire de ma vie》(나의 삶의 이야기)는, 자신이 여성들하고 놀았던 이야기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여성 편력가로 워낙 유명해서, 그의 이름은 "(여성을) 유혹하는 기술"과 동의어로 남아있다. 그는 때로 "세계 최고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카사노바는 유럽의 왕족들, 교황 및 추기경들, 그리고 볼테르나 괴테, 모차르트와 같은 유명 인사들과 교제를 가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집필한 곳인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Count Waldstein)의 집에서 사서로 몇 년간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오늘날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범죄자인 이유는 복권 사업 등으로 인한 사기 행각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는 탈옥하자 유럽 전 나라에서 망명을 받아주었다.
***예술의 사조
*로코코(1루이14세 죽음(1715) - 로이 16세 처형(1793)) 시대이다.
계몽이라는 사조가 뒤덮고 있었다. - 루소와 볼테르가 중심 인물이었다.
-->이 시대의 분위기는 무능한 신사, 숙녀가 한가롭게 모차르트 음악이나 듣고, 가난한 사람이
식모들의 이야기를 재미삼아 웃으려고 나누고,
계몽사상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있었으나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루이 14세의 오랜 치세가, 루이 14세 양식에 젖어서 살았다.
(그들은 인구의 1/10이었고, 9/10은 가난뱅이 였다.)
9/10이 저항하여 1/10을 압도 함으로 로코코 라는 예술양식도 사라진다.
음악에는 오페라 선호로 나타난다.
예술이 국가에 따라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한다. 예술의 양식이 국가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양식에 의하여 전 국가의 예술이 같은 양식으로 된다
-->건축물의 화려한 실내 장식으로
그런 건축물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식기나, 스푼 등등도
==> 로코코 시대는 감상적이고, 깊이가 모자랐다.
이 양식이 러시아 전체로 퍼지지는 않았고
표토르 대제가 유럽화 정책으로 페테스부르그에 로코코 양식의 건출물이 나타난다.
** 영국에서는 화가 호가드가 사회비평의 그림을 그린 것은 하나의 특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