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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의 첫 번째 침략
왕하 6:8-23
8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왕하 6:8-23 / [엘리사 때문에 고민하는 왕] 아람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국경선에 침범하던 때의 일이다. 아람 왕이 자기의 지휘관들과 의논하여 이스라엘 왕을 죽일 수 있는 장소들을 결정한 후 군대를 매복시켰다. 9)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전갈을 보내어 매복 장소를 알려 주고, `아람 군대가 숨어 있는 곳을 피하여 가시오!'하고 주의를 주었다. 10)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예언자가 경고한 곳으로 수색대를 파견하여 경계하고 그런 곳에서는 특별히 조심하면서 지나다녔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반복되자 11) 아람 왕은 불안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고 호통을 쳤다. `우리들 가운데 틀림없이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반역자가 있다. 그게 누군지 당장 말하여라!' 12)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임금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일은 어떤 반역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엘리사라는 예언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말씀하시는 것까지도 이스라엘 왕에게 일러바치는 자입니다.' 13) 왕이 즉각 명령을 내렸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아 나에게 보고하여라. 그러면 내가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겠다' 그러고 나자 즉각 아람 왕에게 `엘리사가 사마리아 북쪽으로 약 1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도단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4) [엘리사의 불말과 불수레]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력은 지극히 허약하였다. 아람 왕은 전차 부대를 앞세우고 대군을 출동시켜 밤에 이스라엘의 중심부로 몰고 들어와 도단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엘리사의 시종이 아침에 일어나 성문 밖으로 나가 보니 온 성읍이 전차와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달려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외쳤다. 16)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우리 편에는 더 많은 군대가 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리고 `주님, 이 시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였다. 주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자 그 성읍이 위치한 온 산에 불말과 불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18) 아람 군대가 몰려오자 엘리사가 주께 기도드렸다. `저들을 쳐서 소경이 되게 하소서!' 주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을 쳐서 소경이 되게 하셨다. 19) 엘리사가 그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너희는 길을 잘못 들었다. 이것은 너희가 찾는 성읍이 아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가 찾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겠다'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리고 갔다. 소경이 된 그들은 이제 속기까지 하였다. 20) 거기서 엘리사가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 그들의 눈을 다시 열어주소서!' 주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니, 그들이 사마리아 도성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21) 국력이 약해져서 예언자만 의지하던 이스라엘의 여호람왕이 엘리사가 적군을 도성 한가운데로 끌고 오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나의 아버지시여, 내가 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까요?' 하고 물었다. 22) 엘리사가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임금이 전쟁에서 직접 포로로 잡은 군인들이라 하더라도 그냥 죽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음식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그들의 임금에게 돌려보내시오!' 23) 왕은 엘리사의 말에 따라서 그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들은 실컷 먹고 마신 다음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아람 군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 땅으로 쳐들어와 약탈해 가는 일이 없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해 몇 번의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선지자 엘리사에 의해 무산되자 그것을 알고 엘리사를 잡으려 군대를 보냅니다.
아람 왕의 두려움(8-13)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과 그 장소, 그리고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자 이에 엘리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정보대로 그것을 점검하였고 그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적군에 대해 준비하여 아람의 은밀한 공격을 오히려 역공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아람 왕은 계속되는 공격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궁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 계략이 자기 신복 중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는 줄로 생각할 만큼 크게 당황하여 그들을 불러 추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을 통해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엘리사를 체포하도록 군대에 명령합니다.
성읍을 둘러싼 아람 군대(14-19) 아람 왕의 명을 받은 군대는 곧 바로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를 동원하여 그가 살고 있는 도단으로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쌉니다. 이때 엘리사의 사환은 아침 일찍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고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심히 두려워하는 사환에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산에 가득한 불 말과 불 병거를 볼 수 있도록 사환의 영안을 뜨게 하였습니다(창 32:1-2). 여기서 엘리사의 사환이 보았던 아람 왕의 군대는 지상군대의 모습이었고, 영안이 열린 후에 발견한 군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상의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오도록 합니다.
자유인이 되어 돌아가는 아람 군대(20-23)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잡은 포로를 몰살시키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요람 왕은 소경이 된 채로 사마리아로 붙잡혀 온 아람의 군대를 공격하기 원했지만, 엘리사는 오히려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떡과 물을 제공한 후에 순적하게 그들의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자고 청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한 지붕 밑에서 함께 먹는 것은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포로 된 자를 살육하지 않는다’는 무사의 도가 선지자 엘리사의 정신에 나타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되며, 오늘날 포로에 대한 국제 협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용서와 화평의 전략을 통해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습니다.
적용: 엘리사의 사환이 영안이 열리지 않았을 때와 열렸을 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영안이 열려있습니까?
믿고 첫걸음을 내딛어라.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 - 마틴루터킹.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당신의 꿈에 도전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도전하는 삶이 불안하다면 도전하지 않는 삶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쉽게 좌절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피할 길을 내고 도와주십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눈으로 그 상황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욕심은 미래를 망칩니다 / 이한규 목사
■ 2006년 11월 용인에 70평과 80평의 대형평수로만 구성된 S아파트 345가구의 분양 보도가 각 일간지에 나왔습니다. 당시 평당 분양가는 1200만 원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그때는 분양하면 다 성공하니까 막대한 수익을 내는 환상을 쫓아 회사가 평당 1800만원에 용인시에 분양 승인 신청을 했습니다. 주변 시세와 비교해 평당 600만원, 한 아파트 당 4억 원 이상을 날로 먹겠다는 지나친 욕심이었습니다. 결국 용인시에 의해 평당 1485만원에 승인되었습니다. 용인시는 원래보다 200-300만 원을 낮췄다고 자화자찬을 했고 건설사는 “시의 강력한 요청으로 경영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분양가를 크게 낮췄다.”고 생색냈습니다. 그러나 그 승인된 분양가도 당시 주변 시세와 비교해 한 아파트 당 2억 이상 비쌌습니다.
드디어 2006년 12월 성탄절 다음날 분당의 모델하우스 개관과 함께 화려하게 분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45가구 모집에 128명만 신청하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뒤 계속된 일간지의 분양광고와 보도에도 분양은 더뎠습니다. H경제지는 ‘흙속의 진주 미분양 아파트 분양 중’이란 보도도 했고 F 경제지는 ‘제7회 하우징 파워브랜드 대상 받은 S아파트 분양 중’이란 기사를 내보냈지만 소비자는 외면했습니다. 그 후 돈 부족으로 공사는 지연되었고 부실공사 의혹도 생겼습니다. 한 차례 준공 연기 끝에 2009년 6월에 억지로 준공을 받으려는데 청약자 70명이 용인시로 몰려가 부실공사라고 준공을 막았습니다. 그때 6월 말까지 준공되지 않으면 회사는 계약자에게 10%의 보상금을 주든지 아니면 계약자는 위약금 없이 해약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계약자들은 준공지연 명목으로 다 해약했고 2010년 초 그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 아파트 345세대가 통째로 경매로 나왔지만 7차례 동안 1채도 낙찰되지 않고 8차 경매 이후로 단 55가구만 낙찰되었습니다. 결국 2012년 2월에 분양가 11억 원이 넘던 아파트가 1억 원대로 경매로 나왔습니다. 그 기사가 수많은 언론에 뜨면서 그 2월 경매 때 93가구가 낙찰되었지만 그 낙찰자들도 손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채권자들이 대지가 아닌 아파트 건물만 경매에 붙여서 결국 대지권이 없는 아파트 건물만 낙찰 받은 것입니다. 당시 대지권을 담보로 가졌던 대한주택보증은 남은 비낙찰 가구들을 통째로 싸게 사들여 공매에 붙였고 기존 아파트를 낙찰자들에게는 4억 이상의 땅 값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1억 원 대에 낙찰 받은 사람들도 총 6억 정도가 들면서 오히려 주변 시세보다 조금 더 비싸게 아파트를 구입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 후 1년 이상의 진통 끝에 모든 법적인 문제가 정리되고 최근에 최초 분양가보다 6억 원 이상 빠진 4-5억 원 대의 가격으로 재분양되고 있습니다. 최초 분양가를 당시 시세인 1200만 원 이하로만 정했어도 상당히 이익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환상에 젖어 아파트 한 단지 사업으로 천 억 이상 떼돈을 벌려고 생떼를 부려 결국 꽤 잘 나가던 건설회시가 망한 것입니다. 욕심은 눈을 멀게 하고 미래를 망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제일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욕심으로 눈이 가려지지 않게 하시고 찬란한 내일의 거룩한 비전을 보며 열심히 살게 하소서!”
영안이 열린 삶의 의미
요새 “영안이 있다! 영안이 열렸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그런 표현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영안이 열렸다는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렸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1.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삶
이스라엘과 아람이 전쟁할 때 아람 왕 벤하닷이 밀실에서 작전을 짰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영적인 능력으로 그 작전 짜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왕이 어디로 가서 어디를 방비해야 할지 철저히 대비시키니까 아람이 당할 수 없었습니다(8-10절). 결국 아람 왕이 내부 스파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자 한 신하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쪽에 엘리사란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도 다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는 것입니다(12절).” 그러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병사를 보내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14절).
사환이 아침에 나가보니 무수한 아람군대가 성을 둘러싼 것을 보고 놀라서 그 보고를 하자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16절).” 그때 엘리사는 영안으로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함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눈앞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우리 뒤에는 천사가 호위해 지키고 있고(마 18:10), 더 크게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진 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의 애굽 군사들과 앞의 홍해를 보고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매장하려고 여기로 끌고 왔느냐?” 그때 모세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그처럼 영안이 열리면 어떤 큰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고 해서 전혀 근심이 없는 강철영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위험한 것을 조심하게 만드는 근심과 두려움은 필요합니다. 과속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안전운전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힘들어도 자살하지 않습니다. 두려운 감정도 하나님이 생존 본능으로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앙적인 두려움입니다. 확신이 있어도 일이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면 일을 더 못하게 됩니다.
이제 믿음을 가지고 너무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불말과 불병거로 지켜주고 있다고 믿으십시오. 눈앞에 펼쳐진 환경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으면 죽으리라! 그래도 예배하고 감사하리라!”라고 나가십시오. 그러면 없던 길이 생기고 사는 길도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불행의 표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기에 더 절제하고, 더 겸손해지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떤 문제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느끼면서 위기를 기회를 만들어 가십시오.
2. 영적인 자원을 사용하는 삶
엘리사가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그 기도대로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자 사환의 눈에 불말과 불병거가 보였습니다. 조금 후 아람 군사들이 공격해올 때 엘리사가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18절).” 그 기도대로 그들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눈먼 병사들을 이끌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19절). 그리고 사마리아에 들어서서 엘리사가 또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무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그 기도대로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자 아람 군사들은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20절).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엘리사에게 묻자 엘리사는 아람 군사들을 죽이지 말고 편히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21-22절).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온 것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람 왕이 엘리사의 말대로 아람 포로들을 잘 대접한 후에 놓아주자 그들이 돌아갔고 그 후부터 아람 군대는 한 동안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23절).
이 장면에서 엘리사는 사환의 눈을 뜨게 할 때도 먼저 기도했고 아람 군대의 눈을 닫게 할 때도 먼저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영안이 열린 삶은 영적인 자원을 사용할 줄 아는 삶입니다. 성도의 영적인 자원 중에 최고의 자원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고 기도를 잃어버린 것은 성도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어느 한 시간도 헛되지 않습니다. 내일이든, 내달이든, 내년이든, 10년 후든, 심지어는 자녀와 손자에게든 그 열매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진실하게 기도하면 응답은 오직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모든 진실한 기도는 영적인 통장에 저축되어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쓰게 되면서 그때 문제도 풀리고, 길도 열리고, 풍성한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기도라는 영적인 자원을 잘 활용해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삶
가끔 보면 영안을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안이란 ‘신기한 것을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는 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손길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보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나누려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입니다.
어느 날, 부목사로 5년 지내던 A목사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저도 담임 목사가 되게 하소서!” 그때 몸에 이상한 부스럼이 생겨 병원에 가보니까 피부암이었습니다. 점점 암세포가 퍼져 얼굴도 이상해졌습니다. 그 즈음에 한 신학교 동기가 유학가면서 교인들에게 “A목사님 설교를 한번 들어보라!”고 해서 그 교회가 A목사님을 초청해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배 후 청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설교는 좋은데 암 투병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분을 담임 목사로 모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집사님이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을 담임 목사님으로 모십시다.” 모두가 미쳤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모시면 진실한 설교를 들을 것 같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에 가장 진실하게 설교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번 설교하고 돌아가셔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건강해도 내일 죽을 수 있고 아파도 기적적으로 나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저렇게 암 투병하는 목사님을 모시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결국 A목사님을 청빙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교인들이 고마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병 치유나 목회 성공을 위한 기도가 아닌 이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저 같은 암 환자를 초빙해준 이 아름다운 교회에 좋은 후임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모두 복 받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자기 병이 그만 나아버렸고 그 후 목회를 잘하다가 은퇴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얘기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처럼 십자가의 길을 택하고 부활의 기쁨을 맛보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입니다.
4. 미래의 비전을 보는 것
성도는 세상과 다르게 보고 세상을 달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자신이 영안이 열렸다고 교만하게 늘 튀는 언행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 뜻만 하나님의 뜻처럼 우기라는 말도 아닙니다. 사실 그런 행동들은 더 나쁜 행동들입니다. 세상을 달리 보라는 말은 눈에 보기에 화려하고 좋고 신나는 길만 따라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크고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를 찾지만 그것이 인생의 미래에 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큰 곳에 몸담는 것보다 좋은 비전의 성취를 위해 자기 힘을 보탤 곳에 몸담는 것이 더욱 복되고 보람된 일입니다. 또한 외형이 큰 교회가 되는 비전보다 영향력이 큰 교회가 되는 비전을 추구해야 부속품 인생이 아닌 창조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의 모습보다 미래의 찬란한 비전을 보는 영안을 구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만 보지 않고 귀신이 나가고 새로워지면 누구보다 귀한 헌신자가 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12제자는 다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고 예수님의 무덤도 제일 먼저 찾아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미래의 모습을 보시고 그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을 현재의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말고 내일의 가능성을 보고 세워주십시오.
사람들은 다 삭개오를 세리라고 욕하고 난쟁이라고 깔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간절히 추구했던 삭개오에게서 내일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서 하루를 지내셨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왠지 모르는 감동에 휩싸여 나눔을 결단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과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처럼 영혼의 현재 모습보다는 내일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볼 때도 그런 내일의 가능성을 가지고 보십시오. 지난 세월 끊임없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라!”고 했던 믿음의 선포를 하나님이 다 듣고 그 믿음을 받아주시고 우리와 우리 후대 가운데 인물이 나오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인들을 보고 우리 자녀를 보고 우리 목회자를 볼 때마다 “보통 인물이 아니네. 이런 인물을 어디서 만나겠어? 하나님! 이렇게 멋진 자녀가 내 자녀입니까?”라고 기뻐하고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그 믿음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볼 때도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보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고 하는 자신을 대견하게 보십시오. 월드컵 4강 경기가 있어도 주일을 지키러 꾸역꾸역 나오는 모습을 보면 사탄이 기가 질려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마음과 정성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어려워도 지금의 현실을 비관하지 말고 문제에 당황하지도 말고 너무 외로워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믿고 내일의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 1918년 11월 소아마비였던 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유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왔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발이 퉁퉁 부어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괜찮나요?” 그때 루스벨트가 대답했습니다. “내 발은 늘 아파도 머리는 늘 건강합니다.” 영안이 열리면 그런 긍정적인 언행이 버릇처럼 나옵니다. 그처럼 하나님 안에서 내일을 낙관하며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며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때를 준비하며 사는 삶이 바로 영안이 열린 삶입니다.
인물 되는 길을 준비하십시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영안’이란 말을 잘못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폐해가 많습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는 말합니다. “천국을 봤다! 지옥을 봤다!” 심지어 어떤 사악한 신비주의자는 자기 멋대로 믿음의 원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서운 정죄적인 말을 합니다. “돌아가신 초대형 교회 아무개 목사님이 지옥에서 울부짖는 환상을 봤어요!” 그것이 영안이 열린 것일까요? 미국에서는 그런 사자 명예훼손을 하면 무섭게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 주장은 증거를 댈 수 없기에 가족이 소송을 걸어오면 백전백패합니다.
한국 전체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면 정당한 비판을 주의 깊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자기가 하나님처럼 누가 지옥 갔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환상 얘기를 하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도 모르는 무속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무속신앙으로 자기가 영안이 열렸다고 착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언행을 용납하고 더 나아가 믿고 전파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헛된 신비주의자가 자기 환상에 사로잡히면 무엇인들 못 보겠으며 꿈에서는 무엇인들 못 보겠습니까?
어느 날, 한 목사가 꿈속에서 너무 생생하게 전 인류를 출애굽처럼 출지구시켜 우주의 신세계로 이끄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피식 웃으면서 그저 내일의 비전을 위해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한번 꿨다고 “내가 메시아다!”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목사입니까?
하나님이 전자와 후자 중 어느 목사를 기뻐하실까요? 그렇게 물으면 어떤 분은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뻔한 질문을 왜 하세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문제는 한국 교계에서 그런 질문이 뻔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가끔 보면 정신 줄 다 놓고 후자 목사에게 이끌려 영혼 망가지고, 가정 파괴되고, 인성 무너지고, 재물 빼앗기고, 심지어는 불신자로부터까지 조롱받는 불행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후자와 같은 목사를 영안이 열린 이 시대의 메시아로 추종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죄입니까?
어떤 목사가 몇 달 동안 아침마다 1시간 이상 깊은 환상에 빠졌습니다. 우주를 자유자재로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고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몸이 생각하는 대로 거기 가 있고 어디를 가보고 싶다고 하면 그 장소가 클로즈업 되어 다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환상 모드로 들어가자고 맘만 먹으면 바로 그 환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환상이 2개월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영적인 우월감과 신비감과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환상이 실상처럼 느낌도 너무 생생했습니다. 마치 우주 전체가 자기 손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뭐하고 있지? 목회자로서 이런 환상 놀음에 빠지다니...” 그 뒤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런 열매 없는 그런 환상에 더 이상 젖지 않게 하소서!” 그로부터 그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 가끔 그때의 극치의 환상적인 쾌감이 언뜻 생각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열매 없는 환상은 병든 심령의 착각이나 마약 중독자의 혼돈과 결과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 목회자는 자기 일상에 충실하고 나눔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내일의 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을 가지고 환상을 젖으면 거의 예외 없이 보람이 없는 낭비 인생이 펼쳐집니다. 또한 영적인 욕심을 가지고 환상에 젖으면 거의 예외 없이 열매 없는 신비주의자가 되고 또한 거짓에 미혹되어 자기도 망하고 가족도 망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해충 인생이 됩니다. 영안이 열린 삶이란 그런 영적인 헛된 욕심을 쫓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찬란한 나눔의 비전을 가지고 내일의 가능성을 보는 삶입니다.
또한 영안이 열린 삶이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고 땀 흘림을 앞세우면서 당대와 후대의 인물 되는 길을 준비하는 삶을 뜻합니다. 결국 영안이 열린 삶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믿음, 십자가, 나눔, 감사, 기도, 그리고 희망입니다. 이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가는 곳마다 희망을 전파하는 희망 발전소가 되게 하소서! 이번 한 주간도 세상에 나가 삶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희망을 전하는 희망 전도사가 되게 하소서!”
어느 날, 전쟁에서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소생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 군의관이 무심코 말했습니다. “이 친구 내일까지 살 수 있으면 희망이 있네.” 그 말을 무의식중에 듣고 이 사병이 희망을 가지고 “하루만 더 살겠다.”고 해서 하루를 넘기자 점차 병세가 호전되어 살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의 믿음의 말과 작은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믿음과 비전과 희망을 가진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목사님 말대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의심하지 마십시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큰 인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에서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런 비전을 가지고 준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야곱처럼 하나님을 꼭 붙잡고 축복받은 후에 더 잘 나누고 섬기며 살겠다는 꿈과 비전을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눈이 좋지 못하면 고생한다?
■ 어느 학교에서 미술 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문제는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작가의 이름으로 쓰시오.’였습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한 학생은 자신 있게 ‘로뎅’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컨닝을 했는데, 눈이 나빠서 ‘로뎅’을 ‘오뎅’이라고 잘못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아있는 다른 학생이 컨닝을 한 후 똑같이 적으면 선생님에게 들킬 것 같아서 ‘오뎅’을 ‘덴푸라’라고 적었습니다. 그 옆에 앉아있는 또 다른 학생 역시 컨닝을 한 것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묵’ 결국 컨닝을 한 세 명의 학생들은 탄로가 나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유머인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눈이 나쁘면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불량용품 판매점’이라는 간판을 보고서 별 희한한 간판도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볼링용품 판매점’이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랑 바닷가에 놀러가서 술 한 잔을 한 후 걷다가 길 건너편에 ‘야구장’이라는 간판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길을 건너 가까이 가서 보니 야구 연습장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아구탕’이라는 간판만 보이더랍니다. ‘아구탕’ 간판을 ‘야구장’ 간판으로 잘못 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친구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눈이 좋지 못하면 실수를 할 때가 있고,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는 등,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눈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람은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눈(육안, 肉眼, naked eye)’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없는 사람이나 육신의 눈으로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소경 혹은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소경이라는 말 대신 ‘시각장애우’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아무튼지 소경이든지 시각장애우든지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생활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습니다. 둘째로 ‘지식의 눈(혜안, 慧眼, insight)’이 있습니다. 옛말에 ‘낫 놓고도 기억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배우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을 묘사한 말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커플이 식당에 갔습니다. 식당 한쪽 벽에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 쓰인 액자가 있었습니다. 여자가 물었습니다. “오빠! 저거 뭐라고 쓴 거예요?” 남자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네 글자 중에 끝에 있는 ‘지마’라는 두 글자는 알겠는데, 앞에 있는 두 글자는 아무리 봐도 무슨 글자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기지마!’ 결국 두 사람은 밥알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었다고 합니다. 까막눈이라는 말은 바로 지식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눈이 좋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지식의 눈이 좋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이 쌓이면 지식의 눈이 생깁니다. 셋째로 ‘마음의 눈(심안, 心眼, mind's eye)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은 자신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한 여인이 아주 멋지게 생긴 얼짱 남자를 만났습니다. 겉모습만 멋진 것이 아니라 매너까지 좋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잃었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한 제가 잘못입니다.” 이 여인은 육신의 눈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눈은 좋지 못했습니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것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려면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영의 눈(영안, 靈眼, spiritual eye)’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은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좋고 지식의 눈이 좋고 마음의 눈이 좋아도 영안이 뜨이지 않으면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5절과 16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었기 때문에 엠마오로 가기는 했지만,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자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인 눈이 닫히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이 뜨이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영적인 눈이 닫혔다가 다시 영적인 눈을 뜨게 된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문을 내용으로 한 설교는 엘리사 선지자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엘리사 선지자가 아닌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주전 850년 경 이스라엘과 북쪽에 있는 아람 나라가 치열하게 전쟁을 치를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람나라가 치밀한 계략을 세워 이스라엘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람 왕은 자신들 중에 스파이가 있어 작전계획을 이스라엘 측에 알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 그가 왕이 침실에서 은밀하게 하는 말까지도 미리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자신들의 작전계획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있는 이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로 구성된 특별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엘리사가 숨어 있다는 도단성을 포위하게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같이 1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도단성은 계곡 위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을 쉽게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수많은 군사들과 말과 병거가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욱이 그는 영적인 눈이 열리 있지 않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인님, 큰 일 났습니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16절 상반절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Don't be afraid" 엘리사는 게하시와 정반대로 반응한 것입니다. 도단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 게하시는 두려워했지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게하시는 두려워 떤 반면, 엘리사는 오히려 두려워 떠는 게하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게하시와 달리 엘리사가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 과거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던 시절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순교자가 장적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그 순교자는 자기의 사형집행을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입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종교를 믿지 마시고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판사가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슨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심장이 뛰고 맥박이 빨라집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의 가슴이 아니라, 침대에 잠을 자러 가는 사람의 가슴처럼 너무나 고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이러한 담대함이 나올까요? 히브리서 11장 36절과 37절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선배들은 엄청난 환난과 학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톱으로 켜질 위험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칼에 맞아 죽는 자리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사람을 담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담대하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게하시는 ‘죽게 생겼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믿음의 사람 엘리사는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며 게하시를 안심시켜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무엇을 믿었을까요? 그가 무엇을 믿었기에 두려워 떠는 게하시와 달리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는 자기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군대가 자기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게하시에게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군사가 더 많다’라고 위로해 준 것입니다(16절).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야훼여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O Lord, open his eyes)"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다같이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야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기 ‘눈을 여시매’라는 말은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 육신의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도단성 주위에 가득하게 진을 치고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낸 주신 불말과 불병거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주셨을까요? 아니면 엘리사가 기도하기 전부터 거기에 불말과 불병거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자, 서둘러라. 아람왕이 보낸 군대에 포위된 엘리사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 기도가 끝나기 전에 우리가 도착해야 된다’고 했기 때문에 천사들이 급하게 달려왔을까요? 아니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체포하려고 몰려오기 전부터 천사들이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었을까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엘리사가 하나님께 천군천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엘리사는 그저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게하시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위해 기도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신 후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도 전에 이미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에게 미리 보내주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미리 천군천사를 보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도단성에 머무르고 있는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천군천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줄로 믿습니다.
어느 글에서 부부의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20대 부부는 포개서 잠을 잔답니다. 그 이유는 옆에 누워 있는 것도 아까워서랍니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면 손잡고 자고, 40대는 손 놓고 떨어져 자다가, 50대에 들면 서로 돌아누워 잔다고 합니다. 그러면 60대가 된 부부는 어떻게 잠을 자는 줄 아십니까? 남편은 이 방, 아내는 저 방, 각자 따로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0대가 되면 또 어떻게 잠을 잘까요? 한 사람은 방에서 자고, 다른 한 사람은 산에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산에서 잠을 잔다는 말은 캠핑 가서 잠을 잔다는 말이 아니라, 산에 있는 무덤 속에서 잠을 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살겠다고 결심을 해도 사람은 변합니다. 사랑이 식어져서 서로 돌아누워 자던지, 각자 따로 방을 쓰며 잠을 자던지 변합니다. 아니면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몹쓸 병에 걸려 한 사람은 병원 침대에서 잠을 자고 한 사람은 안방에서 잠을 자든지, 한 사람은 살아있고 다른 사람은 무덤 속에 있든지 세월이 흐르면 부부는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변함없이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죽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네.” 잠시 후 웨슬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라네.”라고 말한 후 평화로운 얼굴을 한 채 숨을 거두고 천국으로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 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눈을 뜹니다. 그 이유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눈을 감고 움직인다면 이곳저곳, 여기저기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와 얼굴과 몸에 숱하게 멍자국이 남을 것입니다. 물론 손을 내저어 앞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 후 움직일 수 있고, 귀로 들어 본다거나 냄새를 맡아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완벽하게 알려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눈을 뜨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육적인 눈을 뜨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에게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세계와 영적세계를 모두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로마서 11장 8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보지 못할 눈을 주셨습니다. 즉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또 이사야 43장 8절에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두 분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탐욕으로 어두워져서 인간의 도리와 양심조차도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게하시는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와 달리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합니다. 사실 게하시는 자기 주인인 엘리사 선지자 옆에서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목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기름병에서 기름이 끝없이 쏟아지게 하는 것을 보았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것도 보았고,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것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눈은 감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불말과 불병거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를 아무리 오래 따라다녀도,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많은 것을 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 있으면 영적인 세계를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보았다 할지라도, 영적인 눈이 감겨 있으면 게하시처럼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쫓겨나서 광야에서 울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셔서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우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21:19). 기도를 통해 눈이 열립니다. 어떤 눈이 열립니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엘리사가 ‘야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O Lord, open my eyes so I may see’라고 게하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인 눈을 열어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야훼여 원컨대 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만약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나 친구 등,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야훼여 원컨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여러분, 엘리사처럼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감겼던 영적인 눈이 떠지고, 기도를 통해 닫혔던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 이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총장인 찰스 엘리엣에게 어느 날 나이가 지긋이 든 노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노부부는 지저분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적어도 하버드대학 총장을 만나려면 예의상 정장을 입던지, 정장이 아니라 할지라도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부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하버드대학에 얼마간의 돈을 기부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부하면 얼마를 기부하겠는가 생각하고 노부부를 잘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그 부부를 면담하다 말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노부부도 엘리엇총장과 면담을 하다 말고 “총장님, 바쁘신데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총장실에서 나왔습니다. 원래 그 노부부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아들의 이름으로 하버드대학교에 기부를 하려고 했지만, 엘리옷 총장이 자기들을 무시하자, 노부부는 자기들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에 대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대학이 ‘서부의 하버드’라고 불리 우는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스탠포드는 전쟁에서 죽은 노부부의 아들의 이름인데, 그 이름을 따서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던 것입니다.
엘리옷 총장은 그 노부부가 가지고 있는 큰돈은 보지 못하고 노부부의 겉모습만 봤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고, 세계 제일의 하버드대학 총장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신적인 눈으로 보면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영적인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인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영적인 눈이 뜨였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죄악 가운데 살다보면, 다시 감길 수가 있고 닫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적인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의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영분별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육적인 눈을 떠는 것도 중요하고, 지식의 눈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마음의 눈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게하시처럼 영적인 눈이 닫혀서 두려워하며 어려움을 겪지 말고, 엘리사처럼 영적인 눈을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사의 사역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그 배경이 아람과의 전쟁입니다. 아람은 선지자 엘리사가 사역하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관계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열왕기하 13장, 14장에 가보면 아람이 이스라엘을 학대했다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아람이 이스라엘을 학대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보다 월등이 뛰어난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역했던 기간은 이스라엘이 아람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선지자 엘리사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구원의 기관으로 사역했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넘어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고 계신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기적을 베풀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의 백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말씀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람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작전회의를 하고 나면 그 내용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전달됩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설명은 없습니다. 한두 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작전회의를 하게 되면 벌써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소상하게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혹시 아람 안에 스파이가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아람 왕을 비롯한 부하들은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아람 안에 첩자가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정보를 넘겨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서 아람 왕이 침실에서 나눈 이야기까지 이스라엘 왕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잡아서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람쪽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서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잡아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들이 밤에 가서 선지자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을 포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단락은 아람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단락은 도단 성에서 일어난 일,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 사이에 벌어진 일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사마리아 성 안에서, 아람이 이스라엘의 포로가 된 다음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흥미롭게 관찰되는 것은 우선, 엘리사의 이름이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엘리사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흥미로운 관찰은 작전계획이 이스라엘에게 알려졌을 때 아람이 보인 반응입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도단 성으로 보냈습니다. 아람은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은 엘리사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와 기관으로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고 있다면 엘리사의 사명이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존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나타내야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물리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 사역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던 것처럼 세상은 모든 것을 자신이 갖고 있는 힘으로, 물리력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는 아람이 보여준 정신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것을 갖고 우리가 계획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할 때에 물리적인 자원도 필요하고 힘도 필요합니다. 일의 규모에 따라서 많은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힘과 자원을 동원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단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인 힘, 그것이 돈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어떤 놀라운 일이 발생했을 때 누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을 했을까?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이름이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았듯이 교회 안에서도, 교회가 세상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무슨 특별하고 놀라운 것도 없는데 힘 있고, 안정되게, 능력있게 전진해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 이유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붙잡으셔서 사용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람, 개인이나 혹은 몇 몇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묵묵하게 일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알리시고,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통로로, 구원의 기관으로 부르시고 이 땅 위에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목적에 합당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것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갖고 있는 능력이요, 힘입니다. 이것을 포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람이든, 하나님의 교회든 특성이 상실되고, 특성이 상실될 뿐 아니라 존재 목적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서 그 역할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데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신령한 교제”란 다름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보더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엘리사의 사역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17절, 18절, 20절을 보십시오. 세 구절 모두 엘리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통해서 기적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엘리사가 행한 모든 기적은 엘리사 개인의 능력이나 힘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역에서 기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사는 그만큼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생각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엘리사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 위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분별하지도 못한다면, 그 사람들이 엘리사와 같은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라는 혼란과 혼돈속으로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더라도 거짓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들의 말을 듣고 따라간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구약 성경을 통해서 똑똑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마다 때마다 모든 것을 알려주시고,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단지 펜만을 잡고 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고 그것을 그대로 적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을 기초로 연구하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확신하고 담대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10절 이하에서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고 했습니다. “상고”라는 단어는 알아보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깊이 묵상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들을 비롯한 신약 성경의 저자들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무 생각도 없고, 연구도 없이 그냥 순간적으로 스쳐지나 가는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말씀에 비추어서 깊이 있게 분별하고, 어떻게 하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이루어갈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겠는가?’를 생각하고 알아보고 연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알려주신 것도 있지만 매일 매일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노력함을 통해서 점점 더 높은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 것이요, 그와 같은 신앙의 경지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연하게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어떻게 하면 이루어갈 것인가를 생각한 다음,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와 같은 높은 신앙의 경지, 믿음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그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가?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이라면 우리들은, 적어도 저는 한 평생을 살아도 기적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역할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뛰어 넘는 엄청난 일도 우리를 통해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구원의 기관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요,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신령한 교제를 끊임없이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신령한 교제를 끊임 없이 나눔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깊고, 명확하게 아는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약 기적 자체에 우리의 시선이 집중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을 소홀하게 되면,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무리 놀랍고 훌륭하다고 하여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어쫓고, 주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을 하셨습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여러분, 불법을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행한 모든 것들은 결국 그 근본을 보면 우리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을 행했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보다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요,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저와 여러분들의 몸에 딱 붙어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란 단지 말씀을 읽고, 기도한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그 몸부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그 열정,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그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25:12절과 14절 말씀을 여러분들 마음속에 집어넣어 두십시오. 시편 25: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힘을 써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명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저와 여러분들은 결국 우리들의 유익과 만족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추구하는 유익함이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소중한 가치들도 모두 내던지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세상적인 가치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영원한 유익임을 알기에 그 목표를 내 삶의 목표로 삼고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자신이 몰던 소 두 마리를 잡아서 그 고기를 삶아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소의 기구를 불사른 다음, 엘리야를 따라서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각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소유를 모두 내던지고 엘리야를 따라서 나선 것입니다. 엘리사의 그와 같은 행동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딱 맞추고 나서 그 부르심을 따라서 나섰다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가장 영광스럽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 그 목표에 맞추어서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값진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그렇게 결단하고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도움으로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 성에 가두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엘리사가 대답합니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소서. 이스라엘의 왕이 엘리사의 말대로 아람 군대를 위하여 음식을 베풀어서 먹인 다음에 아람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람과 이스라엘이 보여준 절묘한 대비를 보셨습니까? 아람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습니다. 물리적인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난 기적으로 말미암아 아람 군대를 사로잡고, 그들을 죽이는 대신에 떡과 고기를 먹게 했습니다. 얼마나 절묘한 대비입니까?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작동 원리가 얼마나 다릅니까? 이 원리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9절 이하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9절-20절).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미워하고, 거부하는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행동양식입니다. 세상은 칼과 창과 병거와 군사력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곤고함과 어려움을 헤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서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합니다. 우리들의 안전보장은 이 세상의 물리력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보장이요, 산성이요, 구원의 방패이십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찌르고, 괴롭히는 그 모든 사람들, 세상의 모든 대적들을 향해서 우리들이 보여야 할 것은 칼과 창이 아닙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라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원수들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그들보다 월등이 나은 물리력으로 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들이 알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외쳤던 말씀처럼 “너는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신령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함을 통해서 세상이 알지 못하고, 세상이 갖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든 현실을 바라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두려워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하며,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요,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면 무엇이 되었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주신다고 한 약속, 그 약속이 바로 하나님 백성들이 갖고 있는 놀라운 약속이요, 능력 아닙니까? 그 약속과 능력을 부여잡고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무너져가는 세상, 패역하고 타락해가는 세상,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갖고 있는 능력이요, 힘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개인이나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통로로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 땅 위에 능력 있게 서 있으려면 반드시 만들어 가야할 모습임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은 칼과 병거와 군사로 우리를 대적하지만 우리는 떡과 마실 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미움과 무시와 상처를 주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와 여러분들은 용서와 관용과 사랑과 돌봄과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인 저와 여러분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실력입니다. 힘으로, 무력으로 원수를 갚는 것,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해서 대적하는 자들을 오래 참음과 용서와 관용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날 것이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능력 있게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번 한 주간 내 안에서 꿈틀대는 모든 욕망과 두려움과 미움과 아집을 꺾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하는 일에 힘을 쓰는 한 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욕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 마실 물을 먹이는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 구원의 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의미 / 강문호 목사
우리는 영안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 사람 영안이 열린 사람이다>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 영안이 열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북에서 넘어온 김 만철과 남해 기도원에서 하루 밤을 잔 적이 있습니다. 김 만철이 그 곳에 기도원을 세우게 된 동기를 들었습니다. 이북에서 배를 몰고 많은 식구가 나왔기에 정착금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창 인기가 좋아서 오라는 곳에 많아 이 곳 저 곳 강연을 다니다 보니 강사비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덧 7억 원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 투자할 가를 물색하고 있는 데 어느 사람이 양어장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조언하여 주었습니다. 군부대 협조를 받아 헬리콥터를 타고 양어장 할 만한 남쪽 바다를 하늘에서 정착하다가 눈에 뜨인 곳에 남해였습니다. 땅을 구입하고 설계를 하고 포클레인 기사가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포클레인 기사, 조카 그리고 자기 세 명이 있는 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을 걸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양어장을 만드는 중입니다> <허허! 말세가 다가오는 데 기도원을 만들지> 그리고 30분 가량 이야기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기는 30분을 대화를 나누었는데 같이 있던 포클레인 기사와 조카는 그 할아버지를 보지 못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날로 기도원으로 바꾸어 공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강의하러 다닐 때마가 그 할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 하였습니다. 지금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김 만철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하시지 말고 천사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하십시오. 그 분은 분명히 천사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조카와 포클레인 기사가 보지 못 하였지 않습니까?> 내 말을 듣고 김 만철은 받아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천사를 보는 영안이 열린 사람이 있습니다.
감리교 부흥사 중에 이 용도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늘 마귀를 눈으로 보고 나타나기만 하면 소리를 질렀던 영안이 열린 분이었습니다. 요즈음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아람과 전쟁할 때 이야기입니다. 아람 왕이 밀실에서 전쟁 작전을 짰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 작전 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도청기가 없어도 영의 귀가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은 이스라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그 비밀을 다 알고 미리 대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람 왕은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복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11) 그 때 신복중에 한 명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12) 왕은 당장 엘리사를 잡아 가두어 놓고 전쟁을 하여야 전쟁을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 지 찾았습니다. 도단성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람왕은 전쟁을 중단하고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으로 갔습니다. 수많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도단성을 둘러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보니 도단성을 아람군대의 말과 병거가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사환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당황하여 엘리사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엘리사는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7)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이런 들으시고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영안이 열렸습니다. 불말과 불병거가 보였습니다. 조금 후 아람 군사들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였습니다.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눈먼 사람과 눈 뜬 사람과의 싸움은 이미 승리를 정해놓은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영안을 열기도 닫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영안이 열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가요?
1. 남다른 것을 볼 줄 압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남다른 것을 볼 줄 압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육안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영안입니다. 엘리사 사환은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도단성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 군대, 병거 그리고 말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겁에 질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사환이 보지 못 하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불병거와 불 말이 보였습니다. 남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안입니다. 하네다 공항 옆에 시골 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조그만 교회였습니다. 일본이 올림픽을 치르느라고 도시 계획을 다시 하다가 교회 자리가 도로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수십억의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임원회가 열렸습니다.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모두가 성전이 헐렸으니 성전을 짓자는 데 간단하게 합의되고 있었습니다.l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니 하나님의 성전을 크게 그리고 아름답게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돈이 남으니 얼마나 축복이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때 집사님 한 분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성전이 헐렸으니 성전을 짓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님이 거져 주신 것이니 거져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다 고아원, 양노원등 불우한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은 그리 크게 짓지 않아도 됩니다. 발전지역이 아닙니다. 시골입니다. 교회는 우리 실정에 맞게 자그마하게 지으면 됩니다. 우리가 성전 건축 헌금을 드려서 지어야 합니다> 집사님이 이 말을 할 때 처음에는 사람들이 놀랐지만 모두가 동의하였습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법이라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보상받은 돈은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헌금을 드려서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집사님 한 분에 의하여 그 교회 역사는 달라졌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남다른 것을 볼 줄 압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울산 시민 교회에서 부목으로 5년간 일하던 정 순행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종관 담임 목사님을 모시고 5년간 부목으로 일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나도 담임 목사로 나가서 일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기도하던 어느 날 테니스를 치면서 몸을 보았을 때 이상한 부스럼이 생기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동네 조그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 보았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 보았습니다. 피부암이었습니다. 벌써 온 몸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피부암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굴까지 이제는 완전이 병자인 것을 알아보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심각하였습니다. 그 때 소마산 교회 목사님이 신학교 동기 동창인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 순행 목사님이 동기인데 성실하게 목회를 잘 할 터이니 한번 모셔다 설교를 들어 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유학을 떠난 후 정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온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며 암이 온 몸에 퍼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임원회가 열렸습니다. 모두가 설교는 좋은 데 암 투병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저 목사님을 모실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이제 회의가 끝날 즈음이었습니다. 집사님 한 분이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저 목사님을 우리 담임 목사님으로 초빙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미쳤다는 듯이 집사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저 목사님을 모시면 우리 모두 비장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시는 목사님이시기에 한 편 한 편 설교가 비장할 것입니다. 단 한번 설교하고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건강하여도 내일 죽을 수 있고, 아파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고쳐 주실 줄 수 있습니다. 저런 암투병하는 목사님을 우리가 모시면 하나님도 너무나 기뻐하실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집사님의 제의는 회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목사님을 담임 목사님으로 초빙하였습니다. 놀란 것은 정 목사님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기를 담임 목사로 초빙하여 준 교회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는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목회 잘 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 같은 암 환자를 초빙하여 준 저런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좋은 담임 목사님이 오게 하시고, 모두 축복받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아름답게 기도하다가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지금 담임하고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은 남 다른 것을 볼 줄 영안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게다가 7귀신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너무나 신앙생활을 잘 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7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모두가 도망갔습니다. 12명 제자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숨질 때까지 십자가 옆을 떠나지 않았던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을 새벽에 제일 먼저 찾아 간 이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보실 수 있는 놀라운 영안을 지니셨던 분이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삭개오를 세리라고 욕하였습니다. 난쟁이라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뽕나무위에 올라가서 자기를 만나려고 응시하는 삭개오에게서 비상한 그 무엇인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다가 가셔서 그의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무르시면서 지내셨습니다. 남다른 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안입니다.
2.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린 이는 아무리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도 당황하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영안이 열린 성경의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속에 넣는다는 법이 제정된 것을 알고도 당황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속에 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은 사자굴에 이미 천사를 보내어 사자 입을 막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앞까지 왔습니다. 애급 군사가 따라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노예를 잃어버리고 일할 수 없는 애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당황하였습니다. 홍해와 애급 군사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매장지가 애급에 없어서 우리 모두를 매장하려고 이 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이렇게 외치며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당황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영안이 열린 사람을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단성을 그렇게 많은 적이 둘러싸고 있어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영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된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18년 11월 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하다가 지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왔습니다. 소아마비 환자였습니다. 발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발이 아프시다는 데 어떻습니까?” 루스벨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 발은 항상 아프지만 머리는 언제나 건강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열린 사람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입니다. 항상 잘 될 것이라는 낙관을 가질 때 하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3. 영적 자원을 사용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영적 자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영적 자원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능치 못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영을 받으면 가장 놀라운 자원을 얻는 것입니다. 기도를 잃어버리면 가장 큰 영적 자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276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서 14일 동안 바다를 헤매게 되었습니다. 배에 실은 물건들을 다 버렸습니다. 뱃사공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당황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바울 한 사람만은 당황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2-25) 바울은 기도로 놀라운 응답을 받고 276명을 다 살릴 수 있었습니다.
■ 얼마 전에 미국에 들어가서 집회중에 멕시코 선교지에 두 번 들어갔었습니다. 집회하던 교회에서 멕시코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멕시코는 카톨릭 국가입니다. 그 곳에서 한국 교회가 신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한 것인지 가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학생이 17명이었는데 그 중에 특이한 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몸 전체가 문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갱단 마피아단 일원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마약조직에 가담하여 많은 돈을 벌던 어느 날 <내가 이렇게만 살 수는 없지 않느냐?>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 여자였는데 그가 이슬비 작전으로 서서히 복음으로 녹인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3년 간을 수없이 기도하였던 결과였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그는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갱단에서 이탈하여 바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그는 갱단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갱단 5명이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를 묶어 놓고 보는 앞에서 아내와 딸을 무참하게 토막 내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반쯤 죽이고 달아났습니다. 그는 5명을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한 명 한 명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명이 살해될 때마다 신문은 대서특필하였습니다. 온 나라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4명을 죽였습니다. 경찰을 교묘히 따돌리면서 살인에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을 죽이려다가 경찰에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멕시코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티와나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한국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며 회개하기만 하면 더 크게 들어 사용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생활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죽는 것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기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렇게 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을 마저 죽이지 못 하고 죽는 서러움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특별 사면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선교사가 세운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죽었던 생명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만 전하겠다고 가슴에 불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늘 감옥에서 불렀던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멕시코 사람들이 캐톨릭에게 핍박을 받을 때 늘 부르던 복음성가입니다. 그 곡을 멕시코로부터 가지고 왔습니다.
날 세워 주시네 날 세워 주시네 주 말씀하셨네 날 세워 주시네 날 세워 주시네 주님의 손으로 날 세워 주시네
기도는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영적 자원인 기도를 사용할 줄 압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영안이 열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영안이 열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1. 남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2.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3. 영적 자원을 사용할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영안이 열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하지 못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선장에게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선장은 배위에 있던 밧줄을 주면서 <이 밧줄에서 세 끝을 찾아내는 사람을 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두 끝밖에 찾지 못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이 그 밧줄을 들고 두 끝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밧줄을 바다로 던지면서 “나로서 이 시험은 끝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세 끝이 되었습니다. 선장은 이런 엉뚱한 청년을 고용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남다른 데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남다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