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29]9살 손자에게서 배운다
요양원에 계시는 98세 아버지는 갈수록 단기치매가 심해지신다. 하루 세 끼, 끼니 때마다 “밥 먹여야제?” “밥 해먹어야제?” 하는 전화를 못해도 네댓 통 하신다. 서울 에미집에 있다고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알아들었대도 금세 잊어버리고, 말하자면 돌아서자마자 또 전화를 한다. 받자니 ‘성가시고’(우리말로는 숭시럽고), 안받자니 불효를 저지르는 것같다. 당신은 한없이 다정하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아까 방금 손자 밥 멕이고 있다고 힛잔아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듣던 9살 손자가 나를 뻔히 쳐다보며 말한다. “왕할아버지? 그렇게 화난 것같이 말하지 마세요” 아아-, 손자에게서 배운다.
이 녀석, 바레인에서 국제학교를 열 달 다녔다는데, 진짜 희한한 게 영어English가 장난이 아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일단 어휘력語彙力이다. 어제 합기도학원에 데려다주면서 “인도人道로 걷지 않으면 큰일난다”면서 “큰-일-나” 부분에서 내가 톤을 높인 모양이다. “그냥 말하면 되지 왜 그렇게 큰 소리로 힘을 줘 말하냐”고 묻는다. “잘못하면 큰일나니까 엠퍼사이즈emparsize한 것”이라고 하니 “나 알아. 강조하는 것”이라 해 깜놀. “아니, 니가 엠퍼사이즈 단어를 안단 말야?”
제 엄마가 국어-수학 2학기 수련장을 공부를 하루 2쪽씩 시키라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 뺑돌뺑돌하는데 죽을맛이다. 틈만 나면 아이패드로 게임을 못해 안달이다. 정말 뇌구조가 우리와 완전히 다른 것같은 '별종'이다. 내 휴대폰으로 구글 검색을 해 온갖 게임을 척척한다. 구구단 문제를 푸는데 “너무 이지easy하네” “아이 헤이트 디스I hate this(나 이거 하기 싫어)" 영어로 말하는 게 우리말보다 정말 더 편하고 쉬울까? 어제 밤에는 어휘력 테스트에 나섰다. "레전드legend가 무엇이냐?"고 묻자 "레전드는 그냥 레전드야. 우리말이 없어" 우기더니, 한참 있다가 "전설傳說"이라고 해, 약속대로 ‘배춧잎’(1만원권) 한 장을 줬더니, 며칠 후 돌아오는 내 생일날 맥주를 사 선물로 드리겠다고 해 깜놀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손자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내처 신화神話는 영어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즉석에서 ”미스myths"라 해 또 깜놀. “미설러지mythology"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우겨댄다. 결국엔 둘 다 맞아 무승부가 됐지만, 웃기는 장면들이 계속 연속된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Ⅲ-24]어린이는 언어의 천재? - Daum 카페
말하자면 말을 배우는 아기들이 “대박”이라는 단어를 적재적소에 쓰면 얼마나 황당하던가. 요 녀석도 “오 마이 갓Oh my God"을 상황에 따라 쓰는데 그럴 듯하다. 문제는 바레인에서 사귄 친구들과 수시로 영어통화를 하는데,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오죽했으면 ”아임 세임 유I shame you"라고 했겠는가(그런데 ‘너에게 쪽팔린다’는 이 말조차 맞는지 모르겠다). *적확한 영어 표현은 (It's) shame on me라고 동생이 알려줘 바로잡는다. (It's) shame on you는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라는 뜻이라 함. *'나는 나를 벗삼는다'를 영어로 I friend you'라 했더니,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는 지인이 'I befriend me'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거라 해 '한 수' 배운 생각이 난다. 그러고도 영문학을 전공했다니, 어쩌다가 영문도 모르고 학과를 선택한 '죄'를 두고두고 짓고 있다. 그나마 우리말을 잊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 이렇게 ‘저절로’ 익혀버린 영어도 학교에 다니며 쓰지 않으면 2년도 안돼 다 까먹는다고 한다. 그러니 젊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영어 조기교육에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걸까?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좋은 현상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잘 한다는 게. 장차 ‘밥을 먹여주는’ 필요충분조건인지도 모르겠으나, 우리의 영어교육은 문제가 크다고 본다. 이제 통역기가 필요없는 앱을 휴대폰에 깔면 되지 않은가.
어쨌거나 오늘 오후, 국보급 전각篆刻예술인 외우畏友가 손자에게 체험학습을 시켜주겠다며 데리고 나오라 했다. 그 친구가 입고 있는 티셔츠의 영어 문구 <You are doing great>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대뜸 “당신 잘하고 있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또 깜놀. 나는 ‘당신이 큰 일을 하고 있구만’이라고 생각했는데. great가 well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놀란 경험을 손자 자랑하는 팔불출이라고 놀리지 않으면 좋겠다. 광화문의 <포시즌> 호텔이름이 무슨 뜻이냐니까 “사계절”이라고 하는데 감탄지경이다. 녀석을 놀리려고 책이 영어로 뭐냐고 했더니 우습다는 듯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book이 예매하다는 뜻도 있다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그것까지야 모르겠지, 메롱. 합기도학원을 다녀오더니, 8월 10일 워터파크에 간다고 좋아라고 한다. 애는 애인데, 앞으로 영어 공부를 어떻게 시킬지는 내 몫이 아니고 제 엄마 몫이니 다행이다. 휴우-. 때릴 수도 없고, 혼낼 수도 없고 '보이케어boy-care'가 빨리 끝나야 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