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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사는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역사를 구성하지요. 삼국사기는 구당서를 motive로 쓴 역사서 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의문이 들지않습니까? 왜 김부식은 신라의 역사를 구당서를 바탕으로 쓴 것일까요? 이것은 아마도 삼국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쓴 역사서가 구당서가 아니 였을까요?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의 원문은 구당서라는 것은 분명 합니다. 구당서는 왜국열전과 일본열전을 기록하고 있지요. 왜국과 일본은 다르다는 뜻이지요. 고구리와 신라가 900년과 1천년인 이유가 전설의 시대와 有史의 시대가 결합 되엇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 입니다. 일본열도가 백제 멸망으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하게 되자 장강의 야요이 문명이라는 왜라는 역사를 자신들의 상고사로 편입 시키 결과인 것이지요. 일본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라는 것은 분명 합니다. 백제와 왜가 거의 같은 나라 처럼 밀접한 이유는 백제와 왜는 마한에서 함께 나온 것이며 백제는 지배가가 부여인들이라는 것이지요. 삼국의 역사에서 고구리와 신라의 공통적인 이름이 낙랑이라는 이름 입니다. 고구리왕에게는 낙랑국왕으로, 신라왕에게는 낙랑군왕으로 불리는 이름 입니다. 사실 우리 국사적으로 역사를 구성하면 신라왕에게 낙랑국공이라는 이름은 뭔가 어색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국사의 역사는 신라 1천년 동안 신라는 단 한무제가 설치 햇다는 한사군은 물론 낙랑으로 비정 되는 지역을 단 한반도 지배를 한적이 없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신라왕에게 낙랑군왕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일까요? 또 하나는 백제의 국왕에게는 낙랑국왕이나 낙랑국공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고구리와 백제가 東明이라는 역사의 이정표를 두고 죽기로 싸우는 이유는 왕조의 정통성과 낙랑이라는 지역을 두고 싸웟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리는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기원전 37년 건국은 절대로 아닙니다. 고구리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위만 조선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며 부여로 부터 나왔다는 고구리의 뿌리 역사는 부여로 이어져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부지기수 입니다. 즉 부여와 고구리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실제로 고구리의 초기 역사인 고주몽의 가계도는 부여의 해모수 계보를 이은 解氏로 보입니다. 초기 고구리 5부의 지배자는 고주몽이며 고주몽은 낙랑을 포함한 요동이 고구리의 중심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던 것이 고씨 왕조로 바뀌면서 고구리 5부의 중심은 감숙성에서 부터 섬서성으로 바뀌고 산동반도 지역과 산서성 남쪽은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요. 백제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에는 백제는 중원의 다른 나라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관계 였는지 백제왕에게는 낙랑과 관련된 호칭은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 낙랑공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군주는 고구리의 건흥제 입니다. 건흥제는 소위 남하 정책으로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는등 백제를 쥐잡듯이 하지요. 그리고 위만 조선과 부여와 고구리의 고토인 낙랑을 지배를 하는 것이며 바로 건흥제에게 낙랑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습니다. 건흥제는 요동성으로 천도를 합니다. 요동성은 위만 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이며 공손씨의 도읍지인 바로 그 요동성 입니다. 요동성의 위치는 지금의 추현 부근으로 보입니다. 건흥제가 요동성으로 도읍지를 옮기자 건흥제에게 붙는 타이틀이 낙랑공 입니다. 그런데 662년 당조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에게 무열왕 이전에는 없던 樂浪郡公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줍니다. 즉 백제를 멸망 시키고 신라가 백제의 영역이었던 낙랑을 차지한 이후의 일이죠. 이것이 우연의 일치 일까요? 왕들의 시호는 왕의 사후에 붙이는 타이틀이지만 낙랑군공이나 정동장군등은 왕이 생존해 있는 동안 唐朝에서 붙여 주는 일종의 현직 벼슬 이름 입니다. 이런 이름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어느 지역을 통치 햇었는가를 알수 잇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낙랑이라는 지역은 고구리와 백제 신라가 서로 한번 이상 차지 햇던 지역 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낙랑공 또는 낙랑군공이라는 타이틀 입니다. 건흥제의 증조 할어버지인 고국원왕은 요서를 두고 근초고왕과 일전을 벌이다가 전사하며 고구리는 지금의 산서성에서 물러나며 戎(융)으로 돌아가야만 했지요. 융은 고구리의 故國 입니다. 故國原王과 故國壤王의 시호는 바로 고구리가 융으로 돌아샀던 때에 고구리의 고국에서 장사 지내고 고국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시호 입니다. 戎은 고구리의 故國이라는 말이며 고구리의 故國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융이라는 한자는 戎狄(융적)의 줄임 말이며 前四史는 융적이라고 표현 하지만 唐初八史는 융이라고만 표현 합니다. 뭐가 다르냐고 반문 한다면 당조의 종족 정체성은 탁발선비이며 선비족은 융적으로 부터 갈라져 나온 부족입니다. 융적이란 이름은 융을 폄훠하여 부른 이름이지요. 이런 이유로 당초팔사에서는 狄이라는 글자를 빼고 융으로만 표현을 합니다 고국원왕과 고국양왕은 고구리가 잠시 고국으로 돌아 갔던 때 군왕의 시호 입니다. 그리고는 고구양왕의 아들이 광개토태왕 즉 영락제 때 고구리는 갑자기 강성해 져서 요동으로 돌아 옵니다. 이때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절정기 엿으며 중원은 16개의 나라들이 군웅할거 하지요. 그리고 영락제의 이들인 건흥제는 아버지인 영락제가 이루어 놓은 바탕 위에서 이 시기의 진정한 황제로서 오호 십육국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거느리는 것입니다. 황당 하다구요? 이 시기에 수년에서 수십년을 못가고 멸망한 급조된 나라들인 16국들의 역사서는 하나 같이 자신들이 고구리의 왕에게 벼슬을 내린다 라고 쓰고 잇습니다. 고구리 최전성기의 군주가 그야말로 급조된 나라들에게 모두 벼슬을 받앗다는 그 시기를 조금만 연구를 해 보면 그 역사서들은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알수 잇지요. 훗날 당조가 멸망하고 오대십국 시대의 동아시아 최강자는 거란이엿습니다. 거란에게 도움을 청해야지 오대 십국들은 살아 남을 수 잇엇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쓰여져 잇지 않지요. 오대십국 시절에도 거란은 북방의 별볼일 없는 오랑캐로 기록되어 잇습니다. 고구리의 위치를 거란이 그대로 물려 받은 것입니다. 고구리와 거란은 중원을 지배는 햇지만 그 영토들을 소유 하지 않은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흥제는 고구리의 또 다른 옛 영토 엿으며 백제가 소유 햇던 낙랑을 손에 넣고 조선의 왕검성이엇으며 잠시 공손씨의 도읍지엿던 요동성으로 천도를 하는 것이지요. 건흥제 때 三京이 완성 되는 것이며 건흥제 시기에 고구리는 동아시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것이지요 요동성의 위치는 낙랑입니다. 고구리의 요동성을 한반도 평양에서 찿는다면 억지 입니다. 고구리가 백제에게 내 주고 동명의 적정자가 누구인가라는 적통 싸움에서 백제에게 밀리면서 수백년간 백제에게 내 주엇던 낙랑의 주인이 건흥제로 바귀는 것이지요. 그리고 건흥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백제를 후달구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북위의 황제가 건흥제에게 낙랑공이라는 호칭을 붙여 줍니다. 그후 낙랑공이라는 치호는 평원왕에 의해 요동성을 버리고 장안성으로 천도 해가는 때까지 고구리의 군왕들에게 낙랑공이라는 칭호가 분는 것을 볼 수 잇지요. 그리고는 삼국의 군왕들에게서 낙랑공이라는 칭호는 보이지 않다가 신라가 백제를 멸망 시키고 나라가 안정된 때인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 법민이 왕위에 올랏을 때 당조가 다음과 같은 벼슬을 내립니다. 구당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지요. 龍朔 원년(A.D.661; 신라 文武王 1)에 春秋가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太府卿 法敏으로 뒤를 잇게 하여, 開府儀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으로 삼았다. 당조는 어떤 이유로 문무왕에게 낙랑군왕 이라는 호칭을 내린 것일 까요? 우리 국사가 말하는 대로라면 신라는 낙랑을 지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더 볼까요? 용삭 3년(A.D.663; 신라 文武王 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雞林州都督府로 삼고, 法敏에게 雞林州都督을 除授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신라를 게림주도도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도독에 임명한다고 기록 합니다. 즉 낙랑이라는 지여과 게림이라는 지역의 통치자로 문무왕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동맹관계가 어찌 하여 통일 신라 시대에는 주종 관계로 바뀌는 것일 까요? 기록을 더 봅시다. 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 法敏이 開耀 원년(A.D.681; 신라 神文王 1)에 卒하니, 그의 아들 政明이 位를 이어 받았다. 貞元元年,授良相檢校太尉、都督雞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785년 수량상검교위와 도독계림주자사와 영해군사 신라왕에 임명햇다. 무무왕의 아들에게는 도독게림주자사와 영해군사라는 직책이 더해 집니다. 이것은 신라가 더욱 강성해졋다는 것을 의미 하지요. 즉 도독에서 도독들을 감리 괌독하는 자사가 되는 것이며 영해군사라는 직책도 더해 집니다. 寧海(영해)는 지금의 양자강 하구를 말하는 것이며 영해군사란 영해를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런 움직일 수 없는 긹이 존재 함에도 우리 일제반도사관론자들은 이것을 신라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신라방을 지금의 LA타운 정도로 생각 하는 것이지요. 다음 글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신라의 위치를 추적해 보겟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