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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제1권 비국(備局)을 논함
명종(明宗) 때 이르러 비국(備局)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당 나라의 중서성(中書省)이나 송 나라의 추밀원(樞密院) 모양으로 바뀌어져, 온 나라의 정사를 모두 비국에서 관장하니 정부(政府)는 마침내 한가한 아문(衙門)이 되고 말았다. 시임(時任)으로부터 각조(各曹)의 판서(判書)와 양국(兩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의 대장(大將)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정례에 따라 비국의 직책을 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선(嘉善) 이상의 관원 중에서 능력 여하를 물론하고 이력이 좀 나은 사람을 골라 비국의 당상(堂上)으로 임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직명만을 헛되이 지녔을 뿐 한두 사람의 구관 유사(句管有司 사무 담당 책임 관원 또는 관서)가 문서와 안건을 맡아 가지고 무랑(武郞 무관낭청(武官郞廳)으로 비국(備局)의 종6품)으로 하여금 왕래하며 전언(傳言)하게 하여 모든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예로부터 어찌 이같은 관제가 있었고, 이같이 정사를 의논하는 데가 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이들은 좌아(坐衙 관청에 출근하는 것)를 당할 때마다 모두 병을 칭하며 피하기가 일쑤여서 설사 한두 사람이 출근한다 해도 서로가 일을 미루어 지연시키는 것이 예사이다. 따라서 한 해를 마치고 또 한 해를 지내도 실질적인 정치나 사업이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며, 그 중에서도 직무를 잘 거행하였다고 하는 유사 당상(有司堂上)의 일을 보면 고작 지방의 장청(狀請 장계(狀啓)로 주청(奏請)하는 것)을 막는 일뿐인 것이다.
진정 천하를 다스리기가 이같이 쉽다면, 어중이떠중이인들 그 누가 시행하지 못하겠는가. 때문에 한 나라의 일들이 두루
통솔할 요체를 잃어, 감영(監營)ㆍ병영(兵營)ㆍ수영(水營)들이 날마다 보고를 하여와도 비국이 허락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하자는 것인가. 각사(各司)나 각조(各曹)의 중재(重宰)ㆍ장신(將臣)들도,
하며 그럭저럭 시일만을 보낸다. 그러다가 한번 사변(事變)을 만나면, 모든 일이 무너져 일을 맡길 사람도 없고 책임을 물을 데도 없어서 황황 급급하며 조치할 바를 모르고 만다.
이뿐이 아니라, 그 중에는 더욱 한심한 일이 있다. 공가(公家 조정을 말한다)의 중요한 일은 오직 체통(體統)뿐이어서 월소(越訴)하는 것을 미워해야 할 것인데도, 비국이 생긴 뒤로는 모든 이민(吏民)들이 지방 관아 및 감영이나 중앙의 해당 관청을 존중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곧장 비국에 제소(提訴)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있는데 비국은 제소되거나 맡겨진 것이 외람되고 번잡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모두 수리(受理)해서 제결(題決 판결처분(判決處分))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민간의 습속이 날로 나빠지고 관청의 체통이 크게 무너져서, 암랑(巖廊)의 높고도 중요한 지위가 문득 하찮은 작은 관청처럼 되고 말았으니, 각 관청을 설치하여 직무를 나눈 뜻이 다시는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어찌 심히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근세(近世) 이래로 군국기무(軍國機務)는 경재(卿宰)가 함께 협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었다. 그런데 이른바 기무(機務)란 것이 산만(散漫)할 뿐 깨끗하게 다스려지는 효험(效驗)이 전혀 없으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무릇 모든 일은 크고 작음에는 다름이 있어도 그 처리의 요체(要諦)는 동일하니, 병사(兵事)를 주관하는 사람은 병사만을 다스리고, 재부(財賦)를 주관하는 사람은 재부만을 다스리듯이,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을 전적으로 관장(管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뒤에야 비로소 능력 있는 사람은 그 업적이 빛나고 용렬한 사람은 그 잘못이 곧 드러나게 되니, 나라를 경영하는 길은 곧 인재를 기용해서 맡은 일에 책임지고 힘쓰도록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일단 일을 맡긴 뒤에는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간섭해서는 안된다. 대개 이런 뒤에야 현명한 사람이나 모자라는 사람을 물론하고 스스로 맡은 일을 걱정하면서 마음과 힘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정은 이렇지가 못하다. 명위(名位)와 지망(地望)이 서로 다름이 없어서, 자루는 하나인데 잡으려는 사람은 많고 바가지는 하나인데 가지려는 사람은 여럿이듯이, 일은 한 가지인데 아는 체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리하여 현명한 사람은 그 재주를 다할 수 없고, 못난 사람은 그 졸렬함을 감추기가 용이하므로 어물어물 지내며 실제로 이루는 일이 없다. 따라서 그 병폐(病弊)가 터져나오는데도 잘못된 곳을 꼬집어 내어 책임을 물을 사람도 없게 되니 어찌 애통하지 않은가.
오늘날 비혜(備惠 비변사(備邊司)와 선혜청(宣惠廳))의 구관자(句管者 사무를 주관하는 관원)를 당(唐) 나라나 송(宋) 나라의 삼사사(三司使) 및 추밀부(樞密副)와 같은 중요한 직임에 비교하면서,
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당치도 않다. 전혀 당ㆍ송의 고사(故事)가 아닐 뿐만 아니라 사리(事理)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니, 국왕을 보필하는 재상도 아니고 육조의 직무를 아울러 통할하는 직책도 아닌데, 어찌 스스로 직분을 넘어서 공공연히 남의 직무를 침해할 수가 있겠는가. 명분과 체제가 이치에 맞지 않고 사리에 닿지 않는 것이 이에서 더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 어찌 국가를 도모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랴. 간혹 영리하고도 재주 있는 사람이 부서(簿書)를 대략 처리할 줄 안다면 세상의 칭송이 자연 그에게 모이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대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안으로는 육경(六卿)이 그 직무를 잃고, 밖으로는 번곤(藩閫 관찰사와 병마ㆍ수군 절도사의 총칭)이 그 책임을 피하여, 정령(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오고 관리의 성적을 가름할 바탕이 없으니, 정신이 어지럽고 기강(紀綱)이 해이되어 모든 사무가 얽히고 설켜서 하나의 골동품(骨董品)이 된 지가 오랜 것이다. ‘나무꾼 같은 비적격자가 비변사에 앉는다.’는 이야기가 명백하고도 꼭 들어맞는 말이어서 다시 평론할 필요가 없으니, 이러한데도 이 나라에 정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문】: 그렇다면 우리 왕조가 문교(文敎)로 정치하여 왔는데, 국초(國初)로부터 지금까지 조야(朝野)의 사서(士庶)의 장점은 무엇인가.
【답】: 기자 조선 이후로는 우리 왕조의 제도가 그런대로 가장 훌륭하니,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같이 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겠다. 대개 윤기(倫氣)가 밝고 분의(分義)가 엄정하니, 상제(喪制)를 보더라도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모두 삼년상(三年喪)을 행하여 중국의 단상(短喪 일년상을 말한다) 풍속보다 우월하다. 그리고 사대부로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은 자못 전주(箋註)를 다듬고 닦을 줄 알아서 차록(箚錄 글에서 중요 부분을 초록(抄錄)하는 것)을 이룩하기도 하고 대략 의심스러운 곳을 밝혀내기도 하며, 경전(經典)의 의변(疑變)에 있어서도 많이 강구(講究)하여 수집(修輯)하였다. 그리고 예(禮)를 좋아하는 자들이 자못 고제(古制)를 행하였으므로 비록 예악(禮樂)의 근본이 없기는 했어도, 오히려 예도(禮度)를 삼가 지키는 나라로 일컬어질 수 있게 되었다. 또 문자(文字)로 말하더라도 원래 스스로 터득한 사람은 없고 각고(刻苦)하여 책을 읽고 모방해서 이룩한 데 불과하기는 하지만, 장유(張維)ㆍ최입(崔岦)과 같은 사람들이 자못 체재(體裁)를 체득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시율(詩律)에 마음을 다하여 전공한 사람도 없지 않아서, 노수신(盧守愼)과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다른 예(藝)에 비하면 가장 뛰어났다고 하겠다. 이뿐 아니라, 대저 우리나라는 예의(禮義)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고가(故家)의 유속(遺俗)에도 간혹 볼만한 것이 있으니, 이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의 힘이 아닌 것이 없다. 하지만 장점은 이런 것들뿐이다.
아, 이러한 것으로써 국가의 실제 정사를 경영코자 하였으니 난감(難堪)하구나! 예복(禮服)ㆍ시율(詩律)ㆍ문사(文詞)는 나라를 경영하는 데 보탬도 손해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학문(學問)은 참으로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실제 진의(眞義)는 터득하지 못하고 거의가 헛된 명성만 얻었을 뿐이다.
퇴계(退溪)같은 이의 학문이 정사(政事)에 시행(試行)되었더라면 어찌 그 효과가 없었겠는가마는, 행할 만한 때를 얻지 못하여 종신토록 퇴장(退藏)되고 말았다.
비록 세상을 맑게 하고 풍속을 바루는 데에는 후학(後學)에게 혜택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국가 실정(實政)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였던 것이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은 참으로 행할 만한 기회를 가졌었으나 그때의 현인(賢人)들이 거의 시의(時義)를 알지 못하였으니, 결코 이룩될 이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실제로 유자(儒者)의 학문에 힘입어 보지 못하여 왔다.
국초(國初)로부터 정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거의 무식한 재상들이어서 대단한 견식(見識)과 재유(才猷 재주와 계책)를 지니지 못한 채, 일시적인 재간과 속된 식견으로 모든 일을 볼품없이 마련하여 온 데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국초에는 문헌(文獻)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중국의 문자(文字)가 거의 전래되지 못한 때였다. 무식한 경상(卿相)들이 그 무슨 뛰어난 지혜와 높은 식견을 지녔다고 고전(古典)을 상고하지 않고 스스로 아름다운 법제를 창설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일을 함부로 모방하여 중국의 제도를 본떴으면서도 그 실제는 일을 시작하였다가 중도에서 그만둠으로써 제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니, 소추하고 모순된 병폐만 있었을 뿐 자상하고 신밀한 아름다움은 전혀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법을 제정한 당초에 이미 결점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니, 그 폐해가 점차 심하여짐에 미쳐서는 모든 일이 허망하게 되고 풍속이 천박 경솔하게 되었다. 애당초 실다운 정치는 조금도 없었고 약간의 외면상 의절(儀節)만이 꾸며졌을 뿐이어서, 그 정체(政體)와 치규(治規)는 옛 것도 아니고 오늘의 것도 아니며 중국의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것도 아닌, 한낱 사사로운 뜻과 규모(規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 그대의 말은 제대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영릉(英陵 세종대왕)이 다스린 공적은 실로 우리나라의 요순(堯舜)과 같은 것이어서 백성이 평안하고 물자가 풍성하며 습속이 아름답고 교화(敎化)가 드높았다. 불행하게도 연산주(燕山主)의 어지러운 정치를 만나, 옛 제도와 좋은 법규들이 중도에 많이 폐지되기는 했지만, 조종조(祖宗朝)의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은 은택(恩澤)이 굳게 백성들에게 맺어져 왔으니, 소자(蘇子 소식(蘇軾))의 ‘사직(社稷)이 오래가는 것은 결국 이에 힘입어서이다.’ 한 말은 바로 우리나라를 위해서 말한 것이다. 만약 개국 초기의 재상들이 한갓 무식한 범인(凡人)들이어서 임금을 도와 정치를 도모하고 법제를 이룩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당시의 교화(敎化)가 융성하고 은택(恩澤)이 뒷날에 미치어 오늘에 이르도록 정치가 힘입고 있는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나왔다고 하겠는가.
전부터 정치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번번이 개국 초기에 보필한 재상들에게 불평을 표하여 왔지만, 대저 개국 초기에는 원기(元氣)가 두텁고 풍속이 소박하여 문채(文采)ㆍ풍류(風流)와 언어(言語)ㆍ사장(詞章)이 모두 모자라기는 했어도, 삼가고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듬직하고도 조촐하였으며 실질적이고 거짓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무릇 법제(法制) 등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너그러울지언정 옹졸하지 않았고 부족할지언정 기교롭지 않았으며, 오직 근본을 북돋우고 대체(大體)를 힘써 지탱하는 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방관(傍觀)하는 사람이나 뒷날의 사람들이 보면 답답하고 엉성하여 둔한 것 같기도 하고 부족한 것 같기도 하며 오활한 것 같기도 하고 소략한 것 같기도 해서 민망스럽고 가소로운 점이 많이 나타나겠지만, 개국 초기의 재상들이 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신기(新奇)하고 교밀(巧密)한 법을 가지고 관대하고도 질박한 정치로 바꾸고자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들은 차라리 남들이 경멸하더라도 겨루지 않아야 나라의 명맥이 오래가고 나라의 근본이 굳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답】: 세상에서 약간 견해(見解)를 지녔다는 사람들이 대개 그대와 같이 논의하고 있는데, 이는 실로 옳은 것 같아도 틀리는 것이어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우리 영릉(英陵)께서는 진정 요순의 자질을 갖추셨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가 나라를 이루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분의 덕이 아닌 것이 없다. 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임금은 대강(大綱)ㆍ대체(大體)를 거느릴 뿐, 임금을 도와 나라 일을 꾀하고 법을 세워 기강을 펴는 책임은 오로지 보필하는 재상들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황희(黃喜)ㆍ허조(許稠) 등 여러 재상은 덕량(德量)이 매우 두터워서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는 참으로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치도(治道)의 요긴한 것은, 반드시 훌륭한 학문과 식견으로 다스려야 하되, 경술(經術)을 바탕으로 하고 사전(史傳)을 보조로 하여, 토론하고 참작하며 손익(損益)하고 인혁(因革)하기를 오랫동안 다듬어서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한 시대의 전칙(典則)과 제도(制度)를 이룩하여야만 비로소 보필의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인데, 여러 재상의 학문과 식견이 진정 이에까지 미치지를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위에서 성군(聖君)이 공손하고도 검소하게 다스려서 백성과 물자가 풍성하고 변방(邊方)이 개척되니, 당시 재상들의 마음이 지나치게 유족하여 진보하고자 할 뜻마저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례(典禮)와 악률(樂律)로부터 북관(北關)의 개설(開設)에 이르는 일들이 모두 임금의 뜻에서 나오고 신하들은 그 신성(神聖)한 힘을 우러러 받든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이 시기에 탁월한 재주와 통명(通明)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성주(聖主)를 도와서 법규를 자상하게 마련하고 치구(治具)를 명석하게 하여 가장 공변되고 한결같은 어진 방법으로써 정치를 하였다면 서얼(庶孼)을 금고하는 법을 《대전(大典)》을 만들 때 끼워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민(四民)의 일을 나누어 각기 실사(實事)에 오로지하여 의식(衣食)을 얻게 하였다면 유생(儒生)이 반드시 학문을 일으키는 실리가 있었을 것이고 국가가 인재를 얻는 효험이 있었을 것이며, 온 나라에 선비를 가칭(假稱)하면서 공공연히 놀고 먹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또 백성에게 역(役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할 때도 토지에서 거두는 것을 부(賦)로 하고, 근력(筋力)에다 맡기는 것을 역(役)으로 하여, 과조(科條)를 분명히 세우고 절도있게 거두었으면 치우치게 괴로운 역(役)이 없었을 것이고 한정없는 조세(租稅)가 없었을 것이다. 뽕나무와 삼[麻]을 재배하도록 권장하여 이를 집에 심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금을 거두고, 산림과 늪을 개발하고 채취하게 하여 그 수세(收稅)를 관계 관청에 귀속케 하였다면 나라 재정이 넉넉하고 겸병(兼倂) 모리(牟利)하는 무리들이 그 작간(作奸)을 펼 곳이 없었을 것이며, 그리고 온 나라의 재화(財貨)를 거두어 지부(地部 호조(戶曹))에 귀속시키고, 중앙과 지방에서 소용되는 것을 적당히 헤아려 지급하게 하였다면 중앙에서는 각 관청이 장사하는 추한 습속이 없었을 것이고, 지방에서는 관아(官衙)들이 사사로이 재물을 점거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면 농민에게 좋지 않고, 분리하지 않으면 병사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오위(五衛)의 제도는 ‘군대이되 군병이 아니다.’ 한 옛 제도와 근사해서 그동안 잘 경영되기만 했더라면, 정전(井田)의 졸승(卒乘)과 당 나라의 부병(府兵)을 방불케 할 수 있었겠으나 이미 둔전(屯田)의 저축이 없는데다가 어염(魚鹽)의 수입마저 모자라서, 양민(良民)을 보인(保人)으로 충급(充給)했던 까닭에, 이에 파생된 폐해가 쌀과 베로 바치게끔 바뀌어 오위는 무실(無實)하게 되었고, 다시 그것이 군문(軍門)으로 변해 백성이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관제(官制)가 소략하고 어그러진데다 고과(考課)에도 법도가 없어서 아침에 임명하고는 저녁에 옮기니, 마치 어린애들의 놀이와 같다. 일찍부터 연한(年限)이 없이 그 실적을 보아 승진시키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여온 까닭에, 이른바 명관(名官)이란 사람들은 실제로 일하지는 않고, 말로만 앞장서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으며 속히 승진하는 것만을 묘계(妙計)로 삼으니, 실로 나라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각사(各司)의 관리들이 이를 더욱 본받게 되어 자신의 직무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상 우리나라 정치의 대강을 간추려 논술하였다. 이제 그 잘못된 허물들이 뚜렷하게 드러났으니, 어찌 허망한 말로 꾸미면서 우리나라 정치가 좋다고만 하겠는가.
[주D-001]월소(越訴) : 송사(訟事)를 하급 관아부터 제출해서 상소(上訴)하지 않고, 직접 상급 관아에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재판에 삼심(三審)제도가 있었는데, 모역(謀逆)과 같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초심(初審)과 재심(再審)을 거쳐 삼심(三審)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주D-002]암랑(巖廊) : 궁전(宮殿) 옆에 붙은 월랑(月廊)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경복궁 앞 좌우측으로 열립되어 있던 육조(六曹) 등의 각 관서 건물을 뜻한다.
[주D-003]삼사사(三司使) 및 추밀부(樞密副) : 당(唐)의 삼사사는 형부상서시랑(刑部尙書侍郞)ㆍ어사중승(御史中丞)ㆍ대리경(大理卿)의 세 관직이나 관리를 말하는데, 이들은 중요한 사건을 함께 모여서 심리(審理), 판결(判決)하였다. 그리고 송(宋)의 추밀부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하는 추밀원(樞密院)의 동지부사(同知副事)를 말하는데, 이는 추밀사(樞密使) 및 지원사(知院事)에 다음가는 자리로 추밀원의 문부(文簿)를 담당하였다.
[주D-004]묘당(廟堂) : 조선 시대 비변사의 별칭으로 주사(籌司)라고도 하였다. 이 말은 대신(大臣)들이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 종묘(宗廟)에 나아가 고한 뒤에 회의, 결정한 데서 생겨난 것으로 당초에는 의정부를 뜻하기도 했었다.
[주D-005]북관(北關)의 개설(開設) : 조선 세종 때 4군(郡)ㆍ6진(鎭)의 개척과 북쪽 변경(邊境)의 방위 시설을 말한다.
[주D-006]각 관청이 …… 습속 : 조선 후기에는 재정의 곤궁으로 인하여 각 궁방(宮房)과 관청, 특히 군영(軍營)에 어장(漁場)ㆍ염분(鹽盆)ㆍ광산(鑛山) 등을 절수(折受)하여 스스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게 하고, 또 본곡(本穀 : 곡식을 빌려주고 이식(利息)을 받아 쓰게 하였던 일정량의 기금(基金)과 같은 곡물)ㆍ본전(本錢)을 지급하여 고리대(高利貸) 행위를 자행(恣行)하게 한 것을 말한다. 조선 말기의 환정(還政)의 문란은 바로 후자(後者)의 성행으로 인하여 더욱 촉진된 것이었다.
[주D-007]정전(井田) : 중국 주(周) 나라 때에 시행되었다고 전하여 오는 토지 제도로, 1리(里) 사방의 토지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위의 8구역은 사전(私田)으로 해서, 사전은 농가 8호에게 1구역씩을 맡겨 경식(耕食)하게 하고, 공전은 이들 8호로 하여금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주D-008]당 나라의 부병(府兵) :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병제(兵制)인 부병제(府兵制) 하의 농민병을 말한다. 부병제는 중국 서위(西魏)에서 시작하여 당(唐) 나라 때 완성된 것으로, 국가가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자[丁]에게 구분전(口分田)과 영업전(永業田)을 주고 그 대신 조(租)ㆍ용(庸)ㆍ조(調)를 부담시킨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면서 이의 적용을 받는 농민은 교대로 징집되어 현역병(現役兵)으로 근무케 한 병농 일치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병제를 부병제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와 식화지(食貨志)에 각기 당의 병제(兵制)와 전제(田制)를 모방하였다고 기록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제가 균전제가 아닌 전시과(田柴科)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D-009]보인(保人)으로 충급(充給) : 실역(實役)을 지는 정병(正兵) 등 각종 국역(國役) 부담자에게 임무 수행에 필요되는 경비의 조달을 위하여 일정한 보조인(補助人), 즉 보인(保人 봉족(奉足) 또는 보ㆍ자보(資保)로도 칭함)을 딸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16세로부터 60세까지의 건강한 남자[丁]에게 국역을 부과하였는데, 일반 양인(良人)의 경우에는 군역(軍役)이 그 실제였다. 그러나 군역을 지는 양인 모두를 현역병으로 징발하기에는 너무나 그 수가 많았고, 또 보인의 수는 《경국대전》에는 2정 1보로 확정시켰으나 시대에 따라, 또는 병종(兵種)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징발된 현역병이 근무하는 동안에 필요로 되는 경비를 국가에서 지급할 수도 없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인원만을 현역병으로 징발하고, 나머지 정(丁)에게는 징발된 현역병의 근무 경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주D-010]고과(考課) …… 옮기니 : 고과는 관원의 성적을 평정(平定)하는 것. 이조나 병조에서 매년 두 차례 관원의 공과(功過)를 조사하여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였다. ‘아침에 임명하고는 저녁에 옮기니’ 하는 말은 정기적인 인사이동, 즉 도목정사(都目政事) 이외에 비정기적인 인사이동을 말하는 것으로 산정(散政)이 매우 빈번하게 있었던 것을 말한다.
제1권 사민을 총괄하여 논함
우리 왕조(王朝)가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나라를 세운 지 3백 년에 이르었으나, 사민(四民)이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라가 허약하고 백성이 가난한 것은 오로지 이에서 빚어진 것이다. 우리 왕조는 국초(國初)로부터 임진년에 이르기까지, 또 병자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구란(寇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말함)을 겪기는 했으나, 한자의 영토도 잃지 않고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왔다. 그리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공세(貢稅) 이외에는 별로 더 부과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간혹 천재(天災)로 상해를 입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휴양(休養)하여 온 끝이니, 어찌 민산(民産 국민의 생산 또는 재산)이 오늘날처럼 물로 씻은 듯 바닥을 드러낼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나라의 이른바 부잣집을 말하더라도, 대개 사부(士夫)와 훈척(勳戚)과 상인(商人)ㆍ역관(譯官)들을 여유있다고 하는데 불과할 뿐, 농가를 보면, 비록 삼남(三南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비옥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햅쌀과 묵은 쌀이 이어지는 집이 거의 없다. 지난날의 역사를 두루 살펴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민산(民産)이 심히 메말랐던 나라는 없으리라.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사민(四民)이 분별되지 못했으므로, 각자가 제 직업에 힘을 다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나, 그 요체는 위로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 지리(地利)를 버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농사를 장려한 옛사람들의 정사가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이른바 초인(草人)이 토지를 좋게 만들어 곡식을 심게 하는 법이나 구물(九物)을 심고 거름주는 법들이 매우 자상하고, 물로 논의 잡초를 죽이고, 지특(地慝)을 감별하는 방법들도 두루 세밀하여, 백성에게 농사의 토의(土宜)를 가르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당(唐)ㆍ송(宋) 이래로 우안(圩岸)과 갑패(閘壩)의 제도가 함께 강구 시행되어 정교하고도 튼튼한 것으로써 가뭄에 대비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비로소 농사에 힘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수리(水利)를 강구하지도 않고 농사 일에도 법식이 없어, 농사의 무실(無實)함이 매우 심하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반드시 도랑을 파서 물을 댄다. 하지만 수차(水車)의 이용을 알지 못하여 논 아랫 도랑의 물이 한 길만 내려가도, 이를 굽어보기만 할 뿐 감히 끌어 올리지를 못한다. 이리해서 황무한 논이 10에 8~9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우리 문종(文宗)께서 수차(水車)의 제도를 강구한 바 있고, 또 효종(孝宗)께서도 친히 요심(遼瀋)에서의 수차의 편리함을 보시고 이를 널리 권장한 바 있다. 그런데도 아직껏 백성들이 수차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제도가 쓰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남달리 우리의 습속이 게을러 농사에 힘쓰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농토가 모래에 뒤덮이고 물길에 허물어지는 재해도 우리나라에서처럼 끝없이 일어나는 곳은 세상에 없다. 그리하여 농토가 날로 줄어들어 공사(公私)가 모두 해를 입고 있는데 이는 오로지 화전(火田)을 일구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아직껏 아무도 이를 금지시킬 줄 모르고 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또 양반이나 중서(中庶)는 물론, 약간 기력있다는 상인(常人)이면 모두가 스스로 농사짓는 것을 크게 부끄러워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농사가 때를 놓치는 것을 보면서도, 또 가을에 기근이 들 것을 짐작하면서도 힘을 도와 농사를 거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 이러한 무리가 수없이 많으니, 무엇으로 천시(天時)를 힘입지 않고 지력(地力)을 다할 수가 있겠는가.
한 나라의 큰 정사는 농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농사의 큰 요체는 수리(水利)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른바 수리라는 것은 관개(灌漑)ㆍ축설(蓄洩 저수지(貯水池))ㆍ제언(隄堰)ㆍ피당(陂塘 저수지)과 같은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산장(山場)을 갈지 못하게 하고 물길을 옮겨 놓는 것이 바로 수리의 근본인 것이다. 산 밑이 무너지지 않으면 물길이 변하지 않고 물길이 변하지 않으면 도랑이 일정한 제도가 있게 되니, 도랑이 일정한 제도가 있게 된 뒤에야 수리가 흥성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람도 노력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노력을 다한 뒤라면 비록 천재(天災)가 있다 해도 백성이 속수무책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는 지경은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역대(歷代)의 나라들이 모두 수리를 담당하는 관청을 두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농사를 국가가 담당해야 할 일로 여겨 오지 않았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하늘에 맡겼고 농사에 힘쓰고 힘쓰지 않는 것을 백성들 마음에 맡겼으며, 나아가서는 문벌(門閥)의 습속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를 부끄러이 여기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데도 아직껏 보민(保民)의 정치라고 하겠는가.
【문】: 오늘날의 민산(民産)이 점차로 궁핍해진 것은 실로 나라가 오랫동안 평안하여 인구가 크게 불어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그 재산이 날로 궁핍해진 것인데, 어찌 백성이 농사에 힘쓰지 않은 데서 이루어진 현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답】: 세상에는 그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참으로 근거없는 이야기다. 이 우주(宇宙)가 있으면서 인민(人民)이 있어 왔고, 이 인민이 있으면서 그 의식(衣食)이 있어 왔으니, 이는 천지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어찌 땅이 좁고 사람이 많은 것이 민산을 궁핍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가 있겠는가.
삼대(三代)의 시절만을 보아도 백성이 정전(井田) 속에 살아서 모두가 받은 바 농토를 지녔었다. 그리고 전쟁이 없고 유행병도 없어서 태평한 세월을 수백 년이나 누렸었다. 백성이 모두 그 천수(天壽)를 다하고 자손이 크게 번성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천하의 농토는 전보다 늘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당시의 백성은 9년 분의 식량을 저축하는 생활을 했으며, 아직껏 그들이 땅이 좁아 곤란을 받았다는 말은 없었다.
【문】: 우리나라는 원래 땅이 메말라 예로부터 백성이 가난하였고 생계가 다급했었는데, 어찌 꼭 놀고 먹어서 가난해졌다고만 하겠는가.
【답】: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토질(土質)이 중국의 소송(蘇淞) 지방만큼은 기름지지 못하겠지만, 삼남(三南) 지방의 기름진 땅이 어찌 힘써 농사지어 치부하기에 부족하기야 하겠는가. 화식지(貨殖志)에 쌀밥과 고기국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천하의 풍요한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쌀밥을 먹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어찌 땅이 메마르다 하겠는가.
우리나라의 지세(地勢)를 보면, 산이 둘러싸고 물이 감돌아 곳곳이 병풍을 두른 듯 형세가 매우 좋고, 산수가 많아서 진액(津液)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수(水)ㆍ한(旱)ㆍ풍(風)ㆍ상(霜)도 재해가 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서관(西關 평안도 지방)의 명주ㆍ무명, 북도(北道 함경도 지방)의 삼베,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의 무쇠, 남중(南中 삼남 지방)의 대와 닥나무, 바다 근방의 물고기ㆍ소금ㆍ김ㆍ미역, 산골의 콩ㆍ조ㆍ재목 등 무릇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자로는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내가 보기로는 중국은 천지의 중기(中氣)를 얻어서 참으로 우주의 대도회(大都會 사람과 재화가 크게 모여드는 지역)라 할 수 있고 그밖에 서역(西域)ㆍ일남(日南)ㆍ일본(日本)에 이르는 여러 나라가 비록 진귀한 보물을 산출하고 있다고는 해도, 우리 생활에는 실로 무익한 것들일 뿐 의식(衣食)의 물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처럼 매우 풍요한 나라도 있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다른 나라의 의식이 모두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판(商販 상업)을 보면, 말[馬]은 있으나 노새가 없고 배는 있으나 수레가 없으니, 선상(船商)보다는 마상(馬商)이 많고 마상보다는 부상(負商)이 많다. 이것은 우차(牛車)를 사용할 줄은 알아도 마차(馬車)나 나차(騾車)를 알지 못하고, 우마(牛馬)를 키울 줄은 알아도 노새를 번식시킬 줄은 모르며, 홀로 장사할 줄은 알아도 자본을 모아 힘을 합하는 것이 장사하는 데 가장 이익이 크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장사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성행될 것이며, 모든 물화(物貨)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널리 번창하겠는가. 또 광물(鑛物)을 녹이고, 바닷물을 졸이고, 물고기를 잡고, 김ㆍ미역을 따고, 누에를 치고, 베를 짜고, 나무를 심고, 과일을 따고, 닭을 키우고, 돼지를 치는 것들이 모두 이 세상 자연의 물자로써 사람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이에 제대로 힘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으니, 민산(民産)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 우리나라의 사세(事勢)는 중국과 달라서 비록 놀고 먹는 사람을 모두 농공상(農工商) 세 가지 일에 종사시키고자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답】: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은 무엇인가.
【문】: 중국은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지세(地勢)가 평탄하여, 배와 수레와 말들이 밤낮으로 수송할 수 있기 때문에, 교역(交易)이 쉽게 이루어지고 공상(工商)이 크게 번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토(國土)의 3분의 2가 산이어서, 평야는 거의 없고 험한 산골이 매우 많다. 그리하여 거개의 사람들이 산이나 돌틈바귀에 끼어 살고 있고 배나 수레가 다닐 만한 곳은 10에 2~3에 지나지 않는데다가 물산마저 심히 빈약하여 교역이 번성치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마판자(馬販子 말짐장수)와 배부상(背負商 등짐장수)들이 하루가 다하도록 분주히 다녀도 별로 팔지 못하고, 서울 입전(立廛)의 상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손님을 기다려도 팔을 내젓고 지나가는 사람이 10이면 8~9나 되니, 이로써 보아 비록 공상(工商)을 성행시키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중국의 책만을 보고 그 사세(事勢)가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우리나라의 공상(工商)도 중국과 같이 성행시킬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이른바 방내지리지설(房內地理之說)과 같지 않겠는가.
【답】: 이같은 생각은 그대만이 의혹(疑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크게 의혹하여 오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하나 논변(論辯)하여 보고자 하니, 들어보기 바란다.
우리나라 상인들은 장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장사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다. 무릇 장사의 도리라는 것은 반드시 좌상(坐商)의 점포(店鋪)가 있은 뒤에야 돌아다니는 행상(行商)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지방에는 점사(店肆 점포)가 전혀 없었으니, 교역의 번창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문】: 오늘날 서울의 부자들이 많은 돈과 물품을 내어 지방에 행상(行商)들을 내보내고 있고, 또 지방의 상인들도 서울로 물품을 싣고 와서 팔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찌 좌상(坐商)이라 볼 수 없겠는가. 하지만 행상이나 좌상을 물론하고, 그들이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답】: 그것은 아직도 오늘날의 상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야기이다. 오늘날 이른바 마판자(馬販子)들은 1필의 말 등에 물품을 실으니, 그 실은 상품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지방에 나가나 이들 물품을 사들일 좌상(坐商)이 없어서, 이 장[場市] 저 장으로 뛰어다니고 깊은 산골에까지 돌아다니니, 간신히 물품을 판다 하여도 그 이익이 얼마나 되겠으며, 또 그동안 인마(人馬)의 노비(路費)는 얼마나 쓰였겠는가. 1필의 말등 짐으로 이익을 얻고자 하니,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어찌 대단한 이익이 있으리오.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본전마저 잃기가 쉬우니, 팔러 보내는 사람이나 팔러 가는 사람이 모두 대단한 이익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는 산골이 많아 행상하는 데 불편하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은 단지 요동(遼東)의 평야만을 보고, 중국은 모두 이같은 평야여서 수레와 말이 뜻대로 이용될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5리만 가면 산이고 10리만 가면 강이어서 돌밭과 진흙밭이 없는 곳이 없으므로 애당초 수레는 사용될 수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에는 평야도 많지만, 그 사이사이에 험한 곳이 또한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다. 운귀(雲貴 운남성(雲南省)ㆍ귀주성(貴州省))ㆍ사천(四川)ㆍ양광(兩廣 광동성ㆍ광서성)ㆍ민절(閩浙 복건성(福建省)ㆍ절강성(浙江省))ㆍ진진(秦晉)ㆍ초예(楚豫)의 땅들이 모두 산골이 아닌 곳이 없고, 또 습지(濕地)가 많아서 그 험난함이 우리나라보다 더한 곳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 사람들은 수레로 운송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있다.
또 임진왜란 때의 명 나라 군사를 보더라도 군량과 병기를 모두 수레로 실어 날랐으니, 8년을 주둔하는 동안에 수레의 바퀴 자국이 삼남(三南) 지방에 두루 남았다. 그리고 《병자일기(丙子日記)》에도 청(淸) 나라 사람들이 한 마리의 소[牛]로 수레를 끌었는데 그 제도가 매우 민첩하여, 이에 실은 대포(大砲)가 두 칸의 대들보만한데 그것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 수레가 달리 하늘을 날아서 왔겠는가, 아니면 길을 닦고서 왔겠는가. 동북(東北) 지방의 아주 험한 곳은 수레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하더라도, 삼남(三南)과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대로(大路)와 그 밖에 수륙(水陸)의 길이 모이는 평야 지대에서는 어찌 수레를 사용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대개, 배와 수레는 성인(聖人)이 만들어 낸 것이다.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이 반드시 천하 후세에 행용되지 못할 이치가 없으리니, 《중용(中庸)》에 이른바 ‘해와 달이 비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행하는 곳’이라고 한 것은 곧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 시험삼아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를 보면, 산을 다니고 물을 건너는 수레 바퀴를 만드는 법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 있고, 또 명(明) 나라 사람이 지은 수레에 관한 책을 보면, 수레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목재와 철물들이 각가지로 많은 것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수레와 크게 다른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달리하는 까닭을 깨닫지 못하고, 번번이 지세(地勢)가 적합치 않아 수레를 이용할 수 없다고만 말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소홀한 소치이다.
【문】: 우리나라는 중국과 교통한 지 매우 오랜데 정말 그와 같은 훌륭한 제도가 있다면 어찌 배워오지 않았겠는가.
【답】: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로부터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삼베[麻布]로만 옷을 지어 입었다. 그러다가 문익점(文益漸)이 목면(木棉)의 씨를 얻어온 뒤에야 비로소 살갗이 어는 우환을 면하게 되었다. 이같이 절실하고도 배우기 쉬운 것을 오히려 배워올 줄을 몰랐는데, 하물며 수레를 만드는 법을 그 누가 배워오고자 했겠는가.
또 삼사포(三梭布)를 말하더라도 그 튼튼함이 면의(棉衣)를 능가하는 것이어서, 한번 방문하여 그 법을 배워가지고 올 만도 한 것인데, 끝내 그 직조의 묘방을 배우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벽돌을 만드는 것도 약간의 사초(莎草)로써 한 가마에 수천 개를 구워낼 수 있는데도 아직껏 그 방법을 배워오지 않고 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수레를 이용하자고 하는 것도 반드시 한 수레를 가지고 서울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서울로 왕래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수륙(水陸) 교통의 요지(要地)로서 사람과 물화가 많이 모여드는 곳에 반드시 참차(站車)와 참려(站驢)가 있어서, 바닷가나 강가로 다른 지방의 상인들이 물화를 실어오면, 차주(車主 참차상(站車商)의 주인(主人))가 운임을 받고서 이를 도회지로 운반한다. 그러면 도회지에는 또한 이들 물화를 사들이는 큰 상인들이 있어서, 이들이 그 물화를 각지로 분송(分送) 조달(調達)하니, 이와 같이 되어야만 교역의 길이 비로소 성행될 수 있는 것이다.
【문】: 그대가 참차(站車)ㆍ참려(站驢)의 설치(設置)를 말하였는데, 거기에 쓰일 말[馬]이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니 이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답】: 수레가 없고 노새가 없으면 무엇으로 행상(行商)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는 논밭에 물을 대고, 미곡(米穀)을 찧고, 수레를 움직이고, 역참(驛站)을 세우는 일들을 모두 노새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새가 비록 그 몸집이 작기는 해도 성미가 사납고 참을성이 있어서 점참(店站)에서 부려도 족히 운송을 담당할 수 있고, 우전(郵傳)에 부려도 역라(驛騾)로 충족할 수 있다. 더구나 요동(遼東)에서 어린 나귀의 값이 일금(一金)도 안 되니, 이들을 많이 사다가 목장에서 키우면 불과 몇 해 만에 노새가 많이 번식될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의 마정(馬政)에도 역라(驛騾)ㆍ역려(驛驢)가 많이 보이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다고 해서 마련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문】: 우리나라는 길이 험할 뿐 아니라 진흙땅도 많으니, 바퀴가 빠져 움직이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답】: 해서(海西 황해도)와 북관(北關 함경도)에서 오늘날 모두 수레를 사용하니, 길이 험하다는 이야기는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심양(瀋陽)에는 2백 리나 되는 진흙땅이 있어도 수레를 사용치 않은 때가 없는데, 우리나라에 이같은 땅이 있는가.
【문】: 그 누가 강가에 차참(車站)을 세우고자 할 것이며, 또 그 누가 객상(客商)의 많은 물화를 사들이고자 하겠는가.
【답】: 참으로 우둔한 질문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풍속이 공상(工商)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게만 된다면, 차참을 세워 운가(運價)를 받는 이익이나, 많은 물화를 사들여서 얻는 이익이 그 어찌 널리 전장(田莊)을 두고 도지(賭地 소작료(小作料))를 거두는 이익이나, 많은 돈과 곡식을 내어 장리(長利)를 거두는 이익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이런 일들은 부자들이 모두 행할 만한 것으로 여기리니, 어찌 이런 일을 운영할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무릇 점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대상(大商)이 있어서 자본(資本)을 많이 내어 점포를 크게 차려야만 물화가 다투어 몰려들어 비로소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큰 점포라는 곳에는 밥ㆍ술ㆍ기름ㆍ간장ㆍ국수ㆍ떡ㆍ삼생육(三牲肉 소ㆍ양ㆍ돼지의 고기) 등을 파는 점포와 마방(磨坊)ㆍ미방(米坊)ㆍ약방ㆍ책방, 그리고 비단ㆍ명주ㆍ무명ㆍ삼베ㆍ모시ㆍ가죽ㆍ털ㆍ근각(筋角 힘줄과 뿔)ㆍ어염(魚鹽)ㆍ동철(銅鐵)ㆍ재목(材木)ㆍ안채(顔彩)ㆍ종이와 짜놓은 관곽(棺槨), 지어놓은 의복, 새로 나온 과실이나 닭ㆍ거위 등의 물건을 파는 상점과 의복(醫卜 의술과 점술 즉 의사와 점장이)ㆍ공장(工匠)ㆍ역인(役人 잡역하는 사람)ㆍ각부(脚夫 배달부(配達夫))와 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구비되고 물건들이 신선하여야만 교역(交易)의 길이 비로소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이같은 점포가 있는 곳이 몇이나 되는가.
【문】: 오늘날 서울의 시전에는 이들 상품이 대개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이들 상점의 이익이 지방 도회지의 상점들보다 반드시 낫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답】: 그렇지 않다. 오늘날 서울의 상점들이 물화를 구비하고 있기는 해도, 그 교역의 방법이 중국과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제 그 한 가지를 들어 설명하여 보기로 한다.
대개 중국에서는 대상(大商)이 많은 자본을 내어 점포를 세우고, 소매상(小賣商)은 거기서 상품을 파는 용보(庸保 고용인 또는 품팔이꾼) 노릇을 하는 까닭에 술을 팔고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그 자신은 가난하나, 가지고 있는 자본이 풍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본이 풍성한 까닭에 이익 역시 많게 된다. 그리하여 점주(店主 대상(大商))가 되는 사람은 달마다 또는 계절마다 그 이익을 거두어서 용보들에게 그 공은(工銀 임금(賃金))을 나누어주니, 여기서 점주(店主)ㆍ용보가 모두 편하고, 가난한 사람인 용보와 부자인 점주가 함께 얻는 이익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사에는 원래 이러한 풍속이 없어, 술을 빚어 파는 자본이 일금(一金)에도 차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거기에다 의식(衣食)을 이에 의존하면서 이익 남길 것을 꾀하고 있지만, 자본이 이미 적은데 이익이 어디서 많이 날 수 있겠는가.
【문】: 그것은 그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생활은 원래 가난하기가 비길 데 없어,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밴 사람이 10에 8~9나 되니, 설사 시장에 술과 고기가 산처럼 쌓였다 한들 그 누가 이를 사먹겠는가.
【답】: 이 또한 목전(目前)의 형편만을 보고, 그 근본을 살피지 못한 이야기이다. 하늘이 사람을 내실 적에 모두 의식(衣食)을 갖추게 하셨는데, 어째서 우리나라 사람만이 유달리 가난하여 의식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10에 8~9나 되겠는가. 이제 온 나라의 남녀로 하여금 모두 그 직분을 다하게 한다면 모든 물품의 값이 반드시 싸질 것이니, 어찌 교역이 통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리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욕망인 것이다. 참으로 사먹을 수 있는 형세가 이루어지면 무슨 까닭으로 사먹지 않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산업(産業)을 다스릴 방도는 생각지 않고 교역이 성행되기 어렵다고만 말하니, 이것이 과연 그 근본을 살핀 논의이겠는가.
대저, 물화가 비싸고 귀하기가 우리나라와 같은 곳은 세상에 없다. 올이 고운 무명이나 삼베들의 값이 중국의 활백주(闊白紬 명주의 일종)보다 배나 비싸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무명ㆍ삼베ㆍ모시 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어 온 것이지만 서북(西北)과 호중(湖中 충청도 지방) 이외의 지방에서는 이를 힘써 재배하고 직조하지 않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 값이 이같이 비싼 것이니, 이 풍속이 일변하여 모든 아낙네가 공들여 애쓴다면, 그 값이 어찌 이처럼 비싸기까지야 하겠는가.
【문】: 중국은 모든 물가가 정말로 그리 헐한가. 그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아는가.
【답】: 일찍이 중국 사람이 쓴 책을 보았더니, 은(銀) 5냥(兩)이면 비단 치마ㆍ고운 속바지ㆍ비단 저고리ㆍ머리 꾸미개ㆍ비취 비녀와 도금(鍍金)한 귀걸이 등 여인의 의복을 모두 새로이 갖출 수 있다고 한다. 이들 물품을 우리나라에서 마련하려 한다면 10여 냥의 백금(白金)을 가지고도 마련할 수 없으리니, 물가가 헐한 것은 이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문】: 옷값이 이같이 싸다면 사는 사람은 좋겠지만 파는 사람은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답】: 판 사람이 백금 5냥으로 다른 물품을 살 때도 그 값이 또한 옷처럼 싸니, 어찌 이익이 없다고 하겠는가.
【문】: 중국에는 거지가 없는가. 앞서 사행(使行)으로 연경(燕京)에 갔더니, 길가에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도 보이질 않던데, 어째서 그러한가.
【답】: 중국 사람은 아주 가난하다 하더라도 옷이 어느 정도 해지면, 거의가 이를 질고(質庫)에 판다. 이른바 질고는 곧 전당포(典當鋪)인데, 전당포에서는 그 옷을 감가(減價)하여 사서 이를 봉의장(縫衣匠 의복을 만드는 공인(工人))에게 주어 빨고 고치게 한 다음, 이를 다시 옷이 해진 사람에게 판다. 그러므로 누더기를 입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문】: 처음 옷을 판 사람은 감가(減價)하여 받은 돈으로 어떻게 옷을 장만하는가.
【답】: 돈을 약간 보태서 새옷을 사기도 하고, 혹은 옷감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옷이 해질 때까지 입다가 다시 새옷을 지을 줄만 알기 때문에 옷이 항상 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해진 옷을 사입는 경우에도 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입으니, 며칠이 못되어 아주 해져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 돼지ㆍ양ㆍ거위ㆍ오리와 같은 가축의 경우를 보면 중국은 곳곳에서 기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래부터 잘 번식되지 못하고 있다. 풍토(風土)가 같지 않아 축산이 풍족치 못함을 이에서 볼 수 있겠다.
【답】: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닭과 돼지를 놓아 키우면서 우리를 짓지 않고, 채소밭에 울타리도 치지 않는 것은 매우 괴이(怪異)한 일이라고 기록된 것이 보이니, 이에서 우리나라의 목축 방법이 좋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풍습이 돼지 우리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한 집이 돼지를 치면 온 마을이 모두 원망하여 돼지를 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인데, 어찌 번식되지 않아서 그렇다 하겠는가.
그리고 양(羊)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북양(北羊)은 털이 아름다우나 성미가 조급해서 화양(火羊)이라고도 부르고, 남양(南羊)은 털이 연하고 성미가 유순해서 면양(綿羊)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양은 모두가 요(遼)ㆍ금(金)에서 보내온 화양(火羊)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키우기가 적합하지 못한 것이니, 만약 면양의 종자를 얻어다가 키운다면 어찌 번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양이 비록 흔한 가축이기는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귀해서 한 마리의 공가(貢價)가 쌀 수십여 섬에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또 거위나 오리로 말할지라도 중국의 아호(鵝戶 거위의 축양(蓄養)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부화시킬 때 알의 껍질을 갉아내기 때문에 새끼 거위가 알을 깨고 나오기가 매우 쉬우며 또 보리를 섞어 먹이기 때문에 살찌고 자라는 것이 매우 빠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이같이 거위를 키우고 있는가.
중국 사람들은 오로지 한 가지 일만을 하는 까닭에 일이 전문화되고 이익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의 여사(餘事)로 틈틈이 가축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일이 전문적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번성하게 키울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물산이 풍부치 못하고 풍토가 같지 않다는 것에 그 허물을 돌릴 수 있겠는가.
【문】: 그대가 논의한 대로 공상(工商)이 성행하면, 시골의 논밭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해 노는 무리들이라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 생활할 수 있게 되겠는가.
【답】: 점포가 점점 많아지고 매매가 날로 번성하여지면, 용보(庸保)가 되어 생활하기도 하고 땔감을 져다 팔아서 생활하기도 하며, 서기(書記)나 계사(計士)로 일하여 생활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혹은 수레를 몰던가 짐을 져다 주고 운임을 받기도 할 것이고, 목점(木店)을 차려 남의 집 짓는 데 참여하기도 할 것이니, 생활 방도가 넓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문】: 서울에 일거리가 없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이들이 일을 도와주고 그 삯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답】: 이 한 가지에서도 우리나라 사람의 생활 방법이 그릇된 것을 알 수 있으니, 청컨대 의논하여 보기로 하자. 묻노니 이제 수십여 칸의 기와집을 짓고자 한다면 몇 개월이나 걸리겠는가.
【문】: 그것은 집주인의 재력(財力) 여하에 달린 것인데 어찌 예정할 수 있겠는가.
【답】: 중국 사람들은 재력만 있다면 한두 달 만에 완성할 수가 있다.
【문】: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답】: 집주인이 그 공본(工本 설계도(設計圖))을 마련하여 이를 문앞에 게시하며 공고하기를, 어느날에 이 집을 짓고자 하니 여러 아행(牙行 흥정꾼ㆍ상인)들은 이에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하면, 창인(廠人)은 봉둔(蓬芚)으로 창(廠)을 세우러 가고, 목점(木店)은 몇 가지 재목(材木)을 다듬어 가지고 가고, 요호(窯戶 기와ㆍ그릇을 굽는 집)는 기와ㆍ벽돌과 참배(塹坯)룰 가지고 가고, 석공(石工)은 주춧돌과 섬돌을 가지고 가고, 철점(鐵店)은 못과 교철(鉸鐵)을 가지고 가고, 한한(閑漢)ㆍ방수(幇手)는 터를 닦고 일을 도우러 가며, 공사(工師 목수)ㆍ오자(圬者 미장이)는 손질할 도구를 가지고 간다. 그리하여 각자가 그 물건을 다루고 그 일거리를 담당해서, 맡은 일을 끝내고 그 값을 받아 돌아가는데, 집주인이 되는 사람은 차(茶)를 대접하고 은(銀)을 지불한 데 불과하나, 며칠이 안 되어 이미 눈앞에 우뚝 선 집을 보게 된다.
【문】: 일이 빠르고 시원하기는 하지만 비용의 낭비가 많으리라.
【답】: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일이 지연되어 필요 없는 비용이 오히려 많이 들고 있다.
【문】: 우리나라에서는 끝내 이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쩌는가.
【답】: 그렇지도 않다. 사민(四民)이 일단 분별되기만 하면 불과 몇 해 만에 온 나라가 다 이같이 될 것이다.
【문】: 양반이 농상공(農商工)에 종사하는 것을 나라에서 일찍이 금한 일은 없지 않은가. 저들이 스스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답】: 양반이 천업(賤業 농공상업을 말함)에 종사하면 국가가 영구히 폐고(廢錮)하였으니, 이것이 금제(禁制)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제 만일 선비가 농공상업에 종사한다면, 그 교유(交遊)와 혼환(婚宦 혼인과 벼슬살이)에 장애가 없을 리 있겠는가. 사람들이 반드시 저놈은 이미 평민이 되었다고 첫 마디를 던지면서, 비루하게 여기어 상종하지 않기를 엄하게 못할까 걱정하리니, 그 금고(禁錮)됨이 이에서 더할 수 있겠는가.
아, 국가가 명목으로는 양반을 우대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손을 묶고 발을 매어 공공연히 배를 주리게 할 뿐이니,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병들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우대한다는 것이 바로 곤란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며 자연(自然)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이도 그렇기는 하지만, 국가가 이로써 곤란을 받는 것이 양반보다 더한 점이 있으니, 청컨대 의논하여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는 공세(貢稅) 이외에 정구(丁口)에 따른 백성의 신용(身庸 신역(身役))을 부과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단지 양반을 우대한다고 해서 그 역역(力役)을 징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반이 농사를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아서 원래 하는 일이 없으니 그 신용(身庸)을 징수하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구(丁口)에 세를 부과하는 제도는 예부터 모든 나라에 다 있었는데, 우리나라만이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 때문에 고스란히 국가 재정의 궁핍을 겪고 있으니, 이것이 잘못된 것의 한 가지이다.
그리고 이같이 양반에게서 이미 신용(身庸)을 징수하지 못하고 있는데, 중서(中庶)인들만이 납세하려 하겠는가. 이 나라에서 그 어디에도 예속됨이 없어 가장 만만하게 책징(責徵)하기 쉬운 사람은 오직 양민(良民 평민(平民))뿐이어서 군국(軍國)의 경비가 달리 마련될 길이 없으므로 부득불 양민으로써 재물을 삼아, 외를 썰고 콩을 쪼개듯이 각사(各司)에 분속(分屬)시키고 군보(軍保)로 충당시키기도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고금(古今)에 없었던 제도인 것이다. 그러니 양민만이 크게 고통스러운 부담을 지게 될 것은 이치로나 사세로 보아 분명한 것이니 이것이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또 한 가지이다.
또 이미 문벌(門閥)에 따라 사람을 기용(起用)하고 있으니, 사람이면 모두가 오장칠규(五臟七竅)가 있는데, 그 어느 어리석은 사람이 양반이나 중인(中人)이 되려고 하지 않고, 군보(軍保)의 천한 부역을 즐겨 지려 하겠는가. 그리고 실 한 가닥이나 쌀 한 톨을 납부하는 데도 역명(役名 부역의 명분)을 붙이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부끄럽게 여겨 피하고 있고, 따라서 부역을 충당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것이 국가가 잘못하고 있는 또 다른 한 가지인 것이다.
이 밖에도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이 모두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名分)에서 나오고 있으니, 그 근본을 따져 보면 국초(國初)에 법제를 마련할 때 사민(四民)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오늘날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고 시전(市廛)에도 정액(定額)이 없어 생활의 곤궁함이 이미 극도에 달하고 있으니, 이제 만약 이를 구제할 길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백성은 모두 녹아 소멸(消滅)되고야 말 것이다.
[주C-001]사민(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네 가지 일에 종사하는 백성을 말하는데,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노비를 제외한 온 국민의 직업이 거의 이 네 가지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국민 전체의 뜻으로도 쓰였다. 이 글에서는 전국민을 말한다.
[주D-001]공세(貢稅) : 백성이 담당하는 조세(租稅)를 말한다.
[주D-002]《주례(周禮)》 지관(地官) : 《주례》에 보이는 중국 주(周) 나라의 6관(官 : 천(天)ㆍ지(地)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관(冬官)) 중, 재정과 호구를 담당한 지관의 관제 및 직무를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주례》 지관편(地官篇)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주례》는 주 나라의 주공(周公)이 편찬하였다고 전하는 동양 최고의 국가 제도의 기술을 담고 있는 책으로, 당초에는 《주관》이라 하였으나, 당 나라 때부터 《주례》라 칭하게 되었다. 모두 6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수는 학자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생각되고 있으며, 그 내용도 의심되는 바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03]구물(九物) : 아홉 가지의 곡물(穀物)을 말하는데, 학자에 따라 곡물 이름이 각기 틀린다. 《주례》의 주(注)에 따르면, 수수[黍]ㆍ피[稷]ㆍ조[秫]ㆍ벼[稻]ㆍ베[麻]ㆍ콩[大豆]ㆍ팥[小豆]ㆍ보리[大麥]ㆍ밀[小麥]로 되어 있다.
[주D-004]우안(圩岸) : 제방(堤坊)을 뜻한다. 우(圩)는 중국 강회(江淮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지방에서 수면(水面)보다 낮은 전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토 주위에 쌓은 둑을 말한다.
[주D-005]갑패(閘壩) : 저수지(貯水池)의 수문(水門)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갑(閘)은 수로(水路)나 운하(運河)의 수문을, 패(壩)는 방죽을 각각 말한다.
[주D-006]요심(遼瀋) : 중국의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하는 요하(遼河) 유역을 말한다.
[주D-007]중서(中庶) : 조선 시대에 중인(中人) 계층을 일컬었던 말이다. 그러나 중인의 개념이 매우 모호하여, 어떤 때는 중앙 관서의 기술ㆍ실무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원래의 중인 계급만을 뜻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들에다가 양반의 서얼(庶孼)을, 더 나아가서는 지방의 향리와 군관(軍官)ㆍ포교(捕校)까지도 포함하는 광범한 중간 계층을 뜻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후자(後者)의 광범한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주D-008]소송(蘇淞) 지방 : 중국의 소주(蘇州)와 송강(淞江)을 중심한 양자강 하류 지방, 즉 강소성(江蘇省) 일대를 말한다.
[주D-009]중기(中氣) : 사람의 속 기운을 말하는데, 이 글에서는 천하의 중심을 이루는 기운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주D-010]일남(日南) :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월남(越南)ㆍ태국(泰國) 등의 나라를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주D-011]《오학편(吾學編)》 : 중국 명(明) 나라의 학자 정효(鄭曉)가 편찬한 책으로, 모두 6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록된 내용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대정기(大政記)ㆍ손국기(遜國記)ㆍ동성제왕표전(同姓諸王表傳)과 이성 3왕 및 공자세가[異姓三王及孔子世家]ㆍ이성제후표전(異姓諸侯表傳)ㆍ직문연각제신표(直文淵閣諸臣表)ㆍ양경전전표(兩京典銓表)ㆍ명신기(名臣記)ㆍ손국신기(遜國臣記)ㆍ천문술(天文述)ㆍ지리술(地理述)ㆍ삼례술(三禮述)ㆍ백관술(百官述)ㆍ사이고(四夷考)ㆍ북로고(北虜考).
[주D-012]입전(立廛) : 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상권(商權)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던 육주비전[六矣廛]의 하나로, 옷감을 비롯한 각종 직조물을 취급하였다. 선전(縇廛)이라고도 불렀다.
[주D-013]방내지리지설(房內地理之說) : 방안에 앉아서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본다는 이야기로 비현실적ㆍ비실제인 언행(言行)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4]장[場市] : 정해진 일정한 날에 일정한 장소에서 개설되는 지방시(地方市)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5일 간격으로 열리는 5일장이 일반적인 형태였는데, 이에는 보부상(褓負商)과 같은 상인의 참여도 있었지만, 주로 생산자 즉 농민간의 물물교환적 교역(交易)이 중심을 이루었다. 서울의 육주비전이 도시적 교환조직(都市的交換組織)이라고 한다면 지방의 장은 시장적 교환조직(市場的交換組織)이라고 하겠다.
[주D-015]진진(秦晉)ㆍ초예(楚豫)의 땅 : 진진은 중국 춘추 시대의 진(秦)과 진(晉)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의 고토(故土)인 섬서(陝西)ㆍ산서(山西)ㆍ감숙(甘肅)ㆍ하남(河南)성의 황하(黃河) 상류 지역을 말하고, 초예(楚豫)는 중국 전국 시대의 초(楚)와, 수(隋) 나라 때 예장(豫章)에서 일어났던 임사홍(林士弘)의 초(楚)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의 고토인 호남(湖南)ㆍ강서(江西)ㆍ호북(湖北)ㆍ안휘(安徽)ㆍ절강(浙江)성의 양자강(揚子江) 중류 지역을 말한다.
[주D-016]《병자일기(丙子日記)》 : 병자호란 때의 견문(見聞)을 기록한 일기(日記)를 말하는데, 어느 누구의 것을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주D-017]《주례》의 고공기(考工記) : 《주례》 동관(冬官)편에 해당하는 편명(篇名)으로, 30가지의 수공업에 관한 일들이 설명되어 있다. 진 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로 산실(散失)된 《주관(周官)》의 각 편(篇)들을 한(漢) 나라 초기에 수집ㆍ재편하였는데, 이 때 동관편 하나만이 끝내 발견되지 아니하여 부득이 고공기로써 이를 보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주D-018]참차(站車)와 참려(站驢) : 참차는 숙역(宿驛)과 수레를, 참례는 숙역과 노새를 말하므로, 여기서는 숙박ㆍ운수업을 영위하는 점포를 말한다.
[주D-019]우전(郵傳) : 교통ㆍ통신을 담당하는 역(驛)을 통하여 문서를 전송(傳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조선부(朝鮮賦)》 : 중국 명(明) 나라 사람 동월(董越)이 편찬한 책으로, 조선의 풍토(風土)를 기술한 것이다. 1권(卷)으로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의 기록과 그 내용이 부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21]공가(貢價) : 조선 후기에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면서 각 관청은 선혜청(宣惠廳)으로부터 소요 물품 구입에 필요한 미(米)ㆍ포(布)를 받아 지정된 공인(貢人)에게 이를 지급하고 소요 물품을 기일에 맞추어 납품하게 함으로써, 종래 공물(貢物)의 이름으로 현물(現物) 수취하여 충당하던 소요 물품들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때 공인에게 선불(先拂)하는 물품값을 말한다. 이 공가(貢價)는 대체로 시가(時價)보다 약간 후하였다.
[주D-022]창인(廠人) : 창(廠)은 벽이 없는 집, 즉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을 뜻하므로, 창인은 집의 골격(骨格)과 지붕을 만드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주D-023]봉둔(蓬芚) : 지붕이나 벽을 얽는 재목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주D-024]한한(閑漢)ㆍ방수(幇手) : 모두 일정한 직업 없이 남의 일을 도와주고, 그 임금(賃金)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날품팔이 생활자나 기술자를 돕는 막일꾼을 말한다.
[주D-025]정구(丁口) : 일반적으로 인구(人口)를 뜻하는 말이지만, 이 글에서는 16세(혹은 20세)부터 60세까지의 정년(丁年)의 인구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이들에게 이른바 정부(丁賦)라는 일종의 인두세(人頭稅)가 부과되었었다.
[주D-026]군보(軍保) : 정병(正兵)을 돕기 위하여 두는 조정(助丁)으로 조선시대의 군제를 보면 1명의 정병에 대하여 조정인 봉족(奉足) 2명을 두고 정병의 농작(農作)을 대신해 주도록 하였는데 후기에는 양병(養兵)의 비용에 쓰기 위하여 조정에서 역(役)을 면해 주고 그 대가로 군포(軍布)를 바치게 하였다.
제2권 문벌의 폐해를 논함
【문】: 그대가 논하는 바를 듣자니 대체로 우리나라가 문벌(門閥)을 숭상하는 풍속을 심히 개탄(慨歎)하고 있는데, 다만 문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서경(書經)》에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했다.’ 하였으니, 주(周) 나라 사람들은 귀한 사람은 귀히 여기고 천한 사람은 천히 여긴 것이며, 《맹자(孟子)》에는 ‘거실(巨室)에 죄를 짓지 말라.’는 훈계가 있다. 그리고 《시경(詩經)》에는 ‘대대로 그 공적을 누리라셨네.’ 하였으며, 《예기(禮記)》에는 ‘녹(祿)이 자손에 미친다.’ 하였으니, 삼대(三代) 때에는 세신(世臣)을 매우 존중하였음이 이와 같았다.
【답】: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하였다.’는 것은 선조를 들어서 그 후손을 권면하려는 것이고, ‘귀한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천한 사람은 천히 여겼다.’는 것은 임금에게 가까이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문벌을 숭상한다는 뜻이겠는가. 선유(先儒)들이 ‘거실(巨室)’ 두 글자에 대하여 논한 바 있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거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서 이들을 이기려고 하면 화를 입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맹자(孟子)는 근본을 미루어 그 마음을 복종시키려고 말한 것뿐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그 공적을 누린다.’는 것은 공적을 이어나가라고 면려하고 훈계하는 뜻이었고, ‘녹(祿)이 자손에 미친다’는 것은 녹을 잃지 않도록 하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어찌 문벌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겠는가. 《서경(書經)》에는 영화를 누린 지 오래였음을 경계하였고, 《춘추(春秋)》에 ‘잉숙(仍叔)의 아들이 사신으로 왔다.’고 쓴 것은 세관(世官)을 비난한 것이며, 《맹자(孟子)》는 규구회의(葵丘會議)의 사명(四命)인 사(士)는 세관(世官)을 말라는 말을 인용하고있다. 그리고 《예기(禮記)》에는 ‘대부(大夫)는 세작(世爵)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성인(聖人)의 말이 아니란 말인가.
【문】: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열국(列國)의 위정자들이 모두 세족(世族)이었다. 《좌씨전(左氏傳)》에는 ‘나라에서는 녹(祿)이 있고 군대에서는 부(賦)가 있다.’ 하였으니, 대대로 직(職)을 잃지 않고 그 벼슬을 업으로 삼는다는 뜻이요, 《공양전(公羊傳)》에는 ‘세경(世卿)은 예(禮)이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세족(世族)이 임용될 수 없다는 것인가.
【답】: 주(周)가 쇠약하여지자 예의가 무너져서 정령(政令)이 신하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경(卿)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서로들 번갈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여러 차례 세경(世卿)을 비난하였던 것인데, 《공양전(公羊傳)》의 왜곡된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삼환(三桓)은 노(魯) 나라 정치를 마음대로 요리하였으며, 전씨(田氏)는 제(齊) 나라의 종통을 빼앗고 초(楚) 나라와 경쟁하였으니, 종족이 커서 원망이 많았던 것이 열국(列國)의 고질(痼疾)이 아니었는가. 대개 열국의 배경(陪卿)은 성인(聖人)의 후예나 종척(宗戚)의 경(卿)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종족을 세우고 녹(祿)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봉건제도의 여법(餘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대는 봉건의 제도를 가지고 오늘날의 문벌과 비교하고자 하는가.
세록(世祿)은 실로 선왕(先王)의 제도인데, 그 근원은 봉건(封建)에서 나왔고, 봉건은 정전(井田)에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선왕은 녹(祿)을 헤아려 전지를 분급하고, 인구를 보아 식량을 계산하여 그 품절(品節)과 차등이 조리 있고 동일하지 않았다. 제후(諸侯)는 경(卿)의 녹의 10배였고, 경의 녹은 대부(大夫)의 4배였으며, 대부는 상사(上士)의 배였고, 사(士)의 녹은 상등의 농부에 준하여 겨우 대경(代耕)할 정도의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선왕이 다스리던 시대와 성현이 제도를 마련한 뒤에 천자(天子)가 제후를 세우고 제후가 대부를 임명하여 대대로 그 녹을 누리게 하며 그 직책을 잃지 않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승거(升擧 승진 및 천거의 법)와 여탈(與奪 관직이나 토지를 주거나 빼앗는 것)의 법이 있어서, 천자는 제후들을 멸할 정권을 가졌고, 제후는 대부들의 녹을 빼앗을 수 있는 제도를 지녔다. 까닭에 단주(丹朱)는 요(堯)의 아들로서 순(舜)의 시대를 맞았으나 뒤를 잇지 못하였던 것이며, 이러므로 우(禹)는 순(舜)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단주처럼 교만해서 그 세계(世系)를 끊기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폐하고 세우는 것이 이처럼 엄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그렇지 않았다. 천맥(阡陌)의 제도가 정전(井田)과는 반대였고, 군현(郡縣)의 법이 봉건(封建)과는 다르니, 세록(世祿)만 어찌 홀로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 이래로는 아들에게 집안을 맡기고 은음(恩蔭)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법규들이 대를 이을수록 없어지고 날로 엄밀하여 다만 관제(官制) 가운데 세록(世祿)의 뜻을 대략 나타냈을 뿐이요, 경솔히 정치를 맡기고 두루 녹(祿)을 부여하며 대대로 관직을 전해 받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록(世祿)의 근원을 밝히지 못한 채, 범연하게 짐작하여, 세신(世臣)은 모두 녹을 얻을 수 있으며, 세주(世冑)는 모두 관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음서(蔭敍)가 무법하게 되고 관방(官方 관직의 기강)이 날로 문란하여졌으니, 이것은 옛 경서(經書)에 나오는 세록의 뜻을 모르는 처사일 뿐 아니라, 후세의 은음의 사리(事理)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문】: 세록(世祿)은 그러하지만 삼대(三代)의 명신(名臣)은 대개가 세주(世冑)였으니 이것은 세신(世臣)을 계속 임용한 데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답】: 그대의 말이 정말 오활(迂闊)하구나. 삼대의 명신이 어찌 세주(世冑)에서만 배출되었겠는가. 허다한 명신의 후예 가운데서는 선대의 덕행을 본받은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 사람이 마침 현명하여 경전(經傳)에 나타났다고 해서 곧 삼대에는 세주만을 임용한 줄로 생각하는데, 세주가 현명하면 임용하고 미천(微賤)한 사람도 현명하면 임용하였던 것이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는 데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삼대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어찌 오늘날처럼 본인의 현명 여부는 묻지 않고, 그 조상의 관직만을 보는 것과 같다 하겠는가.
아, 삼대(三代) 때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삼물(三物)ㆍ사술(四術)ㆍ팔병(八柄)ㆍ팔법(八法)ㆍ빈흥(賓興)ㆍ대비(大比)라는 제도가 있었다. 서민의 아들도 덕이 있으면 등용하고, 삼후(三后)의 아들도 현명치 못하면 폐하였으니, 매우 공정하고도 엄밀하였다. 어찌 문벌을 숭상하는 후세의 더러운 풍습을 가지고 선왕(先王)의 제도와 비교할 수 있으랴.
【문】: 만일 그대의 말과 같다면, 강좌(江左)에서는 어째서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를 가장 존중하였고,원위(元魏)는 어찌 최씨(崔氏)와 노씨(盧氏)를 가장 귀하게 여겼으며, 당(唐) 나라 초기에는 어찌하여 씨족(氏族)을 특정하였는가.
【답】: 강좌는 위진(魏晉)의 폐단을 따른 것인데, 그 근원은 진군(陳羣)의 중정구품(中正九品)에서 나왔다. 그러나 구품은 문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었고 하품(下品)에는 귀족이 없었기 때문에, 옛날 사람이 이미 배척했던 것이다. 왕(王)ㆍ사(謝)ㆍ환(桓)의 3성(三姓)은 강동(江東)에서 존중하는 바이지만, 왕돈(王敦)ㆍ환온(桓溫)의 반역이 대개 세권(世權)에서 나왔으니, 산동(山東)의 사족(四族)을 귀하게 여길 만한 점이 무엇이 있다고 원위(元魏)가 존중하였겠는가. 이것은 곧 오랑캐의 근거없는 처사인 것이다.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이 신민(臣民)들과 문벌을 다툰 것은 매우 더럽고도 무식한 일이었다.
대개 문벌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선유(先儒)들이 정론(定論)한 바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송(宋) 나라 이후로 중국에서는 문벌의 고하(高下)에 따라 인재를 쓰고 버리는 법이 없어졌는데 오직 우리 왕조만이 고려의 나쁜 풍속을 좇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오히려 재주에 따라 등용한다는 뜻이 있어서 명신 석보(名臣碩輔)들이 한미(寒微)한 집안에서도 많이 나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문벌에 편중되는 세력을 마침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시험삼아 논설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세가(世家) 거족(巨族)들은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며 그 바라는 것이 오직 부귀에 있어, 의기가 자연히 분수에 넘치고 있다. 일족이 성대하고 후원이 두둑한 사람들은 문생(門生)과 고리(故吏), 인척(姻戚)과 의구(義舊 친구)들이 세상에 가득 차서 모든 영달과 곤욕과 용사(用捨)가 오직 그들 마음에 달려 있다. 직위와 대우가 높이 되고 뛰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분수에 맞는 것으로 여겨서 조금이라도 물리침을 받게 되면, 이들 흉악한 무리는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 경외하며 공손할 의리는 모르고 모질고 사나운 버릇을 부려, 공의(公議)도 그 기세를 꺾지 못하고 위벌(威罰)도 그 포악함을 징계하지 못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집안을 망치는 자가 많은 것이다. 어찌 이 나라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아니랴.
무릇 천하와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인재의 현명 여부만을 따져야 마땅한데, 지금은 먼저 문벌을 따지니, 이것이 무슨 의리인가. 또한 옛날에 귀하게 여긴 것은 충신과 효자의 자손인데, 지금은 조상의 관직과 문벌만을 귀히 여기고 있다. 우리나라 문신(文臣)이란 사람들은 글로 삼하(三下 과거에 급제함을 이름)를 받아 요행히 부귀를 얻는 데 불과해서 살아서도 세상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도 후세에 명성을 남기지 못하여, 이처럼 공(功)도 덕(德)도 없는 사람이 십중팔구이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족히 후손들에게 덕을 끼쳐 준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이름이 재상(宰相)의 아들이면 흙덩이처럼 고루해도 반드시 좋은 벼슬을 한다. 그리고 이보다도 심한 것은 모두가 균등한 한 할아버지의 손자일지라도, 아버지가 명관(名官)을 지냈으면 아들도 좋은 벼슬을 하고 아버지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면 아들은 청환(淸宦)길이 막힌다. 또 이보다 더욱 심한 일은 다같이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도, 어머니가 전실(前室)과 후실(後室)이 있음에 따라 문벌의 높고 낮음이 있어서, 동기 중에서도 행세하는 바가 그 외가(外家)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 심한 것은 동기 사이에서도 처가(妻家)의 문벌이 높고 낮은 데 따라 행세하는 데 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추악하고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고금(古今)에 이런 의리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 조상에 명덕(名德)과 관위(官位)가 있으면, 그 자손이 음덕(蔭德)을 입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 사리에 타당하다고들 하는데, 이 또한 거짓으로 가득찬 말이다. 인신(人臣)으로서 명덕과 관위가 있으면 상을 주고 대우하는 것은 옳지만, 무엇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무궁하게 덕을 볼 이치가 있는가. 반드시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우리나라 종실(宗室) 자손들은 극히 쇠잔하여 군역(軍役)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에게는 처음부터 군역을 지울 마음조차 먹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시골 양반 중에도 유명한 사람의 자손이 없지 않지만 출신(出身)하기에 미쳐서는 후원받을 곳이 없으면 종신(終身)토록 침체하고 만다. 그러나 서울 사람은 시조(始祖)로부터 명덕(名德)을 일컬을 만한 조상이 하나도 없고, 대대로 악한 짓만을 하여 본래 소인(小人)의 자손이라 불려 왔어도, 일족이 강성하고 세력이 확장되면 좋은 관직에 올라 높은 대열에 끼이는 데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명덕이니 음덕이니 하는 말이 어찌 감히 허황되다고 아니하겠는가.
이 밖에도 은음(恩蔭)의 제도는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더욱 많다. 이름하여 생진(生進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이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다 하는데 생진이 무수하게 많고, 이름하여 청백리(淸白吏)와 전망인(戰亡人)과 공명(功名)이 있는 사람들의 적자(嫡子), 그리고 선현(先賢)의 자손들이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다 하는데 이런 사람 또한 무수하게 많으니, 이조 판서인들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취하고 버리겠는가. 유명한 집안의 자손이 정목(政目 벼슬아치의 임면(任免)을 적은 기록)에 들면 인물이 뛰어났다고들 말하지만, 유명한 집안의 자손이라고 모두 현명한가. 다만 한때의 형세와 사정으로 말미암아 등용하게 되니, 이른바 음법(蔭法)이란 것이 어찌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며, 불균(不均)ㆍ불공(不公)한 것이 아닌가. 이조 판서의 문앞에서 형세를 겨루는 데 불과할 뿐이다. 그 어디에 공도(公道)가 있는 것인가.
아, 오늘날 시무(時務)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모두 수령(守令)을 잘 선택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가소로운 말이니, 재상(宰相)의 자제와 명가(名家)의 족속(族屬)들로서 그 형세를 끼고도 늙도록 벼슬하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처음 벼슬할 자리가 나게 되면 청탁하기를 ‘어느 대감 어느 영감의 자손이 어찌 한자리 벼슬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하면, 이조 판서는 좋다고 하며 정목(政目)을 내면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인재라고 말하고, 그 사람이 6품(品)으로 승진하게 되면 다시 청탁하기를 ‘어찌 일개 현(縣)을 맡기에 합당하지 않은가.’ 하면, 이조 판서는 무슨 말로 거절하여 이유없이 산관(散官)을 삼겠는가. 어쩔 수 없이 현령(縣令)을 제수하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서 수령을 특별히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그 형세를 업고서 부임하여 탐학ㆍ방종하기가 의지할 세력이 없는 시골 사람들보다 몇 배나 심한데도, 감사(監司)는 못 들은 체 귀를 막고 상고(上考 관원의 고과에서 성적이 우량함)를 쓰며, 어사(御史)는 못 본 체 눈을 감고 포계(褒啓)를 올린다. 그리하여 이른바 잘 다스린다는 수령의 절반 이상이 불법리(不法吏)를 이루고 있다. 아, 이조 판서가 모두 사정(私情)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규(政規)가 이같으니 어쩔 수 없는 실정이다. 이같은 정규를 가지고도 이조 판서가 수령을 잘 선택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녕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억지로 하는 말인가.
아, 양반이 어찌 그리도 요행(僥倖)한가. 유생(儒生)이라 이름하면서도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능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백에 하나뿐이고, 글 뜻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어린애들만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다만 이것 저것을 베끼며 남의 것이나 표절(剽竊)하는 기술을 익혀가지고 과장(科場)에 드나들면서 요행만을 바라고들 있다. 그리고 세력만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벼슬길에 나아가기만 하면 광주(光州)나 나주(羅州)의 목사(牧使)가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이라고들 말하고, 그 부형된 사람 역시 문호(門戶 가문(家門))를 유지하려면 형편상 벼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고 누구나가 다 이같아서,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음사(蔭仕)에 있어서는 열에 아홉은 유명한 집안의 자제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만도 못한 사람은 이모저모로 탐욕을 부리고 모리(牟利)를 꾀하여 부자가 된 다음, 재상(宰相)들과 혼인하여 음사를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또 이만도 못한 사람은 교궁(校宮 향교(鄕校))에 이름을 걸고 당론(黨論)을 조장하여 시의(時議)에 부합하는 것으로써 출세하기를 바라서, 잘되면 관작(官爵)을 얻고, 못되어도 시골에서 호족(豪族)의 칭호를 듣게 된다. 그리하여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 사조(四祖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ㆍ외조(外祖)) 중에 현관(顯官) 한 사람이 없는 사람은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자는 의논이 나오면서부터 사람들은 모두 관직이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명현(名賢)과 명신(名臣)의 후손일지라도 몇대 동안 벼슬하지 못하면 중간에 한미(寒微)하여졌다 해서 현관(顯官)에 오르지 못하고, 비록 향품(鄕品)의 자손일지라도 부호(富豪)가 되어 거족(巨族)과 혼인을 맺으면 곧 양반이 되며, 비록 탐욕스럽고 무례하고 권세에 아첨하기만 하는 사람일지라도 높은 벼슬에 오르면 자손들이 무한하게 덕을 입는다. 그리하여 나라의 관작(官爵)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 나라 사람 가운데 옳지 못하게 관직을 구하는 사람이 한없이 많으니, 이러한 양반들이 나라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쉽게 얻을 수 있는 문을 열어 주고, 요행한 길을 보여 주며, 꼭 다투어야만 할 형세로 몰고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오직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만을 영광으로 여기고 밤낮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못하는 짓이 없으니, 자신이 죽고 종족이 멸망하더라도 꺼림이 없는 실정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이러할진대 무엇이 이상하다고 할 것인가. 사노(私奴)로 말하면 언제나 바라는 것은 속신(贖身)하여 양민(良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양민은 초관(哨官)이나 영군관(營軍官)이 되기를 구하고 있고, 군관은 또 좌수(座首)나 별감(別監)이 되기를 구하고 있으며, 별감은 또 향교(鄕校)의 유사(有司)나 장의(掌議)가 되기를 구하고 있고, 장의는 또 초입사(初入仕)하기를 구하고 있고, 초입사한 사람은 소문평족(素門平族)이 되기를 구하고 있으며, 소문평족은 또 고문대족(高門大族)이 되기를 구하고 있으며, 고문대족은 그 부귀(富貴)를 길이 보전하기를 구하고 있으니, 모두가 분수에 넘치는 소망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정도에 지나치는 소원을 갖고 있어서 등급을 뛰어넘어 출세하고자 하여 마음 편히 분수에 맞는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니 옛날이나 지금이 어찌 다르겠는가마는, 부귀에 당치도 않는 사람이 요행만을 바라고 밤낮으로 날뛰고 경쟁하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극심한 곳이 없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기를 무릅쓰고 다투도록 만들어 놓은 때문이다.
아,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은 다같은 사민(四民)이다. 만일 사민의 아들이 한 모양으로 행세하게 한다면 높고 낮을 것도 없고 저 편이나 이 편의 차이가 없어서, 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를 잊듯이 결코 허다한 다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조정(朝廷)에서 사람을 취사(取捨)하거나 세상에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이 오직 문지(門地) 두 글자에서만 차별되어 있으니, 안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생기고 밖으로는 수치와 분노가 나타나게 되며, 온갖 이해(利害)가 신상에 긴절하고 교사한 꾀가 마음에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상인은 장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장인(匠人)은 공업을 부끄럽게 여기며, 농민은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선비는 선비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온 나라에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없고, 온 세상에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쟁투가 날로 심하여지고, 시골에서는 포악함이 날로 심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슬프다, 옛 임금들이 사민(四民)을 만든 것은 각기 그 본분을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 이처럼 본분에 안정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 어찌 이 나라의 근심이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교목 세신(喬木世臣)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면서 나라를 옹호한다는 등의 말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명분(名分)은 그럴듯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허언(虛言)ㆍ낭설(浪說)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하나의 의리가 되었으니, 매우 가소로운 것이다. 대체로 보아, 평소 무사할 때는 분수를 잊고 날뛰는 거실(巨室)의 무리들이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서 허다한 변괴가 모두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러다가 한 번 사고(事故 전란(戰亂)을 뜻함)가 생기면 사방으로 도망가서 백성들의 앞잡이가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를 보더라도 크고 작은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몰래 도망하여 뒷전으로 빠진 사람이 십중팔구였으니, 슬픔과 즐거움을 같이한 사람은 누구며, 나라를 옹호한 사람은 누구인가.
또한 우리나라가 문벌을 숭상한다고는 하지만 명종(明宗)ㆍ선조(宣祖) 이전에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그다지 문벌에 구애되거나 좁지는 않았다. 재상(宰相)들이 시골에서도 많이 나왔으며, 이에 따라 정치 체재와 정책 규범 또한 요즈음과는 아주 달랐다. 비록 비국(備局)을 설치했어도, 정부와 육조(六曹)가 오로지 각기 맡은바 직무를 전담하여 몇 명의 재상이 나라일을 오로지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사대부(士大夫) 역시 대대로 경성(京城)에 살아야만 하는 일은 없었으니, 직책이 있으면 임금의 부름에 따르고, 직책이 없으면 시골로 돌아갔다. 진퇴(進退)를 함께 하였기 때문에 거실(巨室)과 세족(世族)만이 국가를 옹호하며 변방을 진복(鎭服)한다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해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로 급한 변괴가 자주 생겨서 불안하고 의심됨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여러 공신(功臣)들이 국가를 옹호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그뒤로부터 사람들은 이것에 귀가 젖어 예사로 생각하며 매양 세가거족(世家巨族)에 국가를 옹호하고 변방을 진복(鎭服)하는 길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있은 이후로 변란이 계속 일어났으니, 변방을 진복한다는 말 또한 불안하고 의구스러울 때 반드시 효험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은 체통(體統)을 존엄하게 하고 정령(政令)을 정대하게 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로써 크고 작은 신하들을 통솔하면, 자연히 불안하고 의구스러울 염려는 없게 된다. 어째서 당당한 국가가 도리어 거실(巨室)의 옹호에 의지한다는 말인가. 한(漢) 나라는 외척(外戚)에게 중임을 맡겼고, 동진(東晉)은 거족(巨族)에게 나라를 의탁하였지만, 나는 그 효험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폐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문】: 그대의 말은 비록 이같으나 그것은 끝내 사리(事理)에 닿지 못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은 서울과 시골이 아주 다르니, 이제 만일 시골 사람들로 하여금 일대의 공론(公論)을 주장하게 한다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주관하게 한다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정례(政例)와 사체(事體)와 헌장(憲章)과 의식(儀式)을 능히 다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그들이 사업과 시책을 참작 변통하여 능히 주선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방백(方伯)을 시키면 수령(守令)을 제압하지 못할 것이고, 수령을 시키면 행정의 요점을 익히 알지 못하여 모든 일에 서툴고 고루하며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서(吏胥)는 비웃으며 시골의 동료들은 멋대로 날뛸 것이니 그 직무를 조금도 담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시골 사람은 대대로 농촌에 살아서 민간의 고통과 관리의 간악한 폐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한 고을을 맡기면 대개가 그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만다. 그런데 서울 대가(大家)의 자제는 막 유건(儒巾)을 벗고 목민관(牧民官)이 되어도 물정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백성을 잘 다스린다. 그리고 나아가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더라도 역시 사체(事體)를 알고 완급(緩急)을 살피며 사정을 잘 가늠하여 두루두루 제대로 처리한다. 그 책임과 부담이 아무리 중대하더라도 여유 있게 처리하여 나가니, 국가에서 문벌을 오로지 숭상하는 것이 사세(事勢)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답】: 소위 서울 대가(大家) 자제들에게서 볼 만한 것은 언어와 행동이 민첩하다는 것뿐이다. 문장이 단졸(短拙)하기는 해도 제한된 시간에 과문(科文)을 지을 수 있으며, 식견(識見)이 없기는 해도 사령(辭令)을 수식할 줄 안다. 부형과 친구들 사이에서 듣고 본 것이 넓기 때문에 자그마한 재능과 남에게 잘 보이는 언행으로써도 자질구레한 일을 능히 처리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을 재국(才局)이라 부르며 빨리 승진시켜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주관하게 하니,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고 인재(人才)가 날로 줄어드는 까닭이 이에 있는 것이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서울과 시골의 차이가 어찌 있을 것이며, 선비와 서민의 구별이 어찌 있겠는가. 서울과 시골이 귀천의 차이를 갖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인데, 어찌하여 서울과 시골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가. 선비가 선비다운 점은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며 선생과 벗들을 좇아 자신과 남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뒤에야 세상에 나아가 임금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문헌(文獻)의 고을이라면 안동(安東)ㆍ상주(尙州) 등을 따를 곳이 없는데, 내가 일찍이 안동 가까운 곳을 왕래하며 들어보니, 사실은 그곳 사대부(士大夫) 집에 서책ㆍ문헌(文獻)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안동이 이와 같으니, 다른 곳은 짐작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우도(右道 주로 경상남도 지방)는 심히 무식한 곳이며 호남(湖南) 지방은 영남보다도 더욱 못한 곳이다. 이러하여 이른바 삼남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도 대체로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글이나 열심히 읽는 데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은 집에서도 부형과 친족들로부터 감동되는 바를 얻지 못하는 데다가, 마을에서도 곳곳이 과일이나 먹으며 날씨를 비교하는 시골 농부들이 아닌 사람이 없어서, 견문이 전혀 없고 학문의 연구도 전혀 없게 되어 사람들의 사상이 고루하고 의기가 나약하며, 행동이 거칠고 야비하며, 언어가 오활하고 졸렬하며, 헤아리는 바가 짧고 얕으니, 하는 일의 어그러짐이 실로 어쩔 수 없는 형세이다. 그리하여 요행히 과거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문벌이 한미(寒微)하고 학문이 공소(空疏)하며 후원을 받을 길이 없어서 홀로 외롭기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이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이 의기양양하게 지내는 곳에 끼어들면, 자연 기백(氣魄)이 떨어지고 논설이 궁색해져서, 마치 관청에 들어간 촌닭과 같게 된다. 아, 이것이 과연 그 사람의 죄인가. 이러하고도 시골 사람은 쓸모가 없다고 책망하니 그것이 과연 사리(事理)에 맞는 말인가.
【문】: 시골에서는 인물이 드물지만 서울의 세주(世冑)들만으로도 국사(國事)를 담당시킬 수 있다.
【답】: 그대의 말은 매우 소견이 좁고도 무식한 말이다. 정녕 그대의 말과 같이 한다면, 서울의 양반들만으로 모든 직책을 분배하여 가져도 남음이 있을 것이니, 따라서 한강 밖의 한미한 양반들은 모두 기병(騎兵)이나 보병(步兵)으로 편입시켜서 그 신포(身布)를 징수하여 국가 비용에 충당하지 않을 까닭이 없겠다. 그리고 이같이 한다면 국사(國事)도 오히려 부실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어찌 공허한 양반 칭호에 얽매여 쓸모 없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문】: 그대의 논설은 국가가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해 쓰는 것이 부당하다는 말인가.
【답】: 사대부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 그대는 이미 문벌의 폐해를 깊이 공박하고서 다시 사대부를 등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그것은 모순이 아닌가.
【답】: 그대는 문벌이 곧 사대부인 줄로 아는데 어찌 그렇게도 고루한가. 사대부란 세 글자는 그 관계됨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이른바 사대부란 사군자(士君子)의 다른 칭호이다. 높게는 성현(聖賢)이요, 낮게는 망중(望重)한 길사(吉士)라야 사군자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문벌 좋은 집의 자제를 항상 사대부로 가리키고 있는데, 문벌의 자제들 중에도 마음이 장사꾼 같고 행동이 거간꾼 같은 사람이 많이 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사람을 사대부라 부를 수 있을까. 한미한 집안에도 마음이 빙옥(氷玉)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런 사람은 사대부라 부를 수 없을까.
[주D-001]너의 …… 했다 : 이 대문은 《서경(書經)》 군아(君牙)에 나오는 말로, 주 목왕(周穆王)이 군아(君牙)를 대사도(大司徒)에 임명하면서 훈계한 말이다.
[주D-002]거실(巨室)에 …… 말라 : 이 대문은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말로, 곧 정치를 하는 데 있어 세신(世臣)의 대가(大家)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다. 거실은 세신의 대가, 즉 중신(重臣)을 뜻한다.
[주D-003]대대로 …… 누리라셨네 : 이 대문은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 숭고(崧高)에 나오는 말로, 주 선왕(周宣王)이 신백(申伯)과 같은 공신(功臣)을 사(謝) 땅에 봉(封)하므로, 윤길보(尹吉甫)가 현인(賢人)을 높이 대우할 줄 아는 선왕의 덕을 찬양한 것이다.
[주D-004]영화를 …… 오래였음을 : 이 대문은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나온 말로, 곧 은(殷) 나라 사람들이 영화를 누려온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주D-005]잉숙(仍叔)의 …… 비난한 것 : 《춘추(春秋)》 환공(桓公) 5년에 “천왕이 잉숙의 아들을 시켜 내빙케 하였다.[天王使仍叔之子來聘]” 하였는데, 잉숙은 곧 천자(天子)의 대부(大夫)로서 그가 직접 내빙해야 할 터이나, 그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 대신 내빙케 하였으므로 《춘추》에서 ‘잉숙의 아들[仍叔之子]’ 이라고 써서 세관(世官 : 세습(世襲)의 벼슬)의 폐단을 기롱한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6]규구회의(葵丘會議)의 …… 인용하고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맹자가 환공(桓公)이 규구(葵丘)에서 맹약(盟約)한 내용을 인용한 가운데 “사명(四命)에는 ‘사(士)는 세관(世官)을 말라.’고 했다.” 한 것을 말하는데, 이 말은 곧 관직(官職)을 세습(世襲)하지 말라는 뜻이다.
[주D-007]대부(大夫)는 …… 않는다 : 이 대문은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세작(世爵)은 곧 세습(世襲)의 작위(爵位)이다.
[주D-008]나라에서는 …… 있다 : 이 대문은 《좌전(左傳)》 소공(昭公) 16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9]세경(世卿)은 예(禮)이다 : 이 대문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은공(隱公) 3년조와 선공(宣公) 10년조에 나오는 말로서, 《공양전》에는 두 군데에 다같이 ‘세경은 예가 아니다[世卿非禮也]’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세경은 예이다.[世卿禮也]’라고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세경(世卿)은 곧 세습(世襲)의 경(卿)으로 춘추 시대의 제도에서 대대로 경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10]삼환(三桓) :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정권을 독단하였던 노 나라의 삼경(三卿 세 대부(大夫)), 즉 맹손씨(孟孫氏)ㆍ숙손씨(叔孫氏)ㆍ계손씨(季孫氏)를 말하는데, 모두가 환공(桓公)의 자손이므로 삼환이라 한다.
[주D-011]전씨(田氏)는 …… 빼앗고 : 전씨는 곧 전국(戰國) 시대에 제(齊) 나라에 벼슬하여 경(卿)이 되었던 전화(田和)를 가리키는데, 전화는 끝내 제 강공(齊康公)을 해상(海上)으로 옮겨버리고 스스로 제후(齊侯)가 되었다.
[주D-012]배경(陪卿) : 배이(陪貳)와 경사(卿士). 왕자(王者)의 부이(副貳)의 뜻으로, 곧 삼공(三公)을 가리킨 말이다.
[주D-013]단주(丹朱)처럼 …… 말라 : 이 대문은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나오는 말로, 단주는 곧 요(堯) 임금의 아들 이름이다.
[주D-014]세주(世冑) : 대대로 녹(祿)을 이어받는 집. 곧 세가(世家)와 같은 말이다.
[주D-015]삼물(三物) : 세 가지 일. 첫째는 여섯 가지 덕(德)으로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둘째는 여섯 가지 행실로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고, 셋째는 여섯 가지 기예[藝]로서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周禮 大司徒》
[주D-016]사술(四術) :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말함.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악정(樂正 악관(樂官)의 장(長))은 네 가지 술(術)을 숭상하고 네 가지 가르침을 세우며, 선왕(先王)의 시ㆍ서ㆍ예ㆍ악을 좇아 선비를 육성하되, 봄ㆍ가을에는 예와 악을 가르치고 여름ㆍ겨울에는 시와 서를 가르쳤다.” 하였다.
[주D-017]팔병(八柄) : 군신(群臣)을 부려 다스리는 여덟 가지의 권병(權柄). 즉 작(爵)ㆍ녹(祿)ㆍ여(予)ㆍ치(置)ㆍ생(生)ㆍ탈(奪)ㆍ폐(廢)ㆍ주(誅)이다. 《周禮 天官 大宰》
[주D-018]팔법(八法) : 주(周) 나라 시대에 관부(官府)를 다스리던 여덟 가지 법. 즉 관속(官屬)ㆍ관직(官職)ㆍ관련(官聯)ㆍ관상(官常)ㆍ관성(官成)ㆍ관법(官法)ㆍ관형(官刑)ㆍ관계(官計)이다. 《周禮 天官 大宰》
[주D-019]빈흥(賓興) : 주(周) 나라 시대에 선비를 채용하는 법. 즉 학교(學校)의 생도(生徒) 가운데서 수재(秀才)를 골라 향음주(鄕飮酒)의 예(禮)로써 그를 빈객(賓客)으로 삼아 천거하는 일을 말한다.
[주D-020]대비(大比) : 3년마다 시험을 보여서 인재를 뽑는 일. 《주례(周禮)》 지관(地官) 향대부(鄕大夫)에 “3년마다 덕행(德行)과 도예(道藝)를 심사하여 현능한 이를 천거한다.” 하였다.
[주D-021]삼후(三后) : 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을 가리킨 말. 이 밖에도 여러 설(說)이 있어서 어느 것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치 않다.
[주D-022]강좌(江左)에서는 …… 존중하였고 : 왕씨(王氏)와 사씨(謝氏)는 곧 동진(東晉) 시대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의 두 명가(名家)를 가리킨다. 강좌는 곧 강동(江東)으로서 강동지방에 살던 왕도와 사안의 두 명가가 당시에 가장 존중받았다는 뜻이다.
[주D-023]원위(元魏)는 …… 여겼으며 : 원위는 곧 후위(後魏) 시대를 말함.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두 성씨는 육조(六朝) 시대로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명문(名門)으로 손꼽힌 집안들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24]진군(陳群)의 중정구품(中正九品) : 삼국 시대(三國時代) 조위(曹魏) 때의 상서(尙書) 진군(陳群)이 인재(人才)를 등용하던 법으로 구품관인(九品官人)의 법을 세워, 인재의 우열(優劣)에 따라 관리(官吏)를 전형하던 일을 가리키는데, 즉 상(上)ㆍ중(中)ㆍ하(下) 3등을 또 각기 상ㆍ중ㆍ하로 3분하여 9품으로 만들어 각 주군(州郡)에 중정(中正)을 두고서 그 주군의 인재를 선발 감식(選拔鑑識)한 다음 그 품에 맞추어 관직을 제수했다. 《三國志 卷22》
[주D-025]왕돈(王敦)ㆍ환온(桓溫)의 반역 : 왕돈과 환온은 다같이 동진(東晉) 시대의 권신(權臣)으로서, 왕돈은 원제(元帝) 때에 두도(杜弢)의 난(亂)을 평정하고 시중(侍中)ㆍ강주목(江州牧)에 이르렀으나, 공로를 믿고 국권을 독점하다가 끝내는 무창(武昌)에서 난을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병사(病死)하였다. 환온은 서쪽으로 촉(蜀)을, 북쪽으로 부건(符鍵) 등을 정벌하여 내외(內外)의 대권(大權)을 독차지하였고, 벼슬이 대사마(大司馬)ㆍ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가 되어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졌는데, 이토록 위권(威權)이 높아짐에 따라 반역심이 생겨 끝내는 제(帝)를 폐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세우고서 은밀히 제위를 찬탈하려고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역시 병사하였다. 《晉書 卷98》
[주D-026]교목 세신(喬木世臣) : 여러 대(代)를 중요한 지위(地位)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신하(臣下)를 가리킨다. 《孟子 梁惠王下》
[주D-027]양절 반씨(陽節潘氏)의 글 : 《통감절요(通鑑節要)》를 가리킨다. 양절 반씨는 원(元) 나라 때의 학자(學者)인 반영(潘榮)을 가리킨 말로 그가 통감총론(通鑑總論)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제2권 문벌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논함
【문】: 그대는 이제까지 문벌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이를 구제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풍속이 이렇게 된 지 이미 오래되어 이제는 위엄으로 양반을 몰아세워 평민들과 같게 하려 하더라도, 결코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처벌한다면 이루 다할 수 없을 것이며, 처벌하지 않는다면 법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의 말이 어찌 시행될 수 없는 공론(空論)이 아니겠는가.
【답】: 비록 삼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이 천하를 다스린 것으로 말하더라도, 사민(四民)이 각자의 직업에 힘쓰고, 육관(六官)이 각자의 직책에 충실하게 한 데 불과하다. 그리고 사민이 직업에 힘쓰고, 육관이 직책에 충실하게 된 기본은 가장 공평하고 바른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정치를 행한 데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문벌의 폐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다시는 손을 써 일할 곳이 없으니, 바로 이 점에서 내가 극렬하게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일은 이치에 따르고 자연에 따르는 것뿐이다. 지금 내가 논한 것은 실로 가장 공평정당하고 사물마다 그 사물의 성질 그대로를 놓아 두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어서, 이치에 잘 순응하는 것이고, 자연스러움이 지극한 것이라 하겠다. 어찌 시행하지 못할까 걱정해서 사람을 몰아세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겠는가.
이제 사민(四民) 가운데 사(士)를 우선 정돈하고 이치에 맞게 하면, 나머지 농ㆍ공ㆍ상은 권장하지 않아도 자연히 각자의 직업에 힘쓰게 될 것이다. 사민이 본업에 힘쓴 뒤에야 육관(六官)도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으니, 참으로 이것을 시행한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고질적인 병폐와 뿌리 깊은 장애로 변동할 수 없는 폐해들이 얼음이 녹고 안개가 흩어지듯이 저절로 풀리고 구제하기 어려울 염려가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원기(元氣)가 충실하면 질병이 물러가고, 실정(實政)이 우세하면 겉치레가 없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아, 우리나라가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학교를 세운 지 이미 1천여 년이 되었건만 끝내 선비를 키우는 법을 몰라서 여기서 모든 폐해가 생기고 있으니 어찌 슬프고 답답하지 않은가.
대저 성인(聖人)이 만백성에게 대할 때 사람마다 모두 교양시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이 모자랄 뿐 아니라, 실제로 힘이 미칠 수도 없는 형편이라 여러 사람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고 교양시켜 천직(天職)을 수행하게 하고 모든 사람을 통치하게 한 것이다. 백성들의 생산을 다스려 양육하게 하고 인륜(人倫)을 밝혀 교육하게 했으니, 이것이 곧 《역경(易經)》에서 말한바 ‘천지(天地)는 만물을 기르고, 성인(聖人)은 현명한 사람을 양성시켜 그 혜택을 만민에게 미치게 한다.’는 말의 뜻이다.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에는 ‘향삼물(鄕三物 향(鄕)에서 행하여야 할 행(行)ㆍ덕(德)ㆍ예(藝) 세가지 일)로써 모든 사람을 가르쳐 빈흥(賓興)시키고, 대서(大胥)는 학사(學士)의 판(版) 판(版)은 곧 적(籍)이다. 을 주관하여 3년마다 대비(大比)한다.’ 비(比)는 곧 조사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하고, 또 왕제(王制)에는 ‘경(卿)은 수사(秀士)를 논하여 사도(司徒)에게 올리면 선사(選士)라고 부른다. 선택하여 등용한다. 사도는 선사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논하여 학교(學校)에 올리면 준사(俊士)라 부른다. 재능이 1천명 가운데 뛰어난 것을 말한다. 사도에게까지 올라온 사람은 역(役)을 면제받는다. 정(征)은 요역(徭役)을 말한다. 교육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먼 곳으로 내쫓아 종신토록 대우하지 않는다.’ 하였다.
학기(學記)에는 ‘매년 입학(入學)하고 반년 만에 성적을 조사 비교한다.’ 했는데 반고(班固)는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후(諸侯)는 해마다 소학(小學)에서 특이한 사람을 천자(天子)에게 천거하는데 행동과 재능이 동일하면 활쏘기로 구별한 뒤에 벼슬을 주었다고 하였다.
대저 삼대(三代)의 학제(學制)는 조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경전(經傳)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면, 이미 평민의 자제 가운데 준수(俊秀)한 사람을 뽑아 가르쳤으니, 이가 곧 선사(選士)였다. 그런데 판적(版籍)을 만들었다고 하니 선사에게는 적(籍)이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겠다. 그리고 고을에서 사도(司徒)에게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요역(徭役)이 면제되었고, 사도에서 악정(樂正)에게로, 악정에서 사마(司馬)에게로, 사마에서 천자(天子)에게로 각각 추천되었으니, 그 선택됨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겠다. 또 빈흥(賓興)하여 대비(大比)하고, 입학한 다음 다시 고교(考校)하며, 교육을 따르지 않으면 먼 곳으로 축출하고, 행동과 재능이 같을 때는 활쏘기로 구별하는 것들은 그 조사와 평가가 더욱 치밀함을 볼 수 있게 한다. 가르쳐 키우는 것이 갖추어졌고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정밀하였으며, 학교로의 승진이 신중하였음을 대개 알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준수하고 특이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학교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뒤이어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의 관직을 설치하고 제자(弟子)의 정원을 두었으며, 원위(元魏)에 이르러서는 계속하여 현읍(縣邑) 생도(生徒)의 정원을 정하였다. 당(唐)에 이르러 경도(京都)에는 학생 80명을 두고, 부(府)ㆍ주(州) 이하에는 차차로 체감(遞減)하였으며, 송(宋)에 이르러서는 삼사(三舍)에서 선택 보충하는 제도가 생겼다. 그리고 금(金)과 원(元)을 거쳐 명(明)에 이르러 학제(學制)와 학생수가 더욱 엄밀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뒤에야 참으로 선비를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선비를 양성하는 데 반드시 인원을 제한하면, 전국의 선비 가운데 뽑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선비들이 실망할 뿐 아니라, 비방(誹謗)만을 듣게 될 뿐이리니, 어찌 인재를 즐거이 육성하여 많은 선비가 배출되겠는가.
【답】: 승진ㆍ천거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고 현우(賢愚)의 차이를 묻지 않으며 일률적으로 모두 선비라고만 부르면, 이것이 과연 선비를 일으키는 일이 되겠는가. 한(漢) 나라 말엽 연희(延熹) 연간에 태학(太學)의 학생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유교(儒敎)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오히려 세도(世道)에 해만 끼쳤다고 하는데, 이제 그대의 논설이, 외잡(猥雜)한 것을 허락치 않으면서 많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니 무엇 때문인가.
우리나라는 학교를 설립하기는 했어도 입학시키는 제도는 알지 못하여, 유생(儒生)들이 청금록(靑衿錄)이란 것을 만들어 내어 마음대로 입학하고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로 가소로운 점이다.
해마다 인재를 천거하는 것과 과거(科擧)로 선발하는 것은 서로를 보조하는 것이어서, 이것이 없으면 학교를 운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처음에는 이 제도가 없었는데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과거를 공거(貢擧)로 인식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점의 두 번째이다.
선비를 가르치는 책임은 오로지 사유(師儒)에게 있는데, 순(舜) 임금이 설(契)에게 명한 것을 보면, 주자(冑子)를 가르치는 법이 지극히 중요할 뿐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법(師法)이 엄격하지 못하여 유생(儒生)들이 부황(付黃)ㆍ삭명(削名)ㆍ손도(損徒) 등 이상한 짓을 하며 서로 쟁투하여도 이를 금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점의 세 번째이다.
외읍(外邑)에 교생(校生)을 두어 농부들로 하여금 이것을 핑계로 요역(徭役)을 피하게 하는 곳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유교(儒敎)를 숭상해서 설립한 것인지, 성인(聖人)을 존중하려고 설립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매우 괴상하기만 하고 그 의의가 조금도 없으니, 가소로운 점의 네 번째이다.
이미 입학제도가 있다면 퇴학의 법도 없어서는 안 된다. 행동이 예절에 어긋나는 사람은 사유(師儒)가 사실을 조사하여 퇴학시키고 이밖에 사유가 고시(考試)할 때 세 번 쫓겨남을 당할 때는 역시 퇴학시켜 서민으로 만들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삼대(三代)의 비교(比校)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법은 없고, 다만 나쁜 교생(校生)은 수업을 못받게 하고 군대에 충당시키는 것으로써 학업 평가를 삼으니, 가소로운 점의 다섯째이다.
【문】: 만일 시험을 보아 떨어졌다고 해서 내쫓는다면 오늘날 유생(儒生) 중에는 떨어지는 사람이 반드시 많으리니 어찌 원망하고 비방하는 일이 없겠는가.
【답】: 성적을 평가하는 것은 빈흥(賓興)의 옛뜻으로 그 일이 지극히 공평한데 어찌 감히 이를 원망하고 비방하겠는가. 중국의 유생들은 고시(考試)에 임할 때 스스로 그 재능을 헤아려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자원하여 시험을 보지 않고 학교에서 나가는 사람이 항상 많다.
【문】: 명액(名額)이 이미 결정되면 정원 이외의 사족(士族)의 자제들은 장차 유생(儒生)의 이름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겠는가.
【답】: 오늘날 사람들은 유학(幼學)을 가칭(假稱)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많은 것을 제일의 폐해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폐해를 구제할 논의를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쉽게 처리하기 어려운 때문이다. 이제 유생(儒生)을 시험으로 뽑아 정원을 충당하게 하고, 이 정원 이외에 증광 생원(增廣生員)의 정원을 설치하면 이것은 정원의 유생을 예비로 차출하는 것이다. 이밖에 또한 부학생(附學生)을 정원 없이 설치하여 진정(眞正)한 유학(幼學)이나 가칭 유학을 물론하고 고문(高門)ㆍ한족(寒族)이나 평민들로서 유생의 이름을 갖고 싶어하는 자는 모두 이 속에 몸을 담게 한다면, 이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염려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중국에서는 유생(儒生)에 대한 처우가 이처럼 치밀하고, 이처럼 예우(禮遇)하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폐단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 폐해가 날로 심하여 왔다. 만일 이 한 가지를 깨달아 잘 처리한다면 모든 일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