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위 발언을 했던 날의 기록들..
찬수청(纂修廳)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 및 영의정 이천보를 소견하여 하교하기를,
“이번 일이 있은 후에 황형(皇兄)을 뵐 낯이 없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면서 황형(皇兄)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황형께서 만약 내내 묻는다면 내가 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이를 위해 찬수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후세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김재로의 서문을 보건대 실로 약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도 끝내 뜻을 알지 못하니, 이후에는 또 어떤 광경이 나올지 모르겠다. 내가 4당(黨)으로 하여금 살륙(殺戮)을 하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이번 봄 역옥(逆獄)은 이미 큰 살륙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또 서문을 지어서 살륙을 열려고 하니 무슨 마음인가? 이제 노론(老論)이 없어진 연후에야 나라가 편안하게 된다. 남인(南人)은 흉역을 범한 자 이외에는 편벽된 논의가 없는데, 유독 노론만이 굳게 고집하여 즐겨 중지하지 않았다. 내가 어찌 바람이 없는 데도 풍랑(風浪)을 일으킨 것이겠는가? 유 판부사(兪判府事)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면서 노론의 영수(領袖)가 되고 있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유척기(兪拓基)는 본래 충후(忠厚)한 사람이어서 지난번 화락(花駱)13541) 으로 분당(分黨)될 때에도 이 사람만은 초연하게 들어가지 않았으니, 사람마다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만이 영수가 아닌가? 이광좌(李光佐)가 죄를 입은 것은 소론(少論)의 영수였기 때문인데 어찌 경계할 줄을 모르는가? 내가 보건대 노론이 당론(黨論)을 하지 않은 연후에야 다른 날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어찌 이처럼 번뇌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일이 어찌 사문(斯文)에 해당되겠는가?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도 실로 마음이 아프다. 노론이라 하여 어찌 유독 흉역이 없었기에 이처럼 코를 높이고 거리낌없이 말을 하는가? 노론의 진신(搢紳)들이 만약 다시는 당론을 하지 않겠다고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고백하면 내가 마땅히 진전(眞殿)에 아뢰겠다. 나랏일을 위하지 않음이 참으로 이와 같다면 노론이 어찌 역신(逆臣)을 면하겠는가? 오늘날은 바로 노론 사람들의 죽고 사는 관문(關門)이다.”
하고, 인하여 폐합(閉閤)하고 응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모두 물러나왔다.
노론에게 선전포고를 한 영조!
영중추부사 김재로와 지사 홍계희, 영의정 이천보가 금오(金五)에서 명을 기다리니, 하교하기를,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는데, 김재로가 재차 상소하여 인죄(引罪)하였다.
그러자 노론에서는 다급히 사죄에 나서지만...영조는 그것을 거부하죠.
약방(藥房)에서 구전(口傳)으로 세 번 아뢰어 입진(入診)하기를 바라니, 하교하기를,
“노론을 이기지 못하니, 장차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노론이 내 말을 듣고도 벙어리처럼 하고 있는데, 약원(藥院)은 참으로 의약청을 설치하고자 하는가?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이건 뭔 의미인지....영조를 진맥한다는 핑게로 영조를 만나겠다고 청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광경을 보건대 단지 영수(領袖)만 알고 있을 뿐 군부(君父)는 알지 못한다. 60세 늘그막에 태아검(太阿劍)이 손에 있으니, 정원은 잘 알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벽에 진전(眞殿)에 고하고 대처분(大處分)이 있을 것이니, 백관 이하는 홍화문(弘化門) 밖에 모이라.”
하였다.
태아검!! 영조실록에 7번 등장하는 영조의 스킬아이템입니다.
영의정 이천보 이하 조신(朝臣) 70여 명이 혹 홀로 상소하기도 하고, 혹은 연명 상소하여 모두 당론(黨論)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고백하였는데 모두 노론이었다. 이날에 임금이 약을 중지하고 음식을 물리치며 연달아 엄명을 내려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대궐문 밖에 초승(軺乘)이 길을 메우고 초저녁부터 정원(政院)에 정소(呈疏)하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끊어지지 않아 마치 과옥(科屋)에 시권(試券)을 올리는 형상이었다. 이해 봄에 소론으로 조정에 있는 자들이, 역적이 그 당에서 많이 나온 것으로써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고 분분하게 진소(陳疏)해서 후회하여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허락해 달라고 빌어 국시(國是)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노론이 시세(時勢)를 타고 뜻을 쾌히 하여 다시 살륙의 단서를 열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또 상소하여 스스로 고백하기를 마치 증빙서처럼 하였는데, 모두 조제(調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볼때 영조가 노론에게 휘둘리는 왕이었다고 믿는 누군가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기록일 것입니다만...
영조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긴 하죠.
첫댓글 일부의 사례만 가지고 영조의 정치적 전체성격을 단정짓는건 문제가 있지요 영조는 나주괘서사건후 노론들 위주로 채워놨고 노론들은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영조로부터 노론 4대신의 사당건립이라는 양보안을 받아내어 영조가 무조건 노론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킨게 아니지요 영조는 노론 4대신 기념사당 건립으로 노론들을 회유하여 노론들로부터 그런 선언을 받아낸 것이고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조정 신료와 사대부들 대다수가 전부 노론층이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노론위주의 정치구조는 변함이 없지요
애초에 영조 지지자-노론인 셈인데 노론위주일 수 밖에 없죠.
광해군이 아무리 남인,소북,서인 세력의 정승을 집어넣어도 지지기반은 대북파인만큼요.
그렇다고 영조가 노론에게 휘둘려서 아무것도 못한 왕은 아니었고요.
황현은 고종때의 인물인데 영조를 다룬 글에서 뜬금없긴 하네요.
그리고 한가지 사례만 둔다고 하셨는데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태아검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번 해보셨나요?
왕조 시대에 왕이 특정 파당에 휘둘리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 판단이라고 어느 전공자 강연을 들은 적 있습니다.책 제작자이자 판매상 이덕일의 소설에 너무 많이 휘둘리지요.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노론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오히려 파당에 휘둘린 왕은 광해군이지요
@노하라신노스케 노론만 지지하게 아니라 이광좌 박문수 등 소론 완론들도 영조를 지지하였지만 영조는 탕평책에서 소론보다는 노론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었죠 노론 4대신과 임인옥사가 역모사건이 아니라는 신유대훈을 발표한 사실과 그리고 왕조시대에 신권이 강력하면 왕이 휘둘리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특히 당쟁에서 특정 파당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군주라면 구조적으로 특정 파당을 등질수가 없고 왕의 건강문제시 휘둘리는 문제가 초래되는 정치적 구조를 안게 되죠 영조는 노론 위주로 채워놔서 재위말년 노론 척신당에 의해 정국이 파행되는 왕권이 제대로된 척신당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구조를 안게 되지요
전공자의 의견은 항상 주관적인 요소에 입각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근거와 논리적 설득력이 있는지를 검증하고서 인용하는게 우선이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지요 그리고 왕조시대의 왕권 중심적인 정치에서 신하들이 의견 명분을 같이하여 떼지어 몰려서 결성하는 붕당은 근본적으로 왕권에 해가 되는 존재라 법적으로 붕당 조성하는 행위는 역모로 다스리지요 그러나 선조대 이후 붕당이 정치의 중심에 서고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출신상의 약점과 경종 독살 의혹때문에 노론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죠 자신의 생모 숙빈을 왕비로 추숭하려는 것을 노론들의 반대로 무산될 정도로 무조건 노론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하지 않았지요 나주 괘서사건후 노론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재위 말년 정국을 주름 잡았던 홍봉한 홍인한 김귀주 등의 척신당들은 대개 노론들이었을 정도로 노론 일당 체제를 타파하지 못하였고 노론내에서 청류당을 약화시키고 척신당만 키워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고 세손 정조의 왕위계승까지 방해할 정도의 왕권에 견제적인 권력을 행사할 정도로 비대해지죠 정조 재위초 홍국영의 세도정치와 순조대 이후의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도 영조가 확립한 외척 척신위주의 정치가 영향 끼쳤죠
@공실불 그것 자체가 음모론
전공자의 의견과 비전공자의 의견이 충돌하면 그것을 검증한다는 자체가 비논리적입니다
@노하라신노스케 전공자가 어디 한둘인가요 여러 전공자중에 반대 이견을 제시할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사 연구자인 서길수 교수도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근거보다는 학위와 명성만 따진다고 일침을 가할 정도이지요
@공실불 서길수 교수의 말이 왕정 체계의 기본조차 어그러뜨리는 이덕일류늬 노론 사관 운운하는 궤변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한국은 서양이나 일본에 비하면 약한 편입니다
@공실불 영조가 노론에 휘둘렸다라든지 노론의 음모에의해 아들을 죽였다라고 하는 주장을 하는 전공자는 없습니다
@노하라신노스케 영조와 사도세자가 노론때문에 갈라섰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있습니다 학자들을 단편적으로 봐서 그렇게 보시는 것이지요 사도세자의 죽음이 노론을 시파 벽파로 갈라지게 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여러 있습니다 이덕일씨만 그런게 아니지요 그리고 서길수 교수의 말을 이해못하시는 모양인데 명성을 추구하여 학문의 기본진리를 망각하는 학계의 풍토에 일침을 가한게 서교수의 비판 취지이지요
음모론이라고 하시는데 사료에 언급된 사실들입니다 음모론이라고 하시는데 그럼 중종반정이나 인조 반정 임진왜란 등은 음모없이 안일어 났나요
음모와 음모론은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노론사관 운운 하는 것부터가 비이성적인 음모론의 시작이지요
음모의혹을 규명하는 것도 음모론인가요 무조건 음모론이라고 허구로 치부하는건 그건 객관적으로 학문을 연구하지 않은 폐쇄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식민사관 운운하는 것도 음모론인가요 주관적으로 반대되는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는건 학문을 광범위하게 연구하려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연구하자는 것이 비논리적인 주장까지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민사관 운운하지만 현재 한국사학계는 식민사관을 다 반박하고 끝냈습니다. 오히려 식민사관 부작용으로 나온 과도한 민족주의를 걱정해야지요. 노론의 음모라는 것도 다 조사하면 실제로는 인과관계가 거의 규명되었고 이덕일이 너무나 과장한 것 뿐입니다. 솔직히 사도세자 노론 모함설은 그냥 프리메이슨 음모론이나 911사태 조작설 정도의 가치일 뿐입니다
식민사관은 완전히 끝난게 아닙니다 현재 진행형이지요 사도세자 노론 모함설은 혜경궁의 한중록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비논리적 주장인지 아닌지는 주장의 앞뒤 내용 맥락이 상충되는지가 좌우되지 비논리를 함부로 들먹이는게 아니지요 충분한 검증한 후에 비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민사관 완전히 끝났습니다. 오히려 식민사관 영향으로 생긴 과도한 민족주의를 걱정해야 하지요. 학문적으로 충분히 논의 가능한 식민지근대화론을 무조건 일본 찬양으로 보는 것이 한 예. 노론 모함설이 아니라 신하 몇 명이 모함했는데 그게 노론이라는 것이고요.... 공실불 님의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 상당히 반벅된 것입니다. 노론 사관 같은 음모론을 제하고 한번 보세요.
@노하라신노스케 식민사관이 끝났다니 이런 한심한 말도 또 없습니다. 아직도 주류 사학게는 한국사의 시작이 북은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 남은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에서 시작됐다는 식민사관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과도한 민족주의로 폄훼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평해거사 대체 어느 사학자가 임나일본부에서 한국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나요? 임나일본부의 실존 자체를 논한다면 모를까? 그리고 한사군은 평양에 있기는 했지만 식민지가 아닌 다른 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사학자가 그러 주장을 하나요? 당장 이병도도 안 한 건데
@평해거사 국내에서 한사군 주장하는 학자가 누가 있죠? 그들이 현재 주류였던가요?
그 학자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설마 송호정,이기백선생의 이름을 대진 않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