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 = 명산대찰, 태백산 각화사
이초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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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일보 |
|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태백산과 소백산을 일러 ‘이백(二白)’이라 하고 이 두 산맥의 남쪽 자락에 위치하는 봉화 고을을 ‘이백의 고장’이라 하여 “신(神)이 알려준 복지(福祉)” 또는 “삼재(三災) 불입지(不入地)”의 고장이라 일컬어 온 것이다.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599번지 각화산 자락에 소재한 전통사찰로 태백산 각화사(覺華寺)라 불려오고 있는데, 태백산에서 동서로 뻗은 주봉으로 지금으로부터 1334년 전 각화사가 창건됨으로 인해 산의 명칭이 각화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사찰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산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인데 서기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서기 1101년 국사(國師)인 무애(無碍)스님이 중건하였다.
불가에서 세계가 파멸할 때 일어난다는 세 가지 재앙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 하여 조정에서 삼재 불입지의 중요지역으로 지정 1506년 10월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 조선왕조실록 중초(中抄)와 선원록(璿源錄)을 수호하게 하던 곳이다. 왕조실록이 보관된 뒤로 승려 800여 명이 구도(求道)하는 수도(修道)의 장으로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에 속했던 유명한 사찰이다.
이 절은 해발 650m 지점에 위치하며 태백산 사고는 이 절보다 약 200m 위인 800고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7년에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다음 내심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겉으로는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를 주둔하게 된다. 그러자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 되었으며 특히 봉화에서는 국내 어느 고장보다도 전쟁이 치열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1907년 5월 초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전투에서 몰살당한 일본군은 대대병력을 투입하자 우리 의병들은 각화산 근처에 작전상 후퇴, 적의 동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정탐한 일본군을 각화산에 투입하여 태백산사고와 각화사에 방화를 감행 우리의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 다수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우리를 비적(菲敵)이라 지칭하며 그들이 불태웠다고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1907년에 소실된 각화사는 경하화상(景河和尙)이란 주지스님이 1910년에 요사 채와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2층의 누각인 범종각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었는데 지난 1994년 주지 동춘 스님이 20여 억 원으로 불사 누각과 대웅전, 요사채 2동을 중건하고 1995년 주지 고옹(古翁)스님이 부임 단청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 사찰에 현존하고 있는 중요 문화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와 삼층 석탑이 있다.
귀부는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 위에 놓인 길이 1.75m이며 명확한 건립연대나 유래는 알 수 없으며 비신(碑身)은 없어 졌으나 복원하였다. 원래 이 각화사는 이 절과 가까운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소재 현 춘양 중?종합고등학교 부지에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覽華寺)가 있었는데 원효대사가 이 절을 폐하고 각화사를 창건한 뒤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 하여 각화사(覺華寺)라 명명하였다.
이 남화사 터에는 보물 제52호로 지정된 봉화 서동리의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으며 두 탑 가운데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99개의 소리(小里) 토탑이 들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또 이 사찰에는 조선 철종 시대까지 아홉 도인(道人)이 출세광덕중생(出世廣德衆生)하였다하여 사리탑 9존이 남방 20m 지점에 현존하고 있다.
인간이 주체 할 수 없는 번민이 있거나 소잔하게 삭아가는 육신을 회복하고 싶으면 명산대찰 천년도량 태백산 각화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산과 같이 하면 아주 건강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