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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 일일 동풍기(大鵬一日同風起) 대붕이 하루는 바람과 함께 일어나
부요 직상 구만리(扶搖直上九萬里) 회오리바람 타고 구만리를 솟구치며
가령 풍헐 시 하래(假令風歇時下來) 만일 바람 잘 때 아래로 내려오면
유능 파각 창명수(猶能簸卻滄溟水) 가히 큰 바닷물을 까부르고 뒤집을 수 있습니다
上李邕(상이옹) - 李白(이백)
아버지! "삶이 너무 힘듭니다!" 당신께서 "이순신>을 공부해라 "라는 한마디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슴이 너무 막막해져 옵니다. 그가 어떻게 힘들고 억울한 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서 헤매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 코로나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바닥을 헤매는 귀신 고기(fangtooth)처럼 살아왔습니다. 다른 심해어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도 못하고 왜소하고 온몸이 가시로 덮여 악만 남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버텨 왔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만 갈고 또 갈았습니다.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장군 이순신(神)
온 가족이 처참하게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대전 코로나 372번, 강제로 병원에 입원, 수차례 생혈을 빼앗겼으며 2년 가까이 생업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할지 기약할 수 조차 없습니다. 이사를 했고 교육청, 보건소, 30군데 넘는 언론사, 2만 개가 넘는 악플들로부터 짓 밟혀 왔으며 가장 소중한 마음의 평화가 파랑에 휩쓸렸습니다.
마음이 격동 치는 바다 위를 망자처럼 떠돌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명마 부케 팔로스처럼 제 그림자에 놀라 미친 듯이 날뜁니다. 내 마음의 고삐를 잡아줄 자 누구인지요? 많은 이들의 원망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성욕, 식욕보다 강하다는 반박 욕에 집착하여 날마다 억울하다고 외쳤습니다. 뇌가 잔칫날 맷돌로 눌러둔 돼지머리처럼 진액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 없듯이 제 삶도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한 시대의 비극이 철저하게 개인을 짓밟았습니다. 내 과거가 그들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철학도 도덕도 종교도 제게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감히 묻습니다. 제게 이순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참혹한 세월을 제가 그로 인해 어찌 헤치고 나갈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깨진 머릿 통 속 피딱지가 2년 이 지나도 찐득찐득 묻어납니다. 아직도 밤마다 긁어 피가 흘러내립니다. 몸도 마음도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을 못 합니다.
<초등학교와 이순신>
초등학교 때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소나무 옆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엄마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글귀가 구릿빛판에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점토판을 읽듯 집어 나갔다. 그는 언제나 말없이 교문에 서 있는 낯선 남자였다. 친구들과 만날 최적의 약속 장소이며 숨바꼭질할 때는 숨기 좋았고 언제나 조용히 나를 반겨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가장 싫어했던 존재가 있었다. "빨간 마스크" 보다 더 무서운 "장학사"란 인물이었다. 장학사가 뜰 때마다 들기름과 걸레를 가지고 가서 학교 청소를 해야 했으며 동상 아래 은행잎은 왜 그리도 많이 쌓이고 또 쌓이는지 원망의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상 아래 나뭇잎들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때론 장학사가 어떤 존재일까 싶어서 몰래 동상 뒤에 숨어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학교 대청소날엔 집합장소로서의 역할을 든든히 해왔다. 그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이지만 잘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그렇게 매일 그 앞을 지나갔다. 언제나 낯선 청동의 사나이 "이순신"
<신화의 시작 -전쟁의 신>
이순신 장군은 1545년에 출생했고 1598년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향년 53세. 지금의 내 나이에 23전 23승이라는 Great Grand slam을 달성하고 전설 속으로 걸어가 스스로 신화가 되었다. 마치 거인 오리온이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된 것처럼 그는 시공을 초월해 그 자리에 남아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것은 <이순신>에게는 거짓이다. 나는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고 그는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다.
<신의 부활>
요즘 이순신이 대세다. 이순신에 대해 알수록 화가 난다. 충의 예지 신을 다 가지고 살아온 완전체 인간이었다. 424년의 세월을 거슬러 그를 다시 소환한다. 난 시비충이다. 어떻게든 남의 흠을 잡는 걸 즐긴다. 이렇게 완벽한 인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다
영화 "한산"이 전국에 이순신 열병을 몰고 왔다.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이순신의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순신! 십 대의 내가 이십 대의 또 다른 내가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와 같은 나이가 된 지금의 내가 보기에 그는 또 다른 페르소나를 지닌 인물이었다. 감히 그 이름을 내 난잡하고 조악한 글에 남기고 싶지 않아 참 많이 망설였다.
충무공의 뜻을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해 공을 세운 무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장수들은 박병묵, 조영무, 남이, 김시민 등등 여러 명이 있다. 싸움의 신들 중에 제우스 같은 존재가 바로 이순신이다. 삼국지 제갈공명의 시호 또한 충무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죽은 자의 혼령을 42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소환한다. 이순신. 감히 언급조차 하기 어려운 그 이름. 그 이름을. 불러 낸다. 지상에서 제일 높은 땅,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땅 초모랑마(티베트어로 어떤 새도 넘을 수 없다는 뜻)에 올라 옷을 태우고 그의 혼령이라도 불러오고 싶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텐징 노르가이>
에베레스트의 원래 이름은 초모랑마였다.
1953년 5월 29일, 아무도 밟지 않은 땅, 에베레스트에 20세기 최고의 탐험가이자 뉴질랜드 출신인 "에드먼드 힐러리"가 세계 최초로 8인용 식탁만 한 크기의 땅에 발을 올린다. 그 뒤에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있었다. 그는 힐러리 경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둘은 평생 의리와 신뢰로 함께 한다. 세계 최초라는 말. 인간은 최초라는 타이틀에 목숨을 서슴없이 건다. 최초라는 말은 언제나 인간을 열광시킨다. 최초라는 타이틀 앞에서 목숨조차 서슴없이 던진다. 세계 최초 23전 23승.
좌의정 정탁
<위대한 헤드 헌터 정탁>
위대한 남자 이순신 그 뒤엔 "텐징 노르가이" 같은 헌신적인 정치인이 있었다. 우의정을 지낸 지중추부사 정탁이다. 정탁은 왜란을 당해 조선이 풍전등화의 형국일 때 나라를 구할 명장들을 많이 천거하고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탁, 그는 이순신을 보았고 영웅을 알아내는 매의 눈을 가진 남자였다. 공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목숨을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유명한 ‘논구 이순신 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이다.
“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죽음을 극복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반대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 두려워지며 삶에 대해 더 집착하게 된다. 강도가 집에 들면 백세 어르신께서 제일 먼저 살려달라고 돈 들고 온다는 말도 있다. 노쇄한 72세 고령의 정치가 정탁은 목숨을 걸고 상소문을 올린다. 선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변덕스러운 왕은 그도 두려웠을 것이다. 모든 이들의 두려움은 그가 일어서야 할 명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정탁을 기억해야만 한다.
정탁. 그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나는 그의 30대 후손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세계를 지금 경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많은 이들. 우리에겐 어쩌면 기억해야 될, 잊지 말아야 할, 잊힌 이름들이 있다. 이순신의 부활을 끌어낸 정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순신>
위대한 장수이기 이전에, 인간 이순신이 있었다. 그는 효자였고, 그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사람이 위대할 수 있을까! 그를 파면 팔수록 난 좌절한다. 이순신의 절규, 이순신의 뜨거운 노래들이 내 심장을 후벼 판다.
한 남자가 있다. 신은 또다시 그렇게 이순신처럼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범하지만 위대했던 남자. 소박했지만, 거대했던 한 남자. 강했지만 때론 약했던 한 남자. 대범했으나 고뇌 가득한 남자. 이순신. 어쩌면 그는 그의 갑옷만큼이나 두꺼운 마음의 옷을 입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남자 이순신. 하지만, 애끓는 아버지였던 사람, 아둔한 왕 앞에 피 끓는 눈물을 흘렸던 신하! 감히 그의 이름을, 이 밤에 불러본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오늘 태풍이 불었다. 전국 곳곳에 물난리가 났다. 플랜 A만으로 살아가기 너무 버거운 시대. 플랜 B, 플랜 C가 있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힘들고 통찰과 깨달음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 영웅을 만들려면 먼저 난세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영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오늘도 영웅의 부활을 기다린다. 내가 숨어야 될 곳, 내가 살아가야 될 이유, 나 자신이 기댈 곳. 내가 의지할 한 남자 어쩌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대 위대한 영웅 그가 바로 이순신이다. 칼날을 손에 쥐고 피를 쥐어짜 쓴 것 같은 난중일기를 보면서 삶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이기 이전에 그는 아들이었고 아버지였다. 자식의 죽음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그는 어쩌면 자식 앞에선 무능력한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위대한 장군이었던 이유 또한 아버지로서 무능력했던 이유일 것이다. 시대를 돌려 그를 부활시키고 싶다.
온 국민이 다 힘들었다. 대의명분은 어디에 있으며 삶의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죽음이 더 두려울 때는 삶이 많이 남았을 때가 아니라, 거의 다 소진하고 남겨진 시간이 적을 때일 것이다. 이순신과 정탁. 그들은 셰르파와 힐러리 경과 같은 사이일 것이다. 정탁이 없었으면 이순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조선은 어쩌면 다른 나라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위대한 영화 뒤에 뒤에 많은 스태프가 있는 것처럼, 영웅 이순신 뒤에는 바로 그 정탁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후,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의 이름을 하나씩 다 읽어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와 더군다나 그들의 노력을 그려 보는 사람들은 더욱 없을 것이다. 정탁이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한 자를 알아보고 위대한 인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통 크게 던졌다는 것이다. 그를 찾아낸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과제이다. 내 슬픈 과거가 누군가의 현재 또는 누군가의 미래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시련과 맞서 이긴 이순신을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 당신께서 이순신에 관한 글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그래, 이순신(神)!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함께 신비로움이 밀려옵니다. 제 마음속의 그가 그러합니다. 그의 마음속의 바다는 머리 백개 달린 <레비아탄>이었을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목표가 없어서 배회하거나 표류할 때 나를 잡아줄 닻이 필요하다. 그의 죽음은 통렬하고 심오하며 신화보다 더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설이 되었다. 신이 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쓰고 떠난 삶! 그토록 열심히 살다 간 이유는 무엇일까? 불멸로 가기를 열망했던 걸까? 우리 가슴속에 또다시 부활하고자 했던 것일까?
신이 준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다 쓰고 간 한 남자가 있다. 나라를 백성을 어머니를 아내를 자식을 인간을 심지어 자신을 버린 왕조차 사랑에 사랑을 더해 살다 간 이순신이 있었다. 그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어쩌면 이제 신조차도 그렇게 완벽한 인간을 다시는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절망할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넘치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신이다. 신이 돌아왔다. 우리의 가슴속에. 이런 신이 있었으면 생각하는 한 인간의 부활. 그게 바로 이순신이다.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었으며, 좋은 아들이었으며. 실천하는 상사. 위대한 장수였으며 무엇보다 충실한 신하였던 한 인간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순신이다.
<정탁>
예천 출생으로 본관은 청주 정 씨다. 이황, 조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정탁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며 바른말을 하는 신하였다. 정탁은 왜란이 일어나자 1554년 좌의정에 임명되어 곽재우, 김덕령, 이순신을 발탁하기도 했다. 1597년 모함으로 이순신이 파종 사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신을 겪자 유성룡 조차 선조의 눈치를 보던 그때 정탁이 나섰다. 임진왜란 영웅 중 진정한 영웅이 있었으니 백성의 목숨을 위해 외로운 결정을 내리고 주사위를 던진다. 죽느냐? 나라를 구하느냐?
정탁은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올곧은 성품과 넓은 아량으로 동시대를 살다 간 이상적인 공직자의 패러다임이었다. 정탁은 정유년에 죽음을 앞둔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선조와 눈치만 보는 신하들 앞에서 소신껏 구해 낸 것이다. 의로운 정탁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픈 몸을 이끌고 신구 차(伸救箚) 상소문을 올려 열렬히 이순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이순신은 예전과 같은 크나큰 승리를 거둔다.
이런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정탁의 제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조부께서 살아 계셨을 때 제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본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다른 이들도 넓은 포용력과 이해심으로 내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려 깊은 태도가 정치인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일 것이다. 역사를 거치며 수많은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견뎌낸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아들 이순신>
비가 내렸다. 아침에 흰머리 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머리 털이 무엇이 어떠냐 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순신 [난중일기]
어머니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배려라는 말은 자신의 관점이 아닌 타인의 눈을 통한 것이다. 그는 항상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의 나이 든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실 것 같아서 흰머리를 뽑는다는 말은 자식으로서의 최고의 도리를 다하는 그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미리 염두하고 살아온 자의 배려심이 깃든 모습이다. 어머니 그에겐 언제나 그리움과 아픔의 존재였을 것이다.
1597년 4월 13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이루 다 적으랴”라며 어머니를 잃은 아픔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충무공께서는 왜적들의 간계와 간신들의 모함으로 파직되고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간다. 공의 불행은 또 시작된다. 바로 직후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위의 글은 어머님의 상을 치르신 후 충무공께서 난중일기에 쓰신 글이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충무공의 이 한 마디에 너무도 마음이 아리다. 아! 이순신 장군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구나!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
<아버지 이순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충무공께서 셋째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난중일기에 기록하신 내용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는 무력한 아버지였다. 커다란 갈고리에 심장이 뽑혀나가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때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영(이순신의 아들)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지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남편 이순신>
이순신이 구국의 명장으로 그 공을 떨치게 된 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도운 부인이 있었다. 이순신의 아내 상주 방 씨 방연화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덕행뿐만 아니라 학문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장군의 아내라는 힘든 타이틀을 조용히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외롭고 불안감에 하루하루 버텼을 것이다. 조선의 남자를 남편으로 둔 죄로 그녀는 평생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매우 중하다 한다. 그러나 나라 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다.” (갑오년 8월 30일)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약하다 하니 걱정스럽다.” (갑오년 9월 2일)
“아내는 나은 뒤로 심신이 많이 상해져 천식이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을미년 5월 16일)
전쟁 중에도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는 장군의 마음을 많은 부분에서 느낄 수 있다.
<인간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남다른 전략으로 왜군과의 해전에서 큰 승리를 얻어낸 위인이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모습 뒤에 가려진 장군의 질병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복통과 식은땀, 몸살, 급성 위장염 등에 시달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자주 겪었으며 때때로 공무에 나서지 못할 정도의 아픔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것. 이순신 장군이 건강 이상을 느끼고 일기에 이를 작성한 것은 약 100회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침마다 불안감에 휩싸여 주역으로 점을 치기도 했다. 그는 절박한 심정에 무엇에든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꿈자리가 심란한 날이면 하루 종일 맘을 졸이며 기도하는 모습에 어떻게든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애절함이 엿보인다. 나도 힘들다. 그는 하루하루가 수많은 사람이 매달린 로프를 끌고 등반하는 맘이었을 것이다.
<상남자 이순신>
日本之人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
일본 개놈들은 권모술수와 거짓에 능하여,
예로부터 신용을 지키는 의로움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고 멋진 욕은 처음이다. 속이 다 후련하다.
그는 나의 욕 스승님이기도 하다. 50 넘어 욕을 배워서 정신 건강이 한결 좋아졌다. 욕쟁이 할머니 해장국집을 차려도 될 만큼 욕이 찰지게 늘었다. 살아가는 방식을 하나 더 배운 셈이다. 나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사랑꾼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본부인 방 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과 딸이 하나 있었다. 방 씨 외에 일기에는 가까웠던 여자 4명이 등장한다. 여진이, 최귀지, 내산월 그리고 부안댁 윤 씨다. 최근에는 ‘덕이’라는 또 다른 여인을 난중일기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난 언제든 새로운 사랑에 갈채를 보낸다.
사랑과 외로움의 크기는 비례한다. 외로움이 크지 않은 자의 사랑은 미지근하다. 펄펄 살아 끓어 넘칠듯한 화산이 그의 가슴에 있었을 것이다. 뜨겁게 뛰는 사랑에 대한 열정이 그를 최고의 전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순신이 그립다. 참고로 허 레이쇼 넬슨 제독에겐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지닌 여인 엠마 해밀턴이 있었다. 초상화 속 그녀의 얼굴엔 걸출한 세기의 영웅을 휘어잡을 듯한 요기가 넘쳐난다.
엠마 해밀턴 Emma Hamilton
<이순신과 넬슨의 유언>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다했습니다.”
‘영국의 충무공’ 호레이쇼 넬슨 제독은 1805년 10월 21일 마지막 전투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적군이 쏜 총탄을 맞고도 이렇게 외쳤다. 그는 부하들로부터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승리의 소식은 죽음의 두려움조차 망각하게 했다.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 전방급 愼勿言我死 신물 언 아사)
1597년 왜군과의 마지막 대결인 노량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순국한 이순신의 마지막 말이다. “싸움이 급하다.”며 “단 한 명의 조선수군도 동요해서는 아니 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수없이 많이 그는 죽는 연습을 했으며 머릿속에는 죽음의 시뮬레이션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떠나는 이의 마지막 순간에 남겨진 말은 언제나 가슴이 찡하다. 철이 들고 싶다면 묘비명을 공부하면 된다. 난 어떤 말을 남기고 갈 것인가!
인생이 죽은 자의 심장박동 표시처럼 직선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인생은 온통 아래위로 격심한 V의 요동치는 모습과 같다. 승리와 절망이 교차한다. 그의 삶은 고통의 축제였다. 이토록 잔인하고 도 숭고할 수가!
<시인 이순신>
山島夜吟 (한산도 야음 : 한산도에서 밤에 읊다)
水國秋光暮 (수국 추광모) : 물나라에는 가을빛 저물었는데
驚寒雁陣高 (경한 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떴구나
憂心輾轉夜 (우심 전 전야) : 근심으로 전전반측(輾轉反側) 밤새 잠 못 이룬 사이에
殘月照弓刀 (잔 월조 궁도) : 싸늘한 새벽달이 어느새 활과 칼을 비추네.
고등학교 때, 국어시험 문제에 자주 나왔던 전전반측(輾轉反側)을 외우느라 진땀 뺐던 날들이 떠오른다. 새벽달이 뜰 때까지 밤새우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멀리 와서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같은 나이가 되었더라도, 같은 경험이 없으면 공감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나이에 같은 경험을 하고서야 난 이순신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삶의 교차점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이순신이 제대로 보인다.
이순신은 한 시대의 방탄조끼였으며, 한국인들에겐 영광의 챔피언 벨트였다. 이제는 시대를 초월해 정신적 영웅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장군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 동반자 아내의 죽음, 자신의 미래인 아들의 죽음까지 인간의 모든 고통들이 그를 뒤 흔든다. 참척의 고통은 사람의 영혼까지 황폐화시킨다.
자식을 잃고 난 후, 시간은 뒤엉켜 굳어 버리고 인간사 모든 순리는 다 저주처럼 느껴진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 묻고 또 묻는다. 신과의 끝없는 논쟁이 시작된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앞선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 고난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그는 훨훨 날아올랐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건 무엇일까?
나는 그를 무덤에서 꺼내 별자리로 옮겨 놓는다. 바닷물을 까부르고 뒤집을 수 있었던 인간이 바로 이순신이다. 올해까지만 충무공은 나와 친구인 나이지만 내년부터 내가 누나가 된다. 오래 살고 못살고 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항상 염두에 두어할 것이다.
아버지! 남자의 사랑을 어찌 믿겠습니까? 아랫도리에 불을 뿜는 용을 달고 태어난 짐승인데! 하지만 그 라면 이순신이라면 그의 나라와 부모, 자식을 향한 사랑이라면 믿고 또 믿겠습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떠난 남자, 이순신! 부표처럼 떠도는 제 삶을 그를 닻으로 삼아 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남은 날은 적지만 효도하며 살겠습니다.
칸트의 묘비명이자 순수 이성 비판 마지막 글을 나만의 해석으로 인용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속의 이순신
< 정탁의 30대 후손 정온 올림>
첫댓글 ㅋㅋㅋㅋㅋㅋ재밌어요ㅋㅋ쌤꺼볼라고 가입했는데 왜 댓글달진 못할까유ㅜ 쌤은 제가 본 어른중에 (울 엄마빼고 )제일 아름답고 빛나요ㅎㅎ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너무 곱고 아름답고 멋있고 부러워요>.< 저도 쌤처럼 나이가 든다면 좋을거 같아요! 다만 항상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은 꼭 챙겨요 쌤🤍 이순신 글은 저에게 넘 어렵🥲
제자 <이수민>
댓글은 왜 안될까요??
선생님 천천히 여러 번 글을 읽어봤습니다. 문장 사이사이마다 선생님께서 겪으신 힘든 감정들이 새어나와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이순신 장군님처럼, 선생님께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암울한 시기를 이겨내주셔서... 제자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늘 제가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지금 하느님께 선생님이 늘 즐겁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시린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이 오듯이 선생님의 봄을 곧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제자 <이준선>
댓글을달기가참....어렵네요. 대단해요....간간히사모님의억울함을알수있는구절도있어 반갑지만. 댓글을달기엔 제가너무역부족입니다ㅎ
잘읽었어요.대단하세요!킹왕짱! <김서진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