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 제단의 영적 교훈
여호수아 22: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찬송가 563장(예수 사랑하심을)
여호수아 22장은 이스라엘 정복 전쟁이 끝났을 때에 요단강 동편 땅에 자기 지파 기업을 먼저 청하여 얻었던 르으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기업의 땅을 떠나서 요단 강을 건너서 다른 지파 형제들과 함께 전쟁터를 오간 것이 십여년이 넘었는데, 마침내 다른 지파들이 다 기업을 분배받고 정착하게 되었기에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전쟁 과정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성막이 안치되었던 실로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들을 먼저 전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과정에서 갑작스럽운 돌발 상황이 생겨서 나머지 10지파 이스라엘 장정들이 형제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를 치러 가자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된 사유는 돌아가던 요단 동편 세 지파 군인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강가에 큰 제단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다른 지파에 큰 충격을 주었으니, 실로에 있는 법궤를 모신 성막이 버젓이 안치되어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세 지파가 따로 제단을 쌓은 것은 분열을 감행하는 것이요 다른 신을 섬기려는 의도가 있다고 오해할 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 지파 군인들이 다시금 실로에 모여들어서 요단 동편 세 지파와 싸우자고 열의가 충만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오랜 전쟁이 끝나가고 자기 지파의 기업의 땅에 돌아가서 평안히 쉬기를 원할 즈음인데, 이렇게 자기 형제들하고라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은 그 만큼 그들이 신앙적 열정을 가졌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불신앙적 행동을 자기 형제 지파가 집단적으로 감행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요한계시록 3:15~16)
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합시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거룩한 질투심으로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려는 열정이 세월이 가도 식지 않는 열정 신자가 됩시다.
그런데 열정만 갖고 있으면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차분한 머리로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있어야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지도자들 중에는 뜨거운 가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가운 이마를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요단강 동편에 가서 제단을 세운 세 지파의 의도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자고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의견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지도자들이 지상 조사를 위한 사절단을 꾸려 요단 강을 먼저 건넜습니다. 그들이 건너가서 진술한 바는 무엇이냐면, 요단 강 동편 세 지파의 범죄는 그들 세 지파에게 내려지는 재앙만이 아니라 나머지 열 지파에게도 재앙을 불러온다는 논리였습니다. 그 사절단은 아간의 범죄를 예로 들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지만 그 범죄로 인하여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첫 전투에서 패배하여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였으나 그 결과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유아인이라는 젊은 배우에게 마약 범죄가 드러나 조사받았는데 그가 말하기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하는 일이라서 마약을 흡입하는 일을 했노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혼자 그 범죄를 했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고스란히 그 동안 그가 광고를 찍은 회사에게 매출의 큰 손해를 보게 하였습ㅁ니다. 범죄는 혼자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들에까지 큰 악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비느하스 제사장과 열 명의 지파 대표들이 와서 동편 세 지파의 행위가 전체 이스라엘에게 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요단 동편 세 지파의 지도자들이 지혜롭게 그 제단을 설치한 이유를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제단을 설치한 것은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단 서쪽 열 지파가 자기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호와의 기업에서 받을 몫이 없다고 배척할까봐 그 제단을 설치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충분히 그 제단의 성격이 실로의 제단과 별도로 제사 드리려는 용도가 아니라 도리어 실로의 제단과 같은 모형의 제단이라는 점을 말하며 이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동질성을 증거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여 납득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열 지파의 대표들과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충분히 이해하고 기쁘게 돌아가 전쟁 중비 중이던 열 지파 군인들에게 설명함으로 그들도 이해하고 다들 기쁘게 해산하여 자기 기업으로 돌아감으로써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생기도록 한 배경을 보면, 그 세 지파 사람들이 요단 강 동편 땅에서 모세 시대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점령했을 때에 서둘러 그 땅에 욕심을 가지고 자기네 기업의 땅으로 선점했던 데서 나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이라는 지형적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요단 동편과 요단 서편으로 나뉘어진 관계로 이 세 지파는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과 거리적 이질감을 스스로 느꼈던 것이 이번 일이 일어난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먼저 선점할 욕심으로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다른 지파들과 동질감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오해될 수 있다는 염려로 이렇게 엣 제단 증거의 제단을 만들어서 큰 소동이 났던 것입니다.
실제로 후일에 이 세 지파의 땅은 주변의 모압, 암몬 그리고 아람 그리고 아모리 족속들의 공격을 받아서 늘 평안한 날이 없었고, 다른 지파들보다 먼저 그 영토를 빼앗겨서 아람과 앗수르 나라에 먼저 빼앗겨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지고 형제들과 멀어져 고립됨으로써 이러한 일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리적으로 좀 멀리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늘 성전을 가까이 하면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살펴보면, 사람이 지리적으로 성전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더 경건하고 더 열심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더라도 성전을 드문드문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멀리 있더라도 늘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리적인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거리감입니다.
우리는 늘 마음으로부터 성전을 늘 사모하는 복된 사람들이 됩시다. 다윗이 시편 27편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도 다윗처럼 한평생 항상 성전을 사모하여 가까이 들며 나는 성전의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성전이 멀든지 가깝든지 우리가 성전에 오고가는 행로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와 축복의 은총이 널리 퍼뜨려져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복이 흘러나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보면서 다른 성도들이 오해를 하거나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통하여 신앙의 격려를 받고 함께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기를 힘쓰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