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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8(수) 시 63:1-11(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내용관찰]-한글개역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연구와 묵상]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여!!”라고 부르고 있는 다윗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 외마디에 담겨있을 가슴 깊은 진액의 농도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싶습니다. 많은 시편들이 그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여’라고 제 목소리로 부르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며 그 말에서 전해지는 여운을 느껴보게 됩니다. 제 좁은 가슴으로도 징-하게 올라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확신컨대,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다윗의 이 부름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를 향하여 얼굴을 돌이키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로부터 듣고 싶어하시는 목소리도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간 순간 삶의 고비 고비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나의 간절한 심정을 하나님은 듣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목소리 앞에 꼼짝 못하는 체하고, 제 얼굴을 보고 제 형편을 돌아 보기 위해서 달려 오시고 싶어서 말입니다. 문득 지난 주 제 아들 교실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파티가 생각납니다. 몇 주 전부터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필그림 파틀락을 할 건데 한국 음식을 조금해서 보낼 수 있겠냐는 안내문이 왔길래 Yes라고 표기해서 보냈습니다. 아이는 벌써 며칠 전부터 그 날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저는 그 전날 저녁에, 아이가 가져 가기 쉬운 한국 음식으로 ‘떡’을 준비해서 퇴근을 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기억을 하고 준비를 해 준 것에 대해서 기뻐하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엄마, 내일 12시까지 오면 되는데, 더 빨리 와도 돼.” “그래, 더 빨리 가져 가. 네가 학교 갈 때 들고 가라고 준비해 온 거잖아.” 무심한 엄마의 한 마디였습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엄마가 가지고 오라고….” 엥~~? 저는 순간 놀랐습니다. 그냥 아이 편에 음식만 보내면 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미안해, 엄마는 그 때 올 수 없을 건데…?, 엄마 오피스 가야 되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들의 표정이 바뀌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 무릎에 다가 앉혀서 안아 주고는 다시 한 번 사과하고 달래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이는 아예 단념을 하고 엄마가 싸 주는 음식을 잘 들고는 더 이상 아무말 없이 학교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 마음입니다. 남편한테도 상의를 하지 않고 나왔는데, 출근길 내내 오전 근무시간 동안, 왠지 12시에 맞춰서 아이 교실에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부모님들이 다 와서 함께 파티를 하는데, 우리 아이 혼자 우두커니 눈에 눈물을 머금고 서 있을 상상을 하니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제 점심시간을 포기하기로 하고 급하게 차를 몰아 30분 거리에 있는 아이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그 교실에 와 있었던 부모는 딸랑 한 엄마! 30분 늦게 참여한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싶었는데, 끝까지 다른 부모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가야 할 30분과 교실에 머물렀던 20분 동안의 점심 휴식 오버 시간…, 그걸 생각하면 다소 황당스럽기도 해서, 혼자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엄마가 교실에 나타나는 순간 놀라면서 안도해 하는 아들 녀석의 표정과 마음을 생각하니 그저 기쁘고 그러고 있는 엄마가 대견스럽기만 했습니다. 엄마가 낮 시간 동안 늘 함께 해 줄 수 없지만, 그러나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네 옆에 있어 줄 수 있다.’는 그 무언의 메시지를 그 아이도 느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만은 잘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의 메시지를 저의 마음에도 새기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 한 없이 멀리 있는 것만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하고 큰 소리로 불러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코 앞에 있던 분처럼, 금새 ‘왜 이렇게 야단이냐?’하시며 씩 웃으며 대답해 주십니다. 그러면 혼자 지레 겁을 먹고 울상을 하고 있던 제 자신이 쑥스러워서 눈에 고인 눈물을 슬쩍 훔쳐내곤 합니다. 오늘 다시 ‘하나님이여’라고 주를 간절히 찾고 있는 다윗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또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어 주셨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어떤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지, 사모함으로 묵상하기 원합니다. 지금 다윗은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그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표제에 기록된 대로, 그는 지금 ‘유다 광야’에 있습니다. 그가 왜 유다 광야에 있습니까? 그는 거기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지금 피난 중입니다. 그.것.도. 왕의 신분으로…, 그.것.도. 아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중입니다. 도대체 다윗의 생애는 왜 이렇게 기구한 것입니까? 특별히 이 시점만을 클로즈업 해서 본다면 아들 녀석 이름을 ‘David’으로 지은 것은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차라리 왕이 되기 전에 도망 다니던 시절이라면 오히려 낫겠습니다. 차라리 전 왕인 사울의 미움을 받고 그의 창을 피해 다니는 중이라면 오히려 낫겠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의 근거가 되는 사무엘하 15장의 말씀은 에누리 없이 다윗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그대로 고발합니다. 이 때는 다윗이 사울의 창의 피해 다니던 시절이 끝나고 왕이 된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다윗이 그의 생애 가장 큰 아픔이었을 밧세바를 범하는 범죄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마치 그의 죄에 대한 보응인 듯이 그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자매 즉 다윗의 딸을 근친상간하는 죄를 범한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그 다말의 친 오빠 되는 압살롬이 배다른 형 암논을 죽인 이후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형제를 살인한 죄로 인해 잠시 동안의 근신 기간을 가진 줄 알았던 압살롬이 도리어 아버지 다윗을 향해 반기를 들고 그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여세에 밀려 다윗이 예루살렘 궁에서 도망 나온 때입니다.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는 그 짧은 구절 안에는 이렇게 진한 눈물로 쓰여진 다윗의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아비의 목숨을 찾는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유다 광야에까지 다다르게 된 때에…, 그 절박하고 비참한 때에 그.러.나. 다윗은 어떤 노래를 하고 있습니까? 주를 찾고 주를 바라보고 주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윗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암울한 시점에 쓴 이 시는 분명히 ‘탄식시’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시편 63편은 너무나 아름다운 ‘찬양시’입니다. 다윗은 마치 ‘찬양즙틀’ 같습니다. 포도 알갱이들이 포도주틀을 통과하면 포도즙이 되어 나오는 것처럼, 모든 상황들이 다윗이라는 기계를 통과해서 나오면 찬양이 되어 나옵니다. 포도 알갱이를 짜면 포도주가 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찬양즙틀’은 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마땅히 찬양하기 힘들 것 같은 재료들을 넣어도 모두 찬양이 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 63편에 등장하는 서술어(주로 동사)들을 찾아 보면 그의 찬양즙틀의 효력을 좀 더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주를 찾되, 주를 갈망하며, 주를 앙모하나이다. 2.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5.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합니다. 6. 내가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도 주를 묵상합니다. [표준새번역]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7.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릅니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전체 11절 중에서 9,10절 두 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하나님을 향한 웅장하고도 화려한 찬양의 멜로디입니다. 9,10절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들의 운명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맡겨 드리며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한 구절 한 구절들이 모두 꼭꼭 씹어서 단물을 맛보고 나의 삶에서도 그 고백을 경험해 보고 싶은 깊은 묵상의 재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특히 제 마음에 선한 부담으로 다가 온 구절이 3절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대학교 다닐 때 이 구절로 찬양 가사를 삼은 복음송이 나와서 참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음률에 따라 신나게 찬양을 부르면서도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맛보지 못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가 무슨 의미입니까? [표준새번역]으로 보았더니 좀 더 쉽게 풀어놓았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가 입술로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뜻은 좀 더 풀렸고 좀 더 이해되는 것 같지만, 그 표현이 의미하는 그 깊은 영적인 세계가 어떤 경지인지 쉽게 와 닿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그 상황에서 이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가 내내 궁금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1절을 보았습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찬양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사실은 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광야에서, 아무리 왕이어도 그와 함께 피난을 나온 그 많은 식솔들을 생각하며 어쩌면 물조차도 마음껏 먹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었을 그 상황에서, 그의 영혼이 주를 갈망할 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까지도 주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그 상황에서, 곧 죽을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오직 그가 살아서 다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unfailing love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드디어 그의 심중 깊은 곳에서부터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더 낫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1절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지난 번에 묵상한 시편 42편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의 지은이는 다윗이 아니라, 고라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편 63편이 다윗의 42편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고백은 오늘 묵상하는 63편 1절의 심상과 흡사합니다. 그러면서, 42편을 묵상할 때 읽었던 짧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비전성경에 나와 있는 42편 묵상 자료입니다. 처음 읽을 때, 다소 충격적이었고 지금도 그 감동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선 가을이 되면 사슴들이 짝짓기를 한다. 많은 숫사슴들은 자기가 사랑할 짝을 찾아나선다. 이때 사슴들의 몸에는 타는 것같은 목마름이 생긴다고 한다. 사랑할 짝을 찾아다니다가 이 목마름이 온몸에 엄습하면 사슴들은 오직 물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런데 중동 지방에는 물이 귀하다. 귀한 물을 찾아 헤매던 사슴들은 심한 목마름으로 기력이 다하게 되고 나중에는 헛것을 보기도 한다. 마구 달리다가 헛것이 보여서 찾아가보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은 뜨거운 태양 아래 거꾸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간다. 사슴들은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다고 한다. 그렇게 죽어가는 사슴들에게 있어 한 모금의 물은 곧 생명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통해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시편 42편의 감동이 오늘 시편에서도 느껴집니다. 다윗은 ‘광야’에 있으면서, 그렇게 죽어져 있는 사슴들을 광야 모퉁이 모퉁이에서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칼이나 창에 맞은 자국도 없는데 건장한 사슴이 그대로 자빠져서 죽어 굳어져 있는’ 사체들을 발견하면서, 생명 같은 물 한 모금을 찾아 헤매었을 그들의 갈급함만큼이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들이 물이 없어 죽은 것처럼, 내게 하나님이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 그 절절한 확신 위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소중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왔을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단어는 종종 unfailing love라고 영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 그 끝없는 긍휼과 자비로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이미 끝장난 존재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를 범했을 때, 그리고 그 후속으로 잇따라 터진 가정의 그 무수한 파국들을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벼텨내면서, 참으로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인데 그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자신의 영혼 안에 성령으로 내주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그는 생명을 새로 얻은 것 같은 감격들을 맛보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격이 자신의 내면 안에 갇혀 있을 만큼의 압력 수위를 넘었을 때, 급기야 그의 입술에서 또 그의 온 몸에서 찬양으로 또 찬양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느낀 점] 이 모든 것이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그 광야에 갇.혀. 있을 때에…, 하나님과 나눈 그 내밀한 사랑의 교제의 한 자락들입니다. 이 묵상을 하는 내내 하나님은 제 안에 한 물음을 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지금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어떠한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어떠한 감동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십니다. 추궁은 아니고 돌아보게 하심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인자하심을 날마다 맛보고 맘껏 누리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을 때, 나의 생명은 비로소 진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사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결단과 적용] 그러면 나는 지금 나의 상황 가운데서 나의 하나님께 어떠한 찬양을 드려야 할까요? 내가 가장 감사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는 영역이 어디일까요? 하나님은 오늘 나의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싶으신 걸까요? 금방 특별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이 경험하는 기가 막힌 광야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지 않음을 감사해야 겠지요. 그러면서 결국 제 시선은 저의 가정에서의 제 모습을 돌아 봅니다. 남편과 아이들, 건강하게 제 자리를 지켜 주는 그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크게 감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몇 주 전, 지난 봄에 아이오와 주에서 만난 어떤 전도사님의 메일을 받았는데, 현재 암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30대 젊고 열정있는 사역자인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문득 문득 중보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때, 남편이 병원이 아니라 우리 집에,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었는지요.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 을 감사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예배하는 엄마, 찬양의 제사와 기도의 향불을 끄지 않는 엄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날마다 확인하며 남편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깊은 영성의 사역자로 더욱 견고히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중보하는 아내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겠습니다. 어제, 오늘 행사 때문에 귀가가 많이 늦습니다. 귀가해서 아이들이 자고 있더라도 그들 방에서 찬양 드리며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아이들과 남편을 중보하는 시간을 오늘도 건너뛰지 않고 지키겠습니다. |
첫댓글 아이와 함께 하는 엄마의수고에 맘이 찡하네여
오늘, 신문에 연재하시는 사모님의 육아 지혜를 읽었습니다. 벌써 아이들과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의 거리를 느낄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간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