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유배 생활 중 지었다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후렴 부분으로 노를 젓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이다.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그의 시조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정수로서 형언할 수 없는 여유와 초탈을 느끼게 한다. 그 무대가 되었던 보길도(甫吉島) 가 문득 보고싶어 금년 마지막 달, 저 멀리 남도로 내려갔다.
내려가던 길에 먼저 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 1762~1836)이 10여 년간 거처했던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들렀다. 그를 총애했던 정조가 붕어하자 마자 들이닥친 천주교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온 후, 꾸준히 후진들을 가르치며 공부에 몰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정조의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 격물치지 (格物致知)의 관점에서 행정, 경제, 과학, 의학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발휘하여 공직 재임시에는 수원 화성 축조에 일익을 담당하는 한편, 18년의 유배 중에도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오백여 권의 책을 남긴 바 있다.
청명한 아침의 다산초당은 산새들만 지저귈 뿐 고즈녁했다. 멀리 햇살에 반짝이는 강진만이 간간히 내려다 보이는 초당주변은 남도 특유의 키큰 상록 활엽수와 대나무에 둘러싸여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특히 다산과 교분이 두터웠던 혜장스님(惠藏, 1772 ~1811)이 계시던 백련사로 가는 길은 수북한 낙엽과 함께 동백나무와 차밭 등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었다. 외가였던 해남 윤씨가문의 도움으로 마련되었다는 이 초당의 단아하고 소박한 풍경에서 학구적인 다산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다산은 비록 그 시대 주자성리학의 세계에 머물렀지만,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등등의 저술을 통하여 나름 유연한 사고방식과 풍부한 지적 호기심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다산초당에 기거하던 19세기초 무렵은 이미 서양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산업혁명이 한창이었고, 세계를 무대로 상업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였는데, 우리는 폐쇄적인 성리학과 세도정치의 울타리에 갇혀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2. 다음날 아침 일찍, 완도 화흥포에서 노화도행 배를 탔다. 보길도를 가려면 그 곳에 내려 보길대교를 건너야 한다. 파도는 잔잔한 편, 초겨울의 완도 앞바다는 김, 전복 양식장과 점점이 떠있는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같이 아늑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한 40분쯤 갔을까, 노화도에 내리자마자 구부러진 섬길을 따라 보길도로 넘어갔다.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후 제주도로 가다가 발견했다는 이곳 보길도! 그 때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하였도다" 라고 했다던가. 보길도는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고산이 심혈을 기울려 구축했다는 원림(圓林) 중 세연정(洗然亭)이 있는 정원으로 먼저 갔다. 어떤 영감이 있었는지 이름 그대로 씻은 듯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소나무, 대나무 등 싱그러운 나무들과 온갖 기화요초 사이로 큰 바위와 판석보 등을 이용하여 조성한 연못 중앙에 이르러 사방이 개방된 분합문과 온돌방을 갖춘 정자에 올라 본다. 어느 쪽을 둘러 보아도 그림같은 고산의 다섯 친구(五友)들이 모두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무릉도원이 이보다 더할까 생각하게 된다. 가히 고산이 꿈꾸었을 예술같은 공간에서 자연과 벗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새삼 아련히 떠오른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산의 사랑채격인 낙서재(樂書齋) 역시 탁트인 전망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바로 뒷편 소은병 바위에 걸터 앉아 사색을 하고, 앞마당의 귀암에서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을 그로서는 언젠가 피어날 연꽃의 만개를 바라며 이 곳에 묻혀 마음을 다스리려 했으리라. 하지만 그 차분하고 정돈된 모습에서 오히려 절해고도에 선 그의 고독도 한층 묻어 나는 것 같았다.
해남이 고향인 고산은 광해군때 출사하여 한때 촉망받던 사대부였지만, 특유의 강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성품으로 공직생활 내내 극심했던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유배 20년 은둔 19년을 반복했다. 광해군 시절 실세였던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한 것을 시작으로 인조와 효종, 현종대를 거치면서 복상과 관련한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송시열과 다투는 등 남인의 대표 논객으로서 분투하다가, 결국 이곳 보길도에 보금자리를 틀고 임종을 맞게 된다.
낙서재 맞은 편 산자락에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은 하늘과 땅, 그리고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신선이 사는 세계에 올라온 느낌이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낙서재와 거리를 두고 석문과 석담, 석실, 침실 등 자신만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신선의 도를 깨우치고자 했을 고산의 모습이 눈에 어리는 듯 하다. 어쩌면 정치적으로서는 실패했더라도, 그 탁월한 문학적 감성과 함께 당시 세력이 약했던 남인에서 보기 드문 기개를 느끼게 한다.
고산이 세상을 떠난 지 18년 후, 숙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양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1689)이 보길도에 잠시 들른다. 숱한 당쟁으로 애증이 교차했을 고산의 흔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암이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썼다는 글쒼 바위만이 해안 절벽에 황량하게 남겨져 있었다.
새삼스레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보길도의 겨울을 노래한 어부사시사 가락을 되내며 무상한 세월의 늪에 빠져 본다.
간밤의 눈갠 후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는 만경류리(萬頃琉璃)
뒤희는 쳔텹옥산(千疊玉山)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사와(於思臥)
仙界(선계)인가 佛界(불계)인가
人間(인간)이 아니로다.
3.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당파는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선조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후, 동인은 기축옥사(己丑獄史)와 건저의(建儲議)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나, 북인은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소멸한 반면, 남인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 틈에 숙종과 정조대 잠시 득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순조 이후 세도정치가 들어서면서 남인과 소론은 대부분 물러나고 정계는 노론, 특히 시파의 세상으로 귀결되게 된다.
고산과 다산이 속하였던 남인은 원래 이황과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전통 성리학의 맥을 잇는 집단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인격 수양에 힘쓰는 온건하고 안정적인 성향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으나, 현실의 난관을 타개하는 조직적인 전투력이 부족한 경향을 보여왔다. 그 안이함이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를 주장했던 북인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광해군을 축출했던 서인들의 인조반정을 묵인함으로써 소수 세력으로 남게 한다. 그후 남인은 숙종대 장희빈의 몰락과 영조대 이인좌의 난과 함께 더욱 위축되었다가 정조 사후 일어난 신유박해로 사실상 정계에서 퇴장하고 만다.
이러한 남인들의 역정을 오늘날 우리 정치판에 대입해 보면, 학벌, 경력, 재력 등 우수한 스펙을 갖고도 막상 난관을 타개할 궂은 일에는 서툰 인생이모작형 정치인들이 연상되어 씁쓸한 감을 지울 수 없다. 그와 반대로 비록 나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긴 했지만, 인조반정이후 숭용산림(崇用山林)과 물실국혼(勿失國婚)을 집요하게 추구하며 끈질기게 권력에 집착했던 서인들의 결집력과 대비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 않는가?
4. 돌아오는 길, 가사문학관이 있는 담양에 들러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7~ 1594)의 체취가 묻어나는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 등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사미인곡, 관동별곡 등 우리 국문학사에 빛날 주옥같은 그의 시가(詩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엄청났던 기축옥사의 후과를 안고 쓸쓸하게 스러져간 그는 당쟁(黨爭)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면 그 역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제물은 아니었을까? 정치는 모를 일이다.
시대와 당파는 달라도 우리 선조들이 삶의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들이 남긴 발자취도 어떤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치열했던 갈등과 대립을 넘어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과의 괴리를 추스렸던 지혜에 가슴이 아리다. 비록 일장춘몽의 인생일지라도 그들은 언젠가는 꺼져갈 시간과 씨름하며 자연을 노래하고 인간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인연의 흔적을 남기려 버둥거렸으리라.
나는 가끔씩 우리 시대에 만연한 현세적 물질주의를 진정시킬 내세관(來世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아가 만약 생전의 업보(業報)에 상응하는 윤회설을 믿는다면 이 사회가 보다 성숙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오늘날의 정치현실 역시 진영을 나누어 다투고 있지만, 좌든 우든, 민주화든 산업화 세력이든 서로 업보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수긍한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동업자정신이 절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적은 의외의 곳에서 우리도 모르게 다가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정신세계는 매우 더디게 반응한다. 특히 집단으로서의 대중은 분위기에 휩쓸려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은 발전할 수 있지만, 인간 정신은 반드시 진보하지 않는다는 레오폴드 폰 랑케 (1795~1886)의 말에 실망스럽지만. 어차피 이 땅에 함께 살아가야 할 숙명이라면 한차원 높은 공화(共和)의 문명(文明)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5. 그래도 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든 혼란스럽더라도, 다산 정약용이 죽기 직전 썼다는 지난 날을 돌아보는 회혼시(回婚詩)가 여전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
櫻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로)
戚短歡長感主恩(척단환장감주은)
(육십년 세월 눈 깜박할 사이 날아갔으나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은혜에 감사하오)
此夜蘭詞聲更好(차야란사성갱호)
舊時霞帔墨猶痕(구시하피묵유흔)
剖而復合真吾象(부이복합진오상)
留取雙瓢付子孫(유취쌍표부자손)
(이 밤 목란사 소리는 더욱 다정하고
그 옛날 치마에 먹자국은 아직도 남아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그 옛날 치마에 먹자국' 은 다산이 귀양 10년째, 아내가 그리움의 징표로 보내준 붉은 빛 신혼 치마에다 자식들에게 당부 말을 쓴 하피첩(霞帔帖)이다. 가족공동체 (家族共同體), 근(勤)과 검(儉), 학문 (學文), 처세(處世) 등 어머니 치마에 아버지가 사랑을 담아 쓴 글씨! 세상에 이보다 값진 보물이 있을까?
* 고산 윤선도가 열어놓은 인연의 씨앗은 증손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 ~1715)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게 된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공재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 ~ 1777)가 완성한 동국진체(東國眞體)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외손자인 다산 정약용과 교우했던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 ~ 1866)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통하여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 ~1892)으로 인연이 내려가게 한다.
(금년 12월 여행명상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