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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27일 수요일
[(녹) 연중 제8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1,18-25
사랑하는 여러분,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22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23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24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25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2-45
그때에 제자들이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33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34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그들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사실 그들도 똑같이 높은 자리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과 다른 지도력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부활의 로랑 형제’라 불리는 니콜라 에르망은 전쟁에서 다친 뒤, 스물여섯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부엌일을 맡았습니다. 다리의 상처가 악화되어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신발을 수선하고 포도주를 배달하는 등 궂은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고되고 힘든 일도 즐거운 일로 여겼습니다. 접시 하나 닦는 것도 수많은 군중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변함없이 살자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의 비결이 섬김이라는 것을 그의 삶이 증언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10,4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몸소 섬김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참으로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을 따라 다른 이를 섬겨 봅시다. 섬김으로 우리도 참된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사랑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결심은 할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3.45)
찬미 예수님!
연중 제8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뼈아픈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전, "사람의 아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당신 생애의 가장 비장한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야고보와 요한이 다가와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37)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엇갈림입니까? 스승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며 죽겠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피를 밟고 올라가 완장을 차겠다고 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의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 난청'이라 부릅니다.
도대체 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사람의 의지가 '나 자신의 영광과 행복'을 향해 세팅되어 있으면, 아무리 거룩한 진리를 만나도 그것을 오직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만 왜곡해서 듣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이 앞서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조차 내 출세를 돕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전락해 버립니다.
주님은 오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기본 장착 시스템, 즉 영혼의 운영체제(OS) 자체를 '섬김을 받는 것'에서 '섬기는 것'으로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해집시다. 내 이익을 버리고 남을 섬기는 그 '아가페의 사랑'이 내 힘으로 자연스럽게 됩니까? 결코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자기 영광을 향하도록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힘이 부족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위대한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의지적 결심'입니다. 사랑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의 힘이 우리 삶의 행복과 관계를 어떻게 결정짓는지 살펴보기 위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아주 흥미롭게 나타나고 있는 뚜렷한 통계 현상 하나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결혼율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종 통계와 심층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이 현상의 이면에는 양국 남녀가 겪고 있는 깊은 '불안'과 '결핍'의 심리학이 얽혀 있습니다. 왜 일본 남성들과 한국 여성들은 그토록 불안해할까요?
먼저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기나긴 경기 침체를 겪었습니다. 경제적 성장이 멈추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일본 남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능력이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불안해진 그들은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위에 더욱 집착하며, 여성들에게 더 많은 '섬김'과 '순종'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여성들은 이런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지쳐버렸습니다. 장기 불황 속에서 자란 일본 여성들은 남성에게 거창한 재력이나 높은 스펙을 바라는 허상을 이미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하게 먹고살 수 있는 환경에서 "나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만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눈부신 경제 성장과 함께 K-문화의 위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압축 성장과 무한 경쟁, 그리고 SNS의 과시 문화는 한국 여성들에게 지독한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불행한 것이다'라는 강박이 생긴 것입니다. 이 불안감은 외모 지상주의와 더 높은 스펙의 남성을 요구하는 끝없는 조건 비교로 이어졌습니다.
이 높은 요구치 앞에서 한국 남성들도 절망합니다. 경제적 능력만으로 그 무한한 조건을 다 채워주는 것에 한계를 느낀 한국 남성들은, 생존 전략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와 섬김'으로 여성을 만족시키려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엇갈린 불안의 궤적 속에서 기막힌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끝없는 비교와 스펙 요구에 지쳐 섬김의 에너지가 고갈된 '한국 남성'이, 물질적 스펙보다 그저 자신을 아껴주는 섬김의 태도 하나면 족하다고 감사해하는 '일본 여성'을 만난 것입니다.
이 사회적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영적 질문은 명확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채우기 위해 "네가 나를 섬겨야 한다"고 끝없이 요구할 때 필연적으로 관계의 지옥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와 결핍을 딛고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배려에 "감사"로 응답할 때 국경마저 뛰어넘는 구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주 물리학을 보면 이 '받으려는 자'와 '결심하여 주는 자'의 결말이 얼마나 극명하게 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블랙홀(Black Hole)'과 '항성(Star, 태양)'이 있습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주변의 모든 빛과 물질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것(대접받는 것)' 입니다. 블랙홀은 자신의 불안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결국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어둡고 차가운 공포의 공간이 되어 우주의 괴물로 남습니다.
반면 밤하늘을 찬란하게 밝히고 생명을 키워내는 태양과 같은 항성은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태양이라고 자신의 질량을 잃는 것이 덜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항성은 자신의 중심부에서 맹렬한 핵융합을 일으켜 자신의 질량을 태워버리기로 '결심'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깎아내고 태우는 그 희생의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낼 때(섬길 때), 항성은 수십억 년 동안 우주를 밝히는 빛이 되고 주변에 수많은 행성과 생명체를 거느리는 위대한 중심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섬겨라, 내 욕망의 스펙을 채워라"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영적 블랙홀입니다. 그 곁에 가면 모든 에너지를 빼앗기기에 사람들은 결국 그를 떠나고 맙니다. 반면 비록 내 본성은 부족할지라도 매일 아침 "내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며 자신을 태워 빛을 내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영적 태양입니다. (출처: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기중심적인 블랙홀의 본성을 어떻게 섬김의 태양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마음이 생겨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먼저 '주기로 결심하고 행동'할 때, 하느님께서 그 빈자리에 진짜 사랑의 감정을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마을에 남편과 매일 전쟁처럼 싸우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지독하게 가부장적이고 자기 스펙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대접만 받으려는 블랙홀'이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지 않은 여인은, 당장 이혼을 결심하고 마을의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저히 저 이기적인 인간과 못 살겠습니다. 당장 이혼할 건데, 저 인간이 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만들 가장 잔인하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랍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은밀하게 말했습니다.
"가장 잔인한 복수법이 하나 있지요. 이혼하기 전, 오늘부터 딱 30일 동안만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처럼 대접하는 '실험'을 해보십시오. 당신 마음에 사랑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30일 동안만 남편을 섬기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십시오. 퇴근하면 버선발로 나가 영접하고, 최고의 요리를 바치며, 매일 '당신이 최고'라고 존경의 말을 퍼부으십시오.
그렇게 남편을 완전히 구름 위로 띄워놓고 당신의 섬김에 완벽하게 중독되게 만든 다음, 30일째 되는 날 갑자기 아주 차갑게 이혼 서류를 던지고 떠나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은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평생 당신을 그리워하며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볼 것입니다."
여인은 무릎을 탁 치며 "그것 참 기가 막힌 복수군요!"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부터 여인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직 철저한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적 결심' 하나로 남편을 섬기는 30일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이 악물고 맛있는 반찬을 올리고, 다정하게 안마를 해주고, 마음에도 없는 존경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남편은 처음엔 "이 여자가 미쳤나" 하고 의심했지만, 아내의 헌신적인 섬김이 매일 계속되자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블랙홀 같던 남편의 마음속에 아내의 따뜻한 태양 빛이 스며든 것입니다.
결국 아내가 억지로라도 왕처럼 대우해주자 남편도 기적처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역시 아내를 황후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일찍 퇴근하여 청소를 돕고 다정하게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마침내 30일이 되는 날, 랍비가 여인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자, 이제 복수의 날이 밝았소. 준비해 둔 이혼 서류를 던지고 그 인간을 파멸시킬 준비가 되었소?" 그러자 여인이 깜짝 놀라며 랍비의 손을 강하게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선생님! 세상에서 저를 이토록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는 천사 같은 제 남편을 두고 제가 어딜 간단 말입니까! 저는 평생 이 왕의 황후로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출처: 유대인 민담 재구성)
사랑은 내 힘으로 솟아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억지로라도 먼저 주겠다고 행동에 옮기는 처절한 '결심'입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 복음 강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서 왕관을 쓰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꺾어 타인의 발을 씻어주기로 결심할 때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사랑할 힘이 없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힘은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이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빈손으로라도 먼저 주겠다는 단호한 결심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메주고리예 순례는 3가지 여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81년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발현산’입니다. 거친 바위산이지만 사람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산 위에는 메주고리예에서 치유의 은사를 받았던 한국인이 봉헌한 성모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침묵 중에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봉헌자의 지향에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모님은 ‘묵주기도, 성경 읽기, 고백성사, 단식, 미사참례’를 권고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1933년에 세워진 ‘십자가 산’입니다. 예수님 수난 1900년을 기념하며 마을의 주님들이 가장 높은 산 위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십자가 산은 발현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매년 8월에 있는 젊은이의 축제에서는 많은 젊은이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새벽 2시에 올라가서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합니다. 작년에도 76개국에서 젊은이가 모였고, 107명의 사제가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발현산과 십자가 산의 중앙에 있는 ‘성 야고보 성당’입니다. 매일 오후 5시에 성당에서 묵주기도가 있습니다. 묵주기도 후에는 미사와 성시간이 있습니다. 순례객이 많아서 성당 밖에도 제대와 의자를 놓았습니다. 성모님께서도 그 어떤 표징이나 기적보다 미사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발현산의 묵주기도도, 십자가 산의 십자가의 길 기도도 야고보 성당에서 봉헌되는 미사가 없다면 울리는 종과 같을지 모릅니다. 저는 다섯 번 메주고리예를 다녀왔습니다. 보통은 3일 정도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만난 분 중에는 1달 넘게 메주고리예에 머무는 분도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거친 바위산으로 오르며 묵주기도를 하고, 가파른 산을 오르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1달 넘게 머물면서 기도할까요? 저는 또 다섯 번이나 메주고리예 순례를 할까요? 그것은 메주고리예에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평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에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수난과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사람의 아들도 죽어야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야고보와 요한은 십자가 보다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야고보는 오른쪽 자리에 요한은 왼쪽 자리에 앉고 싶다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야고보와 요한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랬기에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빨아 넘겼습니다. 미국의 많은 교구는 본당을 통합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제가 부족하고, 교우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가 십자가와 수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교우가 늘었습니다. 3년 전에는 한국에서 사제를 한 명 더 파견해 주었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왔을 때는 700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난 부활에는 천 명이 넘었습니다. 꾸준히 800명은 넘게 오고, 900명이 넘을 때도 있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씨를 뿌리고, 영적인 거름을 듬뿍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 신자 분과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새로 오는 교우들을 잘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타주에서도, 한국에서도 달라스 지역으로 이주 오는 분들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벗이여, 그리 하게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ㄴ)
벗이여
오르려거든
오르게 하게나
벗이여
가지려거든
가지게 하게나
벗이여
채우려거든
채우게 하게나
벗이여
받으려거든
받게 하게나
벗이여
이루려거든
이루게 하게나
벗이여
누리려거든
누리게 하게나
벗이여
살려거든
살게 하게나
오늘의 성인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신분 : 선교사, 대주교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 +604/605년
같은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문이나 청소년 시절 혹은 교육과정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Roma) 태생으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친분이 있었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베네딕토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595년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40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하면 그는 이미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주교로 승품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를(Arles)의 대주교에 의해 주교 수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597년 봄에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영국 켄트(Kent) 왕국의 해안가 타네트(Thanet)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선교사들과 켄트의 왕인 성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선교활동에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수도인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와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개종자들이 탄생했고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성 에텔베르트 왕과 신하들이 59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왕이 하사한 땅 위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켈트(Celtic) 전례를 고수하려는 주교들이 로마 전례의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여생을 켄트에서 보내면서 런던(London)과 로체스터(Rochester)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오스틴(Austin)으로도 불린다.
성녀 모나셀라 (Monacella)
활동년도 : +590년경
신분 : 동정녀
지역
같은 이름 : 멜란젤라, 모나첼라
멜란젤라(Melangella)로도 불리는 성녀 모나셀라의 부친은 아일랜드의 왕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고 웨일스 중동부의 포이스(Powys) 지방으로 도주하여 15년 동안이나 하느님만 의지하며 숨은 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포이스의 왕자가 사냥을 나왔다가 기도하고 있는 성녀 모나셀라가 있는 곳으로 토끼를 추격해갔다. 그 토끼는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왕자는 성녀를 위해 '영원한 피난처와 거룩한 장소'를 제공하였다. 그 후 그녀는 그곳에서 37년을 지내면서 큰 공동체로 발전했을 때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