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지니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는 크리스마스(성탄절) 휴전 이야기가 나올만 하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기존의 날짜(이듬해 1월 7일)에서 12월 24일로 앞당겼다는 점. 크리스마스 휴전이라고 하면 12월 24일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기존의 1월 7일로 할 것인지도 헷갈리게 됐다.
러시아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첫해인 2022년 크리스마스 휴전을 제안했지만, 우크라이나와 서방 진영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푸틴 대통령은 아랑곳 하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의 성탄을 하루 앞둔 2023년 1월 6일 낮 12시부터 7일 밤 12시까지 36시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군사작전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일방적인 휴전 선언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새로운 침략을 준비하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1월 6∼7일 휴전 기간에는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와 도심 등에 공습 피해가 났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그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이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지난해(2023년)에는 우크라이나가 성탄절 날짜를 앞당기는 바람에 논의 자체가 물건너갔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그리고 맞은 세번째 크리스마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한 주일 삼종기도 후 연설을 통해 “성탄 대축일까지 모든 전쟁터에서 휴전이 이뤄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 교황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레바논·시리아·미얀마·수단 등을 일일이 언급하며 모든 국가에 휴전을 호소했다. 15일에는 평화를 위한 연례 기도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을 형제이자 사촌으로 부르면서 "전쟁은 언제나 패배"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도 성탄절 휴전을 물건너 가고 있다.
올해 휴전 제안은 전쟁 당사자가 아닌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입에서 나왔다. '빠른 전쟁 종식'을 장담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와 회담한 직후였으니 그 타이밍은 기가 막힌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입씨름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러-우크라-미국 차기 권력-유럽 간의 4인4색,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한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2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누가 크리스마스 휴전을 깨뜨렸는가'(Кто сорвал рождественское перемирие)라는 코너에서 오르반 총리가 전날(11일)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크리스마스 휴전과 포로 교환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헝가리가 유럽연합(EU) 의장국을 끝내기 전에 시도한 평화를 위한 새로운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2024년 2월 EU 지도부와 협의하는 오르반 헝가리 총리(오른쪽 2번째)/사진출처:트위트 @RekettyeJr
하지만, 리트빈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와 아무 것도 논의하지 않았다"고 휴전 제안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반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1일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오르반 총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포로교환을 실시하고, 휴전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고 확인했다. 또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우리의 포로 교환 제안서(대상자 목록)를 주모스크바 헝가리 대사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휴전 제안이 평화 정착을 위한 협의의 시작점이라고 믿고 이를 전폭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라이프.ru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옴부즈맨(인권위원, 연방 인권국장) 타티아나 모스칼코바는 17일 모스크바와 키예프(키이우)는 대규모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는 "포로 900명 혹은 600명을 교환하는 안인데, 우크라이나 측에 명단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며 "협상 중"이라고 말했다. 이 협상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행하기 위한 것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크리스마스 휴전에 대한 미국(트럼프 측)과 유럽의 반응은 미묘하게 엇갈린다. 오르반 총리에게 계속 힘을 실어주고 있는 트럼프 당선자 팀(정권 인수위)은 휴전 제안을 적대행위 중단에 중요하다며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유럽연합(EU) 측은 지지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키예프를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난 왈츠 차기 미 국가안전보좌관 지명자/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rbc 등 러시아 언론과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차기 정부의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는 15일 CBS TV와의 회견에서 "러-우크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오르반 총리의 휴전 제안을 신중하게 연구할 계획"이라고 사실상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는 그러나 오르반 총리과 트럼프 당선자 간의 최근 회동에서 크리스마스 휴전 논의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그는 "오르반 총리는 러시아인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며, 트럼프 당선자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만 했다.
나아가 왈츠 지명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식 '고기 분쇄기' 혹은 '대량 학살극'에 비유하면서 “트럼프 당선자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원하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자도 12일 자신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개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게 더 복잡해졌다"면서도 협상을 통한 조기 종식 의지를 분명히했다. 그리고 사태 해결을 위한 첫 단계로 적대 행위 중단(휴전)을 들었다.
반면, 유럽연합(EU)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그 누구도 크리스마스 휴전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씨야트로 페테르 헝가리 외무장관은 16일 주장했다. 이날 브뤼셀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제 15차 대러 제재안이 확정됐는데, 씨야트로 장관은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오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 EU가 기존의 (대러 강경) 전략을 고수하면서 적대 관계를 확대하고, 유럽 전체를 어려운 상황으로 빠뜨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크라이나측 반응은 2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응에는 오히려 날이 서 있는 듯하다. 그는 17일 지방의회·지역당국 회의에서 "트럼프 당선자와 직접 소통할 것"이라며 "중재자는 필요 없다. 오르반 총리는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트럼프 당선자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법적인 권한이 없다"며 "취임 이후 그와 접촉을 통해 우리의 ‘승리 플랜(계획)’ 중 어떤 부분을 지지하고 어떤 부분은 지지하지 않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젤렌스키 대통령은 19일 EU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이 연말 국민과의 대화에서 제안한 '오레슈니크 신형 탄도미사일'의 대결을 '쓰레기, 미친 짓'이라고 욕하면서 "크리스마스 휴전 같은 건 필요없다"고 선을 그었다.
크리스마스 휴전을 둘러싼 러-우크라-트럼프-유럽 간의 이견은 앞으로 차려질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샅바 싸움으로 비친다. 모든 협상은 대체로 갑과 을이 동등하기보다는 한쪽으로 기우는 게 보통인데, 현재까지는 러시아-트럼프 측이 우위, 우크라-유럽 쪽이 밀리는 국면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트럼프 당선자를 등에 업은 오르반 총리가 제안한 포로교환및 휴전 제안을, 비록 인도주의적 측면이 있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크라-유럽이 협상 분위기를 상대에게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영토와 평화의 교환 방식'에 저항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거의 마지막 카드로 '나토 가입' 혹은 '평화유지군 배치' 를 꺼내든 상태다. 트럼프 측의 압박에도 순순히 손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설사, 트럼프 측의 나토 가입 10년 유예를 받아들이더라도,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는 평화유지군 배치는 마지막까지 밀어붙이겠다는 태세다.
하지만, 트럼프의 압박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 당선 이후 파리에서 만난 젤렌스키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그는 16일 당선후 사실상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많은 사상자와 파괴 행위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조기 평화 정착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약간의 진전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양도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라-우크라 지도자와 첫 회담 이후 그렇게 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곳(점령지)에는 건물이 하나도 없고, 복원에 100년이 걸릴 수 있어, 주민들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젤렌스키 대통령도 취임식에 초대하지 않을 것(푸틴 대통령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편집자)라고 했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 당선자의 기자회견 내용을 전하면서 "그가 전쟁 종식 노력을 거듭 강조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원하는 유럽 평화유지군 파견 문제도 삐걱거리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2일 바르샤바를 방문해 투스크 총리와 이 문제를 협의했는데, 투스크 총리는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로이터 통신은 18일 우크라이나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아이디어에 대한 합의가 주요 국가들 사이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키예프 측은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 5~8개국이 평화유지군을 보낼 수 있으며, 그 규모를 4만명~10만명으로 추정하는 등 기대를 접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