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426. 묵상글 (부활 제4주간 금요일. - 살아 행복하고, 죽어 구원 받는. 등)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살아 행복하고, 죽어 구원 받는
옛날 형제들을 양성할 때 많이 얘기한 것이 성숙입니다.
양성이란 미성숙한 형제를 성숙한 형제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숙과 미성숙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왜 사냐고 묻는 것이지요.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는지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방황이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인데
목적이 뚜렷이 없으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출가해야 하는데 가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서 수행하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집을 나서면 출가인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집이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서면 가출이지요.
그리고 가출하여 방황하는 미성숙한 인생은 열심히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갈 데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갈 수 있습니까?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어슬렁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목적이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열심히 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사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 목적이 단기적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는 것이 목적이고,
대학 가서는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고,
취직해서는 결혼하고 애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적입니까?
일찍이 저는 이 인생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와 방황을 했고
그 인생길을 찾고자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찾다가 10여 년 만에 찾은 목적이
바로 사는 동안 ‘행복한 것’,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고,
행복과 구원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행복이요,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이 길에 길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사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찾기 위해 석가에게도 가고,
힌두 명상가들에게도 가고, 노자 공자에게도 갔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길을 찾고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오늘 주님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일생 감사하는 저인데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이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적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어떤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예속되고 지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답습되던 것들에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에 갇혀 있게 됩니다. ‘왕년에 말이야~’라면서 하는 말,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 이런 모습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과거에 갇혀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더 예속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를 따르면 그만큼 실패 확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에서 찾게 되는 기쁨을 얻기는 힘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이라는 과거를 따르라고 그토록 요구했고, 그러지 않은 예수님 모습을 반대해서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님 모습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새로운 마음으로 더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넬슨 만델라).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4)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그 뜻이(áληθεια)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요한 14,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남자들은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둘째는 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고, 모르는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 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 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상에 목적을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한 확실한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을 ‘문’(요한10,9).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 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죽지 않는 생명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메주고리예에서 미사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데 그분들은 이미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년 전부터 제가 매일 쓰는 강론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메주고리예에 순례 와서 미사에 참례했는데 제가 미사 주례를 해서 정말 놀랐다고 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는데 저의 글이 인터넷이라는 마차를 타고 참 멀리도 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참 좋은 가사의 성가입니다. 부족한 저의 묵상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부족한 저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혼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졌습니다. 잠시 스쳐지나간 만남이지만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 은총의 성지순례가 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는 발현산과 십자가 산이 있습니다. 발현산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성모님은 나타나셔서 5가지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기도를 하라는 것, 특히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성심껏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미사참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발현지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특별한 기적과 표징일 수 있겠지만, 성모님의 발현은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의미입니다. 순례에 온 분들은 발현산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십자가 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1900년을 기념해서 1933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십자가 산에는 14처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15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산에는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신부님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십사처를 세웠고,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쓰러졌는데 그 시간이 오후 3시 였다고 합니다. 거칠고 뾰족한 돌산을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을 하는 의미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평야에 ‘야고보 성당’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5시에 묵주기도와 미사가 있습니다. 매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와 미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 안에서만 했었는데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야외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 마당에는 각 언어별로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고백성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매년 8월에는 젊은이의 신앙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발현산으로 오르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십자가산으로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볼 곳도 많이 있는데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위해서 메주고리예에를 찾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신앙 안에서 기뻐하고, 신앙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고, 신앙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메주고리예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토마스가 “저희는 그 길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이후의 대답은 기가 막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길은 영적인 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길입니다. 그 길이 우리는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단순히 살아 숨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숨 쉬는 사람이라도 죽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숨을 쉬지 않는 사람,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는 사람, 영적으로 귀를 막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벌써 생명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계실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하느님 앞에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생명입니다. 언제나 깨어 있는 영혼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고 모든 인간 앞에 겸손한 그러한 영적인 생명력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진리’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임금이냐?’하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자신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말입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답은 육적인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앉기만 하면 기쁘십니까? 행복하십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으로 자신의 온 생각과 마음과 영혼을 채우며 사셨던 주님을 빌라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 삶의 길이고, 우리 기쁨의 원천이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십니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길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양들이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지휘자
지난 사순절 몇 개의 단체와 본당에서 사순 특강을 청했습니다.
미사 안에서 사순 특강을 하고 다시 미사를 이어가는데
2층에 자리한 성가대가 보였습니다.
지휘자….
가운데 서서 지휘하고 있고
성가대원들은 지휘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 자체로도 그 성가대가 얼마나 하나가 되어 노래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지휘자의 필요성을 낮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각기 다른 박자 위에서 노래한다면 각기 다른 강약으로 노래한다면 그 노래의 완성도는 바닥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휘자는 각자의 특출난 능력을 하나로 만들어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각기 다른 소리가 하나의 박자와 강약으로 노래하게 합니다.
우리의 지휘자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분입니다.
‘각자가 착하게 열심히 살면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지휘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길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
문없이 살 수 없듯이 길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빛을 찾는 인간이듯 문을 찾는 인간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서면 우선 창문에 눈길이 가고 밖에 나서면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은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길에서 나서 길을 가다가 길에서 죽는 인생입니다. 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도인(道人)인 인간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길하면 넷이 생각납니다.
1.하숙생의 길입니다. 1960년대 풍미했던 인기의 절정이요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해 많이 불렀던, 지금도 70-80대 노년 인생들이 잊지 못할, 지금은 고인이 된 최희준 비오의 하숙생 노래입니다. 당시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인생 후반 재혼과 동시에 아내의 권유로 세례받았으며 성당 활동은 내 인생의 기쁨이라 고백한 최비오 가수입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간다”
들을 때마다 온몸과 온맘에 촉촉이 적셔드는 느낌의 가사와 곡의 노래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믿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 간다고 고백합니다. 믿는 이들 앞에 놓여있는 “나는 길이다” 천명하신 하늘길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2.길하면 생각나는 2014년 안식년때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인생길을 압축한 듯한 순례길이요 지금도 순례길을 걷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여정의 길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걷게 될 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명심할 요소는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요, 날마다의 길을 걷는 여정에 상기해야 할 필수요소들입니다. 내 인생길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자주 점검해 보는 것도 산티아고 순례 덕분입니다.
3.날마다 아침식사후 맨발걷기 한지도 7개월째입니다.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길 따라 가다가 하늘길 따라 수도원 정문까지 갔다가 다시 역순으로 걸어서 집무실로 돌아오는 참 상징성이 깊은 하늘길과 십자가의 길입니다. 순례길 걷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걷습니다. 집무실의 위치가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지점 바로 위에 위치해 있어 저는 집무실을 제15처 ‘부활의 집’, ‘지족암(知足庵), 천장암(天藏庵)이라 부르기도합니다.
4.하늘길이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23년전 요즘 때 글이지만 하늘빛을 간절히 찾는 당시의 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요, 그 굽이굽은 굽은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하늘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온갖 초목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사랑 소나무야!”-2001.4.21.
길을, 하늘길을 찾는 인간이요 이 길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이요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길이라 다 길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대로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요? 문중의 문 하늘문은, 길중의 길 하늘길은, 단하나 예수님뿐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하늘길을 걷는 이들은 저절로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지위나 명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충실하게 쌓아가는 일상이다.”<다산>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지키고, 인(仁)에 의지하고, 예(禮)에서 노닌다.”<논어>
하늘문,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떠나,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근심걱정에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어리석게 멀리 밖으로 찾아갈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늘문, 하늘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가는 하늘길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몰라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늘길 예수님이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는 물론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말씀입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하늘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이미 지금부터 앞당겨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를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토마스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환히 드러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이 이 한구절로 요약됩니다. 거짓 길도, 거짓 진리도, 거짓 생명도 거짖 빛도 참 많습니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듯 가짜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바로 진위를 식별하는, 분별하는 잣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수록 아버지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기쁘게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걷게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에서서의 진리와 생명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문을 드나들면서 풍성한 은총에 충만한 삶이듯 예수님의 하늘길을 걸으면서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늘길이신 주님을 통해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바오로의 강론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되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날마다 오늘 태어나는 예수님이시오, 날마다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하시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모두가 길이 되건만 누군가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빛의 길을 걸으며
빛의 길을 내고
마침내 빛의 길이 되고
누구는
어둠의 길을 걸으며
어둠의 길을 내고
마침내 어둠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사랑의 길을 내고
마침내 사랑의 길이 되고
누구는
탐욕의 길을 걸으며
탐욕의 길을 내고
마침내 탐욕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진리의 길을 걸으며
진리의 길을 내고
마침내 진리의 길이 되고
누구는
허위의 길을 걸으며
허위의 길을 내고
마침내 허위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살림의 길을 걸으며
살림의 길을 내고
마침내 살림의 길이 되고
누구는
죽임의 길을 걸으며
죽임의 길을 내고
마침내 죽임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십자가의 길
죽을 운명의 존재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사이자 본보기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작용하는 점에서 성사요, 신심을 북돋는 점에서 본보기입니다. 죄수의 멍에에서 구원받은 이들에게 속량은 십자가의 길을 본받아 따라가는 힘을 줍니다. 세상의 지혜가 자기의 잘못을 자랑삼다 못해 모든 사람이 우두머리를 뽑은 자의 의견과 습관과 삶의 방식을 따를 때, 우리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고 말씀하신 분과 나뉠 수 없게 결합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함께 나누겠습니까? ‘길’은 거룩한 삶이고 ‘진리’는 신성한 교의이며 ‘생명’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대 레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한 대가는 말합니다. “영혼은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고, 결코 하느님을 등질 수 없다. 하느님은 늘 영혼을 위해 존재하고, 영혼 안으로 들어오신다." 나는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영혼을 위해 계셨고, 인간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고 말하렵니다. 영혼 안에서 은총은 아무것도 아닙나다. 은총 역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신적인 존재의 터전에서는 세 위격이 하나의 존재가 되고, 영혼도 하느님과 하나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만물과 하느님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여러분에게서 자아와 만물을 비우고,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비우고,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15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셰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는 빛을 제복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좋은 행실을 통해 빛나도록 권하신 이유를 이해했습니까?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는 말에 이어 그분은 즉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빛은 육체적 감각에만 와 닿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보는 사람의 영혼과 인식능력도 밝혀줍니다. 이 빛은 죄악의 어둠을 쫓아 버리고 이 빛을 보는 사람을 도와 그 자신의 고유한 빛을 밝히게 하고 선한 일을 모방하도록 합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앞에”라고 하신 말씀은 옳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빛이 단지 여러분만을 비추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비칠 정도로 밝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관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이 세상의 크고 작은 길들을 바로 보고 헤매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듯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 빛도,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면서 올바른 행동의 길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추어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합니다.
이 빛은 영적 눈에 존재하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고 이제부터 덕행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198)
----------------------------------------------------
240426.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이 말씀보다 우리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을까요?
이 내용 바로 전에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가운데 마지막으로 주시는 당부가 전해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슬픔과 상실감으로 복잡해진 것을 아시자 그들의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십니다.
‘산란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타라소’로, 마치 바다가 폭풍우에 휩싸여 모든 것이 휘저어진 상태, 심연과 표면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요동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그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모나이’는 ‘머무는 장소’, ‘방’을 의미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아버지의 ‘집’, 방이 많은 ‘가정’으로 은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시며, 그 길은 “진리”를 선택할 때 걷게 되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참된 “생명”을 준다고 선언하십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전합니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관계’이고, 지금은 행복해도 언제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산란하고 평온하지 못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삶에 끊임없이 노출된 우리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에서 보호되고 도착지로 인도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