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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예배
야고보서1:19-27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말함으로서 다른 성경과 달리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과는 정반대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됨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인용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사람들을 율법과 행위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야고보서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교훈이나 주의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지 두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았기에 성경으로서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런 평가를 내리게 된 이유는 당시 천주교의 공덕, 선행을 중시하는 사상에 정면으로 대항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 훼손된 서신의 가치를 정상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감리교회를 창설한 존 웨슬리입니다.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천을 소홀히 여김으로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 세상에서 소외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믿음으로 신분이 변화된 성도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하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절하 했던 야고보서를 다시 살려내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읽고 명상하는 것은 정말 경건을 이루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경건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기도, 찬송, 말씀, 예배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경건의 삶을 강조하면서 경건에도 헛된 경건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경건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종교’ ‘예배’라는 말인데요,
이 말대로 ‘경건하다, 종교적이다’ 는 말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장로는 그것 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진실한 예배, 진실한 경건은 많은 성도들이 모여 정성껏 예배드리고
웅장한 찬양대의 찬양에 은혜 받고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드리는
예배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봉사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순결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의 이런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날 한 번 교회 가서 예배드렸으니까 신앙인으로서 내 할일은 다 한 것이라며 더 이상의 신앙생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이제 남은 시간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내 시간이고 내 세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가면서 나는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렸으니까 기독교인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주일날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것만 틀리고 나머지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50보 백보 거의 비슷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꼭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삶의 현장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이고 경건이고 예배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생활은 무엇입니까?
1. 먼저는,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삶입니다.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이야기하면 참된 경건은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혀를 재갈 물리는 것은 말들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신의 혀를 재갈 물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헛된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경건은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고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을 절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 17장 27절에 보면,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했고요,
28절에서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0장 19절에서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말을 많이 하게 마련이고 말이 많으면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화를 내는 일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혀를 재갈물리지 아니하고 남을 비방하고 화를 내고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잘 드려도 그의 경건은 헛된 경건입니다.
어떤 대학교수의 글을 보니까 입학한 신입생들 가운데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을 아주 쉽게 구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비기독교 신앙의 학생들에 비해 말을 잘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말을 잘 하면서 행함이 그만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말은 잘 하는데 그 말이 남을 비판하고 험담을 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이 사회의 위기는 상당 부분 잘못된 말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말해 이웃을 곤경에 빠뜨리고 불필요한 말로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가깝다는 이유로 거칠고 무례한 말을 내뱉기 일쑤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상에서 익명으로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많은 욕과 인격을 파괴하는 말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일로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까지 종종 생기지 않습니까?
데이 C 셰퍼드는 ‘세 가지 황금 문’이란 글에서 언어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합니다.
“말하기 전에 언제나 세 가지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이다.
첫째 문, 그것은 참말인가?
둘째 문, 그것은 필요한 말인가?
셋째 문, 그것은 친절한 말인가?
이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하지 말고 크게 외치라.”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문을 더 통과해야 합니다. 기도의 문입니다.
말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말인가를 생각할 때 진실한 말, 필요한 말, 친절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참된 경건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도들의 경건, 예배, 종교가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신앙의 핵심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교는 교회 안을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되는 일을 통하여 증거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쓸 당시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혼자된 과부의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일에 힘쓰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경건이요 예배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야고보 장로가 처음 한말은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했습니다.(68:5)
미가 선지자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미6:8)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구하시는 것은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아니라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이런 말씀은 정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생활비가 없어서, 먹고 살 돈이 없어서, 모자가, 모녀가, 일가족이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하고 풍요롭다고 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질병과 기아 속에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먼 나라의 일로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면서 못 본체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더 풍성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것만을 걱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관심 갖고 도와주어야 할 오늘날의 고아와 과부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을 잘 살게 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야고보 장로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잊어버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럽게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고쳐나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하시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생활에 대한 성도들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해서 경건한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세상과 등지고 산과 수도원으로 기도원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다가 결국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다 잘못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세속에 물들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경건생활입니다.
이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19절 말씀처럼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21절 말씀처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질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요즘 새벽마다 사사 삼손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만 삼손의 생애를 보면 몇 가지 단점이 나타납니다.
항상 혼자서 활동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규합하고 함께 힘을 합했다면 더 크게 역사했을 텐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블레셋 지방을 자주 드나들었고 세 번째는,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블레셋 지방을 자주 드나드는 것이 결국은 여자를 사귀는 것하고 연관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스스로 이것이 블레셋을 물리치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실패의 첩경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 좋은 대로 행하였고 아버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장소와 사람을 가까이 했습니다.
너무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세속에 물들고 유혹에 넘어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못할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우리가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22.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