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0]1958년 펴낸 『書齋餘滴』이라는 책
친구의 공방에서 ‘귀한 책’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빌렸다. 『書齋餘滴-大學敎授隨筆集』(서재여적-대학교수 수필집)이 그것인데, 단기 4291년 펴낸 것이니 1958년,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이다. 화폐개혁 전의 정가 900圜환. 251쪽. 고색찬연하다. 당시 내로라하는 교수들에게 수필 몇 편씩을 써달라했는지 차례가 ‘원고 도착순’이다. 모두 58편. 장정은 운보 김기창, 표지 제자는 월탄 박종화의 작품. 참으로 옛날 사람들의 존성대명들이다. 교수 17분의 이름 뒤에 괄호로 나이가 적혀 있는 게 특이했다. 모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지성인들로, 지금도 문명文名의 향기가 가득 남아있는 '명문장가' 들이다.
피천득(48세. 6편) 박종화(58세. 5편) 양주동(56세.6편) 김성진(54세.5편) 주요섭(56세.6편) 유진호(63세.5편) 이병도(6편) 이희승(63세.3편) 이양하(55세.4편) 손우성(55세.4편) 조용만(50세. 2편) 이헌구(54세. 2편) 박종홍(56세. 1편) 이하윤(53세. 4편) 오화섭(43세. 2편) 장익봉(54세. 1편) 권명수(48세. 2편). 이병도 교수는 친일사학자라서 그랬는지 책에 그 부분만 잘려 있었다. 과문의 소치로 김성진(서울대 의대)-권명수(연세대 영문과) 교수 성함은처음 들어봤지만, 다른 분들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어서 반가웠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역사-영문학-불문학-문학평론가 등 유명한 학자 교수들이자 빼어난 문필가들이다.
당시만 해도 한자어漢字語는 모두 한자로 표기할 때여서 지금의 젊은 독자들은 거의 읽지 못할 터. 그들 특유의 한자투성이의 고투古套 표현들, 그리고 글 속에 배어나오는 익살과 유머 등이 아주 재밌어 몰입했다. 수필이기에 현학적이지 않으나, 양주동의 <서경별곡 평설>만 완벽한 논문형식이어서 난해했다. 지금 다시 읽어도 시대를 뛰어넘는 ‘글맛’이 있어 좋았다. 맨 첫 페이지에 나오는 수필가 피천득의 <수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隨筆은 靑磁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蘭이요 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엽한(날렵한) 여인이다.” 이미 고전이 된 명구名句가 아니던가. 역사소설가로도 유명한 박종화교수의 <僧舞>라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인 조지훈의 유명한 <승무>시의 해설인가 했더니, 민속무용으로 자리잡은 승무가 환속한 여승의 회춘懷春의 음탕한 춤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보’라고 호언장담한 양주동 박사의 글은 역시 천의무봉. <문주반생기>를 읽는 듯했다. <신록예찬>으로 유명한 이양하 교수의 수필은 또 어떠한가. 대부분 50대 나이로 학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라 그런지, 모두 글에 품격이 있었다. ‘그렇지, 글을 쓰려면 딱 이렇게 써야지’하는 ‘餘滴여적’(여록=학자나 언론인들이 틈틈이 쓴 심심풀이 잡문이랄까. 지금도 경향신문엔 ‘여록’이라는 고정칼럼이 매일 실린다)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씩 읽은 글도 있었고, 철학자 박종홍 교수의 <길>은 흥미로웠다. ‘길’이 어찌 길way일 수만 있는가? 길은 말씀word이고 방법method이기도 한 것을. 길의 중의적인 의미를 철학적으로 풀어놓아, 깊기가 있기에 지금 어디에 실려도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살아온 지식인들의 고뇌어린 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희로애락들을 맛깔스럽게 풀어내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무엇보다 갈피갈피마다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들이야말로 ‘골방 샌님’이 아니고 멋을 아는 풍류맨들이었다. 53년 휴전협정으로 분단이 고착화된 지 10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문학평론가 이하윤 교수가 쓴 당시의 신조어 <失鄕私民>을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글쟁이 의사였던 김성진 교수의 <變節한 五倫>의 한 대목을 보며, 작금의 세태와 사회윤리와 비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君臣有義는 民主絶이요, 父子有親은 三八絶이며 夫婦有別은 解放絶이고 長幼有序는 同侔絶이며 朋友有信은 思想絶이라”는 才談은 무슨 뜻인가? 군신유의야 민주정치로 전환되었으니 충성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부자유친, 즉 효도는 어떠한가? 38선만큼 단절되었다는 뜻이다. 부부유별은 해방 이후 洋風양풍이 몰려와 부부의 엄격한 에티켓이 많이 흐트러졌고 남녀관계가 문란하게 되지 않았던가. 장유유서는 말할 것도 없다. 선생을 同接親舊동접친구로 아는 세상이 됐음을 개탄하고 있다. 붕우유신의 경우, 친구간에 배신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김교수는 “倫理敎育을 徹底히 하고 道義心을 昻揚하여 무너져가는 五倫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며 글을 마쳤다. 이제 와 오늘날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일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영국의 석학 토인비나 버트란트 러셀도 한국의 오륜문화를 얼마나 상찬했던가.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이런 얇지만 귀한 책을 통하여 옛사람들의 일상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소장하고 있다면 책값도 솔찮을 듯하다. 20-30년 후에 법정스님의 수상록들을, 우리 손자세대들은 어떤 마음으로 읽을까 궁금하다. 그때쯤이면 ‘활자문화’는 완전히 거去하고 100% 디지털 세상이 되어 있을까? 모를 일이거니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닐 듯하지만, 왠지 나는 그것이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