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9월의 뜻밖의 무더위가 계속됩니다.
곧 있을 여신도 대구연합회 총회 때도 이렇게 더우면 시설이 미비한 우리 교회에서의 행사가 걱정이 됩니다.
또 준비 관계로 지체들이 고생하는 것과 총회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불편을 줄까 마음이 졸입니다.
순적한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저희들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오늘 토요 복생반 모임이 있습니다.
소수로 모일지라도 주님 주시는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본문 주해)
1~3절 : 성벽이 재건되고 성문이 완성되고 문지기들로 이를 지키게 한다.
그리고 7월 1일(유대종교력의 신년, 나팔절)이 되자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백성들이 모여서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니, 이는 지도자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원하여 율법책을 읽게 한 것이다.
4~6절 : 에스라가 연단 위에 서고 좌우편에 지도자들이 나누어 선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앞에서 책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선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니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하면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모일 때 이런 방식으로 한다고 하는데, 이는 말씀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7~8절 : 에스라가 낭독하고 나면, 그 뜻을 레위인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율법을 낭독할 때에 히브리어로 낭독을 했다면 그 당시 통용되는 아람어로 통역을 해 줄 수도 있고 또는 그 뜻을 해석하여 준 것이다.
9~12절 :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운다.
그것은 자기들의 죄가 책망을 받았기에 우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던 자신들의 삶에 대한 회개였다.
그러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오늘은 울 날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성일임을 가르쳐 준다.
칠월 초하루는 나팔절이요, 나팔을 부는 이 날은 여호와의 성일이기 때문이다.(레23:24)
그래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 못한 사람들에게는 나누어주라고 한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여호와의 일을 십자가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다.
이것은 에스라가 읽어주고 레위인들이 해석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묵상)
성전을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달고, 문지기들로 지키게 하였다.
이것은 이제 성전으로서 유다 백성들의 겉모습이 준비된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성전 된 자로서 이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에스라가 낭독해 주는 말씀을 듣고, 레위인들을 통해 말씀 해석을 듣고,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 묵상이다.
나는 오늘의 말씀이 주어지면 세 가지 번역을 먼저 본다.
원래 보는 개역개정과 공동번역과 새번역이다.(때때로 쉬운 성경이나 현대인, NIV도 보기도 한다.)
개역개정은 성경을 읽는 맛이 난다. 쉽게 풀어준 성경도 좋지만, 개역개정만이 가지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
공동번역은 실감나게 표현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매우 사실적인 것 같았다.
새번역은 현시대와 맞게 잘 번역된 말씀이라고 들었기에 빠뜨리지 않는다.
해석은 꼭 해야 할 할 중요한 과정이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복음적인 해석-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주해를 찾아서 본다.
대체로 세 가지 주해서(목회자 세 분의 설교 원고나 주해를 참고)를 읽고,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요약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가히 소경이 눈을 뜨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 통독이 주지 못하는 ‘보물 캐기’이다.)
그렇게 해석이 될 때 이미 나는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말씀들이 나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묵상’의 과정이 필요하다.
캐낸 보물이 그 목사님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묵상은 내 감정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는다.
과거에 큐티를 할 때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 되었었다.
그래서 힘이 나면 결단, 결심이요, 힘이 없으면 자기연민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다독여주기 위해 맨 마지막에 기도로 하나님을 부를 때만 하나님을 등장시킬 뿐이다. 이러니 맨날 큐티를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주님 중심의 ‘말씀 묵상’이 아니라, 나 중심의 ‘자기 묵상’이었는데 그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고 그저 열심히 ‘큐티’를 한 것이다.
(말씀 묵상이든 큐티든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중심인가, 나 중심인가에 따라 그 은혜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리고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읽고 해석하고 깨닫는 모든 과정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큐티를 열심히 하던 시절, 그만큼 열심을 내던 종교생활에서는 나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했었다. 가끔씩 잘못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고,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정도로 여기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런데 말씀 묵상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말씀에 비추인 내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 모습인지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내 노력(반성)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를 왜 부르는지 알게 되었다.
구원받기 위한 죄사함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 나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에 연합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때가 목사님들이 캐내어 주신 말씀의 해석이 나의 보물이 되는 순간이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동안 자기들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이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울음을 이해한다.
말씀 묵상을 하는 동안 내 책상 위에도 눈물 콧물의 휴지가 곧잘 수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울음은 이내 기쁨으로 바뀐다. 주님의 보혈이 나를 덮으면, 눈물로 시작했지만,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울지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는 말씀도 완전 이해가 된다.
나의 진정한 기쁨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라는 사실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감은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은혜이다.
날마다 아버지 품속의 그 평강을 누리니, 나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자, 영원에 잇댄 삶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게 하시고,
해석된 말씀을 알게 하시고,
그것이 나의 말씀이 되도록 꼭꼭 싸서 선물로 안겨주십니다.
그것도 매일!!!
울음으로 시작하지만 기쁨으로 마무리되니 주님만을 기뻐합니다.
제 삶의 힘이 주님께 있음을 새 마음으로 고백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아침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 성령님,
장차도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