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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성경은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증거합니다(삼하 11:27).
이는 자기의 죄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한 죄요, 또한 밧세바를 범한 간음죄를 덮기 위하여 행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는 단순히 간음과 살인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였으며 또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죄악 중에 죄악이었음을 압니다.
그러한 죄는 다윗만 아니라 오늘 나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연약합니다.
죄를 보고 주님이 두려워서 피하거나 도망해야 함에도 그 죄를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다가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교만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크신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지금까지 내가 지은 죄를 계수하면 과연 셀 수나 있겠는지요?
죄의 깊이와 넓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만 보면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지만 또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오늘도 그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내가 지은 모든 죄를 합한 것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기에 그 모든 죄를 덮으신 것임을 믿습니다.
크기나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의 대속의 은혜가 모든 만물을 덮고도 남음이 있기에 그 덮으심의 은혜 안에 거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습니다.
셀 수 없는 은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앞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서형섭목사 수술 후 회복이 잘 되도록 성령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8:13-18
제목 : 이에 크게 기뻐하며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 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7월 1일 나팔절에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고 레위 사람들이 그 율법의 말씀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하며 울 때,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 위에 임한다.
“오늘은 성일이니 근심하거나 울지 말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그 이튿날 족장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더 깊이 알고자 에스라에게로 왔다.
율법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7월의 절기에 초막에서 거하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에게 공포하기를 산으로 가서 감람나무와 들감람나무 그리고 화석류나무나 종려나무의 가지를 갖다가 초막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이런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지붕, 뜰 안, 성전 뜰, 수문 광장,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모든 백성들이 이같이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였는데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을 처음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한 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이 초막에 거하며 절기를 지킬 때 에스라는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8일째 되는 날은 규례에 따라 성회를 열었다.
기쁨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공자 왈,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즉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깨달음의 기쁨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물 안에 있는 학문도 그 도의 깨달음의 기쁨을 이처럼 죽어도 좋을 정도로 표현한다면, 만물 위에 있는 존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야 두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정착하는 시기인 여호수아 때로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를 거쳐 귀환하여 성전 공사와 성벽 공사를 마무리 한 지금 시점까지 가장 큰 절기라 할 수 있는 초막절을 지키지 않았다.
율법책이 있고 종교 지도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팔절 이후 율법을 더 깊이 알고자 에스라에게 모여 율법책을 보다가 초막절에 대한 말씀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초막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 머문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초막절을 지켰다.
그럴 때 그들에게 임하는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복음의 최종 단계는 기쁨이다.
그래서 몰트만 교수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기쁨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 즉 기쁨이다.
물론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품에 안길 때 누리는 그 나라를 묘사하지만, 그 나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적 나라로도 임하는데 거기에 의와 평강과 기쁨이 임한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로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말씀을 듣고 작은 깨달음이 오게 된다.
점점 말씀에 대한 깊이가 깊어지면서 주님을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이 알게 되고 참된 복음을 알고 깨닫게 되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그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역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만지심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고 그 심판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육은 고통을 받는다.
문제는 이 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 심지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자기에게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을 피하거나 해결하려고 애쓰거나 몸부림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그러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 애처롭게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알 수가 없다.
부르짖어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에 또 같은 상황이 오면 그런 사람은 똑같이 부르짖어서 응답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신앙이요 믿음이라고 착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적인 신앙에 불과하다.
주님은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러나 이 고통이 새 언약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임을 안다면 그 무덤과 같은 고통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고 부르짖기보다 오히려 잠잠히 그 무덤 속으로 말씀과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진장한 복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신다.
물론 무덤의 상황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있는 죄의 허물, 몸에 배여 있는 습관적인 죄의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말씀 안에서 ‘주님의 심판이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면 그 안에 자신도 알 수 없는 평강이 임한다.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 과연 옳다고 인정하는 고백을 하게 한다.
중심에서부터 나온 이 고백은 불의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를 다시 하나되게 하여 의를 세운다.
(시 94:15)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사 26:8-9)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무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렇게 세워진 의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편, 아버지 품에 거하게 된다.
이런 의의 결과 하나님은 평안을 주신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처럼 관계가 회복되어 아버지 품에 거하는 자는 참된 평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참 기쁨은 바로 그곳에만 있다.
아버지 집이요 아버지 품인 그 나라, 창세전의 세계에만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거하시던 그 곳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얻고 누리고자 애쓰며 노력하는 이 세상은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으로 항상 가득하다.
그러나 기쁘고 참된 평화는 바로 그 곳에만 있다.
(찬송 491장 3절)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내 주여 내 맘 붙드사 그곳에 있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던 날 아들이 누리는 기쁨의 충만함을 잠언 8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잠 8:30-31) 내(아들)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창조사역에 동참하시면서 얼마나 좋았는지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며 즐거워하며 기뻐 뛰노셨다.
그런 주님께서, 주님과 함께 주의 말씀을 듣고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생명과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잠 8:34-35)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복음을 깨닫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다.
그러나 깨닫는 것에 머물게 되면 그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 또한 야곱의 우물이 되어 또 다시 목마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면 그 안에 영생이 있고 다시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항상 주님과 함께 거하므로 참 기쁨의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기쁨이다.
복음의 공동체, 영생의 공동체가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것이다.
(요일 1:3-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나는 복음을 알기 전, 땅의 기쁨으로 채우려고 애쓰던 자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뿐, 항상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땅의 것, 육신의 일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는 무상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무상성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던 자였다.
더 높아지려 하였고, 더 많이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였으며, 더 잘 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자였다.
정말 내가 맡은 일은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자 최선을 다하여 수고했다.
물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고 기쁨은 잠시 뿐 오히려 내적으로 환난과 곤고가 임할 뿐이다.
그 당시 나는 복음을 잘 몰랐으며,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음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복음대로 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비참한 환난과 곤고가 임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나는 나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다.
“그래,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자기주장의지’요, 그 결과 환난과 곤고가 오는데 그 또한 사망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선한 일, 주의 일을 하여 이룬 결과에 대하여 내가 그 영광을 다 받아 버리는, 그래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내가 철저히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는 복음을 알고 깨달아 거기로부터 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깨달음의 기쁨, 이것은 정말 큰 기쁨이다.
오죽했으면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그동안 자기가 고민하던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면서 ‘유레카’, ‘나는 깨달았다’를 외쳤을까?
그러나 아무리 그 깨달음의 기쁨이 클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또 다른 깨달음을 찾아야만 한다.
진정한 기쁨은 말씀의 깨달음을 초월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지면서 누리는 그 나라의 영광이다.
비록 우리는 크로노스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있지만, 하늘의 기쁨은 카이로스의 시간에 항상 현재로 계시는 주님께서 인간의 시간을 뚫고 틈입하여 들어오시는 것이다.
말씀 묵상의 유익은 깨달음의 차원을 넘어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오는 하늘의 기쁨은 땅의 모든 삶을 덮는다.
땅의 고통, 땅의 기쁨, 일상적인 땅의 모든 삶을 삼키는 것이다.
말씀 묵상을 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이 나를 지배한다.
그래서 참 많이 고통스럽고 아프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넉넉히 그 사랑으로 인하여 다시금 그 하늘의 기쁨을 회복할 줄로 믿는다.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인하여서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오늘도 사모하며 그 크신 은혜가 나를 온전히 덮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주의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임을 아오니 나를 심판하시어 오직 주님만 사랑하게 하소서.
주의 소유된 나를 주의 뜻대로 사용하소서.
내 심령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아들의 생명으로 풍성히 나를 채우사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산책을 하면서 보니 태풍 야기로 인한 상흔이 온 데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복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 상흔이오니 주님의 은혜로 속히 회복되게 하소서.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 이 심령이 가난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영광을 보며 날마다 하늘의 기쁨 안에 거하는 자 되게 하소서.
나도 알지 못하는 평안과 하늘의 기쁨이 땅의 것으로 일희일비하는 나를 덮으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이 땅과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영생의 삶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