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16일(월)
* 시작 기도
(고후 5:15, 21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죄인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죄로 죽어야 했던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재판장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여 정말이지 면목이 없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나의 힘과 의지로는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오직 우리 주님의 의를 힘입어 담대히 아버지 품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오늘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나의 의로 행하려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9:1-5
제목 :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1/4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1/4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비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 나의 묵상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과 관련해서 1-7장까지 다루고, 8-13장까지는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주도하는 언약 갱신과 개혁을 통한 선민 공동체의 회복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중 9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전 민족적인 회개 기도와 레위인들의 대표기도 및 하나님께 찬양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6-31절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 찬양 안에는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참으시면서 끝까지 당신이 체결하신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32-38절은 이스라엘의 현재적으로 처해 있는 형편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레위인들의 기도를 담고 있다.
1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그 달’이다.
그 달은 바로 앞장인 8장에서 지켰던 나팔절과 초막절이 있는 7월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나팔절과 초막절에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여 듣고 깨달은 말씀과 함께 그동안 잊고 살았던 초막절 절기를 다시금 회복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 중요한 일이 있었던 7월에 오늘 9장에서 ‘그 달’이라고 기록하면서 같은 달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을 것을 미리 예고하고 강조하는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나팔절은 유대력으로 7월 1일이며 그 달 10일의 대속죄일과 15일의 초막절을 예고하여 준다.
특히 나팔절은 우리의 음력 설날과 같이 유대인들의 새해인 설날에 해당되며, 이 나팔이 울려퍼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그 달 스무나흗 날’은 7월 24일로써 초막절 절기가 15-21일까지 7일간 지켜지고 그 다음날인 22일은 큰 날로써 거룩한 성회를 열었다(8:18).
사실상 초막절이 끝난 때는 22일이다.
따라서 본문의 24일은 초막절 절기가 끝이 나고 하루가 지난 다음 날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에 에스라에 의해 율법책이 낭독될 때 그들의 죄를 통회자복하였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이르기를 “오늘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일이므로 울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울음을 그치고 초막절을 지키면서 먹고 마시고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기쁨의 절기에 슬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곧 눈물을 그치고 기쁨의 축제를 벌였다.
만약 초막절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면, 단지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절기를 지킨 것 외에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 1절은 ‘그 달 24일’을 강조하면서 그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조상들의 죄와 허물을 전 민족적으로 통회자복하는 일과 함께 출애굽 등 이스라엘에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불의한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갱신하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영적으로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초막절과 24일에 이어진 집회에서 선포되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이 말씀이 어떻게 실재가 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들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는 7월 24일에 예루살렘에 모여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다.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썼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원문상 정확한 해석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식하는 가운데 굵은 베를 입고 머리에는 티끌을 뒤집어 쓴 채로 모여들었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그들의 삶의 처소에서부터 회개의 모습을 취하면서 모여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에 한 자리에 모여서 이런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초막절 절기가 끝나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그 자리에서부터 회개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초막절인 기쁨의 절기를 지내는 동안에는 큰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보냈지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곧 회개의 놀라운 역사가 그들의 삶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회개의 역사가 이미 그들의 삶의 처소인 집에서부터 시작되어 금식과 함께 굵은 베를 두르고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면서 예루살렘으로 24일에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회개를 결단하는 의미로 가장 먼저 행한 일이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는 것은 그저 일상적인 삶이나 만남을 단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에스라 10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들을 낳고 살았던 것을 말하고 있다.
(스 10:2-3)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따라서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시고 제사장 나라로 쓰기 원하시는 성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는 것이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멸시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구별된 거룩성 회복을 결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자기와 조상들의 죄와 허물을 통회 자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자신들과 조상들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졌고 그 결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 자신들은 조상들의 그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또 조상들과 동일한 죄 가운데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느헤미야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타버리는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그들은 자신들과 조상들의 죄와 허물을 통회 자복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낮 1/4은 그 제자리에 서서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또 낮 1/4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밤과 낮으로 구분한다.
밤은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낮은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들은 밤과 낮을 각각 4등분 하였다.
따라서 낮 1/4은 12시간의 1/4에 해당하는 3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새벽 6시부터 오전 9시까지 서서 율법을 낭독했으며, 또한 오전 9시부터 정오인 12시까지는 낭독한 말씀에 근거하여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다.
한편 이들이 ‘서서 율법을 낭독했다’는 말은, 회집한 모든 이들이 각각 율법을 낭독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면 레위 사람들이 그 말씀을 해석해 주는 것을 백성들은 그 자리에 서서 들었음을 의미한다.
말씀을 서서 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4-5절에 나오는 명단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레위 사람들로써 이들은 레위인들 중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으며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촉구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나의 삶에 실제화 시키지 못하고 말씀 따로 삶 따로 그렇게 살아온 자였음을 고백한다.
말씀의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머릿속으로만 인정하였을 뿐 삶으로 실제화 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항상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곤 하였다.
이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육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넘어지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뜨거워져서 새롭게 살기로 결단하지만 그 결단은 이내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거품이 사라지듯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삶의 연속이었다.
수련회나 부흥회 등에서 은혜를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얼마나 많이 결단하고 또 결단했던가?
물론 그 마음은 참 귀하다.
그러나 육신이 연약한 나는 내 의지로 그 결단을 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육신의 정욕과 유혹에 넘어져 일어날 힘조차 없이 쓰러지곤 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죄의 문제와 옛 사람의 문제는 십자가로 해결해야 됨을 알면서도 나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죄를 진심으로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진리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하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에도 다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이런 죄 씻음의 행위를 한다.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런 행위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나는 그들과 다름없는 종교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건 둘 중 하나다.
복음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됐거나...
그런데 복음이 가짜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 길을 내가 막고 서서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죄를 끊는 능력이 있는 십자가를 내가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 십자가에 내 자신을 못 박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유혹을 십자가에 못 박기보다 은밀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표리부동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 없이는 생명으로 살 수 없는 자임을 안다.
마치 발람과 같이 속에는 음흉한 의도를 품고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처럼 행동하는 그런 자를 하나님은 심판하셨고 또 오늘도 심판하신다.
심판을 통하여 의를 세우고 의의 결과 화평을 누린다.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러나 불의한 나는 그 심판 안에서만 의가 세워짐을 알기에 거부할 수 없다.
이제는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의 은혜가 오늘도 임하기를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불의하고 비참한 나를 심판하시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찬양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빛이 내 안에 가득하여 그 빛으로 모든 삶을 덮게 하시고 죄로 죽었던 자가 다시 주 안에서 살게 하소서.
이 종을 구하시고 오늘도 주의 발치에 앉아 홀로 주의 말씀을 얻어먹는 자 되게 하소서.
오늘의 일용한 양식이 바로 주의 말씀이오니 그 말씀 앞에서 반응하게 하소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