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산과 의미가 다른 기이한 산이다. 그 산의 높이와 웅장함으로 치자면 보잘 것 없으나, 풍수지리적 의미가 깊다. 지리산과 경주에 이어 세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 된 것 역시, 풍수지리적 가치와 각종 종교단체와 무속인들로부터 계룡산의 신록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계룡산은 작지만 밀도 높은 수려함과 암릉미로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알려졌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라 하여 제례를 올렸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는 고려 기득권층과 단절하고자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했다. 무학대사는 신도안에 와서 계룡산의 산세를 보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다”고 태조에게 고했다.
풍수지리학에서 ‘금계’는 부의 상징이며, ‘비룡’은 현명한 군주를 뜻한다. 따라서 이곳에 도읍하면 지혜로운 군주가 나라를 다스려 풍요로운 태평세월을 맞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무학대사는 금계의 ‘계’와 비룡의 ‘룡’을 따서 계룡산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계룡산의 풍수학상으로 두드러진 표현에는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과 회룡고조(回龍顧祖)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지리산(自智異山) 역룡삼백리(逆龍三百里) 회룡고조”에서 기원한다. 즉 지리산에서 출발한 산의 줄기가 거꾸로 북상해 3백리를 올라가 계룡산에서 다시 동남으로 약간 남하하는 형국으로 되어 자기의 근본을 돌아보는 모습을 뜻한다는 것이다. 태극(太極)·용세(龍勢)가 머리를 돌려 근원을 돌아보는 고조(顧祖)의 형세라는 것이다.
(정종수의 논문 ‘계룡산과 신도풍수’)
한마디로 대길지(大吉地)다. 그래서 무속인들은 입을 모아 계룡산은 영험한 기운이 강하다고 말한다. 예부터 나라의 산신제를 계룡산 중악단(中嶽壇)에서 지낸 것이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성리학이 득세했던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지었다. 명성황후는 몰락하는 조선의 운명을 토속신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나라의 산신제를 올린 곳이라기엔 실제 중악단은 초라하다. 조선 마지막 왕비의 애절한 염원이 스며있는 곳이건만, 왕조의 몰락과 함께 과거의 명성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신원사 경내에 자리한 중악단은, 어찌 보면 소박한 신원사와 고요한 조화를 이루며 깊은 잠에 빠진 듯하다.
중악단에서 안전 산행을 기원하고 본격적으로 입산한다. 산행에 동참한 이는 청주의 홍일표(45세)씨와 김재권(41세)씨다. 홍일표씨는 산이라면 환장하는 청주의 산꾼이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산으로 달려가는 탓인지, 며칠 전 그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접었다. 그 쓰라림을 도닥이기 위해 다시 산을 찾았다.
김재권씨 역시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전국의 산을 누비고 다닌다. 그러나 그는 “산 보다 사람 때문에 산에 간다”고 말한다. 어느 산을 다녀와도 풍경은 기억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한 사람만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그는 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함께 하는 이들의 유대감을 즐긴다.
조선의 멸망을 예언한 신비로운 글귀
계곡 따라 난 길을 얼마간 오르자 고왕암(古王庵)이다. 고왕암은 삼국시대 나당 연합군에게 쫓긴 의자왕의 아들, 백제왕자 융이 숨어 있다가 신라에 항복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근처에는 마명암 터가 있는데, 융왕자의 말이 그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 암자에 와서 슬피 울다 죽었다고 해서 ‘말 울음’이란 뜻의 마명(馬鳴)이라는 이름이 연유한다. 현재 마명암은 흔적만 남아 있다.
고왕암에서 약수로 목을 축이고 계곡 따라 난 길을 얼마간 오른다. 작은폭포다. 아담하고 고운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내린다. 이후부터 경사가 세다. 잡념 따윈 꿀꺽 삼켜버리는 경사다. 거친 숨을 한 번 더 몰아 목재 계단을 확 쳐 오르자, 연천봉고개다. 계룡의 능선에 다다른 것이다. 고개는 연천봉(連天峰)과 문필봉 사이의 사거리 안부다. 여기까지 왔는데, 연천봉을 빼놓을 수 없다. 계룡 팔경 중 3경이 연천봉 낙조라 하지 않았던가.
봉우리가 하늘에 이어졌다하여 붙은 이름처럼, 땀 값 하는 속 시원한 경치다. 특히 관음봉으로 이어진 암봉 줄기와 천황봉과 쌀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장관이다. 영 눈에 거슬리는 건, 역시 천황봉 정상을 차지한 중개탑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연천봉 바위엔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惑禾生)’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서울신문에 실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계룡산에서 신비한 각석문자(刻石文字)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여러 해 동안 아무도 해석을 못하다가 드디어 한 가지 해석에 도달했다. 풀이하자면 ‘방(方)’은 4방이요, 글자도 4획이라 ‘4(넷)’를 뜻한다. ‘방백(方百)’은 ‘사백(400)’이라는 숫자가 된다. 옛날에는 말 ‘마(馬)’자와 소 ‘우(牛)’자를 같이 쓰면서 ‘8(팔)’을 의미했고, 짐승의 뿔(각·角)은 두 개인지라 ‘각(角)’자는 ‘2(둘)’를 뜻했다. 따라서 ‘마각(馬角)’은 ‘82’를 일컫는다.
‘구혹(口惑)’은 나라 ‘국(國)’자, ‘화생(禾生)’은 ‘옮긴다’는 뜻의 ‘이(移)’자가 된다. 따라서 모두 합해보면 ‘482년 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옮겨간다면 망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조선은 개국 482년째 되는 1874년에 망한다는 뜻이다. 조선은 이보다 37년을 더 지탱했으나 얼추 예언이 맞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연천봉 아래 등운암 구경을 잠깐하고 관음봉으로 향한다. 문필봉 주능선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우회로를 탄다. 문필봉(文筆峰)은 네 자루 붓을 세워 놓은 형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관음봉엔 정자가 있어, 쉼터로 제격이다. 금세 어둠이 내린다. 동학사 계곡의 불빛이 골짜기를 밝힌다. 관음봉 정자에서의 비박, 바람이 산에 남은 인간들을 삼켜 버릴 듯 앙칼지다.
천연덕스레 맑은 아침과 걸맞지 않게 바람은 여전히 세차다. 바위 전망대에선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다. 덕택에 금세 땀이 마른다. 철계단 지나 삼불봉으로 이어진 자연성릉, 실로 자연성릉이란 이름에 걸맞게 신이 빚은 바위 성이다. 동쪽으로 30미터 넘는 직벽을 이룬 것이 장관이다.
삼불봉은 천황봉이나 동학사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세 부처의 형상이라 하여 삼불봉(三佛峰)이다. 삼불봉 정상이니, 부처님 머리 위다. 미련한 중생들이 부처님을 타다니, 계룡 특유의 영광이다. 삼불봉은 풍수상으로도 계룡의 봉우리 중에서 으뜸이다.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쌀개 능선이 남쪽으로 서있다. 천황봉의 본래 이름은 상봉이었으나, 80년대 초 계룡산의 높이를 수정하면서 최고봉의 상징으로 천황봉(天皇峰)이라 이름 붙였다. 허나 천황봉이란 이름은 진부하고 인위적이며 일제 분위기까지 베여 있어, 등산인들에겐 그다지 내키지 않는 산 이름이다. 오랫동안 불려온 상봉이란 이름이 훨씬 서민적이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색욕을 이겨낸 도행의 기념탑
삼불봉고개를 내려서자 탑 2기가 오붓하게 서있다. 그 유명한 오뉘탑(남매탑)이다. 유서 깊은 계룡산답게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한 스님이 토굴을 파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목이 아픈 시늉을 하여 보니 큰 가시가 걸려 있어 뽑아주었다. 며칠 뒤 호랑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엎고 와 놓고 갔다. 은공에 보답하는 것이었다. 처녀는 경북 상주 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밤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마침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한 겨울이었다.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자 수도승으로써 남녀의 연을 맺을 수 없기에 처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처녀의 부모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낼 수도 없고 인연이 그러하니 부부의 예를 갖추어 주기를 바랬다. 이에 스님은 고심 끝에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써 불도에 정진했다. 이후 한날한시에 열반에 들게 되자 이 두 남매의 정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워 두 스님의 사리(舍莉)를 봉했다. 그 탑이 보물로 지정된 청량사지 5층 석탑과 7층 석탑이며, 두 탑을 오뉘탑이라 부르고 있다.
오뉘탑이 있는 상원암 터는 평지라 한 숨 쉬어간다. 동학사로 이어지는 길, 큰배재로 넘어가는 길, 삼불봉으로 오르는 길이 닿은 삼거리다. 등산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남매탑고개 넘어 상신리 갈림길 지나니 큰배재 삼거리다. 장군봉 줄기로 들어선다. 이후부터는 조용하다. 신선봉과 장군봉을 잇는 줄기는 높이가 낮고 경치의 화려함이 상대적으로 삼불봉이나 관음봉에 비해 떨어져, 비교적 한적한 산행이 가능하다.
신선봉은 별다른 표지석이 없어 지나치기 쉽다. 다만 우회로를 버리고 주능선으로 갈라치면,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쉬운 것 같기도 한 암릉이 있다. 리지를 타는 것도 아니고 육산을 밟는 것도 아닌 애매한 코스다. 그러나 갓바위는 위험해 우회한다. 등산로를 따라 가다 보니 어느덧 우회로로 이미 가고 있다.
지석골 갈림길엔 알림판이 있다. 장군봉 코스는 험해서 체력소모가 크니 지석골로 바로 하산하길 권한다는 내용이다. 어쨌든 지정 등산로이기에 통행금지가 아닌 하산하길 권한다는 얘기다. 김재권씨와 홍일표씨는 나름대로 산행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개의치 않고 직진한다.
암봉이다. 장군봉은 아니다. 고정로프를 붙잡고 용 써가며 오른다. 내려서면, 다시 암봉이다. 장군봉은 아니다. 일단 오른다. 내려서면 다시 암봉이다. 이쯤 되면 암봉을 오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진다. 장군봉은 인내력을 기르라고 딱딱하게 속삭인다. 장군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암봉을 오르자, 이번엔 장군봉이다. 정상부는 비교적 터가 넓어 쉼터로 좋다.
계룡의 기암 선경을 마지막으로 담아둔다. 계곡을 뒤 덮은 신록의 푸름이 용의 비늘마냥 꿈틀거린다. 갑자기 강풍이 분다. 다리에 힘을 줘야 밀리지 않을 정도다. 계룡이 기를 모아 장풍을 날렸나 보다. 기분 좋은 장풍이다. 병사골 하산길. 바로 아래에 박정자 삼거리가 보인다. ‘박정자’가 혹시 사람이름과 연관된 지명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실은 예전에 이곳에 밀양 박씨가 많이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 오가는 사람이 쉬어갈수 있게 해서 ‘박정자 삼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징소리다. 어디선가 굿을 하나보다. 병사골 매표소와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더 커진다. 마침 계곡에서 굿을 한다. 어떤 굿인지 알 순 없으나, 구경꾼 하나 없는 그들만의 진지한 굿판이다. 신기해서 잠깐 구경한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계곡과 굿의 분위기가 어울려 음산하다. 국립공원 내 굿판은 불법이지만 그냥 지나간다. 전설 많고 사연 많은 계룡산, 저들도 사연 많은 사람들일테다. 매표소를 지나자 김재권씨가 인사한다. “산신 할매, 저희 갈께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