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반가운 이름을 듣는군요. 제임스 클라벨, 정말 시체말로 오다가다 알게 된 작가인데 이 양반의 <킹렛 - 번역본 제목은 '지배자는 아담이었다.'> 을 읽고 그때 느꼈던 그 뭐라 할수 없는 문화적 충격과 아노미 상태가 떠올라 새삼 기억이 새롭습니다.
나중에 이리저리 알아보니 이 양반은 나름대로 아시아통 이더군요. 열 여덟 어린 나이에 싱가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2차 대전 내내 창이 수용소에 갇혀 죽을 고생을 하는 바람에 일본인들에게 뼈저린 증오심을 갖게 됐지만, 뭐 극과 극은 통한다나 나중에는 일본문화에 열렬한 애정을 갖게 되어 나름대로 일본 전문 소설가가 되었다는 사실들을 접하니, 극동과 극서가 이렇게 재밌게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이다.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들고 많이 생각했죠. 그때 고등어 시절, 베트남전에 대한 이면 이야기와 더불어 동서양이 함께 머리채 잡고 싸우던 시절이 참 궁금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이 책을 알게되었습니다. 세계사 교과서에는 포로로 잡은 뉴질랜드 전투기 조종사의 목을 베는 일본군의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셔터를 몇 초만 더 뒤에 눌렀으면 기냥 알짜리 없는 스너프 사진을 교과서에서 보니 참 기분이 싱숭생숭 하더이다. 그러면서 새삼 일본이 태평양에서 수행한 그 거대한 전쟁의 실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사실, 전쟁사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역사책 부터 보는게 순서겠지만, 재밌는거 쫒는 사람 심리가 그러하겠습니까. 정석은 고등학교 세계사로 됐고 그 다음은...쉬운 소설부터.
뼈하고 가죽만 남아있는 포로들 사진을 보고 또 한번 놀랬죠. 세상에...그렇게 말라빠진 난민들은 아프리카 흑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인들도 있었네...그것도 영국, 미국인? 애개개...
이런 세상에...! 필리핀의 바탄 포로 수용소나 싱가폴의 창이, 태국의 콰이강의 다리...수천명이 죽어간 수용소 얘기야 너무 유명해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걸 처음 접했을적의 심정이란, 참, 내가 딴 세상에 갔다 온 것 같더이다.
다른 세상에 다녀왔다....이건 이 소설 <킹 렛>을 보고 난 다음의 내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겁니다. 사실, 이 책은 일본군의 포로수용소 얘기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 갇힌 미국인, 영국인의 얘기가 주를 이루죠. 횡축이 어떻게 이 지옥의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느냐에 대한 얘기라면, 종축은 미국인과 영국인의 문화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전쟁소설도 되지만, 문화인류학적으로도 분석해 보면 꽤 많은 그림이 될 것 같은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가끔 등장하는 영국식 유머와 미국 쌍것들을 비웃는 듯한 위트들은 참 재밌습니다. 그러다가 결론부에서 뒤집히는 미국문화에 대한 - 아니 그것으로 비견되는 서구 문명사회에 대한 평온한 안온감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참 뒤숭숭하게 하죠. 그것도 저처럼 소위 동양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는.
어쨌든 무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쾌함은 사실 등골 서늘한 아이러니에서 온 겁니다. 이 작품은 전쟁소설이지만, 군인의 무용담을 다룬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굶어죽기 직전인 사람들, -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닌 수천명의 사람들 - 의 얘기였죠. 달걀 하나를 먹기 위해 난투극을 벌이는 나이 지긋한 영관급 장교들 얘기를 웃기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양반 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찌나 실감이 나던지 이 책 읽고 한동안 거식증에 시달렸으니까요.
무지 재밌으면서도 읽는 사람 비참하게 하는 구석도 있습니다. 제가 이걸 친구들에게 권해서 읽게 했는데 저와 같은 심정을 토로하더군요.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고 읽는 내내 킬킬거렸는데, 마음 한 구석 너무 답답하고 비참하더라는. 군발이들은 떼거리로 나오는데 정작 총성 하나 요란한 포성 한 방 없는데도 짙게 그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들,,,아, 그래 이것이 진짜 전쟁이구나 싶기도 했던 그런 심정.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심리가 한 눈에 보여졌던.
한국인들 얘기도 가끔 나옵니다. 특별히 일본인들 입장에서 비하 하거나 그런건 없고 그냥 보이는 대로 썼더군요. 인상깊은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라디오였나? 그거 듣는 미군장교를 잡으려고 하다가 놓쳤을때 일본군들이 화풀이로 한국인 포로 감시원들을 패는 얘기가 나오죠.
뭐 이런 식입니다. 상관에게 무지 깨진 다나카 중위는 소위들을 불러다 패고 그럼 그 소대장들은 하사관을 불러다 패고 그 하사관들은 고참병들을 패고 그 고참병은 졸병들을 패고 그 졸병들은 한국인 감시원들을 때렸다...대충 이런 식이죠. --;;
번역본의 이름이 그렇게 된 건요. 포로들 사이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킹' 상등병이 장교들에게 팔아먹는 스테이크 고기용 쥐의 이름이 '아담'이라서랍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용소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족속에게 '쥐새끼 Rat이라는 별칭이 있죠. 특히 마지막 장면의 '쥐'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감명깊죠
첫댓글 "아담"이라니까... 왜 여고 앞에서 코트 입고 설치는 놈이 생각나던지...
번역본의 이름이 그렇게 된 건요. 포로들 사이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킹' 상등병이 장교들에게 팔아먹는 스테이크 고기용 쥐의 이름이 '아담'이라서랍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용소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족속에게 '쥐새끼 Rat이라는 별칭이 있죠. 특히 마지막 장면의 '쥐'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감명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