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차이점(성전)
갈렙 목사님의 글
성전을 헬라어로는 "히에론", 영어로는 "temple" 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옮기면 "신전" "사원" "절"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신에게 제사하는 신의 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성전이 있었는데 그 성전(혹은 성막)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위시한 각종의 제사들을 드렸으며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전이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본래 성막이라는 간편한 이동식으로 건조된 것이었는데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웅장한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그 크기는 달라졌지만 그 구조나 용도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이 성전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써 그 터가 일찍부터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지명되어진 곳이었습니다.
"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저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지고..."(신12:11)
이곳은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바로 그 모리아 산이었으며 다윗이 재앙을 만나 제단을 쌓았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여기에 솔로몬이 성막을 본떠서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이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3:1)
이 장소외에 어떤 장소에도 성전을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 뿐이지 여러개를 세울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대대로 이스라엘에게는 모세와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엄청난 자랑거리요,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성전이 자기들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이었기 때문에 성전을 가운데 모시고 있는 저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외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와서도 그 자리에다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성전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0여년의 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함께 모여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러한 성전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겐 보통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는 본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야 하는데 그 곳에는 이슬람종교의 오말 사원이 들어서 있기 때문인데 이 문제로 인해서 전 세계가 당하고 있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중동문제의 핵심에 바로 이 성전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질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 보다는 훨씬 평화로워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은 아직도 구약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안목이 없습니다.
이제 기독교에 있어서의 성전, 즉 신약시대에 이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시대엔 더 이상 건물로 지어진 성전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의 그림자 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실체가 나타났으니 이제 그림자는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성전을 자주 찾으셨고 그 곳을 사모하셨으며 정결케 하신 것은 그 건물이 아직은 필요했으며 그 역할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그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고 다 무너뜨리울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건물성전의 시효가 다 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심과 동시에 성전 휘장이 위로 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써 성전의 역할이 더 이상 없어졌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고하게 거기에서 제물을 드리는 일이 계속되자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의 군대에 의해 완전무결하게 파괴가 되어짐으로써 더이상 제사도 없고 국가도 없는 백성으로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그 성전을 그리워하고 그 성전 재건을 위해 힘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성전의 가치성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말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성전을 맨처음 짓겠다고 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와서 한 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 부터 오늘 날 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부러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5-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건물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까지 초라한 성막가운데 거했지만 그것에 불만은 없으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에게 어울릴만한 규모의 성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로인하여 있는 힘을 다하게 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데서 나온 자기 생각의 반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인간의 계산이나 생각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집을 제대로 지어드릴 바에야 우주보다 큰 집을 지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알았습니다."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6:18)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집을 지어드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넌센스이겠는지요. 그러나 솔로몬은 부왕의 유언을 들어들여야 했을 것이고 그로인해 그것은 이스라엘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형과 그림자로써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 역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사66:1)
이스라엘이 진정한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에 건물 성전을 지으려는 일이 헛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 세계 평화는 성큼 닥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카운 일은 한국교회에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당을 지으면서 "성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다윗에게도 허락지 않은 성전건축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고 감격스러워하니 도대체 한국 교회는 아직도 구약교회에 속하여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어드릴려면 성전답게 지어야 합니다. 성소와 지성소와 뜰을 갖춘 성전을 지어드려야 하고 무엇보다도 택한 한 곳인 예루살렘에 지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각종 짐승을 잡아 피를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조나 용도는 전혀 없으면서 한반도 아무 곳에서나 건물들을 지어놓고는 "성전" "성전"하니 엄연히 거짓말인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자"는 것과 "성전을 짓자"는 것이 교인들에게 전달되는 어감이 다르기 때문에 굳이 성전이라는 용어를 애용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배당은 거대하게 지을 필요가 없는 반면 성전이라면 그 이미지가 거대하고 화려하기 때문이지요. 한국교회는 성전개념을 다시 한번 확립해야 합니다.
건물 성전은 <히에론>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가 되면서 이 히에론 성전의 모든 기능은 폐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건물성전 <히에론>은 이제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할 성전은 이제 건물 성전 <히에론>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요, 성도의 몸인 <나오스>성전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나오스>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나오스>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21) 이 나오스 성전안에서 하나님을 뵙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물성전을 짓고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겟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스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또한 성도들 각자의 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바로 성도의 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나오스)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나오스)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성전은 또한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전인 성도들이 모여서 거대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해 가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오이코스:집)이 되어가고 ..."(엡2:21)
이처럼 예수님이 성전이고, 성도가 성전인데 차디찬 벽돌로 지어놓은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신성시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예수님이나 자기 자신이 성전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또 아직도 기독교를 이교들중의 하나같은 종교로써 생각하는 소치가 아니겠는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믿어야 하며 또 그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건물속에 거하시는 것으로 안다면 일반 귀신들의 신사(사당)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 하나를 보더라도 한국교회는 아직 구약에서 덜 깨어난 교회라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 속히 깨여나 올바른 신약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댓글 모음>
paullee: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성전이 되기위하여 첫째 법궤(하나님 말씀)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저야 합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금촛대(성령)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불로 밝혀야 합니다. 성령은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이신 하나님의 상징이기 때문 입니다.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성령님의 조명속에 거해야 합니다.
셋째.분향단(기도)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향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1시간을 기도하면 자기자신을 이기고,2시간을 기도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고 3시간을 기도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넷째.진설병(사랑) 사랑입니다. 마음속에 진설병을 구비 한다는 것은 우리와 이질적인 사람,전혀관계없는 사람, 원수같은 사람, 미운사람 등...우리주위의 가장 작은자와 불편한 관계를 가진자를 위한 공간을 마음에 확정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같이 사랑하라(마22:29)”“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것이니라(마25:40) 마음에 크나큰 진설병을 지닌자만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성전(potable temple)이 되기 위하여 1.법궤(하나님 말씀)2.금촛대(성령)3.분향단(기도) 4.진설병(사랑) 이 네가지를 마음속에 갖추기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훈련시켜야 하며 이 네가지를 온전히 갖출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전이 된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이며 성전된 성도 개개인이 모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010-5691-0820)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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