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 만난 여성
허봉조
1956년 부산출생, 2008년 <시와산문> 등단, 에세이집 <즐거운 농락> 칼럼집 <행복도 즐기기 나름>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처럼 높게>
중년여성들이 즐거운 기분으로 손주 자랑, 애완견 자랑, 해외여행 다녀온 자랑을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요즘은 여성들의 갈 곳이 무척 많아졌다. 백화점이나 공공도서관, 주민지원센터, 복지회관 등 곳곳에서 주민건강과 교양을 위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진행되고 있다. 마음만 있으면 심심할 여가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제약을 받으니, 단골 미용실보다 만만하고 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여성과 미용실은 떨어질 수 없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다. 모발의 상태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중년여성들은 염색이나 커트, 파마, 두피관리 등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미용실을 찾게 된다. 그런 만큼 미용실은 여성들이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참새방앗간처럼 부담이 없는 곳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세상에 둘도 없이 똑똑하고 귀여운 손주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경쟁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기 바쁘다. 또 누군가 공항에서의 불편했던 경험담을 쏟아내며 은근히 해외여행 다녀온 자랑을 할라치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태며 자신도 다녀왔음을 증명하려하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치와 연예계의 뒷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그렇게 세상사 돌아가는 흐름을 가장 많이 듣고 전파할 수 있는 골목통신의 진원지 또한 미용실이 아닌가 싶다.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나눠먹을 때도 있다. 그러나 특정인을 안주삼아 입방아를 찧으며 키득거리는 것은 듣기에 불편하다. 간혹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원하지 않게 다른 사람의 비밀을 엿듣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두 번쯤이야 다른 사람의 경험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여성이 있다. 검은색 단발의 생머리에 키 크고 늘씬한,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신체적 조건을 갖춘 50대 초반의 주부다. 원장과는 종교적 인연으로, 미용처치가 필요한 손님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한 길손 정도랄까.
그 여성이 미용실에 들어서면 다른 손님들은 안중에 없다.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상담소를 방문한 것처럼, 자신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 보이는 모양이다. 목소리가 크고 말이 빨라, 손님들의 TV 시청은 물론 독서에도 큰 방해가 될 정도다. 원장의 움직임에 따라 세척실로 화장실로 따라다니고, 자리를 옮겨가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다른 손님들이 힐끗거리며 눈짓을 보내는 것도 의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딘가 단단히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의 내용은 남편 또는 시어머니나 친정부모에 대한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복잡한 가정사로 무척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번 같은 내용으로 미용실을 찾는 것을 보고, 원장에게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이 있건 말건 개인의 가정사를 그렇게 오래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뜻으로….
원장의 대답인즉, 감정조절이 잘 안 되는 환자니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말을 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여기서라도 실컷 말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된다.”고 말이다. 원장의 인정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들어주는데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일면식도 없는 손님들 앞에서 우스개처럼 가볍게 들어주고, 농담 같은 야단을 치는 등의 단순한 방법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단계에 온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외롭거나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내용 주고받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실타래처럼 배배꼬인 심사를 풀어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왕 도와줄 생각이라면 일방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불만을 받아들이고, 부족한 부분을 들여다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다면, 전문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다행히 들어주기만 해도 치유가 될 정도라면, 따로 시간을 내어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차분하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도와준다면, 의외로 간단히 치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감정조절 장애도 적극적으로 관리하면 충분히 치유될 수 있는 두통이나 소화불량 같은 일종의 질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치하거나 잘못 관리하다가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가볍지 못하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는 정신질환자들의 돌출행동이 사회를 공포와 긴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미용실에서 만난 그 여성이 궁금해지는 것은 그것도 인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유쾌한 참새방앗간 같은 미용실에도 가끔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일이 있으니, 그렇게 긁히고 부딪히며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리라. 웃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거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지혜도 찾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동네 미용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