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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
1. 다시 니체를 만나다.
2020. 10. 26. 새벽에 41년 전에 먼저 간 위대한 영웅의 추모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추모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1979. 10. 26. 7시 45분경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비명도 지르지도 않고 옆으로 쓰려졌다. 시중을 들던 두 여인이 등판을 손으로 눌렀으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샘솟듯 했다고 한다. 각하 괜찮습니까 하는 물음에 그는 “응 나는 괜찮아”라고 하였고, 이것이 그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신재순씨는 그가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하였다고 표현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세대의 대표선수였다.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입버릇처럼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열심히 살라면서 가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던 1910-30년에 태어난 분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그해 11. 3. 거행된 국장에서 국립교향악단은 리하르트 시트라우스가 작곡한 교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연주하였다. 이는 니체가 쓴 동명의 책 서문을 음악화 한 것인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즉 초인(Übermensch)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더러운 강물을 들이마셔 바다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순수한 영혼을 잃지 않는 사람!
그렇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헤쳐 가면서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지만 최후까지 영혼이 순수하였던 사람, 메끼가 볏겨진 넥타이 핀과 헤어진 혁대와 낡은 세이코 시계를 차고 있어 시신을 검안한 군의관조차 꿈에도 각하인지 몰랐다고 한다.
인간 박정희, 그가 바로 초인이었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같은 전광석화 같은 천재가 아니라 부끄러움 타는 눈물 많은 초인이었다.
오늘이 그가 탄생한 지 103번째 되는 날이다.
그가 떠난 후 많은 사람이 그를 칼질하고 허물어 버리려고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는 큰 바다가 되어 더러운 강물을 정화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진실로 인간이란 불결한 강의 흐름이다. 우리는 결단을 내려서 우선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러워지지 않고 불결한 강의 흐름을 삼켜 버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들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초인이란 그런 바다인 것이다.“
2.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계보
1844. 10. 15. 프로이센 뤼켄에서 출생...1900년 사망
짜라투스트라는 39세때 집필하기 시작. 45세때부터 정신착란으로 투병하다가 사망
근대에서 현대를 만들어 낸 폭약의 뇌관.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고 인간의 삶은 해방되어야 할 동굴이다. 피안의 세계를 연모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생물학전 인간관 다아윈의 아들이고, 유물론적 역사관 마르크스의 동생,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3. 니체 읽기
니체는 다이너마이트이고 니체 읽기는 그 뇌관을 뽑는 일이다.
니체 읽기는 해방된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한 당신의 의무이다.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련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에 맞서라! 더 바람직한 것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 하라!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인식하는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는 나를 숭배한다. 하지만 어느 날 너희의 숭배가 뒤집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신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너희가 짜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짜라투스트라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나의 신도다. 하지만 신도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아직도 찾아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발견했다.
신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모양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것이 하나같이 그렇고 그럴 수밖에.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니체 사상의 핵심은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삶, 철학이다.
디오니소스는 혼돈, 도취, 광란, 해체, 혹은 생을 확대, 고양, 해방시키려 하는 충동으로서 모든 예술 작품의 뿌리에 가로놓이는 원리다.
그것은 생의 거침 없는 표현이며 약동하는 생의 정열이고 생을 부끄럼 없이 표현하는 광란이며 생에 탐닉하는 도취이다.(비극의 탄생).
짜라투스트라, 초인 등으로 나타난다.
4, 권력(힘)에의 의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의 생을 성장, 고양, 강화시키고자 하는 이 디오니소스적 정열 또는 욕구를 권력에의 의지로 표현하다.
힘에 대한 의지는 강자와 약자,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계급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삶이란 결국 이 힘에 대한 의지들이 충돌하는 투쟁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생이 있는 것에 의지도 있다.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노니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 대한 의지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생 그 자체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단지 힘에 대한 의지이다.
일찍이 생이 내게 그렇게 가르쳤다. 가장 현명한 자들이여, 그러므로 나는 그 가르침에 의해 그대들의 마음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리라.”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없다.
너희 역시 힘에의 의지다. 그 외의 아무것도 없다.”
5.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적 관념론(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인간의 정신을 거세하고 동굴에 가두었다.
“진리를 구하는 자라고 그대가?
햇살은 이렇게 조롱했다. 아니다. 시인을 뿐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 알면서도 짐짓 거짓말을 해야 하는, 교활하게 약탈하며,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한 마리의 짐승.
먹이는 노리고, 알록달록한 가면을 쓰고, 스스로 가면이며 스스로 먹이로 삼는 그런 자가 진리를 구하는 자라니.
아니다 . 바보일 뿐이다. 시인일 뿐이다.“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들은 이처럼 진리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거짓말만 일삼는 시인 또는 바보로 표현한다. 이들의 출현으로 희랍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삶은 종언을 고하게 되며, 이들은 이데아라는 엄청난 독을 이 대지에 퍼뜨린 장본인들이다. 이 독으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모든 삶, 모든 존재는 불완전한 것, 경멸스러운 것, 이윽고 사라져버릴 하찮은 것으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플라톤)이 아니라 영혼은 육체의 도구이다.
“육체는 위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가진 복합체이며 전쟁이고 평화이며, 양떼이고 목자이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 부르는 작은 이성 역시, 육체의 도구다.
그대는 ‘자아’라 말하며 그 말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그대가 그것을 믿으려 않지만-그대 자신의 육체이며, 그 육체의 큰 이성이다. 그 큰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하는 것이다."
6. 신과 피안은 약자들이 날조한 유령이다.
“그 신은 인간이었고, 인간과 자아의 초라한 단편에 불과했다.
이 유령은 나 자신의 재와 불길로부터 내게 왔던 것이다. 피안의 세계를 창조한 것은 괴로움이자 무능력이었고, 가장 괴로워하는 자만이 체험하는 순간적인 행복의 광기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필사적인 도약으로 궁극적인 것에 이르기를 바라는 피곤함, 더 이상 의욕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가련한 무지의 피곤함, 그것이 모든 신과 피안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의 것들과 구원의 핏방울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달콤하고 음침한 독까지도 그들은 육체와 대지로부터 날조해 냈던 것이다.”
“유태 청년 예수는 유태인들의 눈물과 우울, 그리고 선하고 정의로운 자들의 증오밖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가 황야에 머물러, 선하고 의로운 자들로부터 떨어져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아마도 그는 삶을 배우고, 대지를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웃음도.
내 말을 믿어라, 형제들이여! 그는 너무 일찍 죽었다. 만일 그가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진하여 자기의 가르침을 취소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취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유태교는 상상력이 풍부한 천민인 유태인들이 신을 날조한 것이다.
기독교는 여기에 협박과 공갈을 섞어 좀 더 생생하고 무시무시하게 다듬어 놓은 드라마에 불과하다.
예수는 국가나 권력을 거부했던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생을 증오했던 타고난 염세주의였다.
7. 도덕은 인간을 결박한 오랏줄이다.
도덕은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와 예수의 기독교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간교한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성이나 신의 족쇄로 다 묶어내지 못한 디오니소스의 사지를 다시 이중 삼중으로 결박하기 위하여 고안된 오랏줄이다.
8. 모든 신은 죽었다(G0tt ist tot)...그 결과 나타난 허무주의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Übermensch, 超人)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Der grosse Middtag)를 맞이하여 갖게 될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의 살해자다.....
우리는 아직 신이 썩는 냄새를 조금도 맡아보지 못하는가? 신들도 썩는다. 신은 죽어 있다. 사실 우리가 그를 죽였다.....사실 가장 신성하고도 가장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 쓰러져 있다.(즐거운 학문 중에서)”
디오니소스의 삶을 위협해 온 모든 억압의 뿌리, 즉 피안 세계 자체의 몰락을선포하는 것이다.
신을 죽였지만 수 천년동안 우리를 지탱해 온 가치관이 몰락함으로써 반갑지 않은 허무주의(절망감, 상실, 어두움, , 박탈감 등)가 찾아온다.
그 하나는 체념과 몰락으로 주저앉아 버리는 약자의 수동적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의 가치를 초극해야 할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강자의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원한다. 초인이 살기를!]
9. 초인(Übermensch), 대지의 뜻을 깨달은 디오니소스적 인간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초인은 대지의 의미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초인이란 대지의 의미이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천상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간에 독을 뿌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경멸하고 쇠잔해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독을 먹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대지는 지쳐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라져버리는 것이 좋다.
예전엔 신을 모독하는 자들이 가장 큰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그와 더불어 이러한 모독자들 또한 죽었다.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두려운 일이다.“
“보라, 우리의 주위가 얼마나 풍만한가를! 이같이 넘쳐흐르는 자연 속에 먼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Übermensch)'을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나는 이 억측이 그대들이 창조하려는 의지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있었는가 -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간구하노라. 모든 신에 대해 침묵을 지켜라. 그대들은 능히 초인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사막에서 사자로 변한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고자 한다...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해낼 수 있는가?”
-'초인(Übermensch)'은 대지에 발을 딛고 서서 육체를 사랑하는 자다.
-'초인(Übermensch)'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먼 곳의 사람을 사랑하는 자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무력한 떼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초인(Übermensch)'은 동정하는 자가 아니라 전쟁하는 자다. 동정은 힘에 대한 의지에 맞서는 천민들의 정서다. 대지의 뜻을 모독하는 자연도태의 법칙을 거스름으로써 대지를 오염시킨다. 동정은 사랑, 피안, 구원 은총과 같은 타락한 개념들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인간을 왜소화시키고 무력화시킨다. 거지에게 동전을 줄게 아니라 뺨을 쳐라. 걸인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몽둥이다.
10. 마무리
‘초인(Übermensch)'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해방하고 상승시키고자 하는 열정과 도취의 디오니소스적인 인간, 즉 짜라투스트라 이외는 아니다.
니체는 인간의 삶은 해방되어야 할 동굴로 보았다. 그 동굴 속에는 피안의 세계를 연모하며 생을 살아가는 자, 삶을 고뇌, 한숨, 눈물의 골짜기로만 간주하는 자, 웃음을 잃어버린 무거운 정신으로 마치 알콜 중독자가 술에 묶이고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 매이듯 은총이나 기적, 동정이나 이웃 사랑, 기도 또는 도덕률에 얽매여 살아가는 죄수들로 가득 찼다.
그는 예수처럼 순교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동굴 안의 죄수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동굴 안에 들어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대화나 변증법에 의한 설득이 아니라 동굴을 깨부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망치를 사용했다.
“나는 하나의 망치다. 이제 나의 망치는 형상을 감금하고 있는 동굴을 격하여 격노하여 내리친다.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비처럼 흩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러나 2천년 동안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동굴을 망치로 깨부수는데 역부족이다.
결국 니체는 폭약이 된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니체가 망치 또는 폭약임을 자처했다 하더라도 [미워하는 자].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 [창조하는 자]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생을 사랑했으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증오한 것이 아니라 대지와 육체에 애착했으며, 도덕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다.
니체는 불과 10여 일 만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 2, 3부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 책은 1년 동안 겨우 60부가 팔려 나갔을 뿐이다. 그나마 제4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그는 40부를 인쇄하여 친구 7명에게 증정했다. 무엇보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외로워했고, 그리하여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울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다.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에 대해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체험이었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2020. 11. 14. 이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