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일 오후 백범 김구 묘역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에서 첫 선을 보인 『친일인명사전』 3권 속에는 깜짝 놀랄만한 인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장면 부통령, 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 정치권 인사는 물론,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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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方應謨│1883~?
조광 발행인
1883년 12월 6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춘해(春海)이며,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
16세 때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1911년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정주읍내 변호사 사무소에서 1914년까지 대서업에 종사했다.
1915년 살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시작했다.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해 여자교육회를 열었다.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도 펼쳤다.
1923년 4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준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5월에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부가 설립되자 상무위원을 맡았다.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하고 경영을 확대하여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을 맡았다.
1930년 3월 정주에서 평안북도 도평의회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이란 거액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친일행적-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04년 8월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0월에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조선신궁봉찬회에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했다.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추대되었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단체다.
1935년 10월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했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 이사장과 고계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과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
전선지국(全鮮支局) 시찰에 나선 방응모는 진남포·원산·함흥·청진 등을 전전하면서 자비로 강연회와 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1937년 2월 원산의 순회 강연에서는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1937년 5월 조선문예회 제2부 문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문예회는 문예와 연예 방면의 교화를 통해 국체명징(國體明徵)의 정신을 진작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단체로서 심전개발·정신작흥 운동에 앞장섰다.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 등으로 쓰던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했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이에 반대하자 방응모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십만 원의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후 조선일보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를 받았고, 조선일보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집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지면의 변화와 함께 방응모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다.
1937년 7월 “일반 국민에 대한 황군(皇軍) 원호 철저, 응소(應召) 출동이나 개선 군인의 환송·접대” 등의 활동으로
후방에서 군인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조직된 경성군사후원연맹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8월 21일 경성방송국에서 ‘극동의 화인(禍因)된 지나의 배일’이란 제목으로 “지나는 쓸데없는 배일을 일삼아 제국에 도전하여
극동의 평화를 교란시키므로 일본제국은 극동 화인이 되는 지나의 배일을 절멸케 하여 극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는 내용의 시국강연을 했다.
이 무렵 학무국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시국인식과 내선일체를 철저히 할 것을 목적으로 8월에 제1차 전조선순회시국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9월에 조선의 명사들을 동원하여 각 도별로 제2차 시국강연반을 조직할 때 경기도를 담당했다.
9월 6일 오전에 의정부 양주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지나사변의 원인과 지나에 대한 세계 열국의 대세와 금후 국민의
각오’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며, 오후에는 연천공립보통학교 대강당에서 ‘지나사변과 제국의 결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7일 포천에 이어 8일에는 파주 문산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지나사변과 정부방침’이란 제목으로 강연한 뒤 장단군으로 이동해 강연했다.
9일 개풍군, 10일 김포군에 이어서 11일 강화공립보통학교 대강당에서,
12일에는 부천 경인선 소사역 앞 진흥관에서 시국인식을 강조하는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에서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달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조선에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을 축하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聖戰)의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에 참여했고, 그날 결성된 경성연맹 창립총회에서 상담역을 맡았다.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지냈다.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을 위한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2월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위한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7월에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 차원에서 적극적 배영운동을 벌이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상담역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했다.
10월에는 “국체의 본의에 기초하여 내선일체의 실(實)을 거두고 각각 그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성(誠)을 바치며
협심육력으로 국방국가체제의 완성,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선출되었다.
1941년 1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동방흥업(東邦興業)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 8월 “물질·노무 공출의 철저, 국민생활의 최저표준으로 인하,
전시봉공(戰時奉公)의 의용화”를 표방한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가 결성될 때 참여했다.
이어 9월에 일제의 전쟁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임전대책협력회가 1원짜리 애국채권을 판매하기 위해 조직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종로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달 조선인을 전쟁에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할 때 경성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감사역을 맡았다.
언론사 경영인으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글도 남겼다.
조광 1940년 11월호에 창간 5주년을 맞이하는 권두언에서 중일전쟁 개전 이래 조광은 시국인식 철저화에 미력을 다해 왔지만
당면의 시국은 과거와 다르므로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신체제의 독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바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완성해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영구평화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국민은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해야 하며, 따라서 조광의 주력도 이에 따를 것을 천명했다.
또 앞으로의 문화정책은 “자유주의·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전체주의적 방향으로 향하도록 운명이 결정”되었으므로
조광은 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인식시키고 조선문화 향상에 일단의 노력을 더할 것”을 다짐했다.
조광 1942년 2월호의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라는 특집에서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대동아전쟁, 곧 태평양전쟁 개전 소식을 들은 뒤의 감상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요,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동양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또 임의로 착취하여 동양인을 멸시 천대”한 데서 찾았다.
따라서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참아오던 원한의 폭발”이라 규정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 ‘반도민중’에게
첫째로 군관(軍官) 당국을 절대로 신뢰하여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이며,
둘째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깊게 가지고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에 동참하여 정신적 분발과 생산확충에 적극 협력하며,
셋째로 장기전에 중요한 요소인 물자절약에 솔선하며,
넷째로 전비확충의 바탕이 되는 저금 강화, 곧 저금 우선주의로 나아갈 것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말과 9월 초에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다.
이후 12월까지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1
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 8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9월 독촉국민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6·25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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