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더 이상은 사랑할 수 없다고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와 버렸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어느 것에도 더는 미련이 없어졌을 때가 말이다.
문득 모든 사람들을 당황스럽고 가슴스산하게 만들며 떠나간 눈물조차 아름다웠던… 배우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녀가 떠올랐다.
이른 나이에도 알 수 없는 완숙미를 가졌으며 활짝 웃어도 입가에 우수가 머물르곤 했었지.
‘아~ 저 아이는 왜 웃는데도 저렇게 아릴까? 왜 활짝 개이게 웃어주지 않는 거지?’
서운함에 뒤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곤 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른봄에 피어나는 꽃들이 이렇게 키가 작았었나, 여름날의 밤하늘에 이토록 별이 많았었나....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들이 이처럼 고운 빛깔이었나, 한겨울 가로등 불이 이렇게 따스한 주황빛이었나....
익숙했던 모든 풍경들에 새삼 감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지는지요?
어쩌면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별이 가혹한 이유도 세상이 다시 밋밋했던 옛날로 돌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 연애소설 中 -
엊그제까지도 생생하던 그녀가 떠났다고 하니 불현듯 얼굴조차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송어를 찍을 때 앳되기만 한 여고생의 얼굴로 ‘재밌어요. 너무 재밌어요. 강수연 선배랑 같이 연기하는 것이 너무 재밌어요’ 하던 얼굴이 얼마나 생그러웠는지….
혹은 ‘오! 수정’에서 덤덤한 얼굴로 흑백화면을 오가며 서로 다른 기억을 풀어주던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기막히게 매력적이었던지…
도통 아련하기만 하였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fade in된 넓은 스크린위로 다시 환하게 떠오를 이은주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함께 나누었던 영화속 그녀들의 이야기가 호수위로 퍼져가는 물결처럼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 수정
재훈 : 아, 잠깐만, 잠깐만.
수정 : 저, 저 처음이에요.
재훈 : 뭐라고?
수정 : 저 한 번도 안해봤어요.
재훈 : 정말이야?
수정 : 네, 한 번도 안해봤어요.
재훈 : 정말이야?
수정 : 처녀예요, 웃기죠?
재훈 : 아니요, 하나도 안 웃겨요.
이제 막 첫 관계를 가지려 하는 남녀사이의 대화가 이토록 진지하다니 …
그들은 서로 존대말로 상황설명을 하고 있었다.
로맨틱한 설레임이나 관능으로 인한 흥분은 도통 찾아볼 수도 없다.
여자는 자신이 처녀인 것을 배경좋은 남자에게 암묵적으로 부담을 안기고…
남자는 수정의 처녀지에 본인이 첫 남자인 것에 쾌재를 불렀다.
어떤 감독보다 배우가 연기하기 어렵다는 홍상수의 ‘오! 수정’에서 이은주는 묘하게 백치 같은 구석은 있지만 영악한 수정 그대로인 모습으로 흑백화면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번지점프를 하다
소곤소곤한 바람이 어스름 해질녘의 호숫가 숲속으로 불고 있었다.
희미해진 그날의 마지막 온기아래 하얀손수건을 살포시 머리에 묶고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가볍게 스치며 태희가 나직히 인우를 향해 손을 내민다.
‘왈츠 춰봤어? 요즘 교양체육시간에 배우는데… 남자는 왼발이 먼저 나오고 여자는…’
서투른 두사람의 댄스… 엉덩이는 어색하게 뒤로 자꾸 빠지지만 앞으로 당기고 뒤로 밀리는 하얀운동화를 신은 두발의 움직임이 다정하다.
몇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번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거라고 당신은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 번지점프를 하다 中 -
인우와 다시 만난 태희는 몇번을 태어나도 두사람은 이르건 늦건간에 서로를 알아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속한 유일한 소울 메이트이기 때문에…
연애소설
하루에 백 번쯤 생각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흔아홉 번, 아흔여덟 번... 아흔일곱 번...,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숫자를 잊어버렸어.
머리가 색깔이 검정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입술 옆에 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심지어 안경을 꼈었는지 가물가물해지면서, 내가 정말 그 애들을 좋아하기는 했던 걸가 의심스러워지고, 나중에는 그 애들을 만난 적이 있긴 있었는지 모든 기억들이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거야.
한바탕 꿈이었던 듯도 싶고... 내가 정말 사랑하긴 했던 걸까?
우리가 정말 만나기나 했었던걸까?
5년의 시간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추억을 공유한 세사람의 이야기가 그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지환의 나레이션으로 펼쳐진다.
기억은 희미해질 수 있어도 추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일찍부터 병약하여 죽음을 등뒤로 안고 살던 그녀들에게 생기넘치는 순진한 지환은 삶의 활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 세상떠나는 날조차 예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한남자… 그녀에게 지환은 바로 그런 남자였다.
주홍글씨
욕망과 집착에 빠진 사랑이야기… 이은주의 유작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한석규와 함께였던 트렁크에서의 라스트씬을 떠올리는 것은 사뭇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이다.
강렬한 연기… 한석규를 뛰어넘는 연기는 찬사받아 마땅하지만 그녀의 고통이 너무도 화면을 압도하여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송어에서 주홍글씨까지 그녀는 점차 성장해 가고 있었다.
머얼리서 아지랑이처럼 천천히 다가오던 그녀는 어느새 우리에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배우에서 스타가 되어 버리면서 어쩌면 그녀 자신의 개인적 삶은 더 버거워졌을지도….
꽃처럼 피어날거라 믿었던 젊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버렸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떤 부연설명이나 억측없이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면 될 일이다.
동료배우이자 사랑이었던 L은 말하고 있다.
‘은주는 아주 좋은 배우였어요. 잊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은주가 좋은 곳에서 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아마도 별이 되길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도 잊혀지고 싶지 않은 별… 때로 차가운 빛을 발하지만 수만년을 거쳐 폭발하고 다시 생성하고 그 무한한 생명을 거듭하며 거친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그런 별이 말이다.
문득 하늘에 새침하지만 수줍고 도도하게 빛나는 별하나를 본다면 이은주 그녀가 별이 된거라 나는 믿고 싶을 것이다.
하늘 어디쯤에서라도 부디 푸른꿈 고운잠들었으면…
프로메테우스의 심장
나는 새로운 해가 뜨면 잊곤 해.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은 매일 매일 돋아 난다는 것을...
용렬하고 질투심이 많은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가 명령했지.
너는 매일 새로운 심장이 돋고, 그 심장을 독수리에게 뜯기우라고..
그리하여 날마다 새로운 고통에 몸서리치라고...
그토록 기막히던 고통을 다시 잊고 나의 새심장이 돋아나면 갉아 먹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환히 앞섶을 열어주는 어리석음 이라니...
그래도 어쩌겠어.
내일 해가 뜨면 오늘 고통에 뜯기운 심장이 다시 돋아나는 것을...
쨍하게 맑은 어떤날 헤라클라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쇠사슬에서 풀어줬듯이 그런 기적이 내게 오길 바랄 뿐이지..
심장이여!
이제 그만 재생을 멈춰주길..
새로 돋는 심장이라니 매일 괴로울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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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물꼬기's on the road> http://blog.naver.com/eonmi_blue
첫댓글 재즈가수로 나온 영화 저두 봤는데
재즈바에서 혼자 앉아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이은주라는 배우의 매력에 빠진적이 있었습니다.
이은주가 부른 곡이 너무 좋아서, 저는 한동안 참 많이 들었더랬어요.
주홍글씨의 트렁크씬은 보면서 무척 갑갑함을 느낄정도로 두 연기자의 연기가
실감났던것 같습니다.
보기가 너무 불편한 정도로 리얼해서... 마침 그 영화를 커뮤니티에서 단체 관람했는데 심지어 뒤풀이 분위기가 우울해지더라구요.
참 아름다운 배우였는데 안타까워요 25세에 ....
그러게요.. 아쉽게도 아름다운 꽃이 졌지요.